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돈과 교권으로 타 교단 역사까지 사들이고 협박하려 한 경우

남단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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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6-4. 돈과 교권으로 타 교단 역사까지 사들이고 협박하려 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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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신의 역사와 순교의 의미

고신은 그들 총회 연혁에서 1952년을 교단 출발 연도로 잡고 있습니다.
고신의 출발은 그보다 훨씬 앞이지만 성경보다 법을 앞세우다 스스로 역사를 축소했습니다.
어쨌든 고신 스스로 1952년으로 출발을 잡고 있어 남이 역사를 확대해 주기도 어렵습니다.

고신은 '순교'를 교단의 표어로 삼고 한국 교회의 진정한 순교는 그들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노선은 그 배경을 그들보다 더 잘 알지만 이 글에서는 그들 기준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고신이 한국 교회의 순교를 마치 그들 고유의 그리고 그들 독점의 역사로 사용하는 배경은
신사참배라는 사건을 통과하며 그 이전의 교회 정통성은 참배를 반대한 이들에게 이어졌고
그 정통성이 해방 이후 고신 교단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와 그들의 정신은 고신에만 흐른다고 이렇게 교계를 향해 주장을 해도
통합 합동 개혁 등 그 어느 교단이든지 그들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있습니다.
고작 한다는 말은 '고신은 너무 건방지다. 교만하다. 바리새인이다...' 이런 정도입니다.

이유는, 한국 장로교가 단일의 총회로 내려 오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을 하게 되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 모여 결성하고 나온 것이 고신이고 그 고신을 반대한 교단들이
고신을 분리할 때 함께 제거했고 제거한 후에 자기들끼리 갈갈이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권 교세 경제 인물 등을 가지고 말할 때는 고신이 늘 제일 뒤에 처지게 되지만
신앙의 정통성으로 말하게 되면 고신만 큰 소리를 치고 나머지는 다 숨어 버리는 식입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신사참배는 전면적이며 최대 사건이었고 교단 분열의 중심 사건이었으므로
마치 고려사가 조선사를 빼놓고 현대사로 바로 넘어 올 수 없는 것처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오늘까지 이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고 여기에서 존재 의미를 찾으나
정작 현재 고신은 그 어떤 면에서도 내놓을 것이 전혀 없어 결국 순교 이야기만 남습니다.

고신이 오늘 어떤 현실의 고난이 있다 해도 말씀으로 모든 고통을 겪고 나간다는 것은 없고
고신의 과거 조상은 어떤 고난이든 다 승리하고 나왔다는 역사만 고신에 남아 있습니다.
신학의 권위나 규모나 영향력이나 인재나 심지어 입학과 졸업의 성적에서도 뒤 쳐지고 있고
교계를 대표할 대형 교회나 지도력 있는 교회도 전부 타 교파에만 있고 고신은 존재도 없고
교계의 또 다른 자랑인 교단 출신 세상 인재조차 고신은 거의 전무하다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교계에서 고신은 그 규모나 실력에 비하여 엄청난 대우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한국 교회 중심이 장로교요 장로교의 전체 역사 속에 고신의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즉, 고신은 한국 교회의 '순교'와 '깨끗한 신앙'을 혼자 가진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2. 고신의 역사와 고신의 현실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면 갈수록 고신은 신이 나고 옳고 바르고 영광스러워 지는데
문제는 그렇게 위대한 과거를 가진 고신이 현재로 오면 올수록 수치스러워 지는 점입니다.

현재 교계가 세상 기준으로 무엇이든 자랑하다 보니 서울과 지방의 지역 차이가 큰데
타 교단은 본부나 주 활동 지역이 서울이고 고신만 부산에 본부와 신학교를 두고 있다 보니
고신의 인물다운 인물은 전부 서울로 올라 가서 결국 타 교파 신학교나 소속을 두게 되었고
고신은 몇 안 되는 인물조차 타 교단에 공급하는 역할에 그치게 되는 모습을 보고
교단 본부를 서울 중심에 옮겼고 신학교도 그리 하려다 천안에 주저 앉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신의 자랑은 그 과거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신앙이며 순교며 순수였는데
오늘 고신이 그들이 비판하는 타 교단과 그 어떤 면으로 무엇이 다른지 설명을 못합니다.

선배들이 2계명을 지키느라고 투쟁했다는 역사는 가졌으나 오늘의 2계명은 간 데가 없으니
오늘의 2계명인 추도식이나 국기 배례 문제를 두고 고신에는 투쟁의 흔적도 사라져 버렸고
선배들이 주일을 지키느라고 순교를 했다는 자랑은 있어도 오늘의 주일은 실종이 되었으니
현재 고신의 주요 교직자들조차 주일 개념 자체도 없어 계명은 조상용일 뿐입니다.
고신 교인들이 공무원 교사 기업체 자격증의 주일 시험을 예사로 다 치르는 것이 증거이고
이 노선에서 주일 시험 때문에 총회에 협조를 구해도 의논 접수조차 차단한 정도입니다.

즉, 고신의 과거는 있어도 그 자랑하는 그 고신의 현재는 없으니
죽어 없어진 조상을 팔아 조선 5백 년을 이어 온 유교식 전통 자랑 뿐이었습니다.



3. 변 판원 선생님의 순교와 고신

고신이 한국 교회가 공동 역사로 가졌던 순교자는 가지고 있으나 고신만의 순교자는 없는데
그래도 고신만 한국 교회에서 순교자를 가졌다 자랑하고 순교를 앞세우니 우스운 일입니다.
한국 교회의 일반 순교자는 선교 초기와 신사참배 그리고 6.25 시기의 순교자들 뿐입니다.
고신의 출발은 1952년이므로 이 세 시기의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 공동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고신이 고신만의 순교자라고 말을 할 만한 분들이 실제 있기는 있습니다.
박 기천 배 추달 변 판원이라는 6.25 전쟁 기간의 순교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6.25 때 수 많은 순교자들이 거론되고 있으나 면밀하게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과연 순교일까?
한 쪽에서 순교자라고 말을 하니까 순교가 아니라 말하기는 참으로 곤란하지만
순교의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 보면 순교가 아니라 순직이 대부분입니다.

한국 교회가 순교자를 흠모하고 순교를 지극히 높이는 것은 너무 좋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순교자 아닌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거나 순교의 의미를 확대한 다음 배경 설명이 없으면
순교를 팔아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되거나 참 순교자를 묻는 일이 됩니다.

한국 교회 전체를 알지 못하고 각 교단과 교회와 지역에서 말하는 순교를 다 알지는 못하나
6.25 시기에 침략을 당한 남한, 그 중에서도 과거 신사참배 등을 고려할 때 저항할 지역은
간단하게 나타납니다. 이 지역의 신앙 역사와 상황이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할 수 있는데
실제 6.25 전쟁 시기에 남침하는 인민군의 소식을 전국이 다 함께 듣고 있던 상태에서
손 양원 목사님은 피난 가자는 권유도 받았고 갈 수 있는 형편인데도 거부한 정도이고
그 외의 거의 모든 분은 피난 시기를 놓쳤거나 설마 하다가 점령지 내에서 당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좁게 보면 목사니 인민군에게 붙들렸고 그래서 총살 당했으니 순교라 하겠는데
넓게 보면 피난을 가려다 방심하고 설마 하다 죽었다면 애초부터 순교라 하기 어렵습니다.
50~60년대의 한국 교회 최고 성자요 도인이라 했던 김 현봉 목사님도 전쟁을 피해 피난했고
전국의 그 수 많은 목회자 교인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앞장 서서 일제히 피난했으니
손 목사님의 순교가 빛을 발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는 아예 그런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창 지방에서는 피난의 기회 자체를 거부하고 교역자들이 수양회를 개최하면서
시시각각 다가 오는 인민군의 소식과 믿는 사람을 쓸어 버리는 소식을 들으면서 맞았으니
주 남선 목사님이 든든히 중심에서 버티고 있었고 이 노선 교인들이 역시 그러했었습니다.
주 목사님이 점령을 눈 앞에 두고도 전체 목회자를 상대로 신앙으로 독려하였지만
점령지에서 신앙 자유를 가졌던 분은 이 노선 교인들 외에는 주 목사님 밑에 없었습니다.

주 목사님 지도 하의 거창 합천 함양의 3 개 군에서 순교를 한 분들은 전체 3 명이었고
이들은 피할 길을 보고도 평소 배운 대로 담대하게 순교를 했습니다.
아다시피 그 때까지 거창은 주 목사님의 인도 하에 있어 비록 법적으로 고신 출발 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100 % 고신 성향이었고 그 순교자들의 교회와 신앙은 실제 그러했습니다.


고신이 좋아하는 교회 법적 기준으로는 고신의 출발이 1952년이었지만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거창이 인민군에 의하여 점령된 상태에서 향후 고신이 될 교회들은
그 교회들을 책임 진 목회자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교역자 수양회로 준비하고 맞섰으며
그들 중에 앞장 선 주 목사님은 점령 기간 끝까지 인민군 치하를 자유롭게 활동했으나
그 외 모든 교역자와 교인들 중에서 주 목사님처럼 그렇게 한 경우는 이 노선 교인들이니
백 목사님이 목회한 봉산 교회 개명 교회 위천 교회는 점령지에서 예배를 계속 드렸습니다.
그리고 순교자 3 명이 나오는데 그들은 다 깨끗하게 순교하게 됩니다.
박 기천 조사님과 배 추달 변 판원 선생님은 백 목사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결과였습니다.

고신에서는 보통 이 분들이 주 목사님에게 은혜 받고 순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만
박 기천 조사님은 교인으로 있다가 목회를 출발하게 된 배경이 백 목사님의 집회 참석이고
배 추달 선생님이 신앙 생활을 했던 지역은 백 목사님 집회 영향이 오늘까지 있는 곳이어서
이들을 순교자로 적으려 한다면 백 목사님의 이름은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변 판원 선생님의 이야기는 가장 대표적이고 극적이며 모범적인 순교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신 일색이며 고신의 핵심 지역인 거창 지역에서
6.25 전쟁을 거치면서 주 목사님도 순교를 소원만 하였지 실제 순교는 하지 못했는데
그 밑에서 3 명의 순교자가 나왔으므로 당연히 1952년 이후 고신은 그들을 자랑해야 했는데
1951년 1월에 주 목사님이 전쟁 도중 병사하시게 되니까 거창 지방의 고신 권역의 순교를
발굴하고 전하게 되면 온통 백 목사님 이름만 나오게 되어 있고 이를 피할 길이 없게 되자
주 목사님의 후임인 남 목사님은 그가 고신의 전술가이며 행정가이며 정치 목사이기 때문에
고신의 보다 큰 앞 날을 위해 이들 순교 소식을 다 덮어 버렸습니다.



4. 순교를 주장하는 고신이 파 묻은 순교

서울처럼 여러 교파와 교단이 얽혀 있는 곳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아예 고신만 있는 곳에서
고신의 설립자 주 목사님 바로 지도 권역에서 3 명의 순교자가 나오게 되는데
6.25 전체를 통해 손 양원 목사님의 순교 외에는 이런 뚜렷하고 자랑스런 경우가 없는데도
고신이 백 목사님의 이름이 높아 지게 될 것을 우려해서 순교 소식을 다 덮어 버렸습니다.

이후 고신이 1959년에 백영희를 제거하고 그가 교계에서 완전히 매장 되었다고 생각한 시점
즉 1976년에 주 목사님 전기가 출간되는 과정에서 심 군식 목사님이 거창을 완전히 살폈고
순교 못한 주 남선 목사님 밑에 실제 순교한 고신의 신앙 권역의 3 명 순교자를 발굴했는데
그 중에 2 명은 백 목사님을 모르는 이들이 볼 때는 백 목사님 계열의 신앙이 아니라 봤고
그 중에 1 명은 백 목사님과 지역과 교회까지 겹치기 때문에 고신의 정치적 입장이 가해져
전기집에 박 기천 배 추달 2 명은 고신의 순교자로 주 목사님 전기집에 상세하게 소개되고
그 2 명보다 순교의 내용이 훨씬 극적인 변 판원은 등재 과정에서 이름이 제거되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 있어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 남 영환 목사님입니다.
주 목사님의 명목상 후계자인 남 목사님과 전기의 저자인 심 군식 목사님의 내막은 모르나
전기 책에 나타난 내용은 당시와 이후 관계를 아는 사람들에게 아주 명확한 것이 있으니
2 명의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남 목사님에 의하여 소개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백 목사님께 은혜 받아 순교에 이르게 된 내용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글이 반론하는 남 목사님이 남긴 위 글 내용의 남 목사님의 비판을 보면
고신의 원로였던 남 목사님이 청년인 심 군식 목사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지,
또한 책이 출간되던 1976년 고신의 백 목사님에 대한 상황도 함께 고려하면, 간단합니다.

고신은 그들 교단 출발사 직전에 있었던 고신 권역 제일 중심지에서 발생한 3 명 순교를
고신 출발 당시 남 목사님이 거창 지역 대표로 어른으로 고신 내에 전할 소식이었는데
남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평생 시기하고 견제한 백 목사님 신앙 계통이 드러 날까 하여 막고
주 목사님 전기 출간에 있어 전쟁 당시 거창 지방 제일의 어른 위치에서 순교자를 막았으며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관련된 것만 집중 미화되고 백 목사님 때문에 순교조차 빼버렸습니다.



5. 세월이 흘러

백 목사님 생전인 1987년 경 박 기천 조사님 아들이 목사님이 되어 아버지 소식을 살피다가
자신이 고신 소속이며 박 조사님이 거창 지방의 교역자였기 때문에 거창 교회를 찾았는데
모두 박 조사님을 잘 안다고 말은 해도 그 순교에 이르는 신앙 과정은 말해 준 이가 없었고
부친의 평소 뿐 아니라 순교에 이르는 신앙을 바로 알고 싶은데 설명한 이가 없었습니다.
남 목사님이 생존해 있을 때인데 남 목사님은 순교 사실과 순교 후 시신을 찾은 것 뿐이지
박 조사님의 순교에 이르는 신앙 이야기는 설명할 수도 없었고 설명할 리도 없었습니다.

박 조사님의 자녀는 이후 백 목사님 사후에도 다시 서부 교회를 찾아 온 적이 있었으나
그 때는 고신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부친에 대하여 어떤 생활을 했는지만 물었고
그 신앙이 어떻게 해서 그런 순교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더듬어 찾는 것도 서툴었습니다.

당시 저는 찾아 온 고신대 교수님들께 '왜 순교의 고신이 40 년이 넘어 순교자를 찾는지?'
왜 거창 지방 모든 교인들이 다 알고 있는 박 조사님의 순교가 1976년에야 알려 지고
왜 그 자세한 내막을 알려는 움직임이 1990년 이후에야 본격화 되는지를 되물었습니다.
그리고 고신이 고신 내에서 순교한 이런 대표적 순교자를 이제부터 아무리 찾고 연구해도
박 조사님의 세상과 평소 생활의 행적은 얼마든지 찾을 것이나 순교에 이르는 신앙은
찾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노선의 6.25 이전 신앙 운동과 전쟁 당시의 일반적 신앙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같은 그 지방에 있었던 교역자나 일반 교인들은 이런 세계를 알지 못해 할 말이 없습니다.



6. 다시 세월이 흘러

1997년 12월에 같은 그 지방의 위천 교회에 주일 학교 환란 역사를 출간한 적이 있었는데
위천 교회의 국기 문제로 전국 최대 사건이 되었고 이후 전쟁을 준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에 당시 관련자들을 만나 면밀히 내용을 적었는데
출간 직전 그 내용에 관련된 분들이 생존한 경우가 많아서 당시 교회에 연락을 했습니다.
이런 책이 실명으로 출간될 때 그 교회에 목회하는 현직 담임으로 의견을 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국기 문제로 교회를 탄압한 분들이 아직 교회 옆에 계시고 교회가 전도하려 한다면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그런 분들이 교회를 찾는 일에 걸림이 생길까 하여 배려한 것이며
어떤 면으로나 고신의 현지 교회를 배려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1949년 위천 지방의 위천 교회에 백 영희 조사님이 담임으로 부임하여 2계명을 가르쳤고
주일 학생들과 반사들이 학교와 경찰에게 피 흘리며 맞고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건 때문에
정부가 국기 배례를 주목으로 바꾸고 모든 국가 의례의 제도를 변경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출간 직전의 원고를 전부 고신 소속인 위천 교회에 보내어 그 입장을 달라고 하자
교회 담임은 서울의 총회에 총무로 있었다고 기억되는 심 군식 목사님의 의사를 전했으니
원하는 대로 원고료를 주겠으니까 위천 교회 주일 학교 출간 원고를 넘기라는 것이었고
넘기지 않고 출간하면 고신 교회를 총공회 교회로 출간하는 법적 책임을 거론했습니다.

고신 스스로 1952년에 출발했다고 연혁을 적고 있는데 1949년의 위천 교회가 왜 고신인가?
고신 교파 내에서 발생한 것이라 해도 백 목사님의 목회 연구 내용인데 무슨 상관인가?
고신이 그 역사가 고신 역사라면 고신이 고신 시각에서 출간하면 되는데 무슨 언행인가?

당시 심 군식 목사님의 제의도 너무 세상 정치적이었고 그 발상은 위험하기 그지 없었으니
고신이 결정하면 타 교단이라도 좌지우지한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냥 듣고 넘어 갈 정도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협박과 회유가 또렷했기 때문에
자유로 하라 하고 바로 출간에 들어 갔습니다.

이후 기독교 서점을 통해 책이 판매되자 고신의 요직에 있는 분들이 서점에 전화하여
책의 내용이 고신 역사 도용이라고 막고 나섰으나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다만 부산에서는 고신 교회와 거래가 많아서 눈치를 보는 서점들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점 주인들이 제게 하는 말은 이 자리에서 옮기기에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도저히 앉을 자리 설 자리를 모를 정도의 수준들이었습니다.

백 영희 목사님의 1949년 위천 교회 재임 시기에 있었던 사건을 총공회에서 출간하면
왜 고신이 시비를 걸고 역사 왜곡이나 도용이니 법적으로 시비하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가?
이 것이 남 목사님의 위 글 내용과 같은 차원의 인식과 수준과 언행으로 볼 수밖에 없고
이런 행동은 심지어 고신의 공식 기록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뭐라 해야 하나!




7. 고신의 역사 연구를 보면서

신앙이나 세상이나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어떤 일이나 하나님께서 자라 가게 하시기 때문에
초기 모습을 비판하려 하면 비판만 하다 말아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모든 모순과 부족과 잘못이 한 편으로는 자라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입니다.

고신이 고신 역사 연구를 위해 움직인다는 소식을 접하며 만사 잘 되기를 원했고
그들의 초기 역사가 이 노선과 공동의 역사이므로 모든 면에서 실력이 있는 그들의 수고를
이 노선은 가만히 앉아서 혜택을 누리게 될 것으로 예상하여 미안했고 협조적이었습니다만

이 노선이 보유한 자료를 확보하거나 필요할 때만 잠깐 활용할 정도의 인식에 그치고
속으로는 거짓과 왜곡까지 동원해서라도 언행에 한계가 없는 모습을 보며
교계의 형제로서 몇 가지 지적을 통해 스스로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애매한 것은 다 놔 두고라도 여기 몇 가지 글을 통해 지적하는 바는
고신을 사랑하고 진정 아낀다면 아마 심각하게 살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잠깐 그렇게 실수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은 더욱 많으나 치사하여 적지 않았으며
적어도 교회의 이름으로 활동한다면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중심으로 주로 지적했습니다.

이 곳의 글들은 사실은 비판이 아니라 반론입니다. 반론이므로 재반론을 기대합니다.
아마 고신 차원에서 그 어떤 면으로 살펴도 재반론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합니다.
재반론을 하게 되면 인간적 감정이 곳곳에서 되돌려 나올 것으로 생각하나
고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내재적 한계와 암적 단점을 한번 지적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 홈의 글에 잘못이 있다면 고신이 요구하기 전에 이 홈은 초기 홈에 크게 올릴 것입니다.
신앙 세계니 자기 잘못은 최대한 드러 내고 상대방은 고치는 데 필요한 정도가 좋을 것이고
이번에 몇 가지 내용을 적는 것은 고신의 극히 일부 문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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