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인도(10) - 개간과 길바닥 : 분교로 마무리 했으나

남단에서      


e1e0ddd457e37c9a55be686de71c57a2_1734778424_6055.png

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시대적 인도(10) - 개간과 길바닥 : 분교로 마무리 했으나

담당a 0 18
(서부주교를 연구하는 의미)

- 서부교회의 내용
서부교회는 그 실제 규모와 내용과 성격이 외부에 알려 진 대단한 소식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다. 광야 40년에 비할 정도였다.
하나의 교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면을 거의 다 가졌다. 교회론 차원에서 연구를 하자면 끝이 없다. 겉만 알려 졌다.
80년대 주교의 현상 하나만 주제로 출판한 적이 있고 그 개략의 특징으로 다시 출간한 적이 있으나 모두 개괄적 소개뿐이다.
이 번 10 개의 주교 관련 글은 교회 운영과 부흥을 두고 살펴 볼 만한 주제나 각 주제에도 논문으로 살펴 볼 많은 소재가 있다.

- 80년대 서부주교의 의미
오늘 우리가 선 신앙의 급변 상황을 지난 날의 사례로 오늘을 대처하려고 70년대와 80년대 주교를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오늘의 급변을 느끼기나 할지 모르겠으나 겉은 비슷하고 속은 판연히 다르다. 서부주교의 70년대와 80년대가 그러 했었다.
그 사례를 가지고 과거 교회와 예배가 오늘 내용적으로 어떻게 급격히 해체가 되고 와해 되는지 살펴 대처를 살펴 보고 있다.
70년대 서부주교가 외적 내적으로 이상적이고 80년대를 거치며 외적 모습은 어느 정도 유지를 하나 내적으로는 달라 졌다.

80년대 서부주교는 70년대의 이상적 내용을 급격히 잃게 되며 90년대가 되자 서부주교는 사실상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런데 70년대 주교와 비교하면서 어떻게 변질 된 80년대 주교를 통해 오늘 이후의 우리가 대처할 소망을 얻는다고 할까?
80년대 주교가 70년대의 보배를 모두 잃어 버리는 듯했으나 목사님은 80년대를 거치며 그 이후를 미리 대처하고 있었다.
70년대와 달라 진 80년대를 직접 겪고 있던 목사님이 90년대 이후를 낙관했을까, 더욱 어려워 질 것으로 봤을까? 후자다.

그는 70년대보다 훨씬 악화 된 80년대를 겪으며 당시의 어려움에 일회성 대처로 끝내지 않고 주님의 인도를 읽고 있었다.
성경의 진리는 변치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시대를 바꾸며 진리를 바르게 아는지 바뀐 현실에도 바르게 실천하는지를 본다.
80년대의 악화 된 현실에서 충성을 하면서 그는 80년대 이후를 '분교 30 개'라는 대책으로 주님의 인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70년대의 주교는 서부주교 하나를 통해 주신 광야 40 년의 1 인 지도 주교였고, 80년대를 지켜 본 그는 가나안 이후를 봤다.

- 광야 40 년과 같았던 70년대
광야 40 년은 역사에 한 번만 주신 특별한 인도다. 그 인도는 그 인도대로 필요하나 그 인도보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 이후다.
가나안 이후 12 지파와 지파 내 가족 단위로 위치와 사명을 따로 주셨다. 이렇게 될 때 바로 되도록 광야 40 년을 만들었다.
12 지파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명을 가지려면 가나안을 입성하면서 각 지파 별로 따로 싸워야 하고 개간 건설을 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광야 40 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입성 후 구약의 끝까지 늘 광야 40 년을 반복 반복해 주셨다.

한 지파 내 가족 단위로 다시 위치와 사명이 달라 진다. 이 작은 한 가족이 어떻게 강대한 이방 속에서 믿고 살 수 있을까?
그 때마다 광야 40 년을 기억하도록 광야 40 년을 일부로 기적과 능력으로만 인도했고 인간의 노력은 거의 다 빼 버렸다.
70년대의 주력 중 80년대에 소외 된 이들이 80년대를 비판할 때, 70년대 주교는 능력이고 80년대 주교는 인본이라 한다.
광야 40 년이 모세의 실력인가, 지도부의 신본인가? 그 40 년을 그렇게 만든 것은 가나안 시대를 위해 주신 거울이었다.

거울이 거울 되었는가? 시냇가에 흩어진 모래 알을 주인이 모아서 콘크리트에 붓기도 하고 또 녹여서 거울도 만들 수 있다.
확실한 것은 70년대 주교 반사의 충성을 80년대에 그대로 갖다 놓으면 절반 이하의 실적도 내지 못한다. 실제 그러 했다.
70년대 환경이 80년대 환경으로 바뀌던 시점, 바로 그 순간 주교의 현장을 모를 듯했던 그는 상상 못할 앞 날을 제시했다.
1981년경? 대략 기억이 그렇다. '앞으로 주교의 전도 환경이 급변 되어 이런 기회는 없어 진다. 그 때를 대비하려면...'

누구 하나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는 않은 듯했다. 70년대의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고 비록 어렵기는 해도 버티고 있었다.
70년대보다 고생이 많아 그렇지 여전히 이 고생은 할 수 있는 범위였고 주교 외형은 유지가 되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백 목사님은 신앙 외적 생활에서도 안테나가 특이하게 민감한 분이다. 그 자녀들도 모두 그렇다. 그래서 남 다른 면이 있다.
그러나 신앙 문제가 되면 태생적 특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된다. 말마다 예언이고 훗날 보면 그렇게 되어 버린다.



(분교 30 개, 그냥 지부가 아니었다.)
- 한 교회의 발전 형태
한 교회가 대형화가 되었다면 교인을 끄는 강한 힘이 있다는 뜻이다. 멀리서도 모여 든다는 뜻이 되고 분교가 생기게 된다.
그 교회의 성향에 확실히 끌리는 교인들이 본 교회로 가기 어려워 지면 분교보다 발전 된 지교회를 만들게 된다. 필연이다.
교인에게 줄 것이 없는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끌리는 교회를 연구하려 하지 않고 목사가 우상화 되어 나쁘다고 비판을 한다.
천주교처럼 구역으로 나누자는 논리를 편다. 천주교가 그 짓하다 우상화로 나갔고 그 것을 개혁했는데 돌아 가자는 논리다.

교인이 끌리는데 그 끄는 힘과 방법이 성경을 벗어 나면 이단이거나 타 종교가 된다. 성경 안에서 끌린다면 훌륭한 것이다.
서부교회의 방법에 잘못이 있었는가? 문제는 서부주교의 반사 역량이 80년대의 악화 된 환경을 넘어 서지 못하고 있었다.
70년대 환경에서는 모두가 다윗의 용사 같았으나 80년대 환경에서는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다. 다윗은 사후 조처를 했다.
백 목사님은 80년대 들어 서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날을 헤아리고 있었다. 우선 준비할 기회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부부가 이혼하여 두 가정이 되면 깨어 져 부서 진 파괴다. 그 부부의 아이가 자라 가정들을 이루면 파괴가 아니라 성장이다.
싸우지 않을 일로 싸우고 교회가 분리 되어 많아 지면 교회 파괴가 된다. 한 교회가 자라 가며 새로운 교회를 세워 나가면?
이는 교회의 생명 역사며 복음 운동이라 한다. 80년대 상황이 전개 되면서 서부주교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봐도 어려웠다.
80년대라는 상황을 서부주교가 만들었는가? 주님이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도 70년대로 알고 달리게 달리면 탈선이 된다.

- 부산 전역의 주교 분포
비록 교회 주변의 학생이 더 많았으나 그들은 본 교회에서 우선 직접 관리가 된다. 바로 이 상태가 70년대 또는 그 이전이다.
주일의 오전 예배는 이전처럼 본 교회에 그대로 모이고, 오후 예배는 본 교회로 올 수 없는 곳에 분교를 세워 모이게 했다.
세상 말로 표현하면 절묘한 비책이었고 80년대의 악화 된 주교 환경을 오히려 복 되게 사용하여 70년대를 뛰어 넘게 했다.
70년대는 오전 출석이 8천 명이라 해도 오후 예배는 수백 명 정도였다. 80년대에 분교를 만들자 오후 출석이 4천을 넘었다.

세계 교회는 물론 한국의 교계도 교회의 출석수는 1부 2부를 합한다. 서부주교를 그렇게 합산하면 매주 1만 명을 넘긴다.
70년대보다 내용적으로 더 발전을 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목사님은 자기 단속을 위해 오전만으로 늘 충성을 독려했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한 사람이 같은 환경에서 천지 차이가 난다. 시골 학교 1 등이 1 등이라고 안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내 기준으로 점수를 보면 중간도 가지 못한다. 어느 기준으로 자기를 위로할지 또는 노력할지는 자기 결정이다.

그는 80년대 내내 오전과 오후를 합산하여 70년대보다 나아 졌다는 언급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분 자세가 그렇다.
나 역시 오늘 환경을 대처하기 위해 80년대 서부주교를 최근에 살피면서 또한 이 글을 써면서 이제 냉정히 돌아 본 것이다.
당시의 그 곳에 주력으로서는 70년대와 비교하며 80년대 주교의 오전 출석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다. 이 것이 복이다.
그러나 오늘 냉정히 그 때를 객관적으로 살필 상황이다. 오전 8천에 오후 5백과 오전 7천에 오후 4천, 어느 것이 나은가?

한 교회의 제일 간판이 되는 주일 대예배의 1 회 회집 규모로만 본다면 주일 오전의 출석 집계에 노력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본다면, 주일 오전에 이어 주일학생들이 주일 오후를 다시 출석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 난 것이 된다.
70년대부터 시작 된 도심 재개발, 도로나 판자촌 정비, 80년대에 본격화 된 사회의 문화 생활로 주교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다 반사들의 활동은 넓어 져 갔다. 전도를 너머 선교로는 좋으나 내실 있게 기르는 면에서는 안 된다.

반사가 너무 어리다. 환경은 너무 불리 해 갔다. 70년대의 반사들과 비교하면 지도부부터 어리고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일 오전만을 기준으로 보면 70년대가 절정이고 80년대는 내용적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엄청 난 반전이 일어 난 것이다. 해결이 없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듯한 서부주교는 분교의 오후 예배로 일어 났다.
그리고 이 분교는 주교로 그치지 않고, 분교를 통해 백영희 사후가 되면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분규와 붕괴를 막게 된다.

- 백영희 사후의 더 나은 소망
맨 손에서 한 지도자가 일으켜 세운 교회, 그 교회가 이단이거나 교회 외적 요인으로 큰 단체를 이룬 곳이 아닌 경우에
그 지도자가 죽으면 여지 없이 정통성 논쟁과 노선 수정 또는 고수를 두고 산산조각이 난다. 이 나라 우리 수준이 그렇다.
서부교회는 그 어떤 교회들보다 그럴 소지가 많았다. '공회'라는 노선이 그렇고 백 목사님의 신앙과 목회 세계 때문이다.
목사님 스스로 늘 말을 했으나 대책은 없었다. 다른 교회는 후계를 구축하여 분쟁을 최소화 하나 공회는 그냥 맡겨 놓는다.

백 목사님은 생전에 가르칠 것을 모두 가르쳤다. 또 앞에 서서 본을 보였고 공회와 양성원과 연구소와 교회를 다 이루었다.
그런데 배운 이들의 수준은 천하디 천하다. 공회나 양성원이나 연구소는 나뉜다 해도 공회의 특성 상 사실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개별 교회의 경우는 극심한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서부교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세상처럼 대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주교의 활동 범위가 넓어 지며 자연스럽게 분교라는 것이 생겨 졌고, 분교를 다시 들여다 보니 사후 대비가 되었다.

분교를 통해 오후 예배가 견실해 지고 심지어 수요일 오후의 삼일 예배까지 드리게 되었다. 그 주변 어느 교회보다 나았다.
그리고 그 주변의 전도에도 더 유리했고 그 주변의 불신 가정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가 주변에 있음을 심었다.
이제 장년반 전도가 시작되었다. 그 분교를 맡은 책임자들은 타 교회로 말하면 교육 전도사가 아니라 부목의 역할이었다.
일반 반사일 뿐인데 이미 한 교회의 개척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이었다. 이 분교가 제대로 운영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1988년이 되자 그는 1989년을 끝내지 못하고 임종을 한다며 준비를 했다. 80대였으나 건강 검진을 하니 40대 건강이다.
백 목사님은 평생 순교를 원했고 자연사를 원치 않았다. 그가 순교가 가능하지 않은 평화시에 순교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실 별세라는 상황, 서부교회는 어떻게 될까? 분교가 개척 교회로 분리 되면 자연히 성장적 해결이 된다.
백영희 한 인물 때문에 형성 된 세계 10대 교회, 그 교회 안이나 공회 내에는 그 누구도 그의 10 분 1을 감당할 이가 없다.

그렇다 해도 본 교회를 지켜 왔으니 지킬 교인은 있을 것이고, 후임에게 은혜 받지 못하는 교인은 분교로 개척하면 된다.
또 은혜 여부를 떠나 백 목사님 생전에 배우느라고 목회를 해야 할 분들이 교인으로 있던 경우는 이제 개척을 하면 된다.
백 목사님 1 인 체제의 서부교회가 후임에 의해 그대로 이어 지면서 본 교회가 부산 전역에 30 개 교회를 세워 나간다..
이 것이 백 목사님의 유언이고 주님이 서부교회의 1989년까지 베푼 89년대 식 사회 환경을 통해 베푼 은혜의 기회였다.



(개척과 파괴, 개간과 길바닥)
공회 교인은 마13장의 길 밭과 옥토 밭을 잘 안다. 다 같은 밭이었으나 사람이 많이 밟고 밟게 되면 길이 된다. 길바닥...
사람이 세상 지식과 경험이 계속 부딪히고 접하면서 그 속에 하나님이 만든 원래의 인격과 신앙을 짓밟으면 강퍅해 진다.
말씀을 들어도 감이 없을 정도로 강퍅한 심령은 말씀으로 자꾸 쪼아 대고 파고 깨고 으깨야 부드러워 진다. 회개란 이렇다.
서부교회를 혼자 맡아 지도할 수가 없다면 이미 준비 된 30 개 분교를 통해 개척을 후원하면 된다. 서로가 좋아 진다.

분교를 많이 내면 교회 안에서후임 목사를 멱살 잡거나 4층을 독립 예배당으로 만들 분들이 개척에 그 힘을 쏟아 좋다.
반대할 사람은 반대할 시간에 그들의 신앙으로 개척을 하면서 사람이 되고, 머리가 굵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분가를 한다.
당장에는 서부교회 2층 본당에 앉는 숫자가 줄겠지만 그들은 서부교회를 모교회로 삼아 출가를 하고 개척을 하게 되면
훗날 그 개척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 늘 본가로 돌아 오고 또 본가에서 불가피하게 이사하는 이들은 개척교회로 간다.

결국 본 교회의 분란과 분열을 막고 개척을 통해 서부교회의 내용과 신앙을 넓히고 기르며 다시 본 교회로 돌아도 온다.
이 것이 목회를 해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가정 생활을 제대로 해 보면 상식이니 교회는 가정과 같아서 그리 된다.
그런데 후임으로 오는 사람, 또 목사님 생전에 이미 상위 서열에 올라 서서 너무 위대해 져 버린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평양의 김 씨들처럼, 천주교의 1인 체계화처럼, 내 것이면 좋고 아니면 다 깨어 지고 엎어 버려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


서부교회는 주님의 인도로 백 목사님이 세계 최대 주일학교? 실은 세계 최고 최대의 서부교회를 그 사후까지 준비했으나
막상 1989.8.27. 장례를 치르게 되자 많고 많은 복의 길들 중에 망하고 망할 선택만 연이어 하게 된다. 분교의 경우까지도.
우선 서부교회의 자칭 최고 공로자며 신앙가들이 남정교회로 개척을 한다. 예배당을 6개월 분탕칠 분풀이를 해 놓고서야.
이왕 같이 가지 못할 것이면 조용히 개척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멀지 않은 세월에 양측이 비교가 되어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서부교회에서 그들을 모시든, 서부교회에 실망한 이들이 고신이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그들에게로 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행동, 끝장을 볼 데까지 다 헤집어 놓고 이제 있기도 민망하니 나갔다. 서로가 다시는 못 보도록..
서부교회의 20%가 나가며 했던 일이다. 그들의 결과가 잘 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저주가 아니라 그냥 설명하는것이다.
남은 80%, 그들은 후임을 약하게 보고 그 후임을 잡고 교회를 흔들기 시작했다. 후임은 흔들려도 교인은 흔들리지 않는데.

여기에다 후임은 앉기도 민망한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에 모두가 모여야 하며 분교로 나가면 역적이라고 막기에 급했다.
자기 그릇만큼 앉아 있게 되고 그 이상의 교인은 저절로 넘쳐 흘러 가는 법인데 책의 역사는 알아도 현장의 역사를 모르니
막으면 막힌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렇게 막아서 막혔는가? 이후의 상황이 그 때의 결정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 앉아 있는 이들은 후임의 실력이며 그릇일까? 서부교회나 애양원교회 식의 특성은 돌부처를 갖다 놓아도 유지 된다.

손양원 백영희에게 배워 본 이들은, 그 은혜 받은 그 자리를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고수하고 행동을 유지하는 성향이 있다.
애양원이 손 목사님 사후,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바로 오늘의 애양원으로 방향을 바꿨다. 초기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서부교회 역시 40 년 후 꼭 같은 길을 시작하고 있었다. 안타까울 뿐이다. 인자는 기록 된 대로 가지만 그 자는 화가 있다.
그런데 그 자들은 자기 그릇인 줄 안다. 심지어 주님을 팔았지만 절대 주권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궤변까지 나온다.

1989년 8월 27일, 이 날 이후 서부교회는 살아 있던 서부주교와 서부교회의 생동하던 복음 운동이 바로 석회화가 됐다.
폼페이 도시가 순간적으로 화산재로 고형화 되어 최근에 발굴을 해 보니 당시의 한 순간을 정지 화면으로 본다고 한다.
역사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은 많다. 역사를 실제 써 먹는 이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특히 이 나라, 우리가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 때를 철저히 되짚어 볼 기회를 가지고 있다. 그 때도 일부는 목사님 생전을 회상하며 길을 찾은 경우가 있다.


- 개척에 나선 분교
그 분 사후, 그 생전에 마련 된 30 개 분교 중 장림분교가 제일 먼저 서진교회로 개척했다. 서부교회 서 쪽이란 뜻이다.
이 개척을 두고 온갖 패악을 다 저질렀던 분들, 아직도 그 중에 단 1 명도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1991 년의 일이다. 서진교회를 이어 80년대의 서부주교를 이끌던 책임자가 좌천동 분교를 성남교회로 개척하게 된다.
그 두 교회를 분교에서 개척한 이들이 백 목사님 생전 마지막까지 5층에 앉던 5 명 중에 주교와 특수반의 책임자들이다.

5 층 백 목사님 집무실이자 숙소를 언제나 드나 들면서 목사님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또 질문하고 지시를 받는 이들이다.
5 명 중 나머지 3 명은 서부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가장 위상이 컸다. 분교의 개척화는 알면서도 그냥 안주했다.
백영희 사후의 후임자에게 어떤 기대도 간섭도 하지 말고, 꼭 싫다면 분교로 개척하라! 이 것이 그 분과 이 곳의 입장이다.
1990년부터 어지간히 매도하던 이 주장에 대해 반론하는 분들을 보셨던가? 부활은 알지만 시체 도둑으로 덮어 버렸다.


(오늘에 돌아 본 80년대)
80년대를 하면서 나는 오늘을 읽는다. 지난 날과 이제는 달라도 너무 달라 진 현재. 나는 현재를 살지 과거를 살지 않는다.
오늘 모두가 교회와 예배를 해체하고 변형 시키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80년대 서부주교를 보며 나는 길을 찾아 본다.
오늘이기 때문에 더욱 더 과거의 교회와 예배를 고수하는 것이 만사 좋다는 것이다. 찬송가 201 곡이 정확히 그 사례다.
1983년 교계는 새찬송가와 합동찬송가를 모아 통일찬송가로 출발을 했다. 공회 201곡은 대안이 아니라고 모두 반대했다.

세월 속에 통일찬송가는 곁 길로 끝나지 않고 난장판이 되었다. 이제는 덮을 수도 없고 낚시를 문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
초기 공회 찬송은 참 불편했다. 그런데 갈수록 빛이 난다. 이제는 찬송 세계에서는 하늘의 별처럼 독보적으로 빛이 난다.
서부주교, 70년대와 80년대는 환경이 달랐다. 그래서 무너 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더욱 빛 나는 주교가 됐다.
오늘의 서부주교, 부산시 서구 동대1가 381번지에 있을까, 아니면 미아가 되어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찾아 볼 일이다.

1970년대 전에는 교파를 떠나 주일이 있었다. 80년대부터 교회와 예배가 교계를 떠나 버렸다. 공회는 가지고 있었다.
2020년, 정확히 2월이면 코로나가 세계와 국내를 흔들었다. 그리고 남아 있던 교회와 예배 몇몇이 마저 사라 져 버렸다.
이제 2022년 8월, 코로나의 코메디가 끝? 있난 지 반 년 5개 월째다. 현재도 교회와 예배라는 것이 생존한 곳이 있을까?
그 것이 아직도 생존을 했다면 그 것은 희귀종일 것이고 멸종 직전일 것이다. 보존할 가치가 있을까? 과연 가능할까?

이제는 생존의 가능성조차 없고, 만일 있다면 더 이상 생존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살펴 보는 것이다.
흔히들 6.25 전쟁이 전국을 휩쓸면서 남한의 호랑이는 아주 멸종이 되었다고 한다. 6.25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지리산처럼 생존 가능성이 있는 곳을 수 만의 빨치산과 아군이 휩쓸기를 몇 번인가? 그 덩치에 살아 남을 수 있을까?
교계의 분포와 상황, 공회의 분포와 상황, 오늘의 사회 여건 등을 고려해 보면 멸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물론 곳곳의 동물원에는 여전히 호랑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 호랑이도 우리가 말하는 호랑이가 맞는가? 맞다면 있다.
용인 자연농원에 방사한 호랑이도 호랑이라고 하면 이 글을 읽으며 화를 낼 듯하다. 이 글은 이 글의 기준이 따로 있다.
서부교회 후임자들이 없애 버린 분교, 후임자들은 분교를 봉쇄했다. 오늘도 그 분교들은 운영이 되는데 무슨 소리인가?
이 쪽에서 보면 분교를 봉쇄해서 생전의 분교가 분교를 살리고 서부교회를 살려야 하는데 가마솥에 삶아 버린 듯하다.



(서부주교의 아쉬움에서 오늘을)
백영희는 자기 사후에도 서부주교와 서부교회가 새로 주시는 현실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인도하는 주님을 따르게 했다.
그에게 잘 배웠다면 그의 사후 그의 지도가 없다 해도 변경 된 시대에서 서부주교와 서부교회가 더욱 발전하게 해 놓았다.
이런 면까지 생각해 본다면 그는 단순히 위대한 목회자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는 주님과 동행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주님과 동행이란 주님이 알려 주고 조처를 하니 인간 보기에 인간 수준을 넘을 수 있지 혼자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신을 출발 시킨 주남선,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의 세계에서는 그런 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 분.
오늘도 과거의 교회 모습과 형태와 운영을 고수하고 오늘도 과거의 예배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 보인다.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어려울수록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져 보면 된다. 20세에 결혼하고 30세에 3-4 명을 낳으면 된다.
목회자와 교회 핵심들이 낳아 기른 아이들은 세월 속에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지킨다. 먹고 사는 것은 일찍 포기해야 한다.

더 공부하고 더 벌고 더 쓰려고 하다 보니 세상이라는 맹수의 입 속에 교회와 예배를 밀어 넣은 꼴이 된다. 신앙이 죽는다.
오늘은 굶을 각오하면 다이어트를 성공했다고 주변에서 부러워 하는 세상이다. 오늘은 공부하지 않아도 손바닥에 다 있다.
오늘은 교회만 가서 살아도 사회 제도적으로 다 해결을 해 준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으면 장례까지 모두 해결이 된다.
무엇이 두려운가? 세상이 두려워 세상 속으로 들어 가서 세상적으로 잘 되려 하기 때문에 교회가 스스로 교회를 던진 것이다.
연구1 2022.08.23 11:59  
아미동 분교, 이 곳이 개척을 했다면 오늘의 서부교회를 넘어 설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선 분교의 지도자들이 탁월했고, 서부교회에서 멀지 않은데 위치와 구성이 별 세계였습니다. 아쉬운 것은 백 목사님께 순종만 하다 보니 후임에게도 일단 매이는 관성을 벗어 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곳곳에서 교회들을 맡고 있으나 아미동에 교회가 섰더라면 서부교회의 와해 붕괴 때 많은 교인들이 일단 깃들일 수 있었습니다. 감천은 여건과 교인 구성은 더 낫지만 지도력이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구도였습니다. 좌천동 분교나 장림 분교는 분교들 중에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상황에서, 본교의 총력 저지 속에서 개척하고도 각각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훗날에 발생한 문제는 어느 교회든 발생할 수 있는 그 후의 문제이고 현재 동천교회라는 이름으로 진행 되고 있습니다.
(1) 게시판 검색
번호제목이름날짜
  • 3194
    목회
    2026-03-04
  • 3193
    목회
    2026-03-05
  • 3192
    목회
    2026-03-05
  • 3191
    연구
    2026-03-02
  • 3190
    연구
    2026-03-02
  • 3189
    목회
    2026-03-03
  • 3188
    연구
    2026-03-03
  • 3187
    목회
    2026-03-04
  • 3186
    목회
    2026-03-04
  • 3185
    연구
    2026-03-02
  • 3184
    목회
    2026-03-02
  • 3183
    공회
    2026-03-01
  • 3182
    공회
    2026-03-01
  • 3181
    담당
    2026-02-28
  • 3180
    담당
    2026-02-28
  • 3179
    목회
    2026-02-26
  • 3178
    목회
    2026-02-27
  • 3177
    목회
    2026-02-27
  • 3176
    목회
    2026-02-25
  • 3175
    목회
    202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