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사님 묘소 위치와 김해 묘지
y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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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4 00:00
1.서부교회 묘지 접근로
국도변에 있는 관리가옥에서 시작되어 맨 윗쪽 교역자석까지 전부였습니다.
1980년대 초 마산에서 구포로 들어오던 외길의 부마고속도로 중간 부분에서
사상으로 바로 들어오게 하는 진입고속도로가 신설되었고
그 분기점이 바로 서부교회 묘소 바로 앞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상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는 분기점에서 서부교회 묘소 허리를 관통합니다.
1977년 홍순철목사님 장례 때
국도변 관리사에서 맨 꼭대기 교역자석까지 운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부교회에서 묘지를 가는 코스도
서부교회에서 서면 - 사상 - 구포 - 김해 - 장유 묘소로 이어졌으며
차량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1980년 초 묘소 앞에 분기점이 생기고 사상의 진입로가 생기게 되자
묘소 가는 길은, 서부교회 - 구덕터널 - 사상 - 장유로 바로 이어져
40분 거리로 단축 됩니다.
대신 묘소 진입은 국도변 관리가옥을 이용하지 않고
고속도로 바로 위쪽으로 진입로를 내어 현재처럼 묘소 정문이 만들어집니다.
지금 정문은 묘소의 하중간 부분입니다.
2.묘소 내부의 운용
그렇게 큰 뜻은 없었으나
묘소는 서부교회 자체 묘소였지만
당시 서부교회라는 단어는 공회의 본부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묘소는 서부교회 교인용이면서 동시에 공회 목회자 묘소이기도 했습니다.
묘지 사용 분량으로는 비교가 될 수 없어
교역자 묘소는 공간이 조금만 있으면 되고
교인 묘소는 산 전체를 다 사용해야 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묘소의 제일 윗부분을 목회자 묘소로 하고 나머지 전부는 교인 묘소입니다.
공회 목회자가 서부교회 묘소를 사용하는 이유는
첫째
서부교회의 원래 의미가 공회 본부라는 의미였기 때문이고
둘째
공회 목회자 거의 전부가 서부교회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가족 전부가 아직 서부교회 교인으로 있고 본인도 서부교인이었는데
파송을 받아 말하자면 서부교회 지교회에 출장을 가는 형태였습니다.
또 외부에서 들어온 목회자도 서부교회가 재2의 고향이며 가정이었습니다.
혹 그렇지 않은 사람이 1-2명 있다 해도 그들만 제외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의미를 바로 안다면 공회 목회자의 서부교회 묘소 사용를
현 서부교회가 막는다면 서부교회 근본도 모르는 ㅎㄹㅈㅅ 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준입니다.
셋째
공회 목회자는 고향과 가족을 완전히 떠나야 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공회 목회자가 사망하는 경우 가야할 곳이 없습니다.
교학실 이재순목사님이 고향 개명에 묻히는 것은 그분의 수치이며 공회의 수치입니다.
동시에 백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가 무지하고 근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백목사님 생전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고, 혹 아는 이들은 다른 저의를 가져서 그렇습니다.
이런 3가지 정도 이유 때문에
서부교회가 마련한 서부교회 자체 내부 묘소의 제일 좋은 위치를 따로 떼내어
공회 목회자 묘소를 만들었고, 백목사님 신앙지도가 있을 때가지는 그렇게 유지 되었습니다.
3.백목사님 묘소 위치
1987년 8월 15일 서영준목사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묘소를 김해묘지 제일 윗쪽 교역자석에 두지 않고 묘소 입구 현 위치를 택했습니다.
서목사님 장례 직전에
백목사님은 곧 세상을 떠날 것으로 준비하고 있었고
주변 가족과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원 몇 사람에게는 이것이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백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래도 평범할 것 같지 않았고
과거 중요한 공회 장례식들은 토요일이 사망, 월요일 장례식 등의 형태가 많아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때는 백목사님이 지도를 하고 있어 그래도 진행을 했으나
만일 백목사님의 장례식이 그렇게 되면 너무 혼란이 크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의논하고 목사님 묘소를 미리 검토하게 됩니다.
일단 윗쪽 교역자석에 묘소를 사용하게 되면
목사님 묘소를 찾을 분들에게 너무 힘든 거리가 되겠고
그 묘소를 찾을 분들의 고령화를 생각한다면 묘지 입구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김해 묘지는 많은 분들이 왕래하는 곳인데
자기 가족들 때문에 개인적으로 찾는 분들이 있다 해도
그들이 묘소 입구에서 목사님 묘소를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면
그들의 평생 신앙의 다짐을 한번 더 하도록 할 수 있겠다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장지 선택에서는 어른이 위로 가고 자손이 내려 앉지만
우리는 그런 사회풍습을 참고할 수도 있고 배제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묘소 입구에 백목사님 묘소 위치를 정하는 것은
가족들과 답변자가 아주 쉽고 간단하게 결론을 낼 수 있었습니다.
4.백목사님 묘소 묘역의 내부 배열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려한 것은
백목사님의 묘소가 묘지 입구로 오게 된다면
그 묘소 바로 뒤에 백목사님 평생 목회를 두고 가장 가까이 배열할 묘소들을 마련하여
서부교회 묘지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항상 교훈을 주고 싶었습니다.
우선
백목사님 부부는 부부이므로 무조건 나란히 모셔야 했고
다음
백목사님의 묘소라 해도 교회 묘지이므로 가족 전부의 가족묘소가 될 수는 없으나
가족 중에서 백목사님 목회에 큰 의미를 갖는 목회 나선 분들은 모셔야 했고
또한
서부교회 묘소이므로 백목사님의 서부교회 목회에서 큰 의미가 있는 4명의 권사님들도 모셔야 했습니다. 그 4분의 내면 신앙은 이 노선의 중심에 있기도 하고 외곽에 있기도 했지만 서부교회라는 이름 전체를 생각한다면 그분들은 그런 의미에 포함될 수 있었고, 그 분들 중에 문제가 있는 분이 있다면 그런 점도 목사님 묘소 바로 뒤에 배열 될 때 훗날 교인들에게 또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상 검사 대신에 넓은 기준에서 배열 묘소를 정했습니다.
따라서
백목사님 부부 두 분이 제일 중앙에 계시고
바로 뒤에 배열할 분들은 사망 순서에 따라 오른쪽에서 안쪽으로 묘소를 쓰되
최목사님 부부, 서목사님 부부, 4명의 권사님들 등 8명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백목사님은 마지막 돌아가시기 직전 교회 묘소 전체 관리의 공로를 두고
묘소 책임자 이상원장로님의 묘소도 8명 배열에 추가하고 묘소 관리규칙을 만듭니다.
이렇게 내부 준비안을 마련하며 구체적으로 지질 조사까지 하던 중에
백목사님이 알게 되고 답변자에게 대책망과 함께 즉시 없던 일로 돌리라고 하여
그 준비는 업무일지 속에 묻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87년 8월 15일 서영준목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됩니다.
서목사님의 의미와 위치는 서부교회로서 백목사님 장례 다음으로 큰 장례였고
곧 닥쳐올 백목사님 장례의 준비이기도 했습니다.
토요일 돌아가시고 월요일에 장례를 해야 했으며
사고사로 사망신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토요일 늦게까지 행정절차도 복잡했고
백목사님은 주일 준비까지 겹쳐 있어 장례식 일체를 위임시켰으며
이곳은 평소 이 노선 입장에서 생각해 둔 방향을 보고 드려 그대로 다 허락을 받게 됩니다.
5.장례와 묘소
유교식 장례법에 따라 한복을 입혀 전래 동화의 귀신 모습이 되게하는 대신
평소 목회와 강단에서 가장 많이 입던 양복을 입혀 입관을 하였으며
묘소의 형태는 벌초와 관리가 어려운 옛날식 둥근 모양의 봉군 대신에
공원묘지의 사각 석묘를 만들고 제일 윗쪽에만 약간의 잔디를 두는 형태였고
크기와 높이 등 규모 면에 있어서는
일반 교인들 기준으로 서목사님 등 앞으로 권사님들은 약 1.5배
묘역은 약 2배 정도로 하며
백목사님의 경우는 묘 자체의 규모는 일반 교인들에 비해 약 2배
묘역은 방문인들의 편리를 위해 보다 넓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묘역의 위치는
일반 교인들이 사용하는 전체 묘역의 입구 바로 옆부분에 배치하여
중앙에 목사님 묘를 배치하고 바로 뒤에 장례식 순서대로
길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안쪽으로 순서 없이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허락의 형태는
백목사님의 사후 문제에 대하여서는
백목사님 사후 살아 남아 장례식을 치를 가족이나 교회가 결정할 일이지
이제는 백목사님 자신이 막거나 허락하거나 명령해야 할 사안이나 그런 시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서부교회 내부 형편에서 앞으로 중요한 장례나 묘소 문제를 두고
서부교회의 전체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서 하도록 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전체 보고를 받은 백목사님은
무조건 옛날 유교식 장례모습을 우리 신앙에 따라 바꾸는 것은 좋으므로
앞으로 서부교회 묘지 전체를 석재 묘지로 규격화 하고
입관은 평소 입던 옷을 권장하지만 가족들 분위기 따라 알아서 하게 하되
묘역이 전체 묘역의 입구 쪽에 설치되는 것은 세상 풍습과는 정반대지만
상관이 없으며 나머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문제는 알아서 하도록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런 대화는 입에 담는 것조차 백목사님 앞에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에 이르러서는
공회 내부도 목사님 사후 둘로 나뉠 것을 미리 말씀했고
후임자들이 노태우대통령 식으로 전임자를 밟으려 할 것도 미리 내다보았으며
이런 상황에서 백목사님은 사후를 염두에 두고
공회와 교회의 모든 일을 공개적으로 준비하게 됩니다.
교역자 파송제 대신에 청빙제
공회 운영위원회 체제 대신에 노소원위원회
양성원의 강의식 운영 대신에 설교록 중심의 자습식 운영
서부교회 내부의 중간반의 재편제와 임무
그리고 교회 묘소의 개괄 운영 방향 등입니다.
6.윗글 적으신 분께
백목사님이나 서목사님 묘소를 방문하러 갔다가
자기들 개인 묘소를 찾는 것에 대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낄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목사님 묘소 위치 결정 때 고려하고 의논한 일입니다.
반대로 목사님 묘소는 꼴보기도 싫은데 다른 목적으로 묘지에 간 분들이라면
그분들의 눈에는 서부교회가 어떤 신앙 노선이며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두고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 없도록 입구에 놓여진 묘소를 눈에 담아야 합니다. 후임자든지 교인이든지 누구든지 이 묘지를 출입하는 이들은 서부교회를 두고는 백목사님의 이름을 한번 더 기억해 봐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꼭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1989년 8월 27일 이후
백목사님의 장례 전체를 진행하면서
대구공회 측이 다른 진행은 일절 빠지고 다 양보했으나
장례식 후에도 계속 남아 있게 되는 묘지의 형태와 크기 문제에 있어서는
죽어도 자기들 식으로 하겠다고 막고 나서는 바람에
백목사님 장례를 두고 묘소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안내문을 세우는 것만은
이곳 뜻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를 두고 몸싸움을 해가며 이겨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묘소의 크기와 형태를 두고 대구공회와 서울공회 측에서
장례식 이후 비난을 했던 모든 분들은 전부 자기 입을 자기가 쳐서 부셔야 합니다.
이 문제를 두고 늘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왜 묘소 크기와 형태 말고는 5일간의 장례식 기간 중에 모든 것을
일절 간여하지 않고 그들이 칩거를 했느냐는 대목입니다.
장례 5일의 수고는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으니 니네들이 고생해라는 식이었는지!
장례 이전까지 수년 간 너무도 목사님께 몹쓸 짓을 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죄송함이 있어 그 기간 동안은 입에 자물통을 채우고 참자고 했는지!
가신 분은 자신들과 상관이 없으니 남의 장례식에 왜 우리가 수고하느냐는 것이었는지!
모든 힘을 결집해 두었다가 장례식 후의 교권싸움에 승부를 걸기 위해 역량의 비축이었는지!
이 홈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이 다 복합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