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애양원의 의한 손 목사님 가족 고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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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1 00:00
1. 애양원의 주소는 신풍리 1번지
- 광주에서 신풍으로 이주
애양원은 원래 광주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남 장로교 선교부가 직접 운영했고 그 규모가 커지자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져서 1926년에 이전이 결정 되었습니다. 전남 지역을 살핀 끝에 최적지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가 선정 되었습니다. 반도의 가장 남쪽이어서 따뜻했고, 남해안 바다가로 돌출 된 장소가 대규모 환자의 격리 수용에 적당했으며 주변의 경관이나 토지 매입 등 모든 면에서 적격이었습니다.
- 신풍의 마을 교회
애양원의 이주가 결정 되기 2 년 전인 1924년에 신풍 마을의 최초 개척 예배가 차종석 씨 가정에서 있었습니다. 부친이 집안 몇 사람을 데리고 시작했고 차종석 씨는 손양원 목사님 전기에 나오는 애양원의 총무 과장이며 그 부인은 훗날 총공회 핵심 교인이 될 서귀덕 집사님입니다. 개척 후 불과 2 년만에 애양원이 신풍 마을 1번지로 이주하게 되자 마을 교회는 애양원의 부속 시설처럼 됩니다.
- 애양원과 마을 교회의 관계
일제 치하였으니 일반인도 먹고 살기 어려웠는데 애양원은 1천 명 식구를 국가가 먹이고 있었고, 미국의 남 장로교 선교부가 직접 운영을 맡아 각종 지원이 있었으며, 그 옛날인데도 의사가 상주하며 외부에서 최소 10 명 이상의 정규 직원을 채용하고 있었으며 그 직원들은 마을 교회를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애양원의 규모는 신풍 시골 마을 교회와 마을 자체를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작지만 원래 독립 교회였는데 애양원의 이주 이후 애양원이 마을 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게 됩니다..
2. 남 장로교의 신앙 노선
- 선교부와 한국 교회의 관계
한국의 초기 선교 과정에서 각국의 선교부는 서로 지역을 나눠 맡았는데 그 영향으로 선교부 관할 지역에 따라 교회들의 신앙 색채와 노선은 아주 달랐습니다. 호남 지역을 맡은 미국의 남 장로교는 도덕과 사회 사업 면을 강조하는 대신, 평안도를 맡은 북 장로교와 호주 선교부는 칼빈 주의 신앙에 철저하여 투쟁하고 승리하는 면이 강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평화시에는 미세하여 잘 나타 나지 않았으나 신사 참배라는 환란기와 이후 처리 과정을 통해 아주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신사 참배 승리자들은 북 장로교나 호주 선교부 관할 또는 관련 자들이었고, 해방 후 신사 참배 동조자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까지 신앙 성향을 자유롭게 합니다.
- 애양원과 남 장로교
그런데 애양원은, 손 목사님 시절 신앙과 행정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선교부는 애양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니 교인들의 경제와 생활 그리고 제반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고, 손 목사님은 호주 선교부에서 배워 신앙이 철저하게 보수적이었습니다. 1950년 손 목사님의 순교으로 애양원 식구들은 그들의 내면 신앙은 보수적이고 그들의 외부 활동과 소속은 그 반대 쪽으로 평생 가게 됩니다.
- 애양원과 신풍 마을의 교회
손 목사님의 1950년 순교 시점에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 문제로 분열이 되자 애양원을 운영하는 남 장로교는 신사 참배 찬성 측 교회들의 후원자가 되었고 애양원은 일사분란하게 그 노선을 좇았습니다. 애양원교회가 손 목사님의 신앙 노선과 다른 신사 참배 찬성 측인 총회파에 속하게 되고 이후 교회 통합 운동에 앞서는 통합측이 됩니다. 이런 중에 손 목사님의 사모님만이 손 목사님의 신앙 노선을 좇아 분열 된 교단 중에 신사 참배를 반대한 이들이 모여 그 신앙으로 걷고 있던 고신측에 서게 됩니다. 숫자로 보면 '1,000 대 1'이지만 애양원 안에는 두 개의 신앙 노선이 생깁니다.
- 애양원의 설득과 박해
손 목사님 사모님은 비록 1인이었으나 그 의미는 너무 컸습니다. 따라서 애양원 식구들은 일제히 총회측에 남도록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이미 3 부자의 순교와 그 때마다 남겨 진 가족의 앞에 서서 생사를 초월했던 분이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고신 측은 부산이 중심이었고 호남 지역은 거의 지지 세력이 없었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남겨 진 상태였습니다. 사모님이 1952년, 고신의 제거와 함께 애양원 문 앞에 있는 사택에서 고신측으로 교회를 개척하자, 애양원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일제 때와 전시의 인민군의 압박보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박해하게 되면 맥을 짚어 가며 억누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더 큰 법입니다. 아무도 믿을 리가 없는 손 목사님 사모님에 대한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와 애양원 지도부와 그 주변의 압박은 10여 년 계속 됩니다.
3. 손 목사님의 길을 따라 가는 사모님의 순생
- 주변 교인을 통해
애양원의 총무 과장 차종석 장로님은 애양원 전체의 사무를 총괄한 분입니다. 차 장로님 부부의 신앙은 확고하게 손 목사님의 신앙 노선이므로 사모님과 모든 면에서 뜻을 같이 해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선교부에서는 만일 사모님을 따라 나서면 총무 과장 직책은 바로 사면을 해야 한다고 압박을 합니다. 남편은 그러했으나 그 부인인 서귀덕 집사님은 사모님과 생사를 함께 하면 손 목사님이 걸었던 신앙 길을 함께 하자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서귀덕 집사님이 움직이면 교회가 제대로 개척이 될 수 있으므로 애양원은 차 장로님에게 부인의 행동에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전쟁 기간이었고 자연 마을이었으며 차씨 집안의 어른이었므르로 남편이 뜻을 굳게 세우면 당시 부인으로서는 교회를 나누어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애양원에 일을 하는 차 장로님만 묶지 않고 그 가족의 신앙 자유까지도 묶었습니다.
- 교인의 사업 차단
개척 초기를 좀 지나면서 백동학 집사님이라는 남자 가정이 사모님을 따라 개척을 하게 됩니다. 이 분은 애양원에서 계란을 받아 팔아 사는 가정인데 사모님 교회에 유일한 남자 집사님입니다. 백 집사님에게는 애양원에서 아무도 계란을 팔지 않도록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먹고 살 길이 없어 타지로 이사를 가게 만듭니다. 당시 애양원은 격리 수용 시설이었으므로 지도부의 명령이면 울타리 밖의 세상 법과 전혀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생활비 지원 차단
생활비도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는 어려울 정도였으나 그 마저도 몇 달씩 모아서 지출하다가 결국 끊어 버렸습니다. 이후 사모님은 죽조차 먹지 못하고 굶은 적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고통스런 것은 바닷가였으므로 땔 나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항상 짚으로 군불을 땠고 군불은 밤이 깊어지면 식어 버리기 때문에 긴긴 겨울 밤을 어린 아이를 보듬고 떨어야 했습니다. 당시 잠깐 지나 가는 전도사님이 몇 명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사모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굶었으며 땔감도 함께 나누었으며 조금 애매하면 사택을 먼저 챙겼기 때문에 교역자 가정의 고통보다 사모님이 조금 더 어려웠습니다. 3년을 근무한 사모님 한 분의 당시 회고는 절규였습니다. 그 교역자 가정은 추워서 견디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고 한 정도입니다. 굶기는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한 겨울 내도록 추위에 떤 것이 더 고통스러웠고 사모님은 자신들보다 더 심했다는 회고입니다.
- 부산 이주 추진
한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사모님이 당하는 고통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 굶기고 내 몰아 놓은 다음 한 편으로는 애양원에서 사모님에게 부산 이주를 제의했습니다. 딸 3 명이 부산에서 고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도 계시지 않고 딸들은 부산에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사모님이 부산으로 가면 살 곳을 마련해 드리겠다는 제의였습니다. 딸들도 모친에게 이제는 함께 살자고 늘 조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사모님은 신풍에 교회를 세워 놓고 가도 가지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 대항 교회 설립
원래 마을에는 1924년부터 교회가 있었으나 일제 말기와 전시에 폐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마을 앞에 교회를 개척하자 애양원은 대문 앞의 마을에 애양원과 다른 노선의 교회가, 그 것도 손 목사님의 신앙을 되새기게 할 교회가 개척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한 편으로 교인들을 막고 한 편으로 사모님의 생활을 핍절하게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을에 서둘러 보기 좋게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모님이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자 애양원은 마을 한 가운데 모두에게 보기 좋은 예배당을 마련했습니다.
1954년에 이르러 사모님이 부산의 고신 교회들을 다니며 모금을 하고 돌로 작은 예배당을 지을 준비에 들어 가자 이번에는 그 교회와 애양원 사이에 오가는 길목에 크고 좋은 돌예배당을 짓습니다. 사모님이 1954년부터 시작하여 57년에 이르러 대충 예배당을 짓게 되는데 애양원은 56년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완공을 해 버립니다.
이후 사모님이 개척한 예배당이 비행장 신설 때문에 현재의 공항 입구로 이주를 하게 되자 원래 마을 안에 예배당을 둔다는 방침을 바꾸어 공항 입구로 옮긴 사모님의 개척 예배당 바로 옆으로 다시 옮깁니다. 52년 마을에 교회가 시작 될 때에도, 54년 예배당 건축 때에도, 69년 예배당의 이전에도 애양원에서 예배당을 세우고 운영하는 전체 방향은 손 목사님의 신앙 노선이 이어 지는 교회에 대한 견제와 대응으로만 계속하게 됩니다.
현재 손양원 기념관을 방문하는 분들이 여수 공항 앞에서 애양원으로 접어 들어 가는데 공항 정문에 가까운 비교적 작은 예배당인 사모님이 개척한 교회로서 총공회 소속 신풍교회이고, 신풍교회와 직선 거리 100미터 정도의 비교적 큰 예배당이 애양원에서 개척하고 애양원 관련 교인들이 주도하는 성암교회입니다. 지금은 애양원의 환자가 급감하여 애양원교회는 유적지가 되고 외부의 성암교회가 활동적으나 규모 면에서는 주력이 되어 있지만 그 때에는 반대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