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천교회, 금원산, 황산마을, 수승대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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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9 00:00
1. 위천교회 예배당
6.25 때 예배당은 없어 지고 현재는 새 건물입니다. 이 예배당의 앞 쪽이 동네에서 들어 오는 진입로이며 진입로에서 교회로 들어 오는 오른 쪽에는 학교가 담으로 바로 붙어 있고 왼 쪽으로 한 집 전에는 사택이 있었습니다. 지금 보는 예배당의 건물 뒤에는 들이 있고 바로 그 뒤의 산이 금원산입니다. 1949년 5월에 부임하여 52년 7월까지 계셨습니다.

2. 교회 앞 마을
교회 주변에는 6.25 전쟁 때 보도연맹에 연루 되어 사형이 집행 된 가족들을 가진 주민들이 살고 있어 6.25 전시와 수복 후의 빨치산 활동이 지속 되던 시기에 백 목사님은 늘 숙청 명단에 올려 져 생사를 걸고 믿어야 했습니다.

3. 위천초등학교
1949년부터 50년 3월까지 지속 된 국기배례사건의 현장입니다. 일제 식 교사는 벌써 없어 졌습니다. 학교의 왼 쪽 끝이 바로 교회입니다. 지금은 국가의 경제가 넉넉하여 전국 어느 초등학교든지 대규모 시설 투자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옛 모습이 무조건 다 없어 지고 있어 늘 아쉽습니다. 어떤 것은 시설이 바뀌어야 하나 어떤 경우는 쓸 만한 집을 그리고 꼭 그런 시설이 아니어도 되는 경우가 있는데 역사성이 없어 그냥 오늘만 보고 다 쓸어 없애 버리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 환경도 혹시 그렇지 않을지요?

5. 금원산
예배당 바로 뒤 산입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저 산의 높이는 1,300 미터가 넘습니다. 앞에 보이는 능선을 왼 쪽으로 돌아 들어 가면 수량이 풍부하고 화강암의 거대한 폭포와 물줄기가 만들어 놓은 별 천지가 나옵니다. 산 위에서는 밑에서 접근하는 토벌대를 잘 볼 수 있고 접근하는 토벌대는 계곡 사이로 들어 와야 하는데 저 산 바로 밑의 이 곳 교회 주변이 면 사무소와 학교와 경찰 지서 등이 있기 때문에 위천은 빨치산이 원하는 대로 공략하던 곳입니다. 저 골짝 안에서 6.25 빨치산의 두목으로 유명한 이현상이 수백 명 빨치산과 노천 목욕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곳입니다. 산의 오른 쪽에는 호랑 바위가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이 바위로 오가며 사모님과 기도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그 기도가 이 산 밑에서 벌어 질 점령 치하의 6.25와 빨치산 시절 하나님의 돌 보심을 받게 했습니다. 부공3의 집회 장소는 바로 이 산 너머입니다.

6. 황산 마을
설교록에 자주 나오는 위천교회 주변의 명문가 황산 신씨 양반 마을입니다. 그 분들 기준으로 거창에서는 그 분들만 양반입니다. 세상을 넓게 산 분들은 연산군의 계비의 집안이라고 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다면 이 나라에 왕을 지냈던 그 수 많은 집안들과 그 왕들이 데리고 산 수 많은 왕비들의 집안들이 이 좁은 땅 안에서 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았던가? 어쨌든 백 목사님의 두 번째 목회지인 위천교회 시절 이 동네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금은 옛 양반 가옥 체험 마을이 되어 있지만.
'7. 마을 모습
우리가 사는 우리 사회의 과거를 살펴 볼 정도가 됩니다. 도평 집회 장소에서 30 분 거리가 되고, 부공3의 내계 집회는 가는 도중 '위천 수승대'라는 곳 맞은 편 마을입니다.

8. 양반 집의 대문
우리는 간판이 좋아야 합니다. 속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사진의 집은 집이 아니고 대문입니다. 이 대문 안에는 집이 따로 있습니다. 무슨 대문이 이렇게 커야 할까? 대문이 솟구쳐 있고 거창하면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알아서 깁니다. 그 꼴을 봐야 할까? 이런 양반 마을이 있는 곳에 교회가 들어 오면 전도와 복음에 고통이 많습니다. 이 마을에서 며느리 한 분이 믿어 지금 대구공회 제일 큰 남정교회와 그 다음이 될 비원교회를 목회하고 계신 신두범 신길범 목사님을 신앙으로 배출합니다.

9. 또 다른 대문
들판이 있고 대문이 바로 닿았습니다. 이런 논밭을 문전옥답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으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던 때 문 앞에 있는 좋은 논밭이란 노동력의 절약과 급할 때 응급 조처를 할 수 있는 등 그 효율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진은 또 다른 대문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간판'의 의미를 모르고 시골에서 목회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도시는 대문들이 없어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 말에 의하면 5천 년 역사인데 그 세월 속에 굳어 질 대로 굳어 져서 바꿀 수가 없는 '간판'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 우리 심리 속에 어떻게 하기 어려울 철학으로 남아 있습니다. 믿은 이후라도 우리의 교회 역사에서도 이 옛 사람이 우리의 신앙 전체를 다 점령하고 있다 하면 과장일까?

10. 관수루
위천에서 6.25 전쟁을 겪습니다. 이 좋은 자연, 물 좋고 산 좋고 돌 좋고 나무까지 좋은 이 곳을 바로 내려다 보는 마을 뒷 산이 그 유명한 빨치산 안 마당이었습니다. 들어 가는 입구의 대문이 이렇게 웅장합니다. 간판, 외부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밑의 기둥은 곧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굽은 나무를 사용해서 한껏 운치를 더했습니다.
백 목사님이 위천에 계실 때 심방 때문에 전도 때문에 가까운 주변 기도 때문에 자주 찾으셨던 곳, 거창지방의 교역자들이 수양회로 자주 모이던 곳, 공회 출발 후 공회 교인들도 자주 찾았던 곳입니다.

11. 돌 비석들
밑 받침 거북 돌도 중간의 비석도 제일 위에 있는 부분도 거대한 돌을 다듬은 것입니다.

12. 암반 사이의 나무
저 내리 누르고 양 쪽에서 짜고 들어 가는 초대형 암반 사이에서 어떻게 저 큰 나무가 뿌리를 박고 저렇게 웅장한 나무로 버티고 성장했을까? 오늘 우리 나라가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의 세계 4 강 사이에서 보이고 있는 발전이라고 봐도 되겠고, 우리는 신앙인이므로 세상 어떤 현실 환경을 주셔도 우리는 역경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저 형편을 감사하며 우리의 낙원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할 터인데.

13. 물과 돌과 나무
관수루와 수승대 사이에 흐르는 풍광이 좋은 곳입니다. 왼 쪽의 바위와 숲은 큰 시냇가 가운데 자리 잡은 거북 바위입니다. 오래 산다 하여 거북과 소나무와 학과 바위는 우리 나라의 시나 그림이나 이야기에 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불교는 아예 그 바위가 되려고 돌 부처 앞에 앉아 평생을 노력하고, 가정 집에서는 뒤 뜰 나무 밑에서 빌고. 저 바위 나이가 6천 년인데 백 목사님은 주로 검정산에서 큰 바위들을 보며 대화를 한 것으로 알려 지지만 실은 덕유산역에서 믿고 평생 바위를 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만들고 보여 주시는 자연의 계시 중 하나로 대했습니다.

14. 수승대와 바위
바위와 물을 건너 잘 살피면 정각이 하나 보입니다. 백제가 국운이 기울어 망하기 직전, 신라로 넘어 가는 사신이 이 물을 넘어 가면 살아 올지 몰라서 슬프게 넘어 갔다는 곳입니다. 이 곳의 바위는 다른 곳에서 보는 바위와 같은 규모로 볼 수가 없습니다. 저 거대한 바위가 하나의 바위이며 그 위로 저 푸른 계곡 물이 6천 년을 깎으며 흐르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여 뛰어 들거나 또는 돌에 낀 이끼에 실수로 넘어 지면 바위 바로 밑에는 계곡 물에서 볼 수 있는 깊은 곳이 있고 수온의 차이와 소용돌이 물살에 의해 심장마비와 함께 가라 앉는 힘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귀신이 밑으로 발을 잡아 당기더라는 생존자들의 말은 살아 나올 힘마저 빼앗고 허우적 거리게 합니다. 우리 신앙에는 저렇게 시원하고 좋게 보이는 현실 속에 한 발만 삐꺽하면 바로 낚아 채고 끝장을 내는 여러 종류의 악령의 덪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