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모습에서 본 오늘의 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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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0 00:00
한 부분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한 부분이 한 부분일 뿐인데 어떤 때는 전체의 축소판이나 표시판일 수 있습니다. 좀 어렵지만 대개 한 부분을 잘 보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단일성의 하나님으로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 그 무엇에도 잘 보면 그런 하나님의 성향이 스며 있습니다.
집회가 다가 오고 있습니다. 집회는 1 년 2 회의 특별 기간이므로 공회와 신앙 생활과 우리의 신앙 노선의 수 많은 것 중에 하나이니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집회를 생각하자 우리의 오늘이 집약 된 면이 강하여 잠깐 살핍니다.
1. 나뉜 우리
현재 공회의 모습은 분열입니다. 내가 옳든 저 쪽이 옳든 옳은 곳이 있을 수도 있고 다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다 옳을 리는 없습니다. 결론은 분열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집회만 분열 된 것이 아니라 공회의 모든 면에 분열은 광범위한 현상입니다. 한 교회 내에도 그렇고, 한 공회 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 사후에 분열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 생전에 오늘의 분열은 이미 정해 져 있었고 그 분의 장례식은 내부 분열이 외부 분열로 드러 날 하나의 기회였을 뿐입니다.
분열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싸우며 커 가는 것이고 우리가 원래 불완전하게 태어 났고 우리의 범죄로 우리 한 사람 속도 복잡하게 나뉘어 있으니 분열이란 우리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분열의 모순을 보여 주시며 고쳐 가며 만들어 가십니다. 고칠 것이 없는 모습이 고칠 수 없는 모습보다는 나으나, 고칠 것이 없는 모습이 고쳐서 바로 된 모습만은 못합니다. 이 것이 바로 분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분열의 본질을 알지 못한 자세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현재 산산조각입니다. 우리의 자연스런 본질이 드러 난 것이고, 그 분열은 분열 되어서 안 될 모습입니다. 당연히 잘못 된 부분을 서로 찾아서 고쳐 감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집회의 분열을 통해 우리의 단점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볼 때마다 각자 자신의 고칠 몫을 주목하고 노력했으면.
2. 역량 부족
나뉜 집회들 중에 비록 100 점은 없다 해도 그래도 다른 집회보다는 낫다고 생각 되는 곳은 있을 것입니다. 5 곳 정도로 나뉜 집회들이 각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어느 곳이 더 나은지를 비교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가장 옳고 바른 곳이 실제 A라고 한다면 그 A 집회에는 치명적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역량 문제입니다. 자신은 다른 곳보다 더 낫고 좋은데, 그 우수하며 앞 선 곳은 그의 실력으로 다른 곳을 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은 곳은 다른 곳을 위해 본이 되고 좋은 덕이 되어 다른 곳이 덩달아 좋아 지고 개선 되도록 했는가? 공회는 서로의 소식을 모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영향을 미쳤다면? 실제 미쳤다면 점차 하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옳은 곳이 있다 해도 그 곳의 역량이 부족하여 혼자 겨우 숨이나 쉴 뿐이지 다른 곳을 끌어 주는 인도력이 부족한 것이 공회입니다.
집회뿐 아니라 우리 공회의 모든 면에서 더 우수하거나 더 낫거나 더 바른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도에 있는 공회가 다른 공회를 이끌 정도가 아니므로 공회의 드러 난 모습에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노력할 방향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더 낫다고 생각할 터이니 다른 곳을 좋은 면에서 끌어 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접점이 있을 것이고 그 접촉에서 실제 줄 만한 것이 있어서 주면 더 좋고, 주려고 하다가 접촉 사고가 나면 비교를 통해 실상도 알 수가 있어 좋습니다.
3. 집회의 앞 날
목사님 생전의 집회는 단 한 번도 과거의 단순 반복이 없었습니다. 계속하여 자라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실제로 늘 따가 갔습니다. 3 - 40여 명으로 시작한 1957년의 삼봉산 집회가 10 년 정도 지났을 때는 교통과 장소 때문에 지금의 도평 집회로 변화를 했고, 70년대까지 어떤 구조물도 세우지 못하게 하여 심지어 천막 자리에 세멘 바닥조차도 할 수 없게 했으나 80년대에는 고정 건축물을 충분하게 세워 나갔습니다. 집회 개최도 9월에서 8월로, 8월 말에서 8월 초로 변경 되었는데 전국의 전체 교인의 참석 편의를 고려했던 조처였습니다. 바꾸지 않으려 노력하되 바꾸지 않는 그 자체를 가치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5월도 그러했습니다. 농번기를 고려해서 바꾸었습니다. 그렇다고 늘 편의만 보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할 수 있으면 집회에 각자의 형편을 맞추는 신앙의 본질을 지켰습니다. 예배 시간도 3시간을 보통 넘겼던 초기 집회가 학생들의 대거 참석으로 1시간대로 줄이며 조절도 했습니다.
현재 1989년의 장소에만 무조건 고정해야 한다는 집회도 있습니다. 집회의 장소 변경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장소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 될 줄 알았던 집회도 있습니다. 공회 신앙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재를 지키는 것을 잊어서 생긴 일입니다. 1990년 목사님 사후 첫 집회에서는 비디오가 있는 89년 설교만 끝까지 한다던 입장이 바뀌어 테이프만 있는 설교도 재독한다는 소식이 전해 집니다. 일찍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집회의 본질은, 평소 매일의 신앙 생활로 부족한 부분을 1 년에 1 - 2 회 정도 일상 생활을 떠나서 이어 지는 말씀으로 자신의 깊은 속을 완전히 변화 시키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 원칙이 지켜 지는 이상 이 원칙을 위해서 횟수나 장소나 방법은 변경 될 수 있는 것이고, 횟수나 장소나 방법의 변화를 고려하되 원래 취지를 위해 더 나은 방향으로 변경 되지 않으면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한 순간에 과거 모든 은혜를 다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만사 공회 집회의 원래 방향에 촛점을 맞추어 따라 가면서 한 편으로는 신앙의 또 하나의 본질은 필요 없는 변경은 최소화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공회는 보수도 아니며 진보도 아닙니다. 공회는 진보적 보수 노선입니다. 자라 가는 성장이 본 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