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동 측 목사님의 회고

남단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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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3. 합동 측 목사님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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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양순 사모님의 개척 교회 청년으로 반사로 있다가 합동 측 목회자로 은퇴한 분의 당시 회고입니다.


회고 : 09.8.31.
이름 : 화순 거주 합동 교단 은퇴 목사님




1. 신상

1934년 생이며 현재 76세입니다.
1946년 13 세 초등 4학년으로 교회를 처음 출석했고
1952년 19 세 부산 고려 고등 성경 학교 1 년 후 순천 성경 학교 2 년과 서울 개혁 신학교



2. 교회 출석

1946년, 손 목사님 세째가 2학년이고 나는 4학년 때 학교에서 큰 아이들이 목사님 아들을 괴롭혀서 도와 주었고 집을 묻자 애양원 목사님 아들이라 해서 같은 동네니까 앞으로 막아 주겠다고 말했고, 동장이가 집에 가서 사모님께 이야기를 하자 다음 날 집으로 데려 오라 하여 처음 대면. 가난하게 살 때인데 정 사모님이 전도를 해서 교회를 다녔고 나는 집이 너무 가난한데 사택에 가면 먹을 것이 있어 늘 가서 사는 정도가 됨.



3. 가정 형편

당시는 공항이 없어 대로에서 애양원 입구까지 1 키로 정도였고 나의 집은 대로에서 애양원 들어 가는 마을 입구 쪽이며 부친이 대나무로 챙이를 만들었으므로 대밭이 100평 정도 있었음.



4. 애양원

- 사택
애양원 입구에서 4백 미터 정도 마을 쪽으로 애양원 소유의 사택 3 채가 있는데, 원장인 의사 사택, 차종석 총무 과장 사택, 그리고 목사님 사택이었으며, 손 목사님 사후에는 후임 서현식 목사님이 사용하고 사모님은 사용하던 사택에서 애양원 입구 쪽 가까이 새로 마련 된 작은 사택에서 거주

- 애양원
애양원 안에 교회는 환자 교회였고 애양원 밖에는 전쟁 시기에 교회가 폐쇄 되어 없어졌고, 애양원에는 10여 명의 직원들이 출근했고 외부에 교회가 없을 때는 애양원 안으로 들어 가서 예배 참석. 당시 애양원 예배당 강단 뒤 편에 직원용 별도 좌석. 이 곳에서 예배를 드렸던 마을 사람으로는 학생 포함 불과 5 명 정도. 당시는 애양원이 수용 시설이어서 철조망이 있었고 입구에서 출입을 통제



4. 손양원 목사님

1950년 이전, 목사님 계실 때는 토 요일이면 목사님이 외지 부흥회를 마치고 기차 역에 내려 걸어 오시니까 역으로 마중을 나갔고, 월 요일에는 가방을 들고 역까지 모신다. 나는 가방을 들어 드리고. 어떤 때는 애양원 트럭이 있어 역까지만 모실 때가 있으며 손 목사님은 한 주간도 애양원에 계신 기억은 없다,
목사님이 교인들을 직접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데도 교인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은, 그때 환자들이 결혼식을 하면 목사님은 환자들하고 음식도 꼭 같이 먹는데, 일반 가정집에서 하듯 한다. 행위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는 지금까지도 손목사님 은혜 같은 은혜는 보지 못했다. 목사님은 메모를 사용해서 드문 드문 활용하지 원고를 보고 읽으면서 하지는 않는다. 5 년이 늘 그러했다,



5. 정양순 사모님

나는 보리 밥 먹기도 어려웠는데 손 목사님 생전의 사택은 그 당시에도 소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잘 살았다. 일반 가정은 소고기를 보지도 못할 때. 사택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주고, 구제품이 나올 때였는데 우리는 무명베 떨어진 옷 입는데 좋은 옷도 주셨고, 그래서 사모님께 사로잡혔다. 배 고프면 늘 오라 해서 동장이와 같이 자고 학교도 같이 가도록 함.



6. 성암교회

- 예배당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애양원 앞의 부락에 예배당이 있었는데 붉은 도단 예배당. 그 예배당은 어릴 때 없어졌고, 해방 후 교회를 가게 될 때는 차 과장님 하고 손 목사님 둘이 의논해서 새 예배당 마련. 예배당은 마을에 묵어 있던 동청이 위에는 짚으로 잇고 목재 5칸 집. 예배당을 마련하기 전에 서현식 목사님이 애양원에 전도사로 먼저 부임했고 그 곳에서 강도사가 되고 손 목사님 사후에는 안수를 받아 애양원 후임. 동청에서 예배 드린 것이 1년도 채 되지 못해서 손 목사님 순교하고, 서 목사님이 애양원 후임이 되자 사모님이 성암교회를 유지하지 못해서 폐쇄.

- 주교 시작
서 전도사님이 애양원 부목으로 부임 후 동네 밖에 예배당이 마련 되고 주일 학교가 시작 된 것. 차병용이 당시 10여 학생들을 보통 데려 다녔고 함께 봉사도 하자 해서 다니니까 손 목사님께서 마을에 교회 하나 마련해 주자고 한 것. 그래서 내게는 예배당 열쇠도 별도로 준 것. 주일 학교의 인도자는 오정순 사모님, 차병용은 보조. 사모님은 입술에 크게 상처가 있었으나 찬송을 참 잘했고 원래 순천 중앙 유치원 교사를 하셨고, 그 분이 주일 학교를 시작하자 나는 학생들을 몰고 다녔으므로 사모님을 도와 둘이서 주일 학교를 시작.




7. 개척 과정

- 시작
사모님은 애양원을 다니다가 목사님 돌아 가시고 애양원에서 새 집을 지어 준 데서 살았는데 애양원에서 처음 몇 년은 도왔으나 고려파 교회를 개척하자 지원을 차단. 그 때가 고려파와 총회가 갈라진 해에 차병용 집 위에 있던 어느 집이 부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남자는 차씨고 부인은 부산 댁이어서 부산으로 이사를 가고 그 빈 집을 사모님이 구입하여 그 집 안을 털어서 예배 드린 것이 개척 시작. 그리고 비행장 못 가서 중간에 예배당을 돌집으로 짓고 고신파 교회를 세운 것이 신풍교회의 시작. 개척을 시작할 때는 사모님이 혼자 했고, 사모님은 처음부터 성암교회를 다닌 적이 없음. 서귀덕 집사님은 뒤에 따라 나옴. 애양원에서 개척한 동네의 통합 측 성암교회에서 사모님의 개척을 서귀덕 집사님이 개척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아예 모르고 하는 소리, 서 집사님은 차 장로님 때문에 처음에는 아예 나서지를 못했다.

- 목회자
성암교회 시절 애양원은 손활인 전도사를 모시고 왔고, 신풍교회에는 이진섭 전도사님이 오셨는데 하동 밑에서 장마당 장사하던 분으로서 사명을 가지고 나왔다가 신풍을 떠나면서 하동 고향으로 가서 다시 장사한 사람, 하동에서 4키로 거리 정도인데 장사하게 되면서 오라 해서 다시 간 기억.
손활인 조사님은 원래 크게 성공한 것으로 기억. 순천에 고신 측 장천교회에 왔을 때 한 번 만났고, 성격이 아주 칼이었으며 아주 철두철미한 완전 고신 측 인물로 얼굴도 기억 나고, 뒤에 고신 총회장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김진섭 조사님 후로는 고향을 나와 있었기 때문에 후임 기억이 없고 안재선 씨는 예배당 지을 때 순천 제재소에서 나무를 댔던 이야기는 들은 것 같고, 예배당 지을 때 나는 달섬에서 돌을 떠서 배로 옮겼는데 내가 그 일을 거의 맡았고 일하다가 발에 때 못이 들어 간 기억.

- 개척 시기
차병용은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신산으로 서당 공부했고 그 해 가을에 사모님이 부산으로 고등 성경 학교를 보냄. 사모님이 고려파로 개척하여 애양원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나를 부산으로 보낸 것. 사모님이 백영희 조사님을 좋아해서 서부교회에 가서 배우라고 소개해서 다녔는데, 그때 전라도에서는 백 목사님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때여서 사모님에게 처음 들었음. 사모님이 고려파로 개척한다고 애양원이 차별하여 눈물 많이 흘리심. 부산에서 1년 공부할 때 피난 정부가 부산에 있고 성경 학교가 주변이어서 학생들이 부민동의 대통령 관사에 봉사 간 기억.
백 조사님은 서부교회로 와서 일하라고 했을 만큼 나는 열심, 서부교회를 가면 밥을 주는데 밥을 먹기 위해서도 갔고. 안용준 목사님이 계셨는데 너무 잘해 주셔서 고마웠고 차종석 장로님이 부산에 학교를 오면 찾아 와서 학비도 주고 또 선교사들에게 이야기를 해 줘서 선교사들이 무료 식사권도 줌.

- 순천 성경 학교
부산에서 순천 성경 고등 학교로 옮겨 2학년에 들어 가서 1 년 공부, 이 시기에는 순천서 공부를 하면서 주일에는 신풍으로 와서 사모님 개척한 초가 집에서 반사. 순천 성경 학교에는 차남진 목사님이 계셨는데 유명 인물(성악가, 총신 교수 등). 그 분의 첫 딸이 애양원의 유서기 부인. 순천에서 1 년 공부한 후

- 사택 형편
사모님 딸들은 부산에서 공부했고, 명향식 여자 부흥사가 동희에게 피아노를 사 줬고 셋째 딸은 전적으로 배우고, 둘째 딸은 사범학교를 나와서 중학교 교사했을 것이고, 셋째도 피아노를 생활하도록 사 줬는데 명 부흥사가 도움.

- 정양순과 서귀덕
정양순 사모님을 따라 서귀덕 집사님도 고려파로 개척을 하고 싶은데 남편 차 과장님이 애양원 직원 총책임자여서 개척에 따라 나오지 못하여 어려움. 결국 부인이 고려파라 해서 성암교회에서 차 장로님 직책을 떼 버렸고, 백 목사님이 부산에 어디 취직을 시켰는데 처음에는 안 갈 것처럼 하다가 뒤에 취직은 했으나 일체 비밀로 했었고 서 집사님도 비밀적이어서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성암교회에서 다시 불러서 애양원 일은 그만 둬도 성암교회 장로님 복귀. 서 집사님이 완전히 백 목사님을 따르게 된 것은 백 목사님이 집회를 한 뒤.

- 신풍과 백영희
사모님의 교회 개척 시기에 백 목사님이 신풍에 직접 집회 온 기억 있고, 애양원교회에도 집회 온 기억이 따로 있음. 애양원에 백영희를 집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사모님이었는데 당회는 입장이 그렇지만 교인들과는 사모님이 친밀.

- 애양원과 사모님
애양원 식구들 중에서는 사모님하고 밤10시가 넘으면 권사 집사님들이 와서 나 모르게 저 한 쪽에서 밤새도록 3-4시간씩 교회 문제로 이야기. 교회 문제로 늘 눈물 흘리고 그렇게 했다. 그 때부터 사모님은 애양원에서 뭐 안 줘도 산다 이렇게 각오를 했다, 명현식 여사도 애양원 부흥회를 왔다가 사모님 형편을 알게 되어 딸들을 돕게 된 것.

- 개척과 서현식
손 목사님 사후 성암교회는 서현식 조사님이 애양원 당회장이 되니까 성암교회를 바로 예배당으로 출발시키고 직원들이 밖에서 예배 드리게 했음.

- 개척 교인들
사모님을 따라 개척 나온 백동학 집사님은 계란 장사를 했는데 나이는 훨씬 많았고 사람이 그렇게 진실했고 애양원 손양원 사모님 때문에 연결되어 왔는데, 애양원에서 계란을 주지 못하게 하니까 한 몇 년 하다가 여수로 갔다가 그 뒤에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에서 한번 만난 기억.

- 훗날
신풍에 부임하여 오래 계셨던 박래석 목사님은 백 목사님도 잘 알지만 김현봉 목사님으로 소속. 뒤에 보니까 박 목사님은 김 목사님 쪽으로 갔고 정양순 사모님과 서귀덕 집사님은 백 목사님으로 머리를 돌림.
김현봉 목사님은 사모님이 개척한 교회로 매년 집회를 오심. 교회 소속이 고신과 총회가 다시 합할 때 김현봉으로 갔다면 추리가 맞을 것. 박 목사님이 신풍에서 병이 낫는데 서울로 데려 가서 치료 시킴. 그 때는 내가 목회할 때인데 와서 보면 박 목사님이 달섬에 기도 굴을 만들어 놓고 금식 기도를 많이 하다가 머리에 이상. 그 계통에서 다른 사람이 따라 가지 못할 만큼 열심이었고, 머리가 잘못 된 다음에는 정신이 없어 멍했고, 김현봉의 제일 측근인 이교부 당시 조사님이 우리 교인과 결혼했고 부부 관계는 없었고, 그도 신풍 집회. 이교부가 신풍을 잘 알게 된 것은 박래석 목사님과 고향



8. 객지 생활

- 서울 개혁 신학교
집이 워낙 어려워서 돈을 벌러 서울. 아버지는 죽고 형님은 징용, 동생도 남의 집 살고 혼자서 어쩔 수 없어 서울로 간 김에 종암동에서 개혁 신학. 훗날 개혁 신학교.

- 입대
군 입대하고 본대에 막 가니까 제대라는 소리 나옴. 당시 전쟁 때문에 제대가 없다가 06 군번부터 제대하던 시기. 군번이 99로 시작했고 3년 좀 더했고 26세 제대. 제대 1년 전에 신풍 왔다가 그때 박래석 목사님과 최은조 전도사님이 좋은 처녀니 앞으로 목회할 수 있다며 권했고, 논산 훈련소 경비대 대장이 예수님을 믿고 서로 잘 아는 사이며 그 집 조카와 학교 같이 다닌 연고로 결혼 가능. 원래 전방에 배치를 받았는데 당시 이모가 잘 아는 법사위원 순천사람 윤 씨가 휴가를 가니까 이모 집에 와 있는데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본 뒤 후방으로 부른 것. 전방에서도 수송관과 보좌관이 예수를 믿는데 날 보고 설교를 해 달라 했고 군종도 부산 고려 성경 선배여서 잘 있었는데 후방. 훈련소에서 조교 될까 해서 걱정을 했는데 경비 대장이 물어서 정보처를 원하자 그곳에 보내줘서 정보처에서 제대. 군에서 하사였는데 제대 때 정책 때문에 상병으로 강등 되어 제대.

- 결혼
결혼은 1958년 25 세였고 복산교회에서 주례는 남영환 목사님.

- 제대 후
제대하고 왔을 때, 조카 되는 사람이 아주 머리 좋고 영리한 청년인데 ‘삼촌 우리 둘이 배 하나 사서 사업을 해 보자’고 하는데 처가인 복산으로 갔고, 처의 오빠가 서동연 장로님, 그 곳에 가니까 사촌 되는 처남이 돈 5만 원만 된다고 했는데 당시 그 돈으로 산 배는 쓰지도 못할 작고 낡은 배. 그 배를 타고 화양면에서 복산리 대곡으로 돌아서 여수항을 통해 신풍으로 와야 하는데 음력 8월 13일, 추석 2일 전에 사라호 태풍을 그 바다에서 만났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돛이고 노고 다 떠내려가고 물 퍼내는 양은 솥 하나만 있었는데, 그 것으로 물을 퍼내면서 태풍을 통과하여 화양면 멸치 많이 잡는 고진 앞으로 들어오니까, 막 그 큰 바람이 잠깐 쉬는 날인데, 다른 배들은 굵은 로프로 다 묶어놓고 있는데 작은 배가 험하게 들어오니까 모두 귀신이 들어 온다고 하여 겁을 먹고 보고 있었음. 무사히 들어왔다. 그때 여수 만성리 바다 옆 터널 철로 너머로 큰 배가 육지로 올라 와 있던 사라호 태풍. 그런데 내가 가는 배 길의 주변은 하나님께서 잔잔하게 인도해서 들어 온 것. 그때 나는 기도하기를 ‘날 살려 주십시오, 바람이 불어 고기를 못 잡습니다.’ 했는데 하나님 인도로 고향으로 들어왔다. 고향에서는 내 시체를 찾아 여수로 어디로 찾다가 들어왔다, 들어 온 바로 그 뒷날 미평 역전교회가 났다며 박래석 목사님이 말해서 부임.

- 미평 역전교회
방 하나 있고 일제 때 도단 지붕 밑에 사람 3-4명 예배 드리는 곳. 지금 아파트 된 곳에 나무들로 예배당을 지었고, 현재는 미평 밑의 큰 교회가 위로 이전. 미평 교회 위에 있는 교회. 미평 3년 시절에 고려파와 총회가 합동을 했고, 광양 이동. 미평 목회 시기에 신풍으로 김현봉 목사님 집회 와서 참석.

- 신황리교회
미평에서 3년 있다가, 광양 진상 신황리교회 부임하고 1년도 못되어 환원이 되어 나는 순천 노회 잔류하여 합동파.

- 백야교회
화양면의 백야도에서 2-3년

- 낙성교회
벌교의 낙성 교회로 가니까, 광양에서 갈라진 것처럼 벌교도 통합과 합동이 나뉘는데 합동은 교인이 작고 나와서 개척하고, 작은 집에 있었는데, 그 곳을 애양원이 인연이 있다고 해서 애양원 사람들이 벽돌을 찍어도 주고 애양원에 최고 기술자가 와서 그 교회를 지어 준 것. 교단은 합동과 애양원 측 통합이지만 개인 인연으로 지어준 것, 낙성교회 지금 5-600명, 그 곳에서 4-5년 근무한 뒤 다시 합동을 시켜 놓고 내가 나와야 새 교역자를 모실 수 있으니까 사임

- 봉양교회
돌산의 봉양교회로 왔는데 당시 60년 역사였고, 봉양에서 2층 큰 교회 짓고

- 두라교회
여천군의 남면에 두라교회를 거쳐

- 백호교회
함평에 백호교회를 맡고

- 동부교회
영광에서 동부교회를 맡고 은퇴



9. 기타

- 사모님 신앙 전환
원래 사모님 성격이 강하고 신앙이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천사처럼 보지만 목사님 돌아 가시고 두 아들 그렇게 되고 자녀들은 어리고 하니까 분위기가 침체 되어 있던 어느 날 아침, 사택에서 자고 일어난 내가 동쪽을 보니까 아직 해가 뜰 때가 아닌데 달이 15일 보름 달 떠는 것처럼 뜨면서 동인이가 나타나서 즉시 쫓아가서 사모님을 얼른 불렀다. 보자 말자 사모님은 날 보고 예수님이 오신다 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는데 그리고 나니까 동인이 뒤에 동신이도 나타나면서 그 순간 그 해는 예수님으로 변하고 두 아들의 발 아래쪽으로 달이 뜨고 두 아들이 붙들고 있는데 예수님이 손을 들어 사모님을 향해 축복하는 것을 사모님과 나하고 둘이 봤는데, 그 광경을 보라고 옆에 있는 원장 집을 향해 불러 대니까 한국 원장의 아들 정식이가 나하고 같은 또래인데 그 집의 부엌에서 서서 봤고, 뒤에 애양원에서도 다섯 집이 함께 봤다고 들었다. 그 때 동장이가 함께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후부터 사모님은 과거 신앙을 되찾고 담대히 고신을 개척, 사모님이 개척한 것을 그래서 기억. 애양원에서는 보조를 끊어도 사모님은 내가 애양원에서 안 줘도 내가 주를 위해 죽으련다 하면서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 가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불꽃같이 되어 주여 주여 하고 힘 있게 다님. 그 때 그 모습은 환상이 아님. 내가 혹시 환상인가 해서 다리를 때려 봤고, 내 육안으로 본 것.

- 동장이
신앙 생활 없었고

- 사모님
부산으로 가신 후에는 다시는 안부를 못 들었고 돌아 가실 때도 몰랐고, 전쟁 때 부산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안용준 목사님이 앞으로 사모님이 부산으로 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알고는 있었다.

- 백영희
백 목사님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고신 측에서 강도사 시취를 시키지 않았는데 고신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래서 오래 동안 조사라고 한다.

- 신풍 출신 목회자
고신의 김상길 목사님, 차 상0 목사님,

- 차중철
안 믿는 사람치고 차 의사 선생님은 우상이었다, 돈이 없으면 누구든 가서 빌릴 수 있는 그런 사람. 교회를 위해 보이지 않는 도움이 많았고

- 반란 사건
신풍의 한 동네에서만 열 몇이 사상 때문에 죽었다, 그때가 나락 재놓을 때인데 다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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