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총공회 재산 점령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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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7 00:00
①1989-1991년의 대구공회의 총공회 재산 강점기
'양성원건물' '대구기도원' '거창기도원' 등 수 백 억대가 넘는 총공회 공동재산문제가 1989년 이후 10년을 넘기며 아직까지 미결상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부산공회(1)의 이재순목사님이 단독으로 강점하고 있어 공회들마다 그 행동을 여러모로 비난하고 있으나, 사실은 힘에 의하여 여러 차례 주도권이 움직여왔다는 것은 가만히 더듬어 보면 공회 내부인은 다 알 수 밖에 없는 공개적인 사안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총공회 재산을 일방적으로 점령하고 다른 공회를 향해서 주인노릇을 했던 측은 대구공회였습니다. 백목사님 사후 대구공회는 소속교회 2/3와 총공회장 및 행정실장이라는 공회 핵심 집행부를 확보하여 행정처리상 절대 우위에 있었습니다. 한편 집회장소를 실질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거창과 대구지역 교회들과 기도원 관리담당자들 그리고 기도원사찰까지를 대구공회 소속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구공회가 양심을 가지고 의논을 하겠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먹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대구공회는 후자를 택했고 부산공회는 총공회나 서부교회 문제를 두고는 대구공회와 여러 면에서 맞섰지만
기도원 재산문제를 두고는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고 대구공회의 결정만 통고받을 뿐이었습니다.
백목사님 사후 첫 집회였던 1990년 5월집회 그리고 8월집회는 계속해서 대구공회가 주인으로 그 사용시기와 방법 등 모든 것을 결정했고 부산공회는 사용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게 됩니다. 물론 대구공회가 제시하는 대로 사용료와 사용세칙 등을 일일이 따라야 했고 이 과정에서 부산공회는 훗날 두고두고 그 복수를 대구공회에 되갚는데 이는 당시 설움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산공회가 당시 마음만 먹는다면,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의 숫자와 힘으로 탈환할 수 있었고 또한 법적으로 나오면 맞대응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부산공회 내에서 발언권을 가지고 활동하던 시기여서 이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충돌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②1992년, 대구공회 내부 분열로 총공회 재산이 부산공회로 이동
대구공회가 비록 서부교회를 부산공회에게 뺐겼지만 총공회 전체적으로는 대세를 가지고 주도했고 더구나 양대 집회기도원을 장악함으로 제법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1년, 백태영목사님이 공회 분리과정에서 이재순목사님을 충분히 활용한 뒤 양성원장에서 밀어내게 되자 그동안 백태영목사님이 너무 독단으로 공회를 운영한다는 불만을 가진 교회들이 잠실동교회에서 열린 총공회 도중 대구공회를 대거 탈퇴하며 거창공회로 따로 분립하게 됩니다.
대구공회의 주요 젊은 층들이 주도를 하고 지역적으로는 거창지방 교역자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통칭 거창공회라고 불렸습니다. 이 탈퇴는 단순히 빠져나가는 형태가 아니라 양측이 서로 모든 면으로 맞붙어 싸우는 전면전으로 전개됩니다. 거창측은 백태영목사님의 독단과 비리 등을 유포하며 최대한 동반 탈퇴를 적극 권면하였고 반대로 백태영목사님은 울산남산교회 등 탈퇴측 교역자가 있는 교회 중 손을 댈 수 있는 곳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역자 축출을 시도했습니다.
1991년 시작되고 1992년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이 투쟁은 불과 2년전 부산공회와 대구공회가 분리될 때 있었던 투쟁 이상으로 서로 감정을 갖게 되면서 앞서 분리된 부산공회와 쌓였던 감정은 식어 있었고 현재진행형으로 분리되던 양측끼리는 극단적으로 등을 돌리게 됩니다.
대구공회는 내부 분열을 겪으면서 양측이 서로 세확산과 반대측 치기에 정신이 없게 되자 부산공회는 여유있게 총공회 전체재산을 접수하게 됩니다. 어부지리와 같은 세상 이치가 적용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신앙과 말씀은 발표용으로만 사용되었고 손과 발은 오로지 세상 혈육전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③1992-1998년, 부산공회의 총공회 재산 강점기
1992년 2월 14일 부산공회는 행정실 직원 김영환조사님을 통해 부산공회 내 모든 목회자들의 인감증명과 인감도장을 급하게 행정실로 집합시키고 무슨 일에 사용될지도 모르고 제출된 도장과 인감증명을 가지고 부산공회 집행부는 서둘러 총공회 재산확보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이곳은 이재순목사님 송종섭목사님에게 직접 전화를 하여 부산공회가 비록 행정관청 제출용이라고 하지만 인감증명으로 '선' 법적조처를 하게 되면 대구공회가 '후' 소송으로 들어올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고 이후 멍군장군을 주고 받으며 50년전 고신과 총회파가 벌였던 그때 논리 그때 투쟁 그때 법적해결 그때 범죄를 그대로 다 뒤집어 쓸 것이므로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강하게 말했습니다. 물론 이 날 이후 총공회 재산확보에 반대한 교역자기 때문에 확보한 재산인 양성원에 강의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이재순 서영호 송종섭 송종관목사님이 합의하고 그후 이곳을 양성원 강의에서 배제하게 됩니다. 서영호목사님은 이곳을 제거한 바로 그 순서 그 수법에 의하여 그다음 순서로 제거가 됩니다.
이곳은 대구공회와의 분리는 백목사님 사후 한번 겪어야 할 노선투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조처와 활동을 했었지만, 이후 공회적 투쟁은 밥그릇을 위해 싸우는 교권싸움으로 보았기 때문에 틀렸으면 일절 상관치 않는 것으로 상대를 했었습니다. 따라서 부산공회 내부에서는 도장찍기를 거부하고 의견을 발표하는 이상의 반대가 없게 되자 이후 일사천리로 총공회 재산 환수조처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부산공회가 양성원 부지에 일방적으로 건물공사를 시작하였고 대구공회는 가처분신청으로 이를 막고 나서자 양측 공회는 공식적으로 50년 전 고신과 총회파의 예배당소송문제를 그대로 본뜨고 시작하게 되는 첫걸음을 대외에 공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 교회사적 의미와 총공회 출발 역사를 귀에 외쳐대지만 이미 총공회 수백억원에 눈먼 양측 공회집행부에게는 오로지 재산확보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미 대구공회는 내분에 휩싸여 양성원은 고사하고라도 거창과 대구기도원까지도 부산공회에 다 내어주게 됩니다. 대구공회가 내분 때문에 전혀 저항치 못하고 기도원을 내어주자 부산공회의 소송주도세력인 이목사님과 송목사님, 그리고 최종 결정권을 가진 부산공회 최고 지도부는 총공회 재산에 대구공회는 빌려사용하는 것도 불허한다는 접근금지 방침을 발표하고 이후 이를 실행하게 됩니다.
심지어 대구집회를 하던 5월 첫주에 거창공회는 거창기도원으로 몰래 숨어들어 수백명 정도의 교인으로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춘도목사님과 청년들은 대구집회장소에서 바로 거창으로 내려갔고 집회 현장에서 모든 인원을 내쫓고 그 시설을 강제철거하게 됩니다. 당시 거창측 참석인들은 예배보는 도중에 난입하여 마이크, 앰프 등 모든 시설을 뒤엎고 난동을 부렸다고 하지만, 사실 내려간 인물들은 그러고도 남을 정도이며 또 당한 측도 과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물들이므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총공회 전체 재산관리는 완벽하게 부산공회 집행부 손으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후 부산공회 집행부 개인 차원으로 재산은 운영되고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 시기만 해도 부산공회 내부에는 장차 부산공회(2)로 분리될 서영호목사님측에서는 이를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손에 때는 부산공회 내부에 있는 상대방이 묻히게 되고, 그 사용 수익으로 얻게 되는 이익은 함께 나눠가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되면 같은 차원에서 투쟁을 하게 될 것인데 대구공회나 거창공회를 향해 극단적으로 재산접근금지처분을 하고 있는 부산공회집행부는 그 일이 끝나고 나면 부산공회 내부의 비협력 반대측에게 그 무력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을 당시만 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④1998-2002, 부산공회(1)의 총공회 재산 강점기
대구공회의 내분으로 기회를 잡고, 대구공회가 했던 것을 그대로 본떠 총공회 재산 강점을 해온 부산공회는 대구공회와 거창공회로부터는 확실하게 총공회 재산을 지켜내고 있었으나 부산공회 내부 문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우선 부산공회가 총공회 재산을 강점하기 위해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총공회 신앙노선까지 버리게 되자 부산공회(3)으로 나갈 교역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다행히 이 반대는 반대 발표만 하고 그 이상의 무력투쟁을 하지 않는 노선이기 때문에 제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부산공회(3)을 제거할 때 힘을 합했던 부산공회 내 서영호목사님측은 장차 부산공회(2)측으로 스스로 분리해 나갈 세력이지만 당시만 해도 부산공회 내부에서 집행부와 서부교회 서목사님 시무투표 불신임건, 양성원장 해임 및 교회사 강의 금지건, 그리고 1998년에 이르러서는 집회강사에 선임된 서목사님을 해임시키게 사건까지 더해지며 투쟁은 막바지로 치닫게 됩니다.
양성원장 재선임을 거부당하고 교회사 강의를 금지 당함으로 양성원 재산에서는 부산공회(2)측은 배제되었고 마지막으로 집회강사에 선임이 되었으나 해임이 되자 대구와 거창기도원 재산에서까지 부산공회(2)는 완전 축출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산공회 내에서도 현재 부산공회(1)에 해당되며 당시는 부산공회 집행부측에서 모든 총공회 재산을 강점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산공회(2)는 현재까지 만 5년에 걸쳐 집회장소 내부에서 투쟁을 벌이며 순순히 물러날 수 없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서영호목사님이 집회 강사에서 해임되었던 1998년부터 부산공회(2)측은 대구와 거창집회 장소에 집회기간 내내 삐라를 뿌리며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칠하고 부산공회(1)측을 비방하게 되고, 부산공회(1)측 신상만 최현수 김춘도목사님 등은 이를 색출하느라고 경비 검색조를 운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산공회(2)측의 주요 목회자들은 면밀하게 역할 분담을 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서목사님을 지지하는 청량리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앞장을 서면서 집회는 예배도중 강사난타로 이어질까 하여 강단에 철책을 세우는데까지 진행됩니다. 거창 경찰서는 종교계의 무력충돌 첩보를 입수하였다면서 서장이 집회장소에 직접 나와서 불상사가 없도록 요청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청량리교회에서는 부산공회 핵심 집행부 송목사님이 집회를 참석하는 기간에 서목사님측 교인들이 신축 예배당 4개층 내부를 차량스프레이로 반대구호를 전면 도색하고 예배실 커텐을 가위로 가로질러 다 잘라내며 설교강대상에 칼로 구호를 적어넣는 일이 발생됩니다. 크게 보면 부산공회(1)이 총공회 전체재산을 독식하는 데 대하여 부산공회(2)측은 끝까지 이권확보를 하겠다는 의사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양성원 재산을 두고도 1999년 3월 총공회 기간에 양측은 수백명씩 동원하여 양성원 유리문을 두고 대치하게 됩니다. 부산법원에서 구덕체육관으로 올라가는 부산 구도심 도로변에서 대낮에 계속된 일이었습니다. 총공회 분리개최를 꼭 양성원 건물 안에서 개최하겠다는 명분으로 부산공회(2)는 대로변 대치에 인원을 동원하고 교역자들이 전면 앞장을 섰고, 부산공회(1)은 한번 문을 열어주면 재산권 단독확보가 어렵고 양성원 뿐 아니라 총공회 재산 전체 관리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이를 철저하게 막게 됩니다.
부산공회(1)은 서부교회 내 지지교인들과 교역자들이 중심이 되고 육탄 공격을 하게 되고 부산공회(2)는 미리 건물안으로 들어와 있던 거창 및 남해 지방에서까지 동원된 교인들이 숙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북 웅크리고 있는 자세가 안쪽이 더 독했고 악했으므로 바깥에 있던 부산공회(2)는 그날 해산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해를 넘기면서 총공회와 교역자회가 있는 날은 반드시 그 양성원 대문 앞 대로가에서 예배를 드린다며 무력시위를 계속하게 됩니다. 현재는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임시 강의실을 얻어 아직도 그 장소를 노리고 있습니다.
⑤부산공회(1)의 재산관리 능력의 요동
현재 부산공회(1)은 부산공회(2)와 초기 대치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재산 장악력을 잃고 있습니다. 우선 1998-9년 계속되는 부산공회(2)의 도전을 물리치면서 훗날을 대비하여 재산권 확보를 확실히 하도록 총공회 재산을 총공회 명의가 아니라 개인 교역자 명의로 돌려놓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문제를 두고 부산공회(1) 내부의 김삼암목사님 계열에서 이재순목사님 계열의 제의를 거부하게 됩니다.
더구나 2000년 5월 대구집회 장소에서 발병된 장티푸스가 전국뉴스를 집중적으로 타게 되면서 부산공회(1)집행부는 2001년부터는 그동안 단독 운영관리했던 집회장소 관리문제를 외부에 일부 일임하게 됩니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부산공회(1)는 현재 교회의 숫자 교인의 활동 등을 볼 때는 어느 공회라도 이전 투쟁 때처럼 밀고 들어가면 재탈환을 할 수 있으나, 이제는 세상 무력법으로 점령하는 것은 모두들 진저리를 내고 있는 정도여서 기회를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현 총공회 재산이 어떤 형태로든지 총공회 내부에 있지 않고 교회 외부로 유출되는 문제입니다만, 그 시도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막고 나서면 몰라도 사람이 나서서 막기는 어렵게 되어 있으므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부산공회(2)도 2002년 5월집회부터는 그동안 입장에서 많이 후퇴를 하여, 이제 끝없는 재산싸움보다는 집회에서 말씀은혜를 받도록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시도가 있고 2-3곳으로 분산되어 여러 형태로 집회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대구공회는 5월은 경북 칠곡에서 8월은 덕유산에서 각각 수련원을 빌려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울공회는 5월과 8월 집회의 개념이 이미 실종되어 버린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렇다면 백목사님 사후 만 10년을 넘기며, 최종적으로는 부산공회(1)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라도 마지막 죽을 숨을 몰아쉬며 그 손끝에는 집회장소 등 총공회 재산관리권을 움켜쥐고 있다고 볼 수 있고, 타공회는 초기 탈환에 너무 힘을 소진하여 이제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 맞은 범처럼 멀리서 망원경으로 관망만 하고 잇다고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부산공회(3)은 10년 전부터 오늘같은 때가 올 수 밖에 없음을 보고 그때부터 오늘까지 조용히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총공회 신앙노선을 진정 지키려는 공회라면, 그 걸어갈 길은 바로 이런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