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전적 은혜라는 의미 - 보충 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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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1 00:00
보충적 논점들
구원은 아예 우리가 죽어 있어 의식조차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살려놓은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영이 죽은 상태의 사람으로서는 마음으로 믿는 노력 또는 믿는 마음을 가진 결과 조차도 필요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믿음’이라는 성구가 명백하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어 구원론에 있어서 정통 칼빈 교리에서는 단순히 ‘믿기만 하면’이라는 조건을 흔히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구원론의 본질은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 없는가? 전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만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만일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말도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는 인간의 최소한의 심적 노력이라는 면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전적 은혜일 수가 없다.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천주교는 몸이 움직이는 인간의 수고가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 되고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수고를 해야 된다는 주장으로 변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믿기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수고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은 인간이 수고한 것은 전혀 없기 때문에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는 한다면 잘못이다.
육체의 수고는 인간 행위에 속하고 마음의 수고는 인간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육체 노동만 노동으로 알고 정신 노동은 노동으로 알지 못한 것인데 이는 대단한 오류이다.
본문에 ‘은혜로 인하여’라고 했으니 인간 행위는 전혀 개입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다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한 것을 오해하였다. 행위로가 아니라는 말은 육체 뿐 아니라 정신 행위 즉 몸도 마음도 인간의 어떤 노력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구원은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고 한 것은 어찌 되겠는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말을 마음의 수고로 구원 얻는다는 말로,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말을 육체의 보이는 몸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를 한 것이다. 여기 행위는
심신의 행위를 다 말했고 그래야 대전제가 된 ‘은혜로 인하여’라는 말에 모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라는 말은 100% 하나님의 행위, 신적 요소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니 인간의 행위나 인간의 요소는 1%도 개입되지 않아야 은혜이다. 그러므로 몸뿐이 아니라 정신노동 즉 마음의 수고도 구원에는 1%도 개입될 수 없고 개입을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오해가 생겼는가?
천주교는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인간의 몇몇 행위가 최소한 필요하다고 하며 그 예로 고해성사나 세례 등 7 성례(7 sacraments)를 예로 들었다.일단 인간 행위의 최소한 필요가 인정되고 나니까 거기다가 조금씩 해석을 붙이고 각론을 달면서 몇 세대가 지나가면서 연보 동전 소리에 연옥의 부모가 낙원으로 옮겨간다는 정도로까지 삐끌어져 나갔다. 이 정도에 이른 천주교의 교리는 자연스럽게 일반 교인들에게까지 의심을 받게 되고 결국 루터와 칼빈 같은 이들로 인하여 바로 잡히게 된다.
이때 개혁가들이 주장한 첫 마디가 ‘전적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이지 무슨 7성례나 고행 순례 등의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당시 천주교에서 벗어나던 교인들이 생각할 때는 천주교가 요구하는 행위는 수도사들이 아니고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고 따라서 그런 인간의 수고 인간의 육체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성구에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천주교에 비해서는 인간 노력이 하나도 들지 않는 정도요 손가락 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라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것은 그야말로 전적 하나님이 공짜로 주시는 것이 은혜라고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첫 시작의 개혁가들이 고행 고난으로 구원 얻는다고 1천년을 가르쳐 온 세계 교회의 흐름을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고 발표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큰 일을 했다고 할 것이며 이는 신약 역사에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의 업적으로 평가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전적 은혜론을 주장한 것은 옳았으나 그 뒷받침을 육체 행위 아닌 마음이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전적 은혜 아니냐는 논리가 아직 초기이기 때문에 어렸던 것이다. 그 시대로 봐서는 그것이 은혜로 평가될 정도였는지 몰라도 정확하게 말한다면 ‘전적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말과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말은 서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도 정신 노동이며 그것도 인간의 행위의 한 종류이며 그러므로 그것마저도 구원에는 상관이 없어야 구원이 전적 은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 ‘믿음’이 구원에 필요한 것도 성구이며 ‘전적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는 것도 성구이니 이 두 성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말 할 것 없이 ‘은혜로 인하여’ 했으니 인간 노력은 어떤 경우도 어떤 정도도 없는 백% 은혜가 되는 범위에서 해석하면 바로 해석이 되어진다.
마음의 수고 ‘믿음’에 인간 행위가 전혀 존재치 않고 전적 은혜가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겠는가?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데에는 몸의 수고 뿐 아니라 마음의 수고까지도 필요가 없다. 이유는 죄를 지어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인간이 어찌 다시 살아나는 일에 알기라도 하겠는가? 하물며 죽은 자기가 살아나는 일에 스스로 돕는 일이 있겠는가? 백% 죽었던 우리라면 살아나는 이 일에만은 우리 인간 행위나 노력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알고 지었던 모르고 지었던 죄를 지은 우리는 죽었다고 엡2:1에서 단정을 했고 그런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도 단정을 했으니 죽은 것이 살아나는 이것을 중생으로 다시 생명을 받았다는 말이며 다시 살아난 이 생명은 이제 지옥 가지 않고 천국갈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존재케 되었다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을 통칭해서 구원이다. 구원의 과정은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과정이니 우리의 노력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수고 믿는 노력 정도도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믿는 노력조차도 필요 없이 하나님이 다 하신다. 구원을 만든 것도 전적 하나님 홀로, 그 구원을 전달하고 배달하는 것도 전적 하나님 홀로, 배달해 준 구원을 받아들이는 수용도 전적 하나님 홀로라는 것이다. 은혜라는 개념에서 그 은혜의 정도를 인간은 측량도 못할 완전자가 무죄자로 우리 대신 죽고 부활하여 만든 것이 구원이니 그 구원은 인간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을 대신 만들어 주었으니 이것이 은혜요 그 다음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야지 않는가? 배달도 당신 홀로이다. 죽은 것이 배달도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구원을 입혀 주시려고 할 때 거부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구원이란 전적 은혜다 고 가르치는 것이 루터파의 전적 은혜론이다. 그러나 본인이 거부만 하지 않으면 되는 노력이라도 필요치 않다. 거부해도 구원되는 것이 은혜다. 어떻게? 본인이 안 믿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젖혀서라도 안 믿을 수 없게 한다. 그렇다. 인간의 본능은 이미 타락해서 옛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구원 역사에도 거부만 하지 협조는커녕 환영조차도 않게 되어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쫓겨날 것인데 어두움이 빛을 환영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 속에 구원의 빛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전능으로 때가 되매 구원의 객관 역사가 주관을 이기고 꺽고 영을 살린 것이다. 여기까지는 절대적이며 강제적이며 무조건적이다. 그 말은 우리 본인은 알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영이 살아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이 영이 마음에게 살리는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옛주인 살아난 새사람이 이제 흑암 천지인 자기 마음 속에다 빛의 역사, 복음으로 살자고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마음이 어느 날 문득 예수 믿는 일에 대해서 타인의 전도를 받는 중이거나 혼자 떠오르는 생각에서나 어떤 계기 어떤 동기에서라도 예수와 복음에 대한 문제가 제기가 된다. 본인은 전도인 때문이라고 느끼며, 본인은 부인의 설득 때문이라고 느끼며, 혹은 본인은 나이가 들어가고 죽을 때가 가까우니까 인생을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고 그런 인생 노년에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상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 속에서 마음에 넣어주는 영의 존재, 그 활동을 알지 못하고 출처도 알지 못하는 움직임에 움직여졌고 바로 그 움직임의 배후는 자기 중생된 영인 것이다. 마음이 몰랐고 따라서 본인이 확인치 못했을 뿐이다. 산 영이 마음에 빛을 비추기 시작하고 마음에는 어느 날 어떤 동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생긴 오해이다.
자기 마음 속에 복음을 듣고 믿을까 말까 망설여지는 사람, 그런 기간이 오래가는 사람, 단순간에 확정되는 사람 그 차이는 있을지라도 어쨌던지 복음을 듣고 자기 마음의 일정한 과정을 거쳐 ‘자기가 믿기로 작정’했고 ‘믿음’이 생겨졌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을 가져오는 원인이요 내가 맡고 담당할 인간행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자신의 구원에는 자신의 믿는 노력, 또는 그 과정의 갈등은 있었고 결과적으로 믿어버리고 그 결과 구원에 확신을 갖게 되었으니 구원에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성구가 은혜로 인하여 생겨진 믿음을 말했지 자기 노력이 티끌만큼이라도 포함된 믿음을 말하지 않았다. 은혜로 생긴 믿음이란 그 믿음이 생긴 마음의 작용 정신 노동까지도 전적 하나님이 공짜로 만들어 주셔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말이니 이는 어느 각도에서 나온 말씀일까? 하나님이 살려 놓은 영, 이때까지는 마음이 모르고 있었고 살아난 영 그가 자기 마음을 살리는 과정에서 비로소 마음은 갈등을 하게 되고, 그 다음 마음이 영의 설득을 받게 되니까 이때야 비로소 자기는 중생 된 예수 믿는 사람이 된 줄로 알게 된다. 그러나 실은 그 이전에 중생이 되었고 요3: 말씀대로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짐작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거부했고 마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받아들여 믿었다는 이런 과정 속에서 최종 믿은 것이 마음 자신의 결정이니 이 정도는 우리가 구원 얻기 위해서 행할 필수며 이것은 구원 자체를 생각할 때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그냥 공짜로 받은 것 뿐이니 이는 은혜가 아니냐는 논리로 전개가 되는 것이다.
영을 몰랐고, 영과 마음의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생겨지는 오류이다.
이제 결론을 내린다면 구원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당신이 정한 때 당신이 우리 자신이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중에 영을 살렸다. 이것이 중생이며 구원인 것이다. 전적 은혜이며 이는 다른 어떤 대가나 노력으로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며 전적 객관의 역사로 끝난 구원이다. 그런데 이렇게 영이 중생되고 나면 그 영이 자기의 마음에 빛을 비추기 시작하게 되고 이 마음이 처음으로 영의 음성을 받아들일 때를 사람들은 중생의 때라고 알게 되는데 이는 영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본문에서 은혜로 시작된 것이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었다 하신 대로 믿음도 필요치 않느냐는 지적이 있을 것이다. 믿음은 순종이니 마음의 순종은 인정이다. 주님이 객관의 절대 능력으로 영을 살릴 때 영이 거부치 못하게 거부치 않게 살리는 과정을 따라 오도록 당신이 만들어서 영이 살아나는 것이며, 마음이 살아날 때도 하나님이 살릴 때 객관에서는 영이 마음에 빛을 비추게 되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에게 영의 음성을 거부치 말고 인정하도록 하셔서 인정하는 마음을 만들어서 그다음 인정의 단계가 될 때 마음을 살리는 것이 구원이다. 이러므로 본문은 기본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구원 전부를 통틀어서 말씀하는 성구이다.
다만 영을 살릴 때는 살리는 것 자체도 몰랐고, 심신을 살릴 때는 살리는 역사를 우리가 인지하게 되는 차이가 있고, 영을 살릴 때는 하나님이 접수까지도 다 하게 하는 것 같았고 심신을 살릴 때는 마음이 결정권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인정키로 하는 형식 모양이 있게 되고 그러나 속은 실은 당신이 다 하셨고 따라서 모든 것은 전적 은혜인 것이다.
거부하던 자기가 인정하게 된 것은 인간이 구원 얻는 일에 어느 정도 수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다. 거부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안 믿겠다고 손을 내 젖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인적요소의 본질적 발로이다. 인정하겠다는 것은 인적 요소 안에, 타락한 옛사람 안에서는 절대 생겨질 수 없는 이방인이다. 이질 요소이다. 그런데 마음 속에 복음을 받겠다는 부분이 생겨지고 그런 운동이 발생되고 결국 인정이 되었다면 이는 그 부분, 그 운동 전부가 곧 마음 자체것이 아니라 외부 즉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 은혜이며 인간편에서 믿음이라는 순종의 외형이 먼저 순서상 발생하게 되고 그다음 구원의 모습이 들어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설명한 본문을 인간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단면적 접근을 해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