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시무투표로 망한 - 서부교회의 당시 구조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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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30 08:52
(서부교회사)
이 사이트의 초기화면/자료/출간목록 '총공회 노선소개'를 읽어 보시면 백영희와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역사와 전반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윗글 15807번 - 25.5.28의 댓글에 올린 질문)
* '잘 모르던 과거 서부교회사의 일면을 소상히 보게 되며'
공회와 서부교회는 목사님 생전부터 신앙의 노선 정립 때문에 내부적으로 이견이 이어졌고 1989년 돌아 가시기 전에 목사님은 일반 예배와 교역자회나 양성원에서 설교를 통해 입장을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이 곳의 '/자료/출간목록'을 통해 어느 정도 대략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녹음 동영상과 문서로 기록된 내용이 충분하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1989년 안팎의 분쟁 시기에 인터넷이 없어 양론이 맞섰지만 1998년 인터넷의 생활화에 따라 이 곳에서 모든 기록을 전면 공개하자 이 곳의 지난 날 소개가 모두 옳았고 그 반대편은 오늘까지 27년간 침묵 중입니다. 이 곳과 당시 맞섰던 곳은 사이트를 개방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이 곳과 과거 사실을 놓고 맞선 내용은 아예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 곳의 글은 일단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되, 질문이 있으면 항상 안내를 드리고 있고 또 저희가 잘못 알았던 것을 지적해 주시면 공개적으로 수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거의 없다 할 정도였습니다. 공회와 백영희, 그리고 서부교회에 대하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 곳의 출간물이나 소개를 먼저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 '당시 문제들에 대한 그 실효적 해결의 역할이'
1989.8.27. 설교 도중에 목사님이 피습에 의하여 돌아가시게 되자 어떤 준비도 없던 교회는 순식간에 암흑에 휩싸입니다. 평소 법과 체계로 운영되는 교회는 지도자가 갑자기 없어 져도 법과 체계가 어느 정도 잡아 주지만 서부교회는 법이 없고 체계가 없습니다. 만사를 목사님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며 맨손에서 세계 10대 교회를 형성했던 상태입니다.
일반 세상과 교계가 볼 때는 서부교회에 '헌법' 또는 '교회 규정'이 없고 또 그 법에 따른 조직과 운영 기준과 책임 분담이 명시 되지 않아서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은 성경을 법으로 삼았고 성경으로 교회를 평생 운영해 왔으니 그 운영의 흐름, 역사, 처리의 선례를 참고하여 새로운 문제를 처리한다는 불문 관습법을 가르쳐 놓았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법과 제도는 없으나 1989년 8월까지 목사님이 해오신 그 흐름이 목사님이 없어진 서부교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타 교단은 흐름이나 사상은 이론이고 법 규정에 따라 담임 목사의 유고 시에는 누가 대신하며 어떻게 후임을 선출하고 어떤 문제를 어떻게 결정한다고 세세하게 적어 놓아서 모두가 알 수 있으나, 서부교회는 모두가 아는 예배 시간을 출석했고 주일학생은 반사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고 일반 교인은 구역의 지도를 받아 신앙에만 매진했습니다. 바로 이런 흐름, 당시의 그 분위기가 목사님이 갑자기 없어진 상태에서 만사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는 돌아 가셨으니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담임이 없어 졌으니 '후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 2 가지가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5일 동안 장례는 완벽하게 끝났고 후임도 전원일치로 결정하여 기침 소리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한 달을 은혜롭게 잘 진행되자 이후부터 온갖 이의가 쏟아 졌습니다. 강력하게 반대한 분들이 1990년 5월에 개척하고 나감으로 '당시 문제'들은 종료 되었고 이 과정에 '실효적 해결'은 4명의 서부교회 실무자들이 처리했습니다.
* ‘30대 4명과 연구부장’
목사님은 평생 만사를 성경으로 그리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결정했습니다. 남이 믿든 말든 그 것은 그들의 자유고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항상 옳았기 때문에 그 어떤 기술이나 방법이나 정치를 하지 않고 설교와 심방만으로 서부교회를 규모로는 세계 10대로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꿈에서는 가능하다는 상태를 실현 시켰습니다. 한번 결정을 하면 당연히 그대로 실행을 하는데 최대한 담당자를 통해서 집행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이 맡긴 사람은 실수도 많고 부족하기는 하나 목사님을 대신 했고 그 사람은 목사님이 책임을 졌습니다.
1989년 8월에 가실 때 기준으로 목사님은 서부교회의 일반 행정은 지금도 서부교회의 현직에 그대로 계신 이탁원 당시 39세를 통해 집행했습니다. 이 분의 역할은 교회 전체의 서기 정도였습니다. 이 분은 목사님 사후 외부로는 중립처럼 자세를 취했으나 당시의 중립이란 4명의 실무자들과 맞섰다는 뜻이고 모두가 1990년에 개척해서 나가게 되는 쪽으로 간다고 봤을 정도였습니다.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의 장례와 후임 결정과 만사를 결정한 '30대 4명'은
첫째, 주일학교 장영목 총무였습니다.
경남 거창군 마리면 출신으로 1954년생이며 부산에서 불신자로 살다가 20대가 되어서 처음 출석을 했으나 믿는 순간부터 특별한 분으로 모두가 주목했고 주일 오전 8시 30분의 주일학교 예배에 자기 반 하나에 340여명의 학생을 앉히는 최대 기록을 남깁니다. 이런 충성과 실력을 인정하여 목사님은 1982년에 주일학교 600개 반과 1천명의 반사와 보조 반사 전체를 혼자 지휘하는 총무에 임명합니다. 서부교회의 1980년대 10년을 걸쳐 최대 조직의 최고 실무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 내에 움직일 수 있는 분은 모두 그 분의 지도 하에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주일학교에 관한 모든 결정은 목사님이 하지만 총무 1인을 통해서만 내려 옵니다. 그러니 일반 반사와 보조반사 1천명은 그 분을 백 목사님 상대하듯 순종했고 일반 예배 외의 활동은 주교 활동이 기본이고 거의 전부라 할 정도의 당시 분위기로 보면 누가 봐도 교회 내에서 백 목사님 다음 가는 2인자로 보였습니다. 신앙도 실력도 그리고 만사를 목사님께 여쭙고 지도를 받고 지시를 집행하다 보니 영향력은 아주 대단했습니다.
둘째, 중간반 백명희 부장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막내 자녀이며 목사님이 1952년 서부교회 부임한 다음 해 1953년에 태어났으니 서부교회생입니다. 1976년에 결혼했고 1978년에 주일학교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중학생으로 쏟아지게 되자 중고등학생을 중간반으로 만들고 서영준 남편과 함께 부부가 부장으로 매주 2천명을 출석시키게 됩니다. 주교 600명 반사 중 부부 중심으로 35명 정도를 타 교회 전도사 부부처럼 교회 전임자로 묶어 인솔을 했습니다. 1982년에 목사님이 돌아가실 정도의 위기 때 서부교회 후계자로 지명했던 분인데 1983년에 목회를 나가 청주와 부산의 광안동교회를 거쳤고 1987년에 서 목사님이 사고로 돌아 가시게 되자 서부교회로 돌아 왔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5월에 목사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기존 중간반을 개편하여 당장에는 중간반을 그리고 목사님 사후에 서부교회를 목사님 생전처럼 지켜 낼 수 있는 교회의 중추 세력이자 대안으로, 그리고 앞 날의 소망으로 삼았으며 그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여반 책임자는 백명희 부장으로 임명하자 여반 책임자는 남반 책임자로 연구 부장으로 추진을 했으나 목사님은 연구 부장은 목사님 사후 이 노선의 정립과 전달의 별도 책임이 있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세째, 특수반 이치영 부장이었습니다.
1960년생으로 막 30세에 이르렀고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창동교회 출신으로 조부모가 백 목사님의 첫 신앙을 따랐던 공회 출발 가정 출신입니다. 10대 후반에 서부교회로 왔고 1983년 훗날 목회연구소가 되는 서부교회 편집실 직원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설교록 거의 전부는 이 분이 실무적으로 출간했다 할 정도이며 1982년 중간반을 이끌던 서영준 백명희 부부가 목회를 나간 뒤 중간반 조직이 공무원화가 되었고 35명 정도의 전도사 전체를 연차적으로 없애며 그들의 모든 역할을 대신할 부서로 특수반을 만들었으며 1986년에 연구 부장이 유학 후 귀국하면 이 자리를 맡기려 하다가 이치영 부장을 임시로 몇 달 대신하는 과정에 적임자로 인정을 받아 그대로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특수반 부장 부부가 35명 정도의 유급 전임 중간반사들의 모든 업무를 대신하던 과정에 1989년 5월 중간반이 목사님 사후 체제로 바뀌게 되자 특수반 업무를 끝내고 연구소 편집 책임자로 가려던 순간 목사님이 돌아 가셨고, 이 애매한 시기에 특수반 부장으로서 또 이미 교회의 조사로 인준 되어 교회의 교역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 특수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 해도 주교 총무나 중간반 부장에 비해서는 역할이 감소 되어 있었습니다.
네째, 연구소 이민영 소장이었습니다.
1957년생으로 공회의 당시 원로 이진헌 목사님의 아들이며 1982년 목회연구소의 전신인 편집실이 시작할 때 직원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일체를 녹음하고 녹음 자료를 보관 관리하며 책으로 출간하는 편집실 직원 15여명을 맡은 사무 내근직이었으나, 총공회와 서부교회의 생명은 백영희 설교였고 그 자료가 법이고 기준이며 지향이며 만사 판단의 자료였는데 이를 평소 출간했고 아직 미출간 자료가 훨씬 많은 상태라는 점, 그리고 서부교인들의 대부분은 목사님의 교훈이 생명인 줄 알다 보니 연구소 소장은 서부교회의 외부 조직으로 편제가 되어 있었음에도 서부교회 내부의 핵심 실무자로 근무했습니다. 총공회 모든 목회자들에게는 수도꼭지와도 같았고 서부교회의 신앙 있는 핵심들에게는 항상 귀와 같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수반 부장과 함께 매주 월요일 아침에 백 목사님의 개인 서재에 직접 앉아서 교회의 각 업무를 함께 듣고 파악하고 결재를 받는 고정 인원 5인 중 1인이므로 누가 봐도 서부교회의 핵심 실무자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가신 후 모든 것을 목사님 없이 결재를 하려면 과거 자료가 중요하다 보니 연구소 소장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실무자가 되었습니다.
* '당시 이 분들이 문제 해결의 전면에 나서게 된 그 상응적 동기'
서부교회는 백 목사님 1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데 각 실무 부서를 통해 지시가 내려 가기 때문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 4명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면 그 역할은 목사님 계실 때처럼 여겨 집니다. 그러니 장례와 장례 후 교회의 만사는 이 분들이 더 이상 목사님께 지시를 받지 않으나 늘 받아 왔기 때문에 받아 온 그대로 판단하고 집행한다고 여겨 졌습니다. 목사님은 가셨으나 4명의 실무를 통해 목사님은 여전히 계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일 새벽에 피습 받고 돌아 가신 목사님의 장례와 이후 후임 결정까지 숨가쁘게 진행된 만사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 만큼 조용히, 은혜롭게, 모든 교인과 전국 총공회가 목사님 생전처럼 유지 될 수 있었습니다.
* '여전 오늘날 서부교회에 속해 있으신지'
목사님 가신 후 반대측이 1990년 5월에 개척을 나가고 1991년에 목사님 생전에 가장 목사님을 반대한 분이 후임으로 오게 되자 이들 중에 중간반 백명희 부장은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를 부탁 받았기 때문에 2013년에 돌아 가실 때까지 서부교회 내 4층을 근거로 삼고 투쟁하셨고, 주교 총무와 특수반 부장과 연구소 소장 3인은 서부교회에 대한 역할은 1990년으로 그치고 각자 개척을 해서 서부교회 교권을 두고 내부에서 투쟁하지 않고 새로 개척을 하여 그 개척이 서부교회의 원래 모습이 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차례로 나가게 됩니다. 이는 목사님 생전에 부산 시내 30여 곳에 분교를 마련했고 목사님 사후에 서부교회 후임에 문제가 되거나 또는 서부교회의 구심력이 부족할게 될 때 자연스럽게 30개 교회가 주변에서 또는 함께 협력하여 그 전체가 생전의 서부교회 역할을 맡으라고 했으니 그 임무 그 정신에 따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교 장영목 총무도 2015년 62세로 별세했고, 이민영 연구소 소장은 1998년에 소장직을 그만 두고 지금은 교계에서 일반 목회자로 활동 중이며 공회와의 연관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4명은 현재 서부교회에 없습니다.
1991년 1월에 서부교회 후임이 올 때 3명은 서부교회는 향후 역사의 애양원교회나 산정현교회나 아현교회처럼 보이는 의미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교 총무는 개척을 나간 후 다시 서부교회로 돌아 오려고 한 적이 있었고 연구소 소장은 교계로 편입이 되었다는 점에서 현재 특수반 이치영 현재 목사님이 범일동에서 생전의 서부교회를 이어 간다는 자세로 120여 명의 장년반 규모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부산에서 이 동천교회만 작은 서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 '당시 서부교회에서 위임한 그 대표성'
장례와 후임 결정에 그 많은 교인이 단 하나도 반대가 없고 이의가 없었다는 것이 교회가 위임한 대표성입니다. 명문법은 내용이 엉망이라도 형식만 갖추면 대표성이 있지만, 불문법은 내용이 문제고 흐름이 문제입니다. 목사님의 장례는 유가족 7인의 사상이 다 다르고, 서부교회 내부의 향후를 봐서 알겠지만 이해 관계가 첨예하며, 총공회의 본부라는 점에서 전국 100개 교회와 목회자 전부가 직간접으로 이해관계는 물론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지만 훗날의 반대파까지도 장례를 극찬했습니다. 후임 결정도 질문 하나도 없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4명의 서부교회 실무들은 연구부장을 전적 따랐고'
서부교회를 움직이는 주교 중간반 특수반 연구소의 실무 총책임자들은 자기 업무에 관해서는 모두가 전문가였고 다른 사람이 대체를 할 수 없는 대규모 조직과 복잡한 업무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부교회와 공회의 역사와 자료 파악을 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먼저 말할 정도는 아니었고 연구 부장이 설명을 하면 옳은지 아닌지 들었던 것인지 아닌지는 바로 파악을 하는 분들입니다. 이 것이 서부교회 실무 부서 책임자들의 특징입니다. 목사님이 판단하고 지시하면 가장 빠르게 가장 효과적으로 결과를 만들어 놓는 이들이 부서 책임자들입니다. 그렇게 실력을 쌓아 왔고 그래서 당시 그 자리에 있다가 목사님의 갑작스런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모두가 연구 부장에게 물어 봤고 연구 부장은 자기의 주관이나 희망 사항이나 개인 취향이 아니라 목사님이 언제 어떤 사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또 이런 일을 두고 언제 무슨 말씀을 미리 했는지만 말을 했고 1980년대 10여 년을 계속해서 목사님을 가장 가깝게 접하며 자기 업무를 직접 지도 받아 온 이들은 연구 부장이 말을 하면 바로 기억했고 바로 알아 들었고 바로 동감을 했습니다.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린 것입니다.
목사님 계시던 평소에는 목사님이 4명의 실무자들에게 직접 지시하고 그들은 직접 질문을 했고 연구 부장은 그 자리에 동석해서 함께 들었을 뿐이고 연구 부장은 자기의 연구 분야를 질문하고 지도를 받았을 뿐인데 목사님이 가시고 나자 이제는 목사님 계셨다면! 이 전제로 알아서 판단해야 할 상황이 되자 직책상 자연스럽게 연구 부장이 가장 잘 알고 그러니 입장을 개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구 부장이 목사님을 대신 하는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 내 반대측과 총공회의 반대측은 현장에서는 4인과의 투쟁을 했지만 그 배후를 연구 부장으로 삼고 가장 극단적인 공격을 하게 됩니다.
* ‘일반 주요 결정의 제일 중심에 있다고 보는 권찰회와 장로 및 권사직분에 서신 분들'
서부교회의 업무 계통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나 서부교회 구성 자체는 구역 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말출 김현찬 김효순 나인숙 4명의 권사님이 권사라는 칭호와 상관 없이 이 분들이 서부교회의 교인 대부분이 소속한 구역의 구역장인데, 타 교단의 구역장은 그 지역을 맡은 임명직이라면 서부교회의 구역장은 자기가 전도하고 자기가 심방해서 자기를 따르는 신앙의 직계 식구를 맡게 됩니다. 지역은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구역장은 서부교회 내에 별도의 작은 교회처럼 되어 있습니다. 4개 구역의 구역장은 그 규모로도 서부교회 교인 대부분이 소속을 두고 있지만 이들 교인이 목회를 나가 전국의 총공회 주요 목회자들이 되어 있었고, 또 이 4명의 구역장님들은 서부교회가 목사님을 모시고 처음 자리를 잡던 1950년대 고신 교단에 소속했을 때 고신 교단에서도 손꼽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연륜이 높고 교계적으로도 명망이 확실하며 총공회적으로도 중요한 목사님들이 그 구역 교인 출신인데다가 서부교회 교인의 다수가 직접 식구로 소속이 되어 있으니 이 4명이 결정하면 바로 서부교회의 결정이 됩니다. 업무적으로는 30대 4명의 실무자가 실세들이고, 교회의 구조적 인적 편제적으로는 70대였던 이 분들이 실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별세 직전까지 이 4명의 권사님들이 4명의 실무자들을 통해 목사님이 만사를 결정하고 지시하고 또 이 4명이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는 줄을 잘 알고 있었으니 4명의 실무자들이 목사님 사후 장례와 만사를 결정할 때 '장례의 방향은 이렇게' '장례의 비용은 저렇게' '장례의 예배와 순서와 조직은 이렇게'라고 말씀을 드리면 '잘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해.' '중요한 일은 우리가 들어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설명을 해 줄 수 있기는 하지' 라고 대화로 만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4명의 권사님들은 장례 전부와 후임 결정에 이르기까지 무슨 결정이든 실무 4명이 말을 하면 무조건 동의하셨고, 예상 되는 반대측의 질문이나 이의가 들어 오면 개인적으로 할 말이 없도록 미리 장악해 줌으로 만사가 순조로웠습니다. 연구 부장은 실무 4명과도 긴밀히 한 몸으로 움직였지만 또 4명의 권사님들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해결해 왔습니다. 권사 4명도 연구 부장의 판단과 결정이면 목사님의 뜻 그대로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의 경우 16명이었는데 훗날 과거를 고수하겠다고 확실하게 선 분은 4명 정도지만 모두가 권사님들에게 확실히 순종하는 분들이어서 문제가 없었고 나머지 12명의 장로님들은 스스로 장로회의 4분의 3을 장악하고 있으니 때가 되면 자기들이 목사님 사후의 교회를 장악한다고 자신을 했으나, 서부교회는 장로회라는 것도 없고 장로들만이 모여서 결정해 본 역사도 없고 그럴 수도 없게 되어 있어서 목사님 생전을 틀렸다고 깨고 나서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장례와 후임 결정 때까지는 장로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침묵하고 순종을 했으나 후임이 온 뒤 한 달이 지나면서 왜 설교를 하지 않고 재독을 하느냐, 그런데 후임을 결정할 때 누가 결정을 했느냐, 이제는 서부교회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등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는 총공회적으로 과거를 부정하고 교계화를 주장하는 분들이 서부교회 내부에 정보를 주고 부탁을 하게 되면서 일어 난 일입니다.
*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 서울공회는 당시 교계로 편입하자는 극단적인 분들인데 작전상 초기에는 자기들이 목사님 생전을 더 잘 유지 시킨다고 했고
현재 대구공회는 서울공회를 순수하게 생각하고 따르다가 속은 것을 알고 돌아 섰으나 아주 돌아 서지는 않고 어중간하게 계시고
현재 부산공회1은 서부교회 내 중간반 백명희 부장 선생님을 따라 출발을 했다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몰라서 정전된 기계와 같고
현재 부산공회2는 대구공회가 되거나 부공1처럼 될 분들이 함께 모여 '서부교회' 2층을 장악한 곳을 무조건 따른다는 정신이 되었고
현재 부산공회3은 연구소의 모습이 전부입니다.
* 연구 부장은
서부교회든 전국의 공회 누구든 조금 알 만한 분에게 물어 보면 아주 나쁜 인간이며 잘 나가던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깬 원수라고 하거나, 어린 것이 설치는 바람에 서부교회와 공회가 어지럽게 되었다고 하거나, 말은 대부분 맞는데 건방져서 문제라거나, 꿈도 꾸지 못할 것이 서부교회를 도모하다 어느 시골에 있는데 항상 거짓말만 하고 교회와 복음운동을 깨기만 하니 그 말을 듣지 말고 사이트를 들어 가지도 말라고 하든지 아마 그럴 듯합니다.
평생에 이름을 외부에 전하지 않은 것은 해야 할 말이 중요한데 이름을 내걸면 가장 가까운 동지들까지도 결국 네가 높아 지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직접 말을 할 만큼 그런 사연이 많아서 불가피하지 않으면 이름을 적지 않고 왔습니다. 목사님 사후 공회의 첫 연구 출간서가 되는 '총공회 약사'를 비롯하여 당시 교계의 단행본 베스트셀러 소리를 들은 '서부교회 주일학교' 1991년 기독지혜사의 책들이 모두 무명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연구 부장의 글입니다. 또 1989년 1월 목사님 생전의 마지막 서부교회 사경회 강사이기도 했고 1층 주일학교 부장이기도했습니다.
이 곳은 연구 부장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모인 곳이어서 이 곳의 글은 누구의 글이든 연구 부장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연구 부장의 실명만은 최대한 아끼는 편입니다. 이 곳 외에 누구에게든지 물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평양에서 제일 욕하는 남한 인물은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평양에서 남한에 제일 극찬하는 애국자는 가장 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한의 애국자가 궁금하거나 그 애국자의 신상과 내용을 정말 알고 싶으면 평양에 물어 보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공회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질문하신 분이 서부교회 내에 계시는 듯해서 양해를 구합니다.
이 사이트의 초기화면/자료/출간목록 '총공회 노선소개'를 읽어 보시면 백영희와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역사와 전반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윗글 15807번 - 25.5.28의 댓글에 올린 질문)
* '잘 모르던 과거 서부교회사의 일면을 소상히 보게 되며'
공회와 서부교회는 목사님 생전부터 신앙의 노선 정립 때문에 내부적으로 이견이 이어졌고 1989년 돌아 가시기 전에 목사님은 일반 예배와 교역자회나 양성원에서 설교를 통해 입장을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이 곳의 '/자료/출간목록'을 통해 어느 정도 대략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녹음 동영상과 문서로 기록된 내용이 충분하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1989년 안팎의 분쟁 시기에 인터넷이 없어 양론이 맞섰지만 1998년 인터넷의 생활화에 따라 이 곳에서 모든 기록을 전면 공개하자 이 곳의 지난 날 소개가 모두 옳았고 그 반대편은 오늘까지 27년간 침묵 중입니다. 이 곳과 당시 맞섰던 곳은 사이트를 개방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이 곳과 과거 사실을 놓고 맞선 내용은 아예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 곳의 글은 일단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되, 질문이 있으면 항상 안내를 드리고 있고 또 저희가 잘못 알았던 것을 지적해 주시면 공개적으로 수정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거의 없다 할 정도였습니다. 공회와 백영희, 그리고 서부교회에 대하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 곳의 출간물이나 소개를 먼저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 '당시 문제들에 대한 그 실효적 해결의 역할이'
1989.8.27. 설교 도중에 목사님이 피습에 의하여 돌아가시게 되자 어떤 준비도 없던 교회는 순식간에 암흑에 휩싸입니다. 평소 법과 체계로 운영되는 교회는 지도자가 갑자기 없어 져도 법과 체계가 어느 정도 잡아 주지만 서부교회는 법이 없고 체계가 없습니다. 만사를 목사님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며 맨손에서 세계 10대 교회를 형성했던 상태입니다.
일반 세상과 교계가 볼 때는 서부교회에 '헌법' 또는 '교회 규정'이 없고 또 그 법에 따른 조직과 운영 기준과 책임 분담이 명시 되지 않아서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은 성경을 법으로 삼았고 성경으로 교회를 평생 운영해 왔으니 그 운영의 흐름, 역사, 처리의 선례를 참고하여 새로운 문제를 처리한다는 불문 관습법을 가르쳐 놓았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법과 제도는 없으나 1989년 8월까지 목사님이 해오신 그 흐름이 목사님이 없어진 서부교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타 교단은 흐름이나 사상은 이론이고 법 규정에 따라 담임 목사의 유고 시에는 누가 대신하며 어떻게 후임을 선출하고 어떤 문제를 어떻게 결정한다고 세세하게 적어 놓아서 모두가 알 수 있으나, 서부교회는 모두가 아는 예배 시간을 출석했고 주일학생은 반사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고 일반 교인은 구역의 지도를 받아 신앙에만 매진했습니다. 바로 이런 흐름, 당시의 그 분위기가 목사님이 갑자기 없어진 상태에서 만사를 결정했습니다. 첫째는 돌아 가셨으니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 담임이 없어 졌으니 '후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 2 가지가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5일 동안 장례는 완벽하게 끝났고 후임도 전원일치로 결정하여 기침 소리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한 달을 은혜롭게 잘 진행되자 이후부터 온갖 이의가 쏟아 졌습니다. 강력하게 반대한 분들이 1990년 5월에 개척하고 나감으로 '당시 문제'들은 종료 되었고 이 과정에 '실효적 해결'은 4명의 서부교회 실무자들이 처리했습니다.
* ‘30대 4명과 연구부장’
목사님은 평생 만사를 성경으로 그리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결정했습니다. 남이 믿든 말든 그 것은 그들의 자유고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항상 옳았기 때문에 그 어떤 기술이나 방법이나 정치를 하지 않고 설교와 심방만으로 서부교회를 규모로는 세계 10대로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꿈에서는 가능하다는 상태를 실현 시켰습니다. 한번 결정을 하면 당연히 그대로 실행을 하는데 최대한 담당자를 통해서 집행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이 맡긴 사람은 실수도 많고 부족하기는 하나 목사님을 대신 했고 그 사람은 목사님이 책임을 졌습니다.
1989년 8월에 가실 때 기준으로 목사님은 서부교회의 일반 행정은 지금도 서부교회의 현직에 그대로 계신 이탁원 당시 39세를 통해 집행했습니다. 이 분의 역할은 교회 전체의 서기 정도였습니다. 이 분은 목사님 사후 외부로는 중립처럼 자세를 취했으나 당시의 중립이란 4명의 실무자들과 맞섰다는 뜻이고 모두가 1990년에 개척해서 나가게 되는 쪽으로 간다고 봤을 정도였습니다.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의 장례와 후임 결정과 만사를 결정한 '30대 4명'은
첫째, 주일학교 장영목 총무였습니다.
경남 거창군 마리면 출신으로 1954년생이며 부산에서 불신자로 살다가 20대가 되어서 처음 출석을 했으나 믿는 순간부터 특별한 분으로 모두가 주목했고 주일 오전 8시 30분의 주일학교 예배에 자기 반 하나에 340여명의 학생을 앉히는 최대 기록을 남깁니다. 이런 충성과 실력을 인정하여 목사님은 1982년에 주일학교 600개 반과 1천명의 반사와 보조 반사 전체를 혼자 지휘하는 총무에 임명합니다. 서부교회의 1980년대 10년을 걸쳐 최대 조직의 최고 실무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 내에 움직일 수 있는 분은 모두 그 분의 지도 하에 있다 할 정도였습니다. 주일학교에 관한 모든 결정은 목사님이 하지만 총무 1인을 통해서만 내려 옵니다. 그러니 일반 반사와 보조반사 1천명은 그 분을 백 목사님 상대하듯 순종했고 일반 예배 외의 활동은 주교 활동이 기본이고 거의 전부라 할 정도의 당시 분위기로 보면 누가 봐도 교회 내에서 백 목사님 다음 가는 2인자로 보였습니다. 신앙도 실력도 그리고 만사를 목사님께 여쭙고 지도를 받고 지시를 집행하다 보니 영향력은 아주 대단했습니다.
둘째, 중간반 백명희 부장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막내 자녀이며 목사님이 1952년 서부교회 부임한 다음 해 1953년에 태어났으니 서부교회생입니다. 1976년에 결혼했고 1978년에 주일학교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이 중학생으로 쏟아지게 되자 중고등학생을 중간반으로 만들고 서영준 남편과 함께 부부가 부장으로 매주 2천명을 출석시키게 됩니다. 주교 600명 반사 중 부부 중심으로 35명 정도를 타 교회 전도사 부부처럼 교회 전임자로 묶어 인솔을 했습니다. 1982년에 목사님이 돌아가실 정도의 위기 때 서부교회 후계자로 지명했던 분인데 1983년에 목회를 나가 청주와 부산의 광안동교회를 거쳤고 1987년에 서 목사님이 사고로 돌아 가시게 되자 서부교회로 돌아 왔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5월에 목사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기존 중간반을 개편하여 당장에는 중간반을 그리고 목사님 사후에 서부교회를 목사님 생전처럼 지켜 낼 수 있는 교회의 중추 세력이자 대안으로, 그리고 앞 날의 소망으로 삼았으며 그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여반 책임자는 백명희 부장으로 임명하자 여반 책임자는 남반 책임자로 연구 부장으로 추진을 했으나 목사님은 연구 부장은 목사님 사후 이 노선의 정립과 전달의 별도 책임이 있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세째, 특수반 이치영 부장이었습니다.
1960년생으로 막 30세에 이르렀고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창동교회 출신으로 조부모가 백 목사님의 첫 신앙을 따랐던 공회 출발 가정 출신입니다. 10대 후반에 서부교회로 왔고 1983년 훗날 목회연구소가 되는 서부교회 편집실 직원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의 설교록 거의 전부는 이 분이 실무적으로 출간했다 할 정도이며 1982년 중간반을 이끌던 서영준 백명희 부부가 목회를 나간 뒤 중간반 조직이 공무원화가 되었고 35명 정도의 전도사 전체를 연차적으로 없애며 그들의 모든 역할을 대신할 부서로 특수반을 만들었으며 1986년에 연구 부장이 유학 후 귀국하면 이 자리를 맡기려 하다가 이치영 부장을 임시로 몇 달 대신하는 과정에 적임자로 인정을 받아 그대로 직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특수반 부장 부부가 35명 정도의 유급 전임 중간반사들의 모든 업무를 대신하던 과정에 1989년 5월 중간반이 목사님 사후 체제로 바뀌게 되자 특수반 업무를 끝내고 연구소 편집 책임자로 가려던 순간 목사님이 돌아 가셨고, 이 애매한 시기에 특수반 부장으로서 또 이미 교회의 조사로 인준 되어 교회의 교역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 특수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 해도 주교 총무나 중간반 부장에 비해서는 역할이 감소 되어 있었습니다.
네째, 연구소 이민영 소장이었습니다.
1957년생으로 공회의 당시 원로 이진헌 목사님의 아들이며 1982년 목회연구소의 전신인 편집실이 시작할 때 직원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일체를 녹음하고 녹음 자료를 보관 관리하며 책으로 출간하는 편집실 직원 15여명을 맡은 사무 내근직이었으나, 총공회와 서부교회의 생명은 백영희 설교였고 그 자료가 법이고 기준이며 지향이며 만사 판단의 자료였는데 이를 평소 출간했고 아직 미출간 자료가 훨씬 많은 상태라는 점, 그리고 서부교인들의 대부분은 목사님의 교훈이 생명인 줄 알다 보니 연구소 소장은 서부교회의 외부 조직으로 편제가 되어 있었음에도 서부교회 내부의 핵심 실무자로 근무했습니다. 총공회 모든 목회자들에게는 수도꼭지와도 같았고 서부교회의 신앙 있는 핵심들에게는 항상 귀와 같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특수반 부장과 함께 매주 월요일 아침에 백 목사님의 개인 서재에 직접 앉아서 교회의 각 업무를 함께 듣고 파악하고 결재를 받는 고정 인원 5인 중 1인이므로 누가 봐도 서부교회의 핵심 실무자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가신 후 모든 것을 목사님 없이 결재를 하려면 과거 자료가 중요하다 보니 연구소 소장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실무자가 되었습니다.
* '당시 이 분들이 문제 해결의 전면에 나서게 된 그 상응적 동기'
서부교회는 백 목사님 1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데 각 실무 부서를 통해 지시가 내려 가기 때문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 4명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면 그 역할은 목사님 계실 때처럼 여겨 집니다. 그러니 장례와 장례 후 교회의 만사는 이 분들이 더 이상 목사님께 지시를 받지 않으나 늘 받아 왔기 때문에 받아 온 그대로 판단하고 집행한다고 여겨 졌습니다. 목사님은 가셨으나 4명의 실무를 통해 목사님은 여전히 계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일 새벽에 피습 받고 돌아 가신 목사님의 장례와 이후 후임 결정까지 숨가쁘게 진행된 만사에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 만큼 조용히, 은혜롭게, 모든 교인과 전국 총공회가 목사님 생전처럼 유지 될 수 있었습니다.
* '여전 오늘날 서부교회에 속해 있으신지'
목사님 가신 후 반대측이 1990년 5월에 개척을 나가고 1991년에 목사님 생전에 가장 목사님을 반대한 분이 후임으로 오게 되자 이들 중에 중간반 백명희 부장은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를 부탁 받았기 때문에 2013년에 돌아 가실 때까지 서부교회 내 4층을 근거로 삼고 투쟁하셨고, 주교 총무와 특수반 부장과 연구소 소장 3인은 서부교회에 대한 역할은 1990년으로 그치고 각자 개척을 해서 서부교회 교권을 두고 내부에서 투쟁하지 않고 새로 개척을 하여 그 개척이 서부교회의 원래 모습이 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차례로 나가게 됩니다. 이는 목사님 생전에 부산 시내 30여 곳에 분교를 마련했고 목사님 사후에 서부교회 후임에 문제가 되거나 또는 서부교회의 구심력이 부족할게 될 때 자연스럽게 30개 교회가 주변에서 또는 함께 협력하여 그 전체가 생전의 서부교회 역할을 맡으라고 했으니 그 임무 그 정신에 따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교 장영목 총무도 2015년 62세로 별세했고, 이민영 연구소 소장은 1998년에 소장직을 그만 두고 지금은 교계에서 일반 목회자로 활동 중이며 공회와의 연관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4명은 현재 서부교회에 없습니다.
1991년 1월에 서부교회 후임이 올 때 3명은 서부교회는 향후 역사의 애양원교회나 산정현교회나 아현교회처럼 보이는 의미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교 총무는 개척을 나간 후 다시 서부교회로 돌아 오려고 한 적이 있었고 연구소 소장은 교계로 편입이 되었다는 점에서 현재 특수반 이치영 현재 목사님이 범일동에서 생전의 서부교회를 이어 간다는 자세로 120여 명의 장년반 규모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부산에서 이 동천교회만 작은 서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 '당시 서부교회에서 위임한 그 대표성'
장례와 후임 결정에 그 많은 교인이 단 하나도 반대가 없고 이의가 없었다는 것이 교회가 위임한 대표성입니다. 명문법은 내용이 엉망이라도 형식만 갖추면 대표성이 있지만, 불문법은 내용이 문제고 흐름이 문제입니다. 목사님의 장례는 유가족 7인의 사상이 다 다르고, 서부교회 내부의 향후를 봐서 알겠지만 이해 관계가 첨예하며, 총공회의 본부라는 점에서 전국 100개 교회와 목회자 전부가 직간접으로 이해관계는 물론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지만 훗날의 반대파까지도 장례를 극찬했습니다. 후임 결정도 질문 하나도 없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4명의 서부교회 실무들은 연구부장을 전적 따랐고'
서부교회를 움직이는 주교 중간반 특수반 연구소의 실무 총책임자들은 자기 업무에 관해서는 모두가 전문가였고 다른 사람이 대체를 할 수 없는 대규모 조직과 복잡한 업무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부교회와 공회의 역사와 자료 파악을 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먼저 말할 정도는 아니었고 연구 부장이 설명을 하면 옳은지 아닌지 들었던 것인지 아닌지는 바로 파악을 하는 분들입니다. 이 것이 서부교회 실무 부서 책임자들의 특징입니다. 목사님이 판단하고 지시하면 가장 빠르게 가장 효과적으로 결과를 만들어 놓는 이들이 부서 책임자들입니다. 그렇게 실력을 쌓아 왔고 그래서 당시 그 자리에 있다가 목사님의 갑작스런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모두가 연구 부장에게 물어 봤고 연구 부장은 자기의 주관이나 희망 사항이나 개인 취향이 아니라 목사님이 언제 어떤 사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또 이런 일을 두고 언제 무슨 말씀을 미리 했는지만 말을 했고 1980년대 10여 년을 계속해서 목사님을 가장 가깝게 접하며 자기 업무를 직접 지도 받아 온 이들은 연구 부장이 말을 하면 바로 기억했고 바로 알아 들었고 바로 동감을 했습니다. 새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린 것입니다.
목사님 계시던 평소에는 목사님이 4명의 실무자들에게 직접 지시하고 그들은 직접 질문을 했고 연구 부장은 그 자리에 동석해서 함께 들었을 뿐이고 연구 부장은 자기의 연구 분야를 질문하고 지도를 받았을 뿐인데 목사님이 가시고 나자 이제는 목사님 계셨다면! 이 전제로 알아서 판단해야 할 상황이 되자 직책상 자연스럽게 연구 부장이 가장 잘 알고 그러니 입장을 개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연구 부장이 목사님을 대신 하는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 내 반대측과 총공회의 반대측은 현장에서는 4인과의 투쟁을 했지만 그 배후를 연구 부장으로 삼고 가장 극단적인 공격을 하게 됩니다.
* ‘일반 주요 결정의 제일 중심에 있다고 보는 권찰회와 장로 및 권사직분에 서신 분들'
서부교회의 업무 계통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나 서부교회 구성 자체는 구역 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이말출 김현찬 김효순 나인숙 4명의 권사님이 권사라는 칭호와 상관 없이 이 분들이 서부교회의 교인 대부분이 소속한 구역의 구역장인데, 타 교단의 구역장은 그 지역을 맡은 임명직이라면 서부교회의 구역장은 자기가 전도하고 자기가 심방해서 자기를 따르는 신앙의 직계 식구를 맡게 됩니다. 지역은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구역장은 서부교회 내에 별도의 작은 교회처럼 되어 있습니다. 4개 구역의 구역장은 그 규모로도 서부교회 교인 대부분이 소속을 두고 있지만 이들 교인이 목회를 나가 전국의 총공회 주요 목회자들이 되어 있었고, 또 이 4명의 구역장님들은 서부교회가 목사님을 모시고 처음 자리를 잡던 1950년대 고신 교단에 소속했을 때 고신 교단에서도 손꼽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연륜이 높고 교계적으로도 명망이 확실하며 총공회적으로도 중요한 목사님들이 그 구역 교인 출신인데다가 서부교회 교인의 다수가 직접 식구로 소속이 되어 있으니 이 4명이 결정하면 바로 서부교회의 결정이 됩니다. 업무적으로는 30대 4명의 실무자가 실세들이고, 교회의 구조적 인적 편제적으로는 70대였던 이 분들이 실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별세 직전까지 이 4명의 권사님들이 4명의 실무자들을 통해 목사님이 만사를 결정하고 지시하고 또 이 4명이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는 줄을 잘 알고 있었으니 4명의 실무자들이 목사님 사후 장례와 만사를 결정할 때 '장례의 방향은 이렇게' '장례의 비용은 저렇게' '장례의 예배와 순서와 조직은 이렇게'라고 말씀을 드리면 '잘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해.' '중요한 일은 우리가 들어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설명을 해 줄 수 있기는 하지' 라고 대화로 만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4명의 권사님들은 장례 전부와 후임 결정에 이르기까지 무슨 결정이든 실무 4명이 말을 하면 무조건 동의하셨고, 예상 되는 반대측의 질문이나 이의가 들어 오면 개인적으로 할 말이 없도록 미리 장악해 줌으로 만사가 순조로웠습니다. 연구 부장은 실무 4명과도 긴밀히 한 몸으로 움직였지만 또 4명의 권사님들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해결해 왔습니다. 권사 4명도 연구 부장의 판단과 결정이면 목사님의 뜻 그대로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의 경우 16명이었는데 훗날 과거를 고수하겠다고 확실하게 선 분은 4명 정도지만 모두가 권사님들에게 확실히 순종하는 분들이어서 문제가 없었고 나머지 12명의 장로님들은 스스로 장로회의 4분의 3을 장악하고 있으니 때가 되면 자기들이 목사님 사후의 교회를 장악한다고 자신을 했으나, 서부교회는 장로회라는 것도 없고 장로들만이 모여서 결정해 본 역사도 없고 그럴 수도 없게 되어 있어서 목사님 생전을 틀렸다고 깨고 나서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장례와 후임 결정 때까지는 장로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침묵하고 순종을 했으나 후임이 온 뒤 한 달이 지나면서 왜 설교를 하지 않고 재독을 하느냐, 그런데 후임을 결정할 때 누가 결정을 했느냐, 이제는 서부교회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등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는 총공회적으로 과거를 부정하고 교계화를 주장하는 분들이 서부교회 내부에 정보를 주고 부탁을 하게 되면서 일어 난 일입니다.
*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 서울공회는 당시 교계로 편입하자는 극단적인 분들인데 작전상 초기에는 자기들이 목사님 생전을 더 잘 유지 시킨다고 했고
현재 대구공회는 서울공회를 순수하게 생각하고 따르다가 속은 것을 알고 돌아 섰으나 아주 돌아 서지는 않고 어중간하게 계시고
현재 부산공회1은 서부교회 내 중간반 백명희 부장 선생님을 따라 출발을 했다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몰라서 정전된 기계와 같고
현재 부산공회2는 대구공회가 되거나 부공1처럼 될 분들이 함께 모여 '서부교회' 2층을 장악한 곳을 무조건 따른다는 정신이 되었고
현재 부산공회3은 연구소의 모습이 전부입니다.
* 연구 부장은
서부교회든 전국의 공회 누구든 조금 알 만한 분에게 물어 보면 아주 나쁜 인간이며 잘 나가던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깬 원수라고 하거나, 어린 것이 설치는 바람에 서부교회와 공회가 어지럽게 되었다고 하거나, 말은 대부분 맞는데 건방져서 문제라거나, 꿈도 꾸지 못할 것이 서부교회를 도모하다 어느 시골에 있는데 항상 거짓말만 하고 교회와 복음운동을 깨기만 하니 그 말을 듣지 말고 사이트를 들어 가지도 말라고 하든지 아마 그럴 듯합니다.
평생에 이름을 외부에 전하지 않은 것은 해야 할 말이 중요한데 이름을 내걸면 가장 가까운 동지들까지도 결국 네가 높아 지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직접 말을 할 만큼 그런 사연이 많아서 불가피하지 않으면 이름을 적지 않고 왔습니다. 목사님 사후 공회의 첫 연구 출간서가 되는 '총공회 약사'를 비롯하여 당시 교계의 단행본 베스트셀러 소리를 들은 '서부교회 주일학교' 1991년 기독지혜사의 책들이 모두 무명으로 출간이 되었는데 연구 부장의 글입니다. 또 1989년 1월 목사님 생전의 마지막 서부교회 사경회 강사이기도 했고 1층 주일학교 부장이기도했습니다.
이 곳은 연구 부장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모인 곳이어서 이 곳의 글은 누구의 글이든 연구 부장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연구 부장의 실명만은 최대한 아끼는 편입니다. 이 곳 외에 누구에게든지 물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평양에서 제일 욕하는 남한 인물은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평양에서 남한에 제일 극찬하는 애국자는 가장 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한의 애국자가 궁금하거나 그 애국자의 신상과 내용을 정말 알고 싶으면 평양에 물어 보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공회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질문하신 분이 서부교회 내에 계시는 듯해서 양해를 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