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 사후의 총공회에 대한 소망
공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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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5 17:55
(백영희 사후의 서부교회)
서부교회는 그 교인들이 서부교회의 신앙 노선과 내용을 변경해 버렸고 이제 그 역할도 사라 졌고 역사지로만 남았을 뿐이다.
총공회는 서부교회와 달리 서부교회의 주도가 없어 진 이후 각 공회가 제각각 공회의 성향에 따라 최소한으로 연명하고 있다.
서부교회는 2층과 4층이 교회를 주저 앉히려 작정하고 20여 년을 싸웠으니, 망하지 않는다면 그 것이 오히려 이상할 뿐이다.
서부교회는 건물과 교회를 구별할 줄 모르고 건물을 교회로 삼고 싸웠기 때문에 2층이나 4층이나 앞다투어 함께 망해 버렸다.
총공회는 서부교회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회원 별로 지역이 다르고 별도로 모일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다투다 포기했다.
(백영희 사후의 총공회)
총공회의 3대 재산은 부산의 양성원과 거창 대구의 기도원이다. 이 곳을 가지는 곳은 유리하나 이 곳을 가진다고 다는 아니다.
양성원은 1976년 시작 때부터 무허가며 목사님 최후까지 무허가다. 그래서 이후로도 무허가로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양성원은 기존 목회자를 전부 재교육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초기는 학생수가 많았으나 평소 20여 명이면 학생은 부족이 없다.
전국의 공회 교회 어디서나 자체적으로 가능하다. 집회는 백 목사님이 강단에 서지 않는 이상 대규모 집회는 애초 불가능하다.
한 때 대구공회가 2천여 명을, 부산공회가 나뉘지 않고 전력할 때 그 이상을 잠깐 모았으나 모두 평소 1천여 명이면 충분하다.
서부교회는 그 회원들이 부산의 동대신1가 381번지의 예배당을 서부교회인 줄 안다. 교회사를 모르고 교리를 모르니 그렇다.
서부교회로 알려 진 그 예배당의 재산과 의미가 실로 대단하다. 쉽게 넘겨 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넘길 만큼은 아니다.
교인들은 교회와 건물을 구별할 줄 몰랐고 간부 몇은 알았지만 교권이라는 선악과를 뿌리 칠 수는 없으니 교회를 망치게 했다.
총공회는 서부교회와 달리 한 장소에서 늘 만나는 일이 없다 보니 같은 성향의 교회들이 공회를 따로 형성하며 오늘에 이른다.
1989년 백영희 장례 직후 서부교회와 마찬 가지로 총공회 각 재산에도 많은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빠르게 현장이 수습 됐다.
서로의 생각은 맞출 수 없다. 갈수록 더 분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함께 가졌던 총공회 재산의 처리만은 협의가 가능하다.
서부교회가 단일 건물을 놓고 피할 수 없이 분쟁을 했다면 총공회의 각 공회는 분쟁을 미룰 수 있었고, 세월을 두고 기다렸다.
현재 5개 공회 중에 부공1과 4는 이제 혼자 다 하라고 해도 그 재산을 짊어 질 인원도 자신감도 허욕도 허세도 다 없어 졌다.
목숨을 건다며 목사들이 각목을 들고 수십 명씩 쫓아 다니던 그 힘이 성령의 인도였다면 지금도 그렇겠으나 육체의 힘이었다.
세월이 가니 이제 손주를 보게 되면서 손주 보는 앞에 각목 들 정도는 아니다. 진작에 좀 대충하고들 말지.. 참 아쉬움이 많다.
(아합처럼 욕심이 충천한 부공2)
부공1 몇 명의 각목에 뚜드려 맞고 도망을 다니던 이들이 이리저리 이합집산을 하다 어느 날 범이 된 듯하다. 무슨 일일까?
서울의 경건한 인물로 알려 진 분이 구청 등기소 건축사를 쫓아 다니며 법령을 들여다 보고 공무원을 상대로 설교를 한다?
대구공회가 1990년에 하던 일이다. 이후로 부공1이 10여 년을 그렇게 하던 일이다. 해 본 이들은 이제 맥을 놓고 기다린다.
해 보지 못한 부공2의 2세대 3세대들은 수십 년 목에 침을 삼키며 부럽게 지켜 보던 1세대가 하던 일을 한다면 설치고 있다.
부공2, 그들은 그들만 총공회인 줄 안다. 1989년 대구공회에게 말하고 1990년 부공1에게 했던 말을 다시 간곡하게 적는다.
1989년 8월 27일 백 목사님의 별세, 그 순간부터 총공회와 가족과 서부교회의 장례 진행을 총괄하여 나는 전체를 진행했다.
당시 백도광 백태영 백영익 백영침 이재순 등 대구공회 5인으로부터 장례 후부터 공회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을 받았다.
내게 해외 유학 후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주도적 지위를 제안 받았다. 교인이 주지 않고 전국의 교인 몰래 그렇게 해도 되나?
그렇게 해도 된다 치고, 서부교회와 공회의 전체 교인이 추대하면 막을 사람이 있나? 전체가 모르는데 하려 든다면 되는가?
부려 먹을 청년 하나에게 사탕 하나 던져 주고 잠깐 써먹고 만다는 것을 내가 모를 사람으로 봤다는 것도 속으로 한심했다.
그러나 그런 개인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갑작스런 순교로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비상 상황이 닥쳤고 뭐든 해결이 급했다.
서부교회도 공회도 이전 해 오던 방향 그대로 나아 가면 나는 연구 때문에 공회 일에 부탁을 해도 갈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
만일 서부교회와 공회가 이전 방향을 교권으로 바꾸게 되면 연구 일을 잠시 미뤄 두고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맞선다고 했다.
모두가 아다시피 서부교회는 방향 전환을 바라는 절대 다수와 맞서 일단 과거 방향을 지켜 냈다. 그리고 이후 손을 끊었다.
그 다음부터는 서부교회 스스로 할 일이다. 나는 서부교인이 아니다. 총공회도 그렇게 하여 부산공회로 살려 냈고 잊혀 졌다.
목사님의 갑작스런 별세, 나는 서부교회 직원이 아니나 과도기 서부교회의 중요한 결정에는 항상 내가 당사자로 있었다.
총공회의 모든 결정과 분화 과정에도 나는 항상 부산공회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현장에 나타 난 경우는 없다.
그래서 모르는 이들은 나를 모르고 중심부로 들어 올수록 나를 지목했다. 소수는 존경으로 다수는 극단적으로 비판을 했다.
1990년까지 서부교회와 총공회에 대하여 내가 할 일은 마무리했다. 그리고 2022년, 오늘 그 때를 돌아 보면 분명해 진다.
서부교회에서 대구공회로 개척한 분들은 1990년 개척할 때까지의 구호 주장 노력 그들의 모든 약속을 전부 정 반대로 했다.
총공회의 경우, 백태영 목사님을 모시고 나간 당시 대구공회는 오늘 잠실동교회의 모습으로 1990년에 심은 열매가 열렸다.
부산공회의 경우, 대구공회와 비교를 하면 원래의 총공회와 모든 면에서 확연하게 나아 보인다. 그 내면 그 속은 모르겠다.
일찍 나가 본 대구공회는 그 외모는 교계를 묻히는 바람에 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부산공회보다 나아 보인다.
부산공회들은 나가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모는 원래 공회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에눈 아주 못된 것만 쌓은 듯하다.
이 곳의 연구소가 운영하는 부공3이야 처음부터 과도기만 움직였고 그 때나 지금이나 공회 연구만 매진한다. 숨어서 지낸다.
(부공2와 대구공회에 부탁한다.)
부산공회의1세대는 이재순 송종섭 두 분이다. 개인적으로 그 분들을 존경해 마지 않는 분들이 있지만 나도 깊이 알고 지냈다.
그 분들과 격변기에 나보다 가까운 분들은 현재 없다. 그 분들의 장점이 많으나 그 분들은 분명 총공회를 몰랐거나 아니었다.
한 분은 격변기의 광고 때마다 내가 일일이 불러 주고 적어 준 것을 읽은 분이다. 그는 대표였으나 그는 공회를 모르는 분이다.
한 분은 공회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이 제시한 공회의 발전적 앞 날은 공회가 아니다. 모두가 알 듯 하다.
어쨌든 오늘의 부산공회가 단체로서 존재하도록 만든 외적 인물은 두 분이다. 두 분이 만든 부산공회는 부산공회가 아니다.
두 분은 10여 년 대구공회와 수백 건 소송으로 날을 샜다. 두 분의 간곡한 부탁이 이어 졌지만 나는 소송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두 분은 부공1과 2로 각각 입장을 달리 했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듯 이 것은 신앙도 아니고 의리도 무엇도 아니다.
부공2의 핵심들은 뭐도 모르고 당하다가 어느 날 두 분이 갈라 설 때 어부지리로 오늘을 얻었다. 그리고 마치 전부인 듯하다.
부공1이 주관하는 반 서영호 세력의 집회를 거부한다며 도평과 노곡동 집회를 거부하다가 어느 날 가만히 들어 가 앉았다.
신앙가인가? 종교가인가? 얼굴이라는 것이 있는가? 돈만 놓고 보면 지혜로운 처세술이다. 송종섭 목사님이 가르치고 갔다.
나의 이 모든 표현을 부공2는 정면으로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부공2만 총공회의 전부며 그 외에는 탈퇴했다 말은 말았으면.
1세대가 10여 년 동안 수백의 고소 건으로 날을 새면서 붙들어 놓은 것이 결국은 누구를 좋게 했고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나?
다시 총공회를 수백 건 이상의 고소 건에 휘말리도록 하지 않기를 바란다. 방법은 대구공회와 좋게 대화하는 것만 길이다.
나의 기준으로도 대구공회는 스스로 나갔다. 대구공회가 나가면서 부산공회를 제명한 3명 중에 생존한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대구공회에 1990년 1월에만 2회 제명을 당했다. 현재 부공2에는 대구공회로부터 당시 제명조차 받은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대구공회는 부산공회 우리와는 신앙의 판단이 달랐을 뿐이지 넓게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와 같은 교회다.
베냐민 지파의 잘못으로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키려 나섰지만 마지막에 한 지파를 살려 놓았다. 그래서 12지파가 되었다.
대구공회는 목사님 사후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다는 이유로 부산공회를 멸말 시키려 작정하고 온갖 행동을 다 저질렀다.
이후에 힘이 없어 오늘까지 이렇게 내려 오고 있다. 1세대로서 분쟁과 소송을 해 본 분들은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을 듯하다.
대구공회에 1세대 한 분이 아직 계신다 하는데 1990년 백도광 백태영 백영침 백영익 이재순의 지도부들만 실제 1세대이다.
대구공회도 과거 힘이 있을 때 자신들만 총공회라 주장하며 했던 그 행동, 지금 부공2가 하고 있는 것을 자중 시켰으면 한다.
다른 곳은 숫자가 적다. 대구공회 부공2 양 측이 전체 총공회 대표가 되어 이제는 1세대 2세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현재 집행부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비록 2세대나 3세대일지라도 공회 분쟁사를 직접 지켜 봤기 때문에 그래도 소망을 가진다.
현재 집행부조차 2선이 되면 그 다음에는 총공회는 물론 신앙이라는 것이 아예 뭔 말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나서지 않을까?
공회 별 지향점은 조금씩 다르다 해도 크게 보면 큰 차이는 없을 듯하다. 세월도 30여 년이 지났다. 지금이 적기지 않을까?
신앙의 내적 확신은 나만 옳고 나 외에는 다 틀렸다는 정도가 되어야 신앙이라고 본다.
신앙의 외적 대화는 우리 모두 스스로 실수가 많은 줄 알고 다른 쪽의 말을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부공2, 2019년 8월에 부공1에게 속아 노곡동 50년의 건설을 하루아침에 쓸어 버리는 그 난리를 했다면 이제 돌아 섰으면.
부공1에게 그렇게 당해 놓고 부공3의 고발 때문이라고 선전전에 나서면 이 나라 좌파를 빼다 박은 수법이 될 듯하다.
서부교회는 그 교인들이 서부교회의 신앙 노선과 내용을 변경해 버렸고 이제 그 역할도 사라 졌고 역사지로만 남았을 뿐이다.
총공회는 서부교회와 달리 서부교회의 주도가 없어 진 이후 각 공회가 제각각 공회의 성향에 따라 최소한으로 연명하고 있다.
서부교회는 2층과 4층이 교회를 주저 앉히려 작정하고 20여 년을 싸웠으니, 망하지 않는다면 그 것이 오히려 이상할 뿐이다.
서부교회는 건물과 교회를 구별할 줄 모르고 건물을 교회로 삼고 싸웠기 때문에 2층이나 4층이나 앞다투어 함께 망해 버렸다.
총공회는 서부교회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회원 별로 지역이 다르고 별도로 모일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다투다 포기했다.
(백영희 사후의 총공회)
총공회의 3대 재산은 부산의 양성원과 거창 대구의 기도원이다. 이 곳을 가지는 곳은 유리하나 이 곳을 가진다고 다는 아니다.
양성원은 1976년 시작 때부터 무허가며 목사님 최후까지 무허가다. 그래서 이후로도 무허가로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양성원은 기존 목회자를 전부 재교육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초기는 학생수가 많았으나 평소 20여 명이면 학생은 부족이 없다.
전국의 공회 교회 어디서나 자체적으로 가능하다. 집회는 백 목사님이 강단에 서지 않는 이상 대규모 집회는 애초 불가능하다.
한 때 대구공회가 2천여 명을, 부산공회가 나뉘지 않고 전력할 때 그 이상을 잠깐 모았으나 모두 평소 1천여 명이면 충분하다.
서부교회는 그 회원들이 부산의 동대신1가 381번지의 예배당을 서부교회인 줄 안다. 교회사를 모르고 교리를 모르니 그렇다.
서부교회로 알려 진 그 예배당의 재산과 의미가 실로 대단하다. 쉽게 넘겨 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넘길 만큼은 아니다.
교인들은 교회와 건물을 구별할 줄 몰랐고 간부 몇은 알았지만 교권이라는 선악과를 뿌리 칠 수는 없으니 교회를 망치게 했다.
총공회는 서부교회와 달리 한 장소에서 늘 만나는 일이 없다 보니 같은 성향의 교회들이 공회를 따로 형성하며 오늘에 이른다.
1989년 백영희 장례 직후 서부교회와 마찬 가지로 총공회 각 재산에도 많은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빠르게 현장이 수습 됐다.
서로의 생각은 맞출 수 없다. 갈수록 더 분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함께 가졌던 총공회 재산의 처리만은 협의가 가능하다.
서부교회가 단일 건물을 놓고 피할 수 없이 분쟁을 했다면 총공회의 각 공회는 분쟁을 미룰 수 있었고, 세월을 두고 기다렸다.
현재 5개 공회 중에 부공1과 4는 이제 혼자 다 하라고 해도 그 재산을 짊어 질 인원도 자신감도 허욕도 허세도 다 없어 졌다.
목숨을 건다며 목사들이 각목을 들고 수십 명씩 쫓아 다니던 그 힘이 성령의 인도였다면 지금도 그렇겠으나 육체의 힘이었다.
세월이 가니 이제 손주를 보게 되면서 손주 보는 앞에 각목 들 정도는 아니다. 진작에 좀 대충하고들 말지.. 참 아쉬움이 많다.
(아합처럼 욕심이 충천한 부공2)
부공1 몇 명의 각목에 뚜드려 맞고 도망을 다니던 이들이 이리저리 이합집산을 하다 어느 날 범이 된 듯하다. 무슨 일일까?
서울의 경건한 인물로 알려 진 분이 구청 등기소 건축사를 쫓아 다니며 법령을 들여다 보고 공무원을 상대로 설교를 한다?
대구공회가 1990년에 하던 일이다. 이후로 부공1이 10여 년을 그렇게 하던 일이다. 해 본 이들은 이제 맥을 놓고 기다린다.
해 보지 못한 부공2의 2세대 3세대들은 수십 년 목에 침을 삼키며 부럽게 지켜 보던 1세대가 하던 일을 한다면 설치고 있다.
부공2, 그들은 그들만 총공회인 줄 안다. 1989년 대구공회에게 말하고 1990년 부공1에게 했던 말을 다시 간곡하게 적는다.
1989년 8월 27일 백 목사님의 별세, 그 순간부터 총공회와 가족과 서부교회의 장례 진행을 총괄하여 나는 전체를 진행했다.
당시 백도광 백태영 백영익 백영침 이재순 등 대구공회 5인으로부터 장례 후부터 공회의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을 받았다.
내게 해외 유학 후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주도적 지위를 제안 받았다. 교인이 주지 않고 전국의 교인 몰래 그렇게 해도 되나?
그렇게 해도 된다 치고, 서부교회와 공회의 전체 교인이 추대하면 막을 사람이 있나? 전체가 모르는데 하려 든다면 되는가?
부려 먹을 청년 하나에게 사탕 하나 던져 주고 잠깐 써먹고 만다는 것을 내가 모를 사람으로 봤다는 것도 속으로 한심했다.
그러나 그런 개인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갑작스런 순교로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비상 상황이 닥쳤고 뭐든 해결이 급했다.
서부교회도 공회도 이전 해 오던 방향 그대로 나아 가면 나는 연구 때문에 공회 일에 부탁을 해도 갈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
만일 서부교회와 공회가 이전 방향을 교권으로 바꾸게 되면 연구 일을 잠시 미뤄 두고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맞선다고 했다.
모두가 아다시피 서부교회는 방향 전환을 바라는 절대 다수와 맞서 일단 과거 방향을 지켜 냈다. 그리고 이후 손을 끊었다.
그 다음부터는 서부교회 스스로 할 일이다. 나는 서부교인이 아니다. 총공회도 그렇게 하여 부산공회로 살려 냈고 잊혀 졌다.
목사님의 갑작스런 별세, 나는 서부교회 직원이 아니나 과도기 서부교회의 중요한 결정에는 항상 내가 당사자로 있었다.
총공회의 모든 결정과 분화 과정에도 나는 항상 부산공회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현장에 나타 난 경우는 없다.
그래서 모르는 이들은 나를 모르고 중심부로 들어 올수록 나를 지목했다. 소수는 존경으로 다수는 극단적으로 비판을 했다.
1990년까지 서부교회와 총공회에 대하여 내가 할 일은 마무리했다. 그리고 2022년, 오늘 그 때를 돌아 보면 분명해 진다.
서부교회에서 대구공회로 개척한 분들은 1990년 개척할 때까지의 구호 주장 노력 그들의 모든 약속을 전부 정 반대로 했다.
총공회의 경우, 백태영 목사님을 모시고 나간 당시 대구공회는 오늘 잠실동교회의 모습으로 1990년에 심은 열매가 열렸다.
부산공회의 경우, 대구공회와 비교를 하면 원래의 총공회와 모든 면에서 확연하게 나아 보인다. 그 내면 그 속은 모르겠다.
일찍 나가 본 대구공회는 그 외모는 교계를 묻히는 바람에 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부산공회보다 나아 보인다.
부산공회들은 나가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모는 원래 공회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에눈 아주 못된 것만 쌓은 듯하다.
이 곳의 연구소가 운영하는 부공3이야 처음부터 과도기만 움직였고 그 때나 지금이나 공회 연구만 매진한다. 숨어서 지낸다.
(부공2와 대구공회에 부탁한다.)
부산공회의1세대는 이재순 송종섭 두 분이다. 개인적으로 그 분들을 존경해 마지 않는 분들이 있지만 나도 깊이 알고 지냈다.
그 분들과 격변기에 나보다 가까운 분들은 현재 없다. 그 분들의 장점이 많으나 그 분들은 분명 총공회를 몰랐거나 아니었다.
한 분은 격변기의 광고 때마다 내가 일일이 불러 주고 적어 준 것을 읽은 분이다. 그는 대표였으나 그는 공회를 모르는 분이다.
한 분은 공회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이 제시한 공회의 발전적 앞 날은 공회가 아니다. 모두가 알 듯 하다.
어쨌든 오늘의 부산공회가 단체로서 존재하도록 만든 외적 인물은 두 분이다. 두 분이 만든 부산공회는 부산공회가 아니다.
두 분은 10여 년 대구공회와 수백 건 소송으로 날을 샜다. 두 분의 간곡한 부탁이 이어 졌지만 나는 소송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두 분은 부공1과 2로 각각 입장을 달리 했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듯 이 것은 신앙도 아니고 의리도 무엇도 아니다.
부공2의 핵심들은 뭐도 모르고 당하다가 어느 날 두 분이 갈라 설 때 어부지리로 오늘을 얻었다. 그리고 마치 전부인 듯하다.
부공1이 주관하는 반 서영호 세력의 집회를 거부한다며 도평과 노곡동 집회를 거부하다가 어느 날 가만히 들어 가 앉았다.
신앙가인가? 종교가인가? 얼굴이라는 것이 있는가? 돈만 놓고 보면 지혜로운 처세술이다. 송종섭 목사님이 가르치고 갔다.
나의 이 모든 표현을 부공2는 정면으로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부공2만 총공회의 전부며 그 외에는 탈퇴했다 말은 말았으면.
1세대가 10여 년 동안 수백의 고소 건으로 날을 새면서 붙들어 놓은 것이 결국은 누구를 좋게 했고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나?
다시 총공회를 수백 건 이상의 고소 건에 휘말리도록 하지 않기를 바란다. 방법은 대구공회와 좋게 대화하는 것만 길이다.
나의 기준으로도 대구공회는 스스로 나갔다. 대구공회가 나가면서 부산공회를 제명한 3명 중에 생존한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대구공회에 1990년 1월에만 2회 제명을 당했다. 현재 부공2에는 대구공회로부터 당시 제명조차 받은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대구공회는 부산공회 우리와는 신앙의 판단이 달랐을 뿐이지 넓게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와 같은 교회다.
베냐민 지파의 잘못으로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키려 나섰지만 마지막에 한 지파를 살려 놓았다. 그래서 12지파가 되었다.
대구공회는 목사님 사후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다는 이유로 부산공회를 멸말 시키려 작정하고 온갖 행동을 다 저질렀다.
이후에 힘이 없어 오늘까지 이렇게 내려 오고 있다. 1세대로서 분쟁과 소송을 해 본 분들은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을 듯하다.
대구공회에 1세대 한 분이 아직 계신다 하는데 1990년 백도광 백태영 백영침 백영익 이재순의 지도부들만 실제 1세대이다.
대구공회도 과거 힘이 있을 때 자신들만 총공회라 주장하며 했던 그 행동, 지금 부공2가 하고 있는 것을 자중 시켰으면 한다.
다른 곳은 숫자가 적다. 대구공회 부공2 양 측이 전체 총공회 대표가 되어 이제는 1세대 2세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현재 집행부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비록 2세대나 3세대일지라도 공회 분쟁사를 직접 지켜 봤기 때문에 그래도 소망을 가진다.
현재 집행부조차 2선이 되면 그 다음에는 총공회는 물론 신앙이라는 것이 아예 뭔 말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나서지 않을까?
공회 별 지향점은 조금씩 다르다 해도 크게 보면 큰 차이는 없을 듯하다. 세월도 30여 년이 지났다. 지금이 적기지 않을까?
신앙의 내적 확신은 나만 옳고 나 외에는 다 틀렸다는 정도가 되어야 신앙이라고 본다.
신앙의 외적 대화는 우리 모두 스스로 실수가 많은 줄 알고 다른 쪽의 말을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부공2, 2019년 8월에 부공1에게 속아 노곡동 50년의 건설을 하루아침에 쓸어 버리는 그 난리를 했다면 이제 돌아 섰으면.
부공1에게 그렇게 당해 놓고 부공3의 고발 때문이라고 선전전에 나서면 이 나라 좌파를 빼다 박은 수법이 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