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의 '집회 역사'를 관리한 가정
공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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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1 12:56
1960년대까지 공회는 거창의 삼봉산에 집회와, 부산의 금정산에 집회 2 가지로 방향을 잡고 내려 왔다.
1970년 안팎이 되면서 참석의 규모가 확대 되고 산 속의 야산 집회를 이어 갈 수 없게 되자 대구의 노곡동과 거창의 도평으로 집회 장소를 옮기고 1989년 백 목사님의 별세 때까지 이어 진다. 이 2 곳은 접근성과 함께 산집회를 지켜 갈 정도로 시작을 했으나 주변의 수만 평을 확보하면서 5월에 5천명과 8월에 1만 5천만이 모이는 한국교회 최대 최고의 집회를 향해 치닫는다.
1957년의 삼봉산 첫 집회부터 다 참석한 분들은 현재 거창에 계신 1 명 정도와 고신에 계신 원로 목사님 1 명 정도일 것이다. 현재 공회 목회자들은 제일 고령에 제일 오래 전부터 참석한 분이라 해도 일단 해당이 없다. 당시 목회자 중심으로 출발을 했고 봉산교회에 연고가 있는 일반 교인이 몇 명 참석한 정도인데 내가 알기로는 모두 돌아 가셨다. 내 셈에 오류가 있으면 몇 명 정도가 더 있지 그 이상은 아니다. 태풍이나 폭우가 불어 닥치면 금정산이나 삼봉산에서는 대책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목회자나 신앙이 있는 교인들이야 원래 그런 폭우 속에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 왔으나 갈수록 참석하는 교인이 많아 졌기 때문에 어린 교인 때문에 장소를 옮겼다.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야산이었고 산 속의 향기와 분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넓은 땅을 평소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관리인을 두게 되었다. 이용식 집사님, 백 목사님은 그렇게 불렀다. 모친을 모시고 혼자 살았고 거창 창동교회의 이덕순 여청년과 결혼하여 세 식구가 거창의 도평 기도원, 장생골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땅이 넓으나 농지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밭 농사와 함께 평소 양봉을 해서 생활을 했다. 공회의 집회 역사는 '서부교회'와 '양성원'과 함께 '집회'를 빼놓을 수 없다. 양성원이나 서부교회는 특별한 분들의 개별 역사가 되지만 '집회'란 전국의 공회 교인이 공회 교인으로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
처음에는 스레트 방 2 칸으로 기억이 난다. 집회가 되면 그 방 중에 하나를 강사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집회 때 모든 전국 교인들은 급하면 이 집에 가서 뭐든지 빌렸다. 모친은 까칠한 분이다. 이성수 이덕순 부부는 젊은 분들이지만 천성적으로 부지런하며 인심 좋고 건강하고 누구든지 가족처럼 상대했다. 모두가 기억하는 분, 이 관리사의 이 가족이 집회의 숨은 또 하나의 기둥이었다. 2022년 10월 10일, 뜻밖에 이덕순 집사님의 권사 취임식을 듣게 되었다. 복 된 가정으로 사셨으니 종신토록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한다. 사진 등의 몇 가지 자료를 더해 보고자 한다.
(계속)
1970년 안팎이 되면서 참석의 규모가 확대 되고 산 속의 야산 집회를 이어 갈 수 없게 되자 대구의 노곡동과 거창의 도평으로 집회 장소를 옮기고 1989년 백 목사님의 별세 때까지 이어 진다. 이 2 곳은 접근성과 함께 산집회를 지켜 갈 정도로 시작을 했으나 주변의 수만 평을 확보하면서 5월에 5천명과 8월에 1만 5천만이 모이는 한국교회 최대 최고의 집회를 향해 치닫는다.
1957년의 삼봉산 첫 집회부터 다 참석한 분들은 현재 거창에 계신 1 명 정도와 고신에 계신 원로 목사님 1 명 정도일 것이다. 현재 공회 목회자들은 제일 고령에 제일 오래 전부터 참석한 분이라 해도 일단 해당이 없다. 당시 목회자 중심으로 출발을 했고 봉산교회에 연고가 있는 일반 교인이 몇 명 참석한 정도인데 내가 알기로는 모두 돌아 가셨다. 내 셈에 오류가 있으면 몇 명 정도가 더 있지 그 이상은 아니다. 태풍이나 폭우가 불어 닥치면 금정산이나 삼봉산에서는 대책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목회자나 신앙이 있는 교인들이야 원래 그런 폭우 속에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 왔으나 갈수록 참석하는 교인이 많아 졌기 때문에 어린 교인 때문에 장소를 옮겼다.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야산이었고 산 속의 향기와 분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넓은 땅을 평소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관리인을 두게 되었다. 이용식 집사님, 백 목사님은 그렇게 불렀다. 모친을 모시고 혼자 살았고 거창 창동교회의 이덕순 여청년과 결혼하여 세 식구가 거창의 도평 기도원, 장생골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땅이 넓으나 농지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밭 농사와 함께 평소 양봉을 해서 생활을 했다. 공회의 집회 역사는 '서부교회'와 '양성원'과 함께 '집회'를 빼놓을 수 없다. 양성원이나 서부교회는 특별한 분들의 개별 역사가 되지만 '집회'란 전국의 공회 교인이 공회 교인으로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 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
처음에는 스레트 방 2 칸으로 기억이 난다. 집회가 되면 그 방 중에 하나를 강사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집회 때 모든 전국 교인들은 급하면 이 집에 가서 뭐든지 빌렸다. 모친은 까칠한 분이다. 이성수 이덕순 부부는 젊은 분들이지만 천성적으로 부지런하며 인심 좋고 건강하고 누구든지 가족처럼 상대했다. 모두가 기억하는 분, 이 관리사의 이 가족이 집회의 숨은 또 하나의 기둥이었다. 2022년 10월 10일, 뜻밖에 이덕순 집사님의 권사 취임식을 듣게 되었다. 복 된 가정으로 사셨으니 종신토록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한다. 사진 등의 몇 가지 자료를 더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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