[연구실] 개명교회 설립 100주년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남단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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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연구실] 개명교회 설립 100주년에 대한 질문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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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명교회 역사

①올해가 설립 100주년입니다.

거창군 행정 당국에서 개명교회의 설립이 100주년이냐는 문의가 있었습니다. 미국식 계산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100주년이라고 하면 1903년 설립된 후 만 100년을 더하여 2003년이 되면 100주년입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이전부터 내려오는 습관에 익숙한 분들은, 1904년에 설립되고 2003년이 되면 100년째되는 해를 맞는다고 해서 100주년으로 계산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장례식을 '3일장'이라고 하면 죽은 날이 하루, 다음날이 또 하루, 그리고 3일째 상여가 나가면서 '3일장'이 됩니다.

개명교회의 개척연도는 1904년입니다. 그렇다면 2004년이 100주년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또 2003년이 100주년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따라서 행정당국에서 올해가 100주년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1904년이 설립연도이고 올해가 100주년이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②참고로, 총공회 신앙노선에는 기념 행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은 백일잔치 돌 생일 결혼일 사망추모일 등을 호적이나 주민등록상 숫자로만 기억하지 기념일로 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 개척일이나 교인의 세례 학습일 목사안수일 등 신앙에 관련된 중요한 행사도 기념일로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기록들을 한번씩 찾아보려면 수없는 노력이 필요하고, 결국 못찾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은 물론 교회들까지도 상식적으로 다 지키고 있는 기념일들을 일절 배제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날만 '날'이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이곳도 개인적으로나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주일 외의 날은 날로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 날들 중에서 연도와 일자를 알아야 신앙노선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어 백목사님과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③백목사님을 잘 아는 분들은 개명교회가 백목사님이 개척한 교회로 알고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1910년 개명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도평에서 출생한 분입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1929년에 개명에서 살게 된 분입니다. 그러나 총공회 교인들은 개명교회를 백목사님이 개척해서 세우고 목회하고 또 신사참배를 그곳에서 승리하고 해방을 맞이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904년에 개척되었다고 세상 행정당국도 알고 있는 내용과는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착오가 있는 것은 원래 개명교회의 설립이 1904년에 먼저 있었으나 백목사님이 복음을 받게 되던 1936년에는 교회가 유지되지 못하여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1936년 백목사님이 복음을 받을 때는 이미 동네에 있던 교회는 없어졌기 때문에 10리 넘는 농산교회로 출석을 했고 3년후 신사참배가 강행되고 그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백목사님이 출석하던 농산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게 되자 백목사님은 살고 있던 개명동네에 교회를 새로 시작하게 됩니다. 1939년 1월 1일이었습니다.


2.개명교회의 1904년 첫 개척

①1893-1904년까지 경남지방에 세워진 14개 교회의 위치는 전부가 동부경남이었습니다.

부산 경남지역에 대한 최초의 선교는 1891년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복음을 받았던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북한 지역과 달리 부산 경남지역은 복음과 접촉이 늦었던 편입니다. 더우기 부산 경남지역은 한반도 안에서 가장 폐쇄적이었고 유교와 불교가 전통적으로 강한 편이어서 기독교에 대한 배척이 심했습니다. 어쨌든 부산에 선교본부를 두고 선교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 성과는 대단히 미미했고 선교 지역은 부산 부근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1893년 초량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진 이후 1904년까지 불과 14개교회가 세워지는데 전부 부산이 위치했던 경남의 동부지역에 이 교회들은 몰려 있었습니다. 1893년 부산초량교회, 1895년 울주 온산병영교회, 1886년 창원 월백교회, 1887년 함안 사촌교회, 1887년 밀양 춘화리교회, 1899년 함안 이령교회, 1901년 부산의 부산진교회와 영주동교회 그리고 구마산교회 및 김해의 신용교회 울산 전읍교회, 1902년 동래 안평교회, 마지막으로 1904년 김해 시례교회와 일천교회가 각각 차례대로 개척됩니다.

경상남도를 좌우로 절반씩 나눈다면 동부경남은 부산이 중심이고 서부경남은 진주가 중심인데, 14개 교회가 전부 동부경남에 위치해 있습니다.


②서부경남 11개 시군 전체를 통해 그 첫 교회가 바로 서부경남 최고 오지인 '개명'이었습니다.

해방 이전 한국교회의 역사는 평안도지방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교회 역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출옥성도들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성도들 중에서 남한 출신목회자들은 단 1명도 빠짐없이 전부가 경남지방입니다. 그들을 출신지역으로 살펴본다면 동부경남과 서부경남으로 고르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남지방의 초기 선교사에서 개척되던 순서로 본다면 아주 뚜렷하게 구별이 나고 있습니다.

초기선교역사 만 10년간 동부경남에서만 교회가 설립이 되어졌고 서부경남에서는 단 1개교회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를 살펴보자면, 경남지방을 전적으로 맡은 선교부는 호주장로교였습니다. 한국에 나왔던 선교부 중에 가장 미약하였기 때문에 선교사의 숫자나 지원도 부족했으나 앞서도 말했지만 전통적으로 유교나 불교에 유달리 집착하고 당시 유입되던 서양문물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던 지방민의 성향에도 크게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전국에서도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사찰로,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이 전부 경남지방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유림의 보수성향도 특별히 강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부경남은 구한말부터 일본이 부산을 통해 서울로 올라가는 도로 연결망을 서부경남으로 잡지 않고 동부경남으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동부경남은 자연스럽게 일본을 통해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경남지역이 전반적으로 복음을 가장 배척하는 곳이었으나 그중에서도 동부지역은 형편이 나았기 때문에 초기 경남지역의 교회설립은 동부에 집중되었다고 보겠습니다.

한편 호주선교부는 조선 땅에서 경남지역을 선교관할지역으로 배정을 받았기 때문에 서부경남에 대한 선교도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벽은 높았고 거리도 멀었으며 전도순회는 하지만 불과 몇 명이라도 믿으면 비록 개척교회지만 그래도 교회가 설 터인데, 10년이 지나도록 단 1곳도 교회가 서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서부경남이라고 한다면 진주시를 중심으로 하동군 의령군이 좌우에 있고, 진주시 남쪽으로는 사천시 통영군 고성군 남해군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주시 북쪽으로는 산청군 합천군 함양군 그리고 서부경남에서도 가장 오지인 북쪽에 위치한 것이 거창군이었습니다. 이렇게 경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서부경남의 11개 시군 중에서도 동부경남과 가장 거리가 먼 거창군, 그 거창군에서도 가장 북쪽 가장 오지인 개명마을에 서부경남 전체를 통해서 첫 교회가 서게 된 것은, 경남지방 선교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총공회 신앙노선과 고신의 신앙노선에서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개명은, 바로 뒷고개를 넘으면 국제스키장으로 유명한 무주구천동입니다. 경남과 경북 그리고 전북이 맞닿았고 몇 걸음 더 나가면 충청도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맞닿는 곳입니다. 서부경남 11개 시군을 10여년간 다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단 한 곳도 성공하지 못했다가 마침내 1904년 가장 오지에서 한 곳을 세웠습니다.


③1904년, 개명교회의 첫 설립 교인은 박순명 영수였습니다.

총공회 신앙노선 내에 있는 분들이면 그 이름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분의 딸이 박봉선집사님이며 그 자녀분이 장종범장로님(남정교회)과 장경재집사님(울산남산교회 이술이장로님 부인)이고 장장로님 자녀분이 현재 대구공회 달산교회를 목회하는 장신석목사님입니다.

호주 선교사들이 서부경남 전체를 그렇게 고생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첫 교인을 찾아 10년을 방황한 끝에 박순명을 중심으로 개명교회를 설립하고 상부에 정식으로 등재한 것이 1904년, 이 시점을 기준으로 2003년은 이제 세상식으로 기념을 한다면 설립 100주년을 맞게 된 것입니다. 이 첫 가정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복은, 이제까지 설명한 과정을 살펴본다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훌륭한 목회자와 사모님들이 배출되어 현재도 대단한 실력으로 목회를 하고 있으며, 그 손주딸은 정갑용권사님과 같은 성녀 가정 며느리가 되어 울산 남산교회를 개척하고 울산지방 총공회 교회들을 차례로 개척하는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증손녀가 되는 분은 현재 사모님이지만 서부교회 중간반 초대 여반사며 또 백목사님이 가장 가까이 두고 아끼던 인물입니다. 일단 그 가정을 연구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가정 소개는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교회는 1936년 백영희목사님이 술도가를 경영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던 당시에는 이미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앞서 믿었던 분들이 초기 신앙에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중도에 교회로 더 이상 운영이 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부경남 첫 교회가 문을 닫게 된 것은 그 사실 자체만 가지고 살펴본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만, 1939년에 백영희 당시 집사님이 다시 개명교회를 재 개척하여 그 맥을 잇게 되는 상황과 연결을 지어본다면, 백영희신앙노선에 관심이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문제도 따로 살펴볼 사안이지만 여기서는 개명교회가 두번 개척하게 된 역사만을 살피고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3.개명교회의 1939년 재개

①백영희목사님의 신앙출발과 개명교회

백목사님은 1910년, 개명에서 30여리 떨어진 도평에서 출생합니다. 이 도평은 총공회 전국 집회 장소가 있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백목사님은 이 도평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6세에 일본에 들어갔다가 19세에 나오면서 그해 결혼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 사모님이 개명 사람인데, 결혼과 동시에 백목사님은 당시 허가제였던 탁주제조업을 개명 동네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가 20세가 되던 1929년이었고 이후 1936년이 되는 27세까지 돈은 크게 벌었으나 완전히 술에 빠져 폐인이 될 지경이 되었다가 윤봉기전도인(후에 고신의 목사님이며 총회장 역임)에게 전도를 받고 신앙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는 믿자말자 바로 술과 담배를 연이어 끊고 그 번창하던 술사업과 고리대금업 등을 성경에 죄가 된다며 바로 청산하되 그 재물이 불의의 것이라 하여 양심에 어긋난 경제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처분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성경이 말하고 신앙양심에 옳은 것은 어떤 타협도 없이 바로 실행하며 출발을 하게 되자, 개명동리는 앞서 1904년에 첫번째로 교회를 설립했던 첫교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예수에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을 접하게 됩니다. 먼저 믿었던 분들은 이 폐쇄된 벽지 안에서 동네사람들과 신앙문제 때문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을 피해갔지만 이번에 다시 시작한 백목사님은 생명을 내놓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있게 믿고 나가자 동네에서 한 두 사람씩 함께 믿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개척 때는 가장 앞서 믿는 분조차 그렇게 뜨겁게 믿지 못했으므로 다른 분들도 대충 다니는 식이었으나, 이번에는 앞장 선 사람이 불화로를 안고 달려가는 기관차 같았기 때문에 뒷따르는 이들도 모두 믿음에 큰 불을 안고 있었습니다.


②1939년, 신사참배 환란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개명교회는 다시 문을 열게 됩니다.

1936년 백목사님이 처음 믿던 순간에는 개명교회가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10리 이상 떨어진 농산교회로 출석을 했습니다. 물론 개명동리에서 전도한 분들이 그를 따라 함께 농산교회로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기 시작하던 이 1936년은 총독부에서 조선 전체를 향해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키기 위해 발진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1년 2년을 지나면서 전국은 신사참배 소용돌이에 말리면서 모든 교회들이 총독부 명령에 항복하고 순응하게 되면서 이곳 농산교회도 신사참배를 하는 교회로 편입이 됩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백목사님은, 자신이 교인으로 다니는 농산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하고 있으므로 교회를 결정하고 지도할 입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미 개명동리에서 농산교회까지 함께 다니는 교인들의 숫자가 10여명 이상이 되어 이제 개명동리에도 따로 교회를 개척해야 할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에게 맡기고 백목사님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리에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1939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처음에는 기도소로 시작을 했고 이후 예배를 보게 되고 차츰 횟수를 늘리면서 몇 달이 지나지 않으면서 완전히 독립 교회로 서게 된 것입니다.


③이 2차 개명교회는 이후 한국교회사에서 첫 손 꼽을 박해의 교회가 됩니다.

신사참배 강제집행기였던 1939-1945년 사이 7년을 걸쳐 목회자와 전 교인이 다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한 사람의 이탈자나 실패자가 없이 끝까지 계속했던 경우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개명교회 뿐입니다. 한국교회사의 대기록이 총공회 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공회 내부에서는 일반 교회사와 전혀 비교 검토를 하지 않는 성향이므로 이를 모르고 있고, 또 총공회 내에 한 두 분의 훌륭한 신학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일반 신학계와 같은 시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총공회 신앙노선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어 이런 사실은 현재 묻혀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백영희신앙노선의 교리와 교훈을 중심으로 그 신앙노선에 집중하고 있으며 교회사는 상식 수준 이상으로 연구할 시간이 없어 안타깝게도 외부에 이를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교회주의의 공회 운영, 시무투표 제도, 주일학교 체제 등과 함께 앞으로 공회의 여러가지 모습이 한국교회사를 통해 외부로 알려지고 밝혀져야 할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을 이용하는 분들 중에 이런 면에 사명을 가진 분이 있다면 이곳으로 연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④1939년 재개된 개명교회는, 이 신앙노선에서는 특별한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백영희신앙노선은 그 신앙노선에 대하여 특별히 연구하고 살펴보아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말세 교회를 감당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노선은 백목사님의 목회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백영희'신앙노선이라고 이곳은 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신앙노선의 핵심 인물이며 이 신앙노선을 체계화하고 완성한 인물이 바로 백영희목사님인데 그분이 그 신앙노선을 가르치고 안내할 때마다 알기 쉽게 예를 드는 중에 수도 없이 거론하는 교회가 바로 개명교회입니다.

개명교회는 백목사님이 1939년부터 1949년까지 만 10년을 집사와 조사로서 목회하며 신사참배를 승리했고 또 해방 후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재현되며 고신의 중심부를 달구었고 수많은 산 순교자들을 배출하여 출옥성도들까지도 감탄하고 부러워하던 교회입니다. 앞으로 백목사님의 교회사적 위치가 칼빈과 같이 된다면, 개명교회는 6.25를 보낸 위천교회와 1952년부터 마지막까지 목회했던 서부교회와 함께 목회의 표준과 이상향으로 제시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진정으로 말씀대로 믿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어야 하며 어떤 고난을 각오해야 하며 또 실제로 자기 생명과 가족과 재산과 인생 모든 것을 다 내놓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교회가 바로 백목사님 목회하던 시절의 개명교회입니다.


⑤그렇다면, 우리는 '개명교회'라는 이름을 전혀 다른 2개로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부경남 11개 시군 중에서 가장 최초로 개척된 1904년의 개명교회와 1939년 백목사님이 재개 시킨 개명교회는 세상 행정당국에서 볼 때는 동일한 교회의 부침의 역사일 뿐입니다. 2개의 교회로 따로 볼 것이 아니고 바로 한 개의 교회입니다. 마치 대한민국 정부가 몇 번씩 헌정이 중단 된 적이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할 때는 1948년의 정부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보지 헌정이 중단되고 재개될 때마다 새로운 나라로 건국되었다고 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총공회 신앙노선에 엄격한 사람들이 그 신앙노선적 입장에서 본다면, 외형적 교회는 동일한 개명교회이고 앞서 개척한 교회가 주저 앉은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보겠지만, 1939년 이전의 개명교회는 총공회 신앙노선 상에서 볼 때는 별 의미가 없겠습니다. 1939년 재개된 개명교회가 총공회 신앙노선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4.이제 이 글을 적게 된 상황으로 다시 올라가서 글을 요약하겠습니다.

①현재 총공회 소속 개명교회는 그 역사가 1904년입니다.

얼마 전 거창지방 행정당국에서, 거창지방 최초의 기독교 계통 교회로 이제 2003년으로 100주년이 되는 교회가 개명교회냐는 확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개명교회가 바로 1904년에 개척된 개명교회라고 확인해 줄 수가 있습니다. 비록 중간에 교회가 유지되지 못한 적이 있었지만 1939년 백목사님에 의하여 재건을 했기 때문입니다. 1904년 첫 개척할 때 중심 교인이었던 박순명영수의 딸인 박봉선은 백목사님에 의하여 재건하는 개명교회에 다시 교인으로 출석하여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교회 이름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②물론 신앙노선의 내면을 강조하는 총공회로서는, 1939년의 재건을 새개척으로 보고 싶을 것입니다.

1904년에 개척된 교회와 1939년에 재건된 교회가 서로 다른 것이 있다면 재건되어 새출발을 하는 개명교회는 그 신앙성향이 이전 교회와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혹 신앙을 그 내면으로만 기준을 삼아 분류하는 분들이 있다면 개명교회를 2개로 분리시켜도 이곳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이곳도 외부를 향해 발언할 때는 1939년의 백목사님 개척은 신개척이 아니라 1904년 개명교회의 재기라고 합니다만 신앙성향으로는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총공회 범위 내에서 발언할 때는 1939년을 개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③서부교회로 예를 든다면, 1952년에 백목사님이 부임하는데 그때를 개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서부교회는 1949년 손양원목사님의 동생인 손이원목사님이 개척을 하고 이어 서울 충현교회의 김창인목사님이 목회를 한 뒤 1952년 7월에 백목사님이 제3대 목회자로 서부교회를 담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서부교회의 설립과 개척은 언제로 봐야하느냐는 질문은 두말할 것 없이 1949년이 됩니다. 백목사님은 단순히 제3대 교역자로 부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회사가 기록할 단순한 통계상 내용일 뿐이고 백영희신앙노선의 시각에서 본다면 서부교회는 1952년 백목사님 부임시부터 비로소 서부교회입니다. 그 이전의 서부교회는 이름도 교인도 위치도 건물도 전부 동일하지만 그 내부 신앙노선이 백영희신앙노선이 아니므로 개념상으로는 구별하여 별개의 서부교회로 취급하게 됩니다.


④이 문제를 살펴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총공회 교인들의 표현이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한번 살펴보는 것은, 총공회 신앙노선에 엄격하게 살아온 분들은 총공회 내부 교인들끼리 대화할 때 사용하는 표현을 그 노선과 상관없는 외부인들에게도 그대로 사용하여 공연한 오해와 혼란을 종종 유발하기 때문에 이를 주의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백목사님의 신앙이 특별하다 해도, 그것은 그 신앙노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외부인들과 대화할 때는 모든 종류의 신앙과 인식을 다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상식에 속한 일이므로 따로 이곳에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만, 백영희신앙노선이라는 곳은 개인과 개교회 신앙자유를 교회 운영의 첫원리로 삼고 있는데 그 원리의 중심은 바로 다른 사람의 신앙이 비록 나와 맞지 않다 해도, 내가 그 사람에게 내 신앙이 침해받지 않아야 하듯이 나도 그 사람의 신앙을 침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노선과 상관없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그 표현이 한쪽에 쏠리거나 속하지 않도록 중립에 놓아야만 양심이 될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현재 총공회 안에는 여러 공회들이 있는데, 각 공회들이 소속 교인들만을 상대로 하는 장소가 아니라 외부 교인 아무에게나 공개하는 자리에서 굳이 자기 공회 소속 교회만 총공회이고 타 공회는 총공회에 존재도 하지 않는다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스러운 일입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운영을 한다면, 홈이라는 것은 불신자까지를 포함하여 세계인이 다니는 사거리에 붙이는 게시판과 같은 것이라고 모를 리가 없는데, 마치 그 홈이 부부 두 사람만이 앉아 대화하는 침실인 줄 알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⑤마지막으로, 세상이 그들의 좋은 역사로 기록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지켜 볼 일입니다.

현재 거창지방에서는, 매년 8월집회 때가 되면 과거 총공회 단일 집회가 이제 3곳으로 나뉘어 개최되고 있습니다. 거창 지방의 타 교단이나 불신 지방민들에게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집회의 성격은 서로가 합해질 수 없도록 각자 나가는 신앙노선이 확연하게 분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창지방 행정당국이 자기 지방의 문화 사회 교육 방면에서 기독교를 소개하면서 총공회 소속 개명교회를 서부경남 11개 시군의 최초교회라고 설명을 하게 된다면 공회의 대외적 인식이 개선되는 면이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세상이 어려움을 준다면, 우리는 환영하고 기다리는 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노력하지 않았으나 세상이 우리를 좋게 홍보한다면 우리는 굳이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총공회 주요 교회들이 대거 위치하고 있는 거창지방과 서부경남은 최후까지 기독교 전파를 거부하던 곳이었으나 일단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는 이 지역의 사회 교육 문화면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에 세상 당국으로서는 자신들의 시각에서 기독교의 첫 역사를 중요하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대개 이런 시각을 가지고 그 첫 개척지를 소개하게 되면 그들은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좋은 면으로 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공회의 분리 때문에 심겨진 여러 부정적인 면들이 일부 씻어지는 결과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총공회 교회는 일반 교회들과 너무 다른 점이 많아서 공연한 오해를 많이 받고 또 그 오해 때문에 적지 않은 불편이 있는데, 적어도 우리가 집회를 해야 하는 거창지방에서는 총공회 개명교회가 최초의 교회로 표시가 되면 이단이거나 이상한 곳이거나 좀 문제가 있는 곳이라는 식의 표현은 함부로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세상의 눈과 시선은 처음부터 무시하는 것이 이 신앙노선이지만 교회사적으로 사실인 내용을 상식조차도 없어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수준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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