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일정을 뺏길 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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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2 17:42
평생을 통해 따로 운동을 해 본 적이 없다. 아주 응급할 때 잠깐 하는 것이야 있지만 기본적으로 운동으로 건강을 챙긴다는 것이 하나님 주신 육체라는 도구를 잘 관리한다는 인식보다 주를 위해 열심히 사용하다 장렬히 부서지는 것이 멋 있어 보였다. 모르면 이런 꿈도 꾸는 것이다. 모두가 유관순의 멋 있는 항쟁과 역사에 남은 추앙이지 그가 당한 고문과 고형의 매 순간을 아는 사람은 끔찍해서 고개를 돌린다.
6.25를 끝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야욕을 추구하다 당하는 일은 있어도 그마저 예전처럼 그렇게 막 하지는 않았다. 전후 세대는 오랜 세월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고생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용감하다. 무식하니 용감하지 않을 리가 없다.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 무수하다. 언론에는 도배칠을 한다. 코로나를 주며 감기 한 번 하라 하자 한국 교회는 거의 또는 모두가 도망을 갔다.
공회의 교훈은 교리적으로는 역사 발전의 제일 앞에서 진행하고 있다. 공회의 교훈의 내막은 고난 중에 과연 신앙을 지켜 내겠느냐를 끝없이 자문자답하며 평소 미리 환란의 극단을 끌어다 놓고 마음으로 또 생활 속에서 미리 연습해 보라 한다. 말하자면 고행주의 신앙으로 오해 받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를 안다면 육체를 잘 보존하기 위해 따로 약을 먹거나 운동을 따로 한다면 공회 분위기를 모른다 할 것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환을 가지게 되고 교회에 즉각 짐을 얹게 되는 상황이 되면 '치료' 차원에서 약을 먹거나 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왕 운동을 해야 한다면 공회의 신앙에 따라 그 순간도 복 되게 사용할 수 있다. 여러 방법 중에 평소 외우고 싶었던 찬송가를 한 곡 정하여 외워 질 때까지 반복한다. 걷기가 일반적인 운동인 듯하다. 걸으며 또는 뛰면서 찬송 외우기를 해 본다. 출력이 편한 세상이니 걷거나 뛰면서 가사를 볼 수 있는 글자 크기와 종이 형태를 만들면 된다. 코팅도 사무실에서 자유롭게 하는 세상이다. 찬송이나 성경을 운동하며 외울 정도면 A4 절반이면 좋다. 이 정도 크기의 코팅 기계는 요즘 몇만 원이면 된다.
불신자는 두고 갈 세상에 죄를 짓기 위해 좋은 몸이 필요하다. 묵직한 쇠뭉치를 들고 내리거나 자연을 즐긴다며 유행가를 틀어 놓고 걷거나 달린다. 우리는 찬송가를 외운다면 그 시간이 예배 시간 정도가 될 듯하다. 은혜가 되면 소리를 내고, 소리를 내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면 주변에서 쳐다 볼 것이다. 실례 되는 것은 곤란하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면 그 소리가 복음으로 전해 질 듯하다. 전도가 되고 본인은 예배가 되는 운동도 있을까? 매일 해 보면서 느끼고 좋아서 적어 본다.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다. 성경 읽기는 집중의 분산이 되면서 성경을 쉽게 대하는 습관이 들 수 있어서 속도를 낮추고 환경을 잘 고려해야 한다. 찬송은 그냥 부르면 되니 주변이 찬송 때문에 불편하게 되지 찬송이 주변 때문에 흐려 지는 문제는 별로 없어 보인다.
기숙사 생활을 2 년 정도 하면서 강의 시간과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 시간 외에는 찬송가만 부른 분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온 목사님 한 분이 '어떻게 그렇게 장송가만 부르냐'고 하더란다. 공회 찬송가는 이미 한국 교계에서도 장송곡 정도로 본다. 흥으로 유별 난 아프리카 분이었으니 그랬을 듯하다. 그 말이 나오자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아프리카 목사님에게 오늘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한 곡만으로 그렇게 부르냐고 물었다. 그 목사님은 오늘 한 곡도 두 번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한다. 아프리카 목사님의 찬송은 다른 사람이 들을 때 그렇게 들렸을 듯하다. 찬송은 내 마음을 모으며 주변이 불편하지 나는 상관이 없다. 그 대신 깊이 들어 가는 면이 아쉽다. 그렇다 해도 분산 되는 내 마음 나의 안팎을 묶어서 감사로 풀어 내니 운동을 할 때 그 시간이 아까울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하다.
연구소 직원 중에 노동을 몇 년하던 분이 짐만 져 나르는 곰방, 고운반을 하며 그 날 새벽의 설교 중 묵상하며 풀어야 할 내용을 간단히 적거나 성구를 적어서 일을 하는 중간에 봐 가며 하루 종일 묵상과 노동과 돈을 번 이야기를 자주 한다. 연구소가 추구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공회의 교리와 성경 해석과 말씀의 깊이는 굉장하다. 이 것을 소화 시켜 자기 것을 만들고 그리고 이 것으로 어떤 현실에서도 실제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을 해 보는 사람이라면 운동을 하거나 생활 속에서 이런 식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은 된다. 이 육체를 주님이 쓸 때 한 번에 던져 부셔야 할 터인데.. 그런데 그 생각이 나 중심의 감성 감상일 수도 있다. 한 주간도, 지난 한 해도, 요즘 수 년을 건강에 유념을 하고 있다. 교회에 짐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기도와 함께, 이 시간 때문에 성경 읽기와 각종 업무의 진행이 늦어 질 때마다 망설여 진다. 던져 버리고 맡겨 놓고 갈까.. 목사님이 계실 때는 이렇게 망설여 지면 직접 여쭌다. 그리고 무조건 그렇게 해 버린다. 지금은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내가 져야 한다. 그래서 망설여 진다. 아낀 것이 과연 잘 사용 될까, 공연히 호들갑만 부리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인내가 없어 계속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 각종 운동이 하루와 한 주간에 고정이 되면서 몸에 익어 지니 이제는 하루라도 빠지거나 조금이라도 줄이게 되면 너무 아쉽다.
주신 현실, 말씀으로 하나씩 따지며 대처해 보면서 이 말씀의 가치를 보배롭게 느낀다. 말씀으로 자기 평생에 모든 문제를 실제로 다 적용해 보고 해결해 본 분들이 계실까? 궁금하다. 이 노선은 그러하다.
6.25를 끝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야욕을 추구하다 당하는 일은 있어도 그마저 예전처럼 그렇게 막 하지는 않았다. 전후 세대는 오랜 세월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고생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용감하다. 무식하니 용감하지 않을 리가 없다.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 무수하다. 언론에는 도배칠을 한다. 코로나를 주며 감기 한 번 하라 하자 한국 교회는 거의 또는 모두가 도망을 갔다.
공회의 교훈은 교리적으로는 역사 발전의 제일 앞에서 진행하고 있다. 공회의 교훈의 내막은 고난 중에 과연 신앙을 지켜 내겠느냐를 끝없이 자문자답하며 평소 미리 환란의 극단을 끌어다 놓고 마음으로 또 생활 속에서 미리 연습해 보라 한다. 말하자면 고행주의 신앙으로 오해 받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를 안다면 육체를 잘 보존하기 위해 따로 약을 먹거나 운동을 따로 한다면 공회 분위기를 모른다 할 것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환을 가지게 되고 교회에 즉각 짐을 얹게 되는 상황이 되면 '치료' 차원에서 약을 먹거나 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왕 운동을 해야 한다면 공회의 신앙에 따라 그 순간도 복 되게 사용할 수 있다. 여러 방법 중에 평소 외우고 싶었던 찬송가를 한 곡 정하여 외워 질 때까지 반복한다. 걷기가 일반적인 운동인 듯하다. 걸으며 또는 뛰면서 찬송 외우기를 해 본다. 출력이 편한 세상이니 걷거나 뛰면서 가사를 볼 수 있는 글자 크기와 종이 형태를 만들면 된다. 코팅도 사무실에서 자유롭게 하는 세상이다. 찬송이나 성경을 운동하며 외울 정도면 A4 절반이면 좋다. 이 정도 크기의 코팅 기계는 요즘 몇만 원이면 된다.
불신자는 두고 갈 세상에 죄를 짓기 위해 좋은 몸이 필요하다. 묵직한 쇠뭉치를 들고 내리거나 자연을 즐긴다며 유행가를 틀어 놓고 걷거나 달린다. 우리는 찬송가를 외운다면 그 시간이 예배 시간 정도가 될 듯하다. 은혜가 되면 소리를 내고, 소리를 내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면 주변에서 쳐다 볼 것이다. 실례 되는 것은 곤란하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면 그 소리가 복음으로 전해 질 듯하다. 전도가 되고 본인은 예배가 되는 운동도 있을까? 매일 해 보면서 느끼고 좋아서 적어 본다.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다. 성경 읽기는 집중의 분산이 되면서 성경을 쉽게 대하는 습관이 들 수 있어서 속도를 낮추고 환경을 잘 고려해야 한다. 찬송은 그냥 부르면 되니 주변이 찬송 때문에 불편하게 되지 찬송이 주변 때문에 흐려 지는 문제는 별로 없어 보인다.
기숙사 생활을 2 년 정도 하면서 강의 시간과 책상에 앉아 책을 보는 시간 외에는 찬송가만 부른 분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온 목사님 한 분이 '어떻게 그렇게 장송가만 부르냐'고 하더란다. 공회 찬송가는 이미 한국 교계에서도 장송곡 정도로 본다. 흥으로 유별 난 아프리카 분이었으니 그랬을 듯하다. 그 말이 나오자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아프리카 목사님에게 오늘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한 곡만으로 그렇게 부르냐고 물었다. 그 목사님은 오늘 한 곡도 두 번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한다. 아프리카 목사님의 찬송은 다른 사람이 들을 때 그렇게 들렸을 듯하다. 찬송은 내 마음을 모으며 주변이 불편하지 나는 상관이 없다. 그 대신 깊이 들어 가는 면이 아쉽다. 그렇다 해도 분산 되는 내 마음 나의 안팎을 묶어서 감사로 풀어 내니 운동을 할 때 그 시간이 아까울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하다.
연구소 직원 중에 노동을 몇 년하던 분이 짐만 져 나르는 곰방, 고운반을 하며 그 날 새벽의 설교 중 묵상하며 풀어야 할 내용을 간단히 적거나 성구를 적어서 일을 하는 중간에 봐 가며 하루 종일 묵상과 노동과 돈을 번 이야기를 자주 한다. 연구소가 추구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공회의 교리와 성경 해석과 말씀의 깊이는 굉장하다. 이 것을 소화 시켜 자기 것을 만들고 그리고 이 것으로 어떤 현실에서도 실제 그렇게 살아 보려고 노력을 해 보는 사람이라면 운동을 하거나 생활 속에서 이런 식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은 된다. 이 육체를 주님이 쓸 때 한 번에 던져 부셔야 할 터인데.. 그런데 그 생각이 나 중심의 감성 감상일 수도 있다. 한 주간도, 지난 한 해도, 요즘 수 년을 건강에 유념을 하고 있다. 교회에 짐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기도와 함께, 이 시간 때문에 성경 읽기와 각종 업무의 진행이 늦어 질 때마다 망설여 진다. 던져 버리고 맡겨 놓고 갈까.. 목사님이 계실 때는 이렇게 망설여 지면 직접 여쭌다. 그리고 무조건 그렇게 해 버린다. 지금은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내가 져야 한다. 그래서 망설여 진다. 아낀 것이 과연 잘 사용 될까, 공연히 호들갑만 부리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인내가 없어 계속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 각종 운동이 하루와 한 주간에 고정이 되면서 몸에 익어 지니 이제는 하루라도 빠지거나 조금이라도 줄이게 되면 너무 아쉽다.
주신 현실, 말씀으로 하나씩 따지며 대처해 보면서 이 말씀의 가치를 보배롭게 느낀다. 말씀으로 자기 평생에 모든 문제를 실제로 다 적용해 보고 해결해 본 분들이 계실까? 궁금하다. 이 노선은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