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투표로 망한 - 서부교회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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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8 08:04
1989.8.27. 새벽 강단에서 목사님이 가셨다. 한순간에 서부교회는 모든 기둥이 뽑히고 허공에 떠버렸다.
훗날 대구공회에 속할 3분의 2 전부와 훗날 부산공회에 속할 3분의 1 대부분이 백태영 목사님을 필연적 후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교회의 목사님 사후를 결정할 서부교회 중심의 실무자들은 80년대 내내 목사님을 직접 모시면서 백태영은 아예 그 가능성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김효순 구역은 서영호를 원했으나 1988년 1989년 내내 목사님의 모든 설교를 알던 김효순 자신이 가능성을 접고 있었다.
목사님의 사후 첫 결정은 주일학교 총무 장영목, 중간반 백명희 두 사람이 양대 기둥이었고, 그 바로 옆에 연구소 이민영과 특수반 이치영이 조금 작은 기둥으로 함께 했다. 행정실장은 교회 전체의 서기에 지나지 않았다. 30대 4명의 실무 책임자들이 돌아 가시기 직전 서부교회를 움직이는 목사님의 수족이었다. 그런데 이들 전부는 서부교회의 실무로 현장을 이끌고 있었지만 총공회와 서부교회에 대한 역사와 노선과 교리와 이론은 모르고 있었으며 모두가 총공회 전체의 판세 분석과 대처는 모르고 있었다. 4명의 서부교회 실무들은 연구 부장을 전적 따랐고 연구 부장이 총 지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연구 부장은 실무 부서는 아니었으나 서부교회의 교인 전부를 움직이던 4개 구역 중 나인숙 이말출 2명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 2명을 통해 나머지 2명도 묶고 있었다.
서부교회의 주교 중간반 특수반 연구소를 책임진 30대 4명의 실무자와 연구부장은 1989년 9월부터 1990년 5월까지 서부교인 중 대구공회의 남정교회로 개척하는 분들과 극단적인 대치를 끝내고 서부교회를 예전 모습으로 일단 수습해 놓았다. 5월 집회를 마치면서 교회는 안정을 찾았고 6월 7월 8월은 겉으로 은혜로웠다. 재독을 통해 목사님 생전 이상의 은혜를 체험했다. 바로 이 시기에 당시 후임이던 인산교회 출신 이재순 목사님과 중간반 백명희 부장 선생님 사이에는 1주 11회 예배 전부를 재독으로 하자는 주장과 대예배 4회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공방과 협상이 치열하게 이어 지고 있었다. 연구 부장은 처음에 주일 오전 1회를 설교하고 10회를 재독으로, 그 다음에는 주일 오전과 오후를 설교하고 평일은 재독으로 조정하는 데까지는 비교적 쉽게 조정을 했다. 그러나 3회 설교를 두고는 감정이 격화 되었다.
분리해 나간 남정교회 측은 나가기 전까지 주일 오전 예배의 설교 시간 내내 수백 명이 손바닥만한 판자를 마주 쳐서 소음을 유발하며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방해했었다. 우상 예배를 막는 것이 거룩이라는 논리였다. 그들이 나간 뒤 이번에는 그 이상의 내전이 예상 될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 뒤에는 시무투표가 있고 25%만 반대하면 이재순 목사님은 그냥 가셔야 한다. 싸울 것도 없다. 어떤 면을 봐도 가셔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런데 목사님 사후 첫 후임이 시무투표로 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목회자를 보내 본 경험을 가진 서부교인들은 후임을 끝없이 내보낼 것이고 매2년의 임기로 교체 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무한 투쟁으로 나가게 된다. 서부교회의 내부 성향이 그렇다.
1990년 11월의 시무투표는 9월 교역자회에서 일단 거론이 된다. 총공회를 운영하고 있는 행정실에서는 상식이나 서부교회 내는 정작 이런 행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8월 말에 연구 부장은 이재순 목사님을 보내기로 확정한 중간반 부장을 빼고 주교 총무와 연구소 소장과 함께 이재순 목사님을 사택에서 만났다. '9월 교역자회는 11월 시무투표 일정을 언급하게 됩니다. 이 번 투표에 목사님은 25% 이상의 불신임으로 가시게 됩니다. 목사님을 한번 보내고 나면 서부교회는 끝없는 투쟁으로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재건의 기회는 없습니다.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부교회를 위해서 시무투표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공회의 제도이기 때문에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공회 제도를 거부하지 않고도 막는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쉬운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서부교회 내에서 자기를 반대한 사람은 남정교회로 다 나갔고 나머지는 자기를 지지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 '목사님 사후의 교회 분쟁은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정교인들이 대구공회 성향이어서 싸운 것입니다. 목사님을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재순 목사님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목사님이 만든 제도니 충실하게 지킨다며 자신을 했다. 당시 이 목사님을 지킨다는 호위 무사들도 있었다. 지금은 그들이 모두 부공2에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울 것이나 본인들은 정작 당시를 잊고 있을 듯하다.
연구 부장은 이 목사님의 자신감뿐 아니라 그 성향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나왔다. '여기 두 사람은 교회 실무들이니 그대로 계실 것이나, 저는 교회도 따로 맡아 있고 연구소 내 부장이어서 앞으로 더 이상 서부교회 일로 연락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재순 목사님을 후임으로 모신다는 생각과 방법은 연구 부장의 구상이었다. 이후 대구공회로 나갈 교인들과의 모든 대처도 연구 부장이 전체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 목사님은 멀리 있던 연구 부장에게 당시 시외전화비가 한 달에 70만원 이상이 나오도록 매사를 물어서 대처했다. 연구 부장의 전화비만 70만원이 나갔으며 대부분은 이 목사님인 먼저 전화를 걸어 왔고 그 비용은 그 이상일 수밖에 없다. 1990년 8월 말 이렇게 서로 결별했다. 그리고 연구 부장은 목사님 사후 제대로 된 첫 책으로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운영과 실제'를 집필하기 위해 모든 연락을 끊고 산속으로 갔다. 그 다음 주간이 9월 교역자회 기간이었다.
월요일에 산에 갔다가 토요일에 내려 와 보니 이재순 목사님의 전화가 집으로 불이 날 정도로 계속 되었다고 한다. 어쩐 일이시냐고 여쭸다. 시무투표를 막기 위해 대처를 부탁했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 소신을 말씀하셨고, 저는 관계하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라고 바로 끊었다. 이 것이 이 목사님과 목사님 생전부터 그렇게 가깝게 지내 온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서부교회 내에서 재독을 원하는 중간반과 그 주변 분들이 이 목사님을 보내려고 작정하고 움직이며 이를 막을 도리가 없음을 한 주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투표에서 목사님은 불신임을 받았고, 불신임 된 목회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1986년 공문으로 '이동에 참고'한다고 버텼다. 남정교인들이 나갈 때 극단적인 투쟁을 다 견뎌 낸 분이 다시 버티겠다니 내보내는 이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한번은 노선 싸움인데 다시 분쟁이 나면 이제는 밥그릇 싸움 밖에 되지 않는다. 연구 부장은 이 목사님의 최측근에게 전화를 했다. 1988년 공문과 이후 이어진 자료가 모두 있는데 서부교회에서는 나가셔도 앞으로 총공회적으로는 하실 일이 많은 분을 함께 아끼기 위해 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가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글을 적는 연구소가 운영하는 연구 공회 안에는 이런 이야기가 당시 실제 겪은 이들의 핵심들 때문에 늘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불신임이 나면 갑자기 돌변한다. 그냥 시무투표는 하나의 참고일 뿐이라고.
이 사이트의 '/초기화면/백영희/참고' 안에는 언론 기사가 나온다. 그 중에 7번이 '뉴스메이커'다. 2010년 9월호의 불신 언론이 한국교회의 위기는 총공회의 시무투표에서 찾으라고 교계에 던진 소식이다. 당시 목사님 자녀 한 분은 자녀의 허락 없이 부친을 언론에 소개했고 언론은 이를 보도한 책임을 묻겠다고 거칠게 언론사를 압박했다. 해당 기자는 너무 어이가 없다며 누구냐고 물어 왔다. 이런 곳을 공회라 한다. 불신 언론이 목사님 가신 후 21년만에 총공회를 심층 취재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시 15년이 지나고 있다. 밥그릇 문제가 되면 돌변한다. 또 입장이 바뀌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다. 공회 우리까지도. 우리 내 제일 큰 소리친 분들도 그렇다. 어느 날 이 곳도 또 그렇게 될까 싶어 이 곳의 입에 재갈을 하나 더 물려 놓기 위해 적는다. 이 곳도 1990년 8월에 이재순 목사님을 찾아 가서 시무투표를 한번 슬쩍 건너 뛰자고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은 자기를 찾아 온 연구 부장도 자기를 붙들어야 밥그릇을 챙기니 돌변했다고 느꼈을 듯하다. 앞으로 연구 부장까지 밥그릇 때문에 입장을 바꾼다면 이 글을 가지고 제시해 주면 좋겠다. 그런데도 사람이 미쳐 놓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연구 부장이니 연구소의 발표문을 뒤집을 때 또 재주를 부리지 않을까?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하다. 베드로가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 서서 도망을 갔으니.
훗날 대구공회에 속할 3분의 2 전부와 훗날 부산공회에 속할 3분의 1 대부분이 백태영 목사님을 필연적 후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교회의 목사님 사후를 결정할 서부교회 중심의 실무자들은 80년대 내내 목사님을 직접 모시면서 백태영은 아예 그 가능성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김효순 구역은 서영호를 원했으나 1988년 1989년 내내 목사님의 모든 설교를 알던 김효순 자신이 가능성을 접고 있었다.
목사님의 사후 첫 결정은 주일학교 총무 장영목, 중간반 백명희 두 사람이 양대 기둥이었고, 그 바로 옆에 연구소 이민영과 특수반 이치영이 조금 작은 기둥으로 함께 했다. 행정실장은 교회 전체의 서기에 지나지 않았다. 30대 4명의 실무 책임자들이 돌아 가시기 직전 서부교회를 움직이는 목사님의 수족이었다. 그런데 이들 전부는 서부교회의 실무로 현장을 이끌고 있었지만 총공회와 서부교회에 대한 역사와 노선과 교리와 이론은 모르고 있었으며 모두가 총공회 전체의 판세 분석과 대처는 모르고 있었다. 4명의 서부교회 실무들은 연구 부장을 전적 따랐고 연구 부장이 총 지휘를 하고 있었다. 특히 연구 부장은 실무 부서는 아니었으나 서부교회의 교인 전부를 움직이던 4개 구역 중 나인숙 이말출 2명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 2명을 통해 나머지 2명도 묶고 있었다.
서부교회의 주교 중간반 특수반 연구소를 책임진 30대 4명의 실무자와 연구부장은 1989년 9월부터 1990년 5월까지 서부교인 중 대구공회의 남정교회로 개척하는 분들과 극단적인 대치를 끝내고 서부교회를 예전 모습으로 일단 수습해 놓았다. 5월 집회를 마치면서 교회는 안정을 찾았고 6월 7월 8월은 겉으로 은혜로웠다. 재독을 통해 목사님 생전 이상의 은혜를 체험했다. 바로 이 시기에 당시 후임이던 인산교회 출신 이재순 목사님과 중간반 백명희 부장 선생님 사이에는 1주 11회 예배 전부를 재독으로 하자는 주장과 대예배 4회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공방과 협상이 치열하게 이어 지고 있었다. 연구 부장은 처음에 주일 오전 1회를 설교하고 10회를 재독으로, 그 다음에는 주일 오전과 오후를 설교하고 평일은 재독으로 조정하는 데까지는 비교적 쉽게 조정을 했다. 그러나 3회 설교를 두고는 감정이 격화 되었다.
분리해 나간 남정교회 측은 나가기 전까지 주일 오전 예배의 설교 시간 내내 수백 명이 손바닥만한 판자를 마주 쳐서 소음을 유발하며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방해했었다. 우상 예배를 막는 것이 거룩이라는 논리였다. 그들이 나간 뒤 이번에는 그 이상의 내전이 예상 될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 뒤에는 시무투표가 있고 25%만 반대하면 이재순 목사님은 그냥 가셔야 한다. 싸울 것도 없다. 어떤 면을 봐도 가셔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런데 목사님 사후 첫 후임이 시무투표로 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목회자를 보내 본 경험을 가진 서부교인들은 후임을 끝없이 내보낼 것이고 매2년의 임기로 교체 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무한 투쟁으로 나가게 된다. 서부교회의 내부 성향이 그렇다.
1990년 11월의 시무투표는 9월 교역자회에서 일단 거론이 된다. 총공회를 운영하고 있는 행정실에서는 상식이나 서부교회 내는 정작 이런 행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8월 말에 연구 부장은 이재순 목사님을 보내기로 확정한 중간반 부장을 빼고 주교 총무와 연구소 소장과 함께 이재순 목사님을 사택에서 만났다. '9월 교역자회는 11월 시무투표 일정을 언급하게 됩니다. 이 번 투표에 목사님은 25% 이상의 불신임으로 가시게 됩니다. 목사님을 한번 보내고 나면 서부교회는 끝없는 투쟁으로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재건의 기회는 없습니다.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부교회를 위해서 시무투표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공회의 제도이기 때문에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공회 제도를 거부하지 않고도 막는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쉬운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서부교회 내에서 자기를 반대한 사람은 남정교회로 다 나갔고 나머지는 자기를 지지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 '목사님 사후의 교회 분쟁은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정교인들이 대구공회 성향이어서 싸운 것입니다. 목사님을 지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재순 목사님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목사님이 만든 제도니 충실하게 지킨다며 자신을 했다. 당시 이 목사님을 지킨다는 호위 무사들도 있었다. 지금은 그들이 모두 부공2에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울 것이나 본인들은 정작 당시를 잊고 있을 듯하다.
연구 부장은 이 목사님의 자신감뿐 아니라 그 성향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나왔다. '여기 두 사람은 교회 실무들이니 그대로 계실 것이나, 저는 교회도 따로 맡아 있고 연구소 내 부장이어서 앞으로 더 이상 서부교회 일로 연락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재순 목사님을 후임으로 모신다는 생각과 방법은 연구 부장의 구상이었다. 이후 대구공회로 나갈 교인들과의 모든 대처도 연구 부장이 전체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 목사님은 멀리 있던 연구 부장에게 당시 시외전화비가 한 달에 70만원 이상이 나오도록 매사를 물어서 대처했다. 연구 부장의 전화비만 70만원이 나갔으며 대부분은 이 목사님인 먼저 전화를 걸어 왔고 그 비용은 그 이상일 수밖에 없다. 1990년 8월 말 이렇게 서로 결별했다. 그리고 연구 부장은 목사님 사후 제대로 된 첫 책으로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운영과 실제'를 집필하기 위해 모든 연락을 끊고 산속으로 갔다. 그 다음 주간이 9월 교역자회 기간이었다.
월요일에 산에 갔다가 토요일에 내려 와 보니 이재순 목사님의 전화가 집으로 불이 날 정도로 계속 되었다고 한다. 어쩐 일이시냐고 여쭸다. 시무투표를 막기 위해 대처를 부탁했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 소신을 말씀하셨고, 저는 관계하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라고 바로 끊었다. 이 것이 이 목사님과 목사님 생전부터 그렇게 가깝게 지내 온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서부교회 내에서 재독을 원하는 중간반과 그 주변 분들이 이 목사님을 보내려고 작정하고 움직이며 이를 막을 도리가 없음을 한 주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투표에서 목사님은 불신임을 받았고, 불신임 된 목회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1986년 공문으로 '이동에 참고'한다고 버텼다. 남정교인들이 나갈 때 극단적인 투쟁을 다 견뎌 낸 분이 다시 버티겠다니 내보내는 이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한번은 노선 싸움인데 다시 분쟁이 나면 이제는 밥그릇 싸움 밖에 되지 않는다. 연구 부장은 이 목사님의 최측근에게 전화를 했다. 1988년 공문과 이후 이어진 자료가 모두 있는데 서부교회에서는 나가셔도 앞으로 총공회적으로는 하실 일이 많은 분을 함께 아끼기 위해 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가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글을 적는 연구소가 운영하는 연구 공회 안에는 이런 이야기가 당시 실제 겪은 이들의 핵심들 때문에 늘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불신임이 나면 갑자기 돌변한다. 그냥 시무투표는 하나의 참고일 뿐이라고.
이 사이트의 '/초기화면/백영희/참고' 안에는 언론 기사가 나온다. 그 중에 7번이 '뉴스메이커'다. 2010년 9월호의 불신 언론이 한국교회의 위기는 총공회의 시무투표에서 찾으라고 교계에 던진 소식이다. 당시 목사님 자녀 한 분은 자녀의 허락 없이 부친을 언론에 소개했고 언론은 이를 보도한 책임을 묻겠다고 거칠게 언론사를 압박했다. 해당 기자는 너무 어이가 없다며 누구냐고 물어 왔다. 이런 곳을 공회라 한다. 불신 언론이 목사님 가신 후 21년만에 총공회를 심층 취재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시 15년이 지나고 있다. 밥그릇 문제가 되면 돌변한다. 또 입장이 바뀌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다. 공회 우리까지도. 우리 내 제일 큰 소리친 분들도 그렇다. 어느 날 이 곳도 또 그렇게 될까 싶어 이 곳의 입에 재갈을 하나 더 물려 놓기 위해 적는다. 이 곳도 1990년 8월에 이재순 목사님을 찾아 가서 시무투표를 한번 슬쩍 건너 뛰자고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은 자기를 찾아 온 연구 부장도 자기를 붙들어야 밥그릇을 챙기니 돌변했다고 느꼈을 듯하다. 앞으로 연구 부장까지 밥그릇 때문에 입장을 바꾼다면 이 글을 가지고 제시해 주면 좋겠다. 그런데도 사람이 미쳐 놓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연구 부장이니 연구소의 발표문을 뒤집을 때 또 재주를 부리지 않을까?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하다. 베드로가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 서서 도망을 갔으니.

“..‘30대 4명의 실무 책임자들이 돌아가시기 직전 서부교회를 움직이는 목사님의 수족’이었다.” , ‘..서부교회의 실무로 현장을 이끌고 있었지만..’ 그러셨는데,
(여전 오늘날 서부교회에 속해 있으신지 모르지만) 당시 (서부)교회에서 위임한 그 대표성이었음인지,
‘..4명의 서부교회 실무들은 연구부장을 전적 따랐고 연구부장이 총지휘를..’ , 또한 ‘..서부교회의 주교 중간반 특수반 연구소를 책임진 30대 4명의 실무자와 연구부장은..’의 부문에 언급된 ‘연구부장’이 (누구이신지 모르나),
이 또한, 당시 서부교회에서 위임한 그 대표성으로 관여됨이었는지, 아니면 (예로) 이를 애타한 터에 주위에 떠밀려 부득이 관여케 됐음인지,
당시 이 문제의 적극 해결에, ‘일반 주요 결정의 제일 중심’에 있다고 보는 (해당교회) 권찰회와 장로 및 권사직분에 서신 분들의 (이에 대한) 중추적 역할이 실제 어떠했음인지..
당시 실상을 본바 없어 (귀가) 어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