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교회의 향후 처리, 1990년 봄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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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서부교회의 향후 처리, 1990년 봄

담당 0 2
1990년 5월,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를 두고 교계화에 나서야 한다는 분들과 이전을 고수하자는 분들이 부딪혔고 많은 분쟁을 거친 다음 노선의 수정을 추구한 대구공회 교인들이 남정교회를 개척해서 나갔다. 태풍이 지나 가고 맑게 갠 하늘의 청명함에 그 홀가분함은 말할 수 없었다. 목사님의 생전 마지막과 그 사후의 분쟁 기간에 서부교회를 두고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은 4명 정도였다.

주교 총무, 중간반 부장, 행정실, 그리고 연구 부장이다. 연구소 소장은 직책상 최고위직처럼 예우를 했으나 실제 그럴 힘은 없었다. 그런데 연구부 부장이 먼 곳으로 목회를 나간 상태에서 서부교회의 내부와 공회의 전체 상황을 소상하게 연구부 부장에게 전해 줄 인물이 소장이었기 때문에 늘 서부교회의 향방을 두고 결정할 때 주교 총무, 중간반 부장, 연구소 소장을 적어 왔었다. 행정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훼방을 하려 들면 무슨 일에든 사회 기준으로 보면 불법과 부정이 많았기 때문에 할 일도 많았다.


남정교회가 나간 후 서부교회는 1990년의 봄을 정말 따뜻하고 희망 있게 누리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 다시 다가 올 다음 단계를 보며 일단 4명 중에 3명이 모여 행정실까지 모시고 밖에서 따로 만났다. 이런 식의 모임은 공회에서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안이 중요했다. 3명은 서부교회의 기존 방향을 고수할 때 앞에 섰다. 1명은 서부교회를 크게 바꿔야 한다며 앞에 섰기 때문에 모두가 남정교회 개척에 1등 공신으로 나갈 줄 알았다. 판세가 처음에는 남정교회로 개척 나갈 분들이 서부교회를 주도할 줄 알았는데 막상 부딪혀 보니 고수 측이 80% 정도고 변경하자는 측이 20%에 그쳤다. 남정교회가 나갈 때 고수 측은 행정실을 어떻게 할지 무척 고민을 했다. 활동은 남정 측의 중심에 섰었다. 성향도 그렇다. 그러나 남정교회가 개척하는 순간 판세가 나오자 행정실은 당연히 그대로 있고 싶어 했다. 모두가 자기 발로 나가면 몰라도 나뉘는 이 순간에라도 남겠다고 말한 이상 밀어 낼 수는 없다고 뜻을 모았다. 이런 것을 공회라 하고 서부교회라 하고 이런 것을 백영희 신앙 노선이라 한다. 성향으로 볼 때 목사님 생전에도 엉뚱한 모습을 보였고 목사님 사후에는 앞장 서서 남정교회 측에 나섰으니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지만 끝까지 잡을 수 있다면 잡는 것이 이 노선이다. 부공2! 이런 사실을 아시는가? 현재 부공2의 거의 전부가 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 이 3인이 배제했으면 현재 부공2의 우두머리부터 저 밑에 까지 부산공회에 발을 딛기 어려운 인물들이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잡아 줄 유다까지 마지막 만찬에 불러 놓았고 발을 씻기시고 떡까지 먹여 주셨다.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할 유다를 알면서도 그가 오지 않으면 그냥 두지만 예수님으로서는 그를 불렀다. 발을 빼고 도망을 간다면 놔 두겠지만 예수님의 동태를 끝까지 살피려고 발까지 내밀고 암약하는 유다의 내면을 알면서도 그 발을 씻겼다. 말씀이 그렇기 때문에 주님도 또 손양원도 그리고 이 노선의 백영희도 그를 팔 자인 줄 알면서도 교수직에 앉혔고 그의 목회 실력으로는 그렇지 않은 줄 알지만 그를 고칠 수 있도록 청량리로 배려를 했다. 개명교회와 청량리교회는 총공회의 중환자실이다. 부공2,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순간 모두가 안다. 그 전까지는 그냥 살아 왔다.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 안에서 서부교회를 통째로 완전히 다 바꿔 버리자는 반란이 일어 날 때 행정실은 그들의 상황실이 되었다. 그리고 서부교회를 그대로 지키자는 이들은 서부교회의 상황실을 내준 상태에서 대처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목회 연구소 2층이 임시 상황실이 되었다. 서부교회가 부산공회로 서기 위한 주소지는 정확하게 표시하면 목회연구소 2층 소장실이었다. 이 곳에 제한 없이 출입한 이들이 장영목 주교 총무, 중간반 백명희 부장, 그리고 원래 이 곳의 주인은 소장과 연구 부장이었다. 이 곳을 막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대구공회측은 연구소의 주도권을 변경하기 위해 연구소의 운영위원장 직을 움직였다. 대구공회의 핵심 이재순 목사님이 연구소 운영위원장이었으니 하고 싶은 일을 다할 수가 있다. 이 이야기는 서부교회의 목사님 사후 분규가 시작 되기 직전에 먼저 진행 된 일이다. 연구소에서도 아마 처음 글을 적는 듯하다.

일단 사실은 알고, 일단 역사의 흐름을 알고, 그리고 나서 떠들어야 하지 않을까? 임진왜란에 강감찬이 공을 세웠으니 북쪽 평양에 기반을 둔 고구려 세력이 오늘의 한반도를 주도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면 너무 우습지 않을가? 5천만을 그렇게 세뇌 시켜 놓아도 바위 위를 잠깐 덮은 눈과 같아서 돌아 서면 속에 든 것이 나온다. 부공2를 추종하는 이들, 앞에 선 이들, 모여서 웅성거리는 이들에게 그들이 밟고 그들이 내세우는 부산공회의 본산의 발바닥 밑이 눈인지 바위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세상도
교계도
공회도
자기의 역사 이전을 사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된다. 불신자들은 사상누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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