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손양원목사님의 신앙노선과 교단 소속-통합측 소속 인물로 인식되는 질문에 대하여

남단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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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연구실] 손양원목사님의 신앙노선과 교단 소속-통합측 소속 인물로 인식되는 질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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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목사님과 총공회 신앙노선


1.손양원목사님의 신앙노선과 총공회

손양원목사님의 이름은 한국기독교사 제1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교계 일반적 평가입니다. 그리고 그 손목사님과 애양원교회는 수없이 분열된 교단들 중에서 현재 서울영락교회로 대표되는 통합측교단에 소속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 인식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그렇지 않지만, 문제는 오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1950년 9월 손목사님 순교 직후 애양원교회는 즉시 손목사님 신앙노선을 정면 거부하고 신사참배 찬성측 교단으로만 속하여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양원교회 안에서 손목사님의 생전 신앙노선을 그대로 이어 가자는 분들은 애양원 바로 앞에서 신풍교회를 개척하여 처음에는 고신으로 그다음에는 김현봉목사님으로 그리고 1975년부터는 총공회 소속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총공회 소속으로 가입하기 이전에도 신풍교회는 총공회가 걸어온 신앙걸음과 비록 시차는 있어도 궤를 같이 했고 결국은 총공회에 소속하면서 손목사님의 신앙노선의 훗날의 안주를 가지게 됩니다.

애양원교회의 간판은 애양원이라는 치료기관의 이름이기 때문에 가져나올 수 없었으며 또한 그 이름을 가져나오는 투쟁이란 신앙노선에서 원치 않기 때문에 두고 나왔습니다. 손목사님의 유품에 대하여도 같은 원칙 때문에 그리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애양원교회는 그 교회 명칭은 포기하고 자진해서 없앴습니다. 현재 전남의 114 안내번호와 전국 교단의 교회 명부에도 애양원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애양원교회는 성산교회로 이름을 벌써 변경했습니다. 1990년 성산교회는 손목사님에 대한 정통성 확보를 위해 기념관을 추진하였고 그 모금운동의 원활을 위해 '애양원교회'라는 이름을 비공식적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현재 손목사님의 목사 호적과 애양원교회의 등기는 통합교단에 올려져 있습니다. 형식과 법적 사실을 치중하는 교계로서는 당연히 손목사님을 통합측 인물로 인식할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손목사님의 신앙노선과 그 노선을 계속 지켜오는 인물들은 전부 총공회로 편입하였고 그 외에는 손목사님의 신앙노선과 반대로 걸었기 때문에 총공회는 손목사님에 대한 인식이 교계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총공회 신앙노선이 천주교처럼 베드로의 몇 대 후임이라는 것에 교회의 권위를 두고 있었다면 손목사님의 신앙노선이 총공회로 편입된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왔겠지만, 총공회 신앙노선은 실질적인 현재의 신앙걸음에 모든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손목사님 영유권을 두고는 전혀 발언치 않았습니다. 실제 사실을 덮어두고 있기 때문에 총공회 내 교역자들까지도 손목사님에 관련된 사실은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손목사님 연구관련 권위자들이나 손목사님과 직접 관련된 분들을 직접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분들에게는 이런 면을 분명히 했습니다. 교계의 다른 분들에게는 손목사님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던 이들이지만 총공회가 아는 몇 가지 사실을 가지고 지적했을 때, 순간 대화는 중단되고 깊은 침묵만 있었습니다. 그분들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손목사님의 신앙은 모든 면으로 오늘 총공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목사님이 가치있는 분이라면, 한국교회는 총공회 신앙노선 안에서 그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950년 9월 손양원목사님의 순교까지를 담은 것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그 유명한 서적입니다. 1950년 9월에 순교한 손목사님의 장례까지만으로 그 책은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이후에 이어진 손목사님의 신앙 후사는 총공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계는 총공회 신앙노선의 특별함을 고려하여 그 후사는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2.손양원목사님을 사모하는 교계의 두 시각

손양원목사님은 한국교계에 그 상징성이 대단히 큰 인물입니다. 일반 교계는 원수까지 사랑하여 자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우리는 세상과 교계를 역항하여 끝까지 말씀대로 걸어갔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일반 교계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의 정신으로 교계의 모든 노선과 신앙을 전부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사랑의 최고봉이기 때문에 좋아하고, 우리는 말씀과 신앙노선을 두고는 단어 하나도 양보치 않았던 그 구별성과 말씀 절대주의자이기 그를 좋아합니다. 일반 교계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출옥성도인데도 출옥성도당이었던 고신에 머물지 않고 그 반대였던 신사참배 찬성측 교단으로 자진하여 넘어왔기 때문에 크게 좋아하고, 우리는 교권싸움을 두고는 어디에도 휘말리지 않고 고요히 주님과만 동행할 수 있는 밧모섬으로 자진해서 귀양을 갔기 때문에 그리 좋아합니다.

동일 인물 손양원목사님을 두고 일반교계는 일반교계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그를 좋아합니다. 일반교계가 그를 좋아하는 것을 두고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손양원목사님을 한국교회 최고의 성자로 올려놓은 이상 그 분 속에 있는 알맹이 신앙걸음을 쉽게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속화 타락의 일반 교계가 사랑놀음에 귀신이 씌어서 덜컥 먹은 것이 하필이면 손양원목사님인데 실은 잘못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분 속에는 낚시바늘이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일반교계가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정죄하고 비판하다가 가장 쉽게 중단하는 사유는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정죄하고는 손양원목사님을 함께 정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묘하게 남겨주신 이름입니다. 손양원목사님의 호적은 지금 통합측 교단이 가지고 있습니다만 손양원목사님의 신앙계통은 총공회 소속 신풍교회에서 그대로 쥐고 있습니다. 손목사님의 옷가지와 책가방은 통합측에서 소유하고 있으나 그분에 대한 알맹이는 전부 총공회 소속 신풍교회에만 있습니다. 이러므로 외식하는 일반교계는 한국교회의 큰 성자의 겉모습을 보유하고 있고, 알맹이 신앙을 목표하는 총공회 노선은 그의 알맹이를 전부 흡수하여 이 신앙노선에 중요한 참고로 삼고 있습니다.


3.통합교단이 알 수 없고, 애양원교회가 파악할 수 없는 손양원목사님

①초기 선교사들의 지역 분할

애양원교회만큼 손양원목사님을 잘 아는 교회는 없습니다. 애양원교회가 손양원목사님이고 손양원목사님이 애양원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아는 것은 손양원목사님의 외부모습 뿐입니다. 애양원교회와 소속인 통합측 교단은 손목사님의 신앙노선과 본질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선교지 분할 정책이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지가 중복되지 않도록 지역을 조정하면서 함경도와 간도는 카나다장로교가 맡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미국의 남장로교가, 그리고 경상도는 미국의 북장로교가 맡게 되었는데 미국의 북장로교가 맡았던 지역을 낙동강으로 경계하여 그 이남을 호주장로교에게 맡겼기 때문에 부산 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가 맡게 되었습니다.

②손목사님과 애양원교회를 맡았던 선교부의 신앙노선 비교

손목사님은 호주선교부가 주로 활동하던 경남의 함안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첫 신앙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애양원교회는 비록 섬진강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나 미국의 속화 타락한 교단인 남장로교에 의하여 지도되던 순천노회 소속 교회입니다. 호주선교부는 말씀대로 사는 데에는 생명 내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믿으라고 가르치며 신앙의 첫돌을 놓았습니다. 따라서 신사참배 반대자로 출옥한 모든 성도들은 남한출신치고는 교파별로는 호주선교부 신앙노선인 경남노회 교회에 소속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전남지방 선교를 책임진 미국북장로교단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나환자를 씻어주고 먹여주는 사회사업이 그들의 사랑이었고 사람들 좋게 해 주는 것이 예수믿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사참배문제에 대하여는 교리적으로 서로 다른 이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 그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불신자와 정권과 갈등을 빚으면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선교지역 교회들을 가르치며 신앙의 첫돌을 놓게 됩니다. 제사문제도 생기면 적당히 버무리지 꼭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앙 투쟁을 가르치는 일은 없습니다. 죽으라고 가르쳐도 죽지 못하는 길인데 하물며 타협하라고 가르치는 신앙노선에서 순교자가 나올 수는 없었고, 죽기로 믿으라고 가르친 신앙노선에서는 많지는 않아도 순교자가 나오게 되는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신앙노선이란 항상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모든 신앙 외모에 앞서 그 종자를 구별할 수 있는 무시못할 요소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믿는 사람의 숫자와 교회의 교세는 전남지역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반대로 경남지방은 예수믿는 사람의 숫자도 적고 교회 교세도 전남에 비하여 월등하게 적으며 이 추세는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경남지방은 한번 믿었다 하면 생명을 내놓고 끝까지 믿는 사람이 배출되고 반대로 전남지방은 쉽게 믿고 기독교가 사회를 주도하는 전성기를 만들지만 질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믿는 분들이 없습니다. 교회사적으로는 선교지를 맡고 나선 각 교파들의 신앙노선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남장로교의 이러한 신앙성경은 더구나 선교지였던 전남의 포용성과 적응력에 잘 어울렸고, 반대로 호주장로교의 비타협적이고 독선적이며 투쟁적인 신앙성격은 그 선교지인 경남일대의 칼날같고 옹색하기 이를 데 없는 지역성과 또한 잘 어울렸습니다.

③손목사님을 손목사님으로 만든 신앙노선

손양원목사님은 함안에서 호주선교부의 신앙노선에서 출발했고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이곳은 호주선교부의 제일 경건했던 권임함목사님과 최상림목사님 등이 맡아 해방후 활동하는 출옥성도 전부를 길러내거나 연결을 가졌던 곳입니다. 이인재 손명복 조수옥 손양원 등을 비롯하여 백목사님도 예수 믿고 난 뒤 다음해 이곳에서 1학기를 공부했고 그때 받은 은혜를 평생토록 증거합니다. 손양원목사님이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출옥성도로 해방 후 유명하게 출발하는 배경은 애양원교회가 들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손양원목사님의 원래 신앙 때문에 신사참배를 승리했고 손양원목사님 때문에 애양원이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손목사님의 신앙을 빼놓는다면 애양원은 대표적인 구호기관으로는 유명할지라도 신앙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곳입니다. 참고로, 애양원과 애양원교회, 그리고 소속 교단은 손양원목사님을 신사참배 거부자라 하여 제거하였고 그 가족들까지도 무참하게 내쫓았던 분들입니다.


3.한국교단 분열사에서 손목사님의 처신

①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를 두고 분열되던 양측

해방 후 한국교단은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절대다수의 교권측과 신사참배반대로 옥고를 치른 출옥성도 소수로 분열됩니다. 물론 교단은 단일의 교단이나 내부 흐름은 또렷하게 둘로 나뉩니다. 출옥성도들은 눈으로 통하고 마음으로 통합니다. 말이 필요 없고 의논이 필요 없습니다. 생사의 6년 고비를 성령에 붙들려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교권을 쥐고 신사참배를 찬성했던 이들도 자신들이 해방정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세술과 이를 위해 출옥성도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런지에 대하여는 생존법 차원에서 서로가 협력할 일과 처리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본능이 가르치는 것이므로 그렇게 많은 모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②전남 여수의 애양원교회를 맡았으나, 손목사님의 소속은 부산의 경남노회

손목사님은 그 교회가 전남 여수 신풍리라는 바닷가였습니다. 출옥성도는 전부 부산 경남에만 있었고 손목사님만 홀로 무인도와 같은 먼 여수 시골에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것보다 시간으로 교통편으로 또 인적 물적 왕래의 현장감으로 현저히 먼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교회가 진리에 올바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맡은 교회는 애양원이었으나 부산에 있던 고신 본부로 늘 오가며 뜻을 같이하였고 고려신학교 설립에는 총무로서 중책을 맡고 나섰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은 맡고 있는 교회는 전남지방의 순천노회가 소속입니다. 그러나 손목사님 자신만은 목회자의 소속으로 순천노회가 아니라 부산에 있는 경남노회 소속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자기 호적을 부산노회에서 순천노회로 이적을 해 오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순천노회, 목사는 부산노회 소속이었습니다.

이유는, 애양원교회가 소속한 순천노회는 전부 신사참배 찬성측 목사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으로 호적을 옮기면 마주치지 않을 수 없고, 또 듣고는 한 마디 반드시 하는 분이며 그 한마디는 일제 검사나 판사 앞에서도 또 고문하는 사람 앞에서도 거침없이 직격으로 발사되었고 그 후유증은 상대방이 죽든지 아니면 발언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굳이 신사참배 찬성측 목사님들로만 모여있는 순천노회로 이적을 해서까지 투쟁할 때가 아니며 또 그런 성질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손목사님은 경남노회에 적을 그대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노회 일이 있을 때 부산으로 출장을 다녔습니다. 당시는 전국이 한 교단이었고 다만 지역적으로 노회를 두고 있었으며, 목회자는 그 소속을 담임하는 교회와 달리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손목사님은 그리 처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③교회와 목사님의 소속이 달랐던 것은 바로 신앙노선의 상이

1946년 3월에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당시는 목사 안수가 참으로 어려워 그 숫자도 적었고 권위도 컸었는데 부산노회 소속 목사님으로 안수받게 된 것입니다. 해방 후 애양원교회의 교인들은 손목사님의 이런 입장을 잘 이해하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해방 전에는 그분을 내쫓고 못할 일을 많이 했으나 해방 후 손목사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또 출옥성도라는 전국의 몇 안되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실제 목회의 은혜와 사랑에 이미 녹아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일반적인 예를 따라 애양원을 담임했다고 목사님의 노회 소속을 순천으로 이적하는 것을 요구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소속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애양원교회가 특수 격리 수용된 시설 내부에 위치 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현실도 감안되어졌고 또한 손목사님이라는 인물이 순천노회에 소속하게 될 때, 일제 고등경찰도 꺾지 못했던 그의 주장을 해방 후에 다시 꺾어야 할 일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곳에 있게 된 것을 내심 반가워 할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목회 임지는 전남 여수 신풍이었으나 목회자는 홀로 부산에 있는 경남노회 소속으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4.순천노회로 자진하여 소속을 변경

①출옥성도들의 교권투쟁과 손목사님의 노회 소속 변경

손양원목사님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출옥성도라는 점으로만 말한다면 그분의 위치는 여러 수십명 중에 하나이며 고신에는 그런 분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의 분명 여러 출옥성도들 중에서도 남달랐고 그래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순교로 불러가시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온유하나 날카로운 영안이 있었습니다. 고신의 진리운동은 분명 초기에는 바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한상동목사님이 중심에 서서 분명하게 교권투쟁으로 변질되고 있었고 산순교자들의 보상확보로 나가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자칭 성자들의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해방 이전 신사참배를 육체로 행했던 총회 전체 교회들이나, 해방 후 중심이 이미 교권을 우상으로 삼고 나가는 출옥성도들의 모임이나 손양원목사님이 볼 때는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경남노회 모임 때문에 부산까지 가는 일도 대사였고 그곳에 가게 되면 출옥성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의 모의를 듣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산순교자로 대접받는 잔치의 상좌는 손목사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욕이며 가치없는 고문이었습니다.

따라서 6.25가 발생되기 전, 손목사님은 단호하게 자기 소속을 순천노회로 옮기게 됩니다. 법적으로는 전국이 단일 교단이었고 그 단일 교단의 전국 총회 소속 중에 지역적으로 순천노회가 있고 또 부산노회가 있으니 자기 목회 임지 관할인 순천노회로 옮기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②손목사님의 순천노회 소속의 의미

이미 해방후 수년간 단일 교단 내에서 신사참배 찬반을 두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막 가는 싸움으로 치닫는 이때에 출옥성도 전부의 모임이라는 가장 큰 무기를 가지고 있던 고신측(아직은 고신 교단이라는 의미의 고신이 아니라, 고려신학교 중심이라는 뜻)에 비록 한 명이었지만 그것도 손양원목사님이라는 비중의 인물이 순천노회로 옮기는 것은 지역적인 이동의 의미가 아니라 신사참배 찬성측으로 신앙노선을 옮기는 의미를 가지게 되고 이것은 전국적 투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타격이 됩니다. 이 손목사님의 행동 하나를 두고 신사참배 찬성측은, 출옥성도측을 두고 바리새파 분열주의자 손목사님이 빠져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독선주의자들이라고 마구 질타할 수 있었고, 반면 출옥성도가 중심으로 된 고신측은 손목사님이라는 인물을 두고는 타락이나 타협이나 변질이 되어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설명이 될 수 있는 다른 논리가 없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미 손목사님은 자칭 의인들이 스스로 잔치 상좌에 앉아 교권을 탐하는 회중에는 앉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반면 순천노회에서는 손목사님이 다른 출옥성도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자세를 그동안 취하여 신사참배 찬성측을 정죄하거나 몰아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부흥회와 목회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속 이동은 자신들로 귀의한다고 보았고 또 기대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고신측 출옥성도 의인의 회에서 나온 것은, 죄인이 옳아서가 아니고 타협하고 변질되어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양측이 똑 같은 문제를 안고 있으니 한국 교회 단일 교단 소속으로는 이미 지역적으로 무리하며 부산까지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순천노회로 소속한 것입니다. 소속을 옮긴 후 손목사님은 고신을 단체로는 상대하지 않았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들 중에 신앙으로 교류하고 한 마음으로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늘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손목사님의 장례식을 고신 인물들이 중심으로 진행한 것도 바로 이런 신앙성격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속은 순천노회로 왔으나 이는 고신 중심의 교권화에 동참할 수 없었던 이유지 그 내부 신앙노선이 동일하고 신앙으로 교류하던 이들은 역시 고신 소속의 여러 목사님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순천노회로 왔으나 순천노회에서 노회적 활동은 극히 최소화하였습니다. 또한 이왕 이렇게 옮기게 되었으니 옮기게 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신앙노선이 극심하게 흔들리는 곳에 있어 그들의 신앙이 세상을 향해 빨리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말씀 중심으로 돌아설 수 있는 일에 할 일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순천노회는 이후 분열되는 한국장로교회 교단사에서, 1951년 고신을 제거하는데 앞장을 서면서 총회파의 중심이 되고, 이후 총회파 안에서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교단이 분열될 때에는 통합측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분열 이전 1950년 9월에 손목사님은 순교하게 됩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에서 순교한 두 아들 때문에 이미 세계적인 성자가 되어 있었고 1950년에는 본인이 순교함으로 손목사님의 이름은 한국교회에서는 교단에 상관없이 가장 큰 인물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손목사님의 고명은 이후 손양원 상표권 확보 경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③손목사님의 순교 이후 신앙노선은 총공회로 편입

손목사님이 순교하던 1950년 9월, 손목사님이 순교한 직후부터 애양원교회는 소속인 순천노회의 수준높은 포용력으로 순천노회에 깊숙히 잠식됩니다. 이제는 소속만 두는 것이 아니고 그 신앙본질까지 동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느끼고 즉시 돌아서서 혼자라도 말씀제일주의로 걸어간 손목사님의 신앙노선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그 부인인 정양순사모님은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애양원의 많은 혜택을 뿌리치고 밤마다 자갈을 이어지고 바닷가에서 애양원 앞에 있던 동네에 예배당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년반 4-5명 학생 10여명을 데리고 2년 정도 걸려서 예배당을 짓게 되는 때의 고초는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던 손목사님 때문에 감옥 밖에서 고난 당하던 그 시절이 또 다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애양원교회의 방해는 집요하여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크게 감정이 상할 일이었으나 상관치 않고 고신 소속으로 교회를 뚜렷하게 세웠으니 오늘 신풍교회입니다. 고신이 이후 예배당 소송 등으로 나갈 때 김현봉목사님 신앙노선에 서게 되고 1975년 정양순사모님은 신풍교회를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에 소속시키도록 교회를 지도하게 됩니다. 그 자신도 거창 8월집회를 참석하다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는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을 알고 있으며 손목사님의 신앙노선도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 사모님이 신풍교회가 총공회 소속으로 돌아설 때, 백목사님만이 손목사님의 신앙과 같은 분이라고 주동교인들을 지도했던 이유입니다.


5.손목사님의 교단 소속 문제

오늘 애양원교회는 통합교단 소속으로 손목사님 묘소와 기념관 때문에 1년 4-5만명의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이 애양원교회는 손양원목사님이며, 애양원이 소속한 통합교단은 손양원목사님을 소속 목회자로 보유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신이나 합동측에서는 손양원목사님을 자기 소속 목사님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 백영희신앙노선연구회에서는, 손양원목사님은 장로교가 단일 교단으로 있었고 그 1차 분리 이전이었던 1950년 9월에 손목사님이 순교했기 때문에 손양원목사님의 소속 교단은 그 이후 분리되어 오늘까지 내려오는 고신, 합동, 통합 등 어느 교단도 자기 소속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손목사님이 목사 적을 옮겼던 순천노회는 손목사님 사후 교단의 분열시에 총회측(고신을 제거한 총회로 합동교단)으로 또 그 이후는 통합측으로 통째로 소속하게 됨으로 손양원목사님의 노회 소속 기록문건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애양원교회도 그러함으로 손목사님이 통합측으로 오해가 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목사님이 설교 중에서 손목사님이 고신에 있다가 통합측으로 갔다는 것은 교단사의 법적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고신교단이 될 측에서 장차 통합측이 될 측으로 소속을 옮겼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백목사님은 1945년 이후 급변되던 한국교회 분열사를 남다른 혜안으로 남모르는 기준으로 파악하는 분입니다. 교회사를 두고 그분에 견줄 식견과 핵심을 파악하는 분이 없다는 점에서 그분의 표현은 접하는 분의 좁은 범위에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현재, 총공회 목회자들 중에서 자기의 성향은 보수측이지만 대구공회나 서울공회와 같이 수정측으로 서게 된 분들이 흔히 자기 변호를 위해 인용하는 것이 바로, 손목사님도 고신에서 통합측으로 넘어갔으니 죄인들을 좀더 회개시키려는 의미라고 한 백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하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손목사님의 순천노회 소속 이동과 대구공회나 서울공회로 소속을 정한 분들은 그 성격과 의미 그 동기가 아주 다릅니다. 영안이 어두워 판단에 실수를 해서 그리 간 것입니다. 혹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그리 말한다면, 말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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