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세계, 현장의 세계 - 교리와 실행의 조화
담당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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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1 13:27
(이론과 현실)
재벌을 처음 만든 창업자, 그들은 거의 다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재벌이 되고 나면 자녀에게 경영학을 전공하게 하고 자기 주변에도 경영학 전공자를 불러 모은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이 재벌을 만들지는 못해도 재벌들을 연구하고 특징을 적는 분석을 보면 왜 재벌이 경영학을 아끼는지 알 수가 있다.
초대형 교회를 처음 만든 이들, 그들은 목회학 전문 교수가 아니다.
그런데 목회학을 배우면 성공한 목회자들을 분석할 수는 있다. 목회학은 목회를 하지 못한다. 목회자는 목회학을 이해를 한다.
그래서 목회에 성공을 한 사람이 목회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 좋다. 목회학은 이론이고 목회는 현장의 실행이다. 서로 다르다.
(여러 사례들)
자본주의 이론은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한다. 그냥 놔 두면 인간은 저절로 자본주의가 된다. 자본주의 이론은 훗날 형성 된다.
공산주의 사회는 만들어 질 수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 이론이 먼저 형성 된 후 강제로 만들어 봤다. 그 결과 처참하게 망했다.
집합 교육은 성공한다. 성공 사례를 연구한 것이 교육학이다. 열린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억지로 만들면? 교육이 없어 진다.
역사적 결혼은 인류를 오늘까지 발전 시켰다. 개방 결혼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가정조차 없어 진다.
재벌이란 이론과 학문이 억지로 만들어 형성 되는 것이 아니다. 혹시 만들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대로 두면 저절로 망한다.
저절로 되지 않을 때 애가 타면 국가가 억지로 만들 수 있다. 만든 뒤에 얼른 자율로 돌려야 한국처럼 계속 살아 남게 된다.
완전히 자생적으로 재벌이 된 서구와 달리 정부가 만들어 낸 한국의 재벌은 자율로 돌려 생존은 했지만 부작용이 많았다.
공산주의처럼, 열린교육처럼, 개방가정처럼 처음부터 망할 경우가 아니라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리를 잡게 되어 있다.
(청교도 신앙)
한 때는 초대교회를 만들자는 운동이 많았다. 초대교회가 되려고 노력한 교회치고 초대교회적인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성경으로 실제 운영을 한 교회들이 초대교회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보면서 초대교회 라고 한 교회는 좀 안다.
20여년? 안팎으로 복구주의 신앙이 많아 지면서 청교도 신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이 많았다. 공회 출신들도 많았다.
초대교회나 청교도 신앙은 그 것을 공부해서 그리 되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이론에서 그치고 흉내만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개혁교회, 청교도 신앙, 한국의 선교 초기를 노래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만들 여건도 신앙도 실력도 없다. 그러나 자연 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교회는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왕정 국가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것은 식민지가 되고 미국에 의하여 해방이 되어 진 상황, 그 한 번만 기회였다.
오늘 북한은 남한과 같은 나라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한다. 만주가 중극으로부터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도 안 된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와 로마의 박해라는 역사적 인도 하에서만 가능했다. 천주교 때문에 개혁교회가 나온 것처럼.
청교도 신앙은 영국의 왕정과 천주교가 갈등하는 상황 때문에 누구의 계획이 아니라 그냥 청교도 신앙이 형성이 되었다.
한국의 초기 선교도 초대교회적이고, 개혁교회적이며, 청교도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선교 초기를 재현하지 못한다.
그 좋은 교회들을 왜 오늘 재현하지 못하는가? 오늘은, 오늘을 펼치며 인도하는 주님의 오늘의 교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로마라는 이방 제국의 미신 탄압이 없었다. 온 세상이 다 교회인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박해 했었다.
바른 신앙이라면 진리 고수의 노력은 같고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려면 갖은 고난과 희생을 겪어야 하는 모습은 모두 같다.
그러나 로마 이방을 주신 주님의 인도와 천주교 치하를 주신 주님의 인도 방향과 영국 왕정을 주신 주님의 사명은 달랐다.
오늘 우리에게는 한국 교회의 초기 은혜를 재현하는 환경을 주지 않고 그 때 교회가 상상도 못할 또 다른 세상을 주셨다.
초대교회처럼, 개혁교회처럼, 청교도처럼, 한국의 선교 초기처럼, 오늘도 신앙의 이치와 원리와 노선은 꼭 같을 것이나
우리에게 주신 위치와 사명은 과거 교회가 겪어 보지 못한 세상을 상대해야 한다. 역사 이후 모든 교회는 늘 그러 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오늘의 우리는 과거를 참고는 하되 외형까지 꼭 같은 시험 문제가 출제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사명을 향해 시간을 아끼고 노력이 분산 되지 않도록 오늘의 시대적 방향에 집중을 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교 초기와 신사참배와 6.25 전란이라는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거의 문제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의 신학자, 당시의 어떤 목회자라도, 심지어 출옥성도 순교자들의 설교도 분석을 해 보면 신론에 이단처럼 보였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신앙에 문제 되거나 그들이 곁 길을 가지 않았다. 이미 1500년 전 천주교 이전에 확정을 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 아빠를 바꿔 부른다고 남의 집 아이 되는가? 그럴 수 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도 호칭에 실수가 많다.
20세 안팎에 옆 집의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 30대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오빠 동생이라는 부부도 적지 않다.
그 부부의 호칭이 좀 나아 지고 좋아 지면 더 좋다. 그렇다고 오빠 동생이라고 서로 부른다고 가족의 신분이 달라 지는가?
엄마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둘이 낳은 둘째 여자 아이가 첫 째를 오빠라 부른다고 그 집 아빠와 아들이 형제가 되나?
유독 한국 교회만 삼위일체로 끝 없이 논쟁을 한다. 구원론으로 서로 이단이라 난리다. 이론을 위한 이론 세계에 빠졌다.
어느 조직 신학자라도 그가 자기 집에서 초등학교 아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은 무슨 말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칼세돈 교리만 주문처럼 반복하고 그칠까? 알아 듣게 하려고 설명을 할 듯하다. 설명을 시작하면 거의 다 틀린 말이 된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불교와 천주교는 아예 주문만 외우지 벌대로 무슨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교회는 설명을 많이 한다.
어린 사람을 길러 가다 보면 가르치는 사람도 알아 가게 된다. 시행착오를 거친다. 남에게만 엄한 잣대를 대는 것이 문제다.
공회란 무엇인가? 최근에 유독 질문을 많이 받는다. 설명을 하다 달리 들었다는 분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고 해 드린다.
달리 설명할 수도 있다. 모르고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도 많다. 나도 고쳐 가며 더 나아 져 가고 있다. 이 것이 성장이다.
다만 아주 명확한 것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드린다. 과거, 공회의 원래는 이렇다... 그러나 오늘의 선택은 자유라고 ...
말씀으로 실제 살아 보면, 저절로 알아 지고 고쳐 진다. 또 자라 간다. 또 한 말씀으로 살아 보면 된다. 반복하다 보면 된다.
재벌을 처음 만든 창업자, 그들은 거의 다 경영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재벌이 되고 나면 자녀에게 경영학을 전공하게 하고 자기 주변에도 경영학 전공자를 불러 모은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이 재벌을 만들지는 못해도 재벌들을 연구하고 특징을 적는 분석을 보면 왜 재벌이 경영학을 아끼는지 알 수가 있다.
초대형 교회를 처음 만든 이들, 그들은 목회학 전문 교수가 아니다.
그런데 목회학을 배우면 성공한 목회자들을 분석할 수는 있다. 목회학은 목회를 하지 못한다. 목회자는 목회학을 이해를 한다.
그래서 목회에 성공을 한 사람이 목회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 좋다. 목회학은 이론이고 목회는 현장의 실행이다. 서로 다르다.
(여러 사례들)
자본주의 이론은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한다. 그냥 놔 두면 인간은 저절로 자본주의가 된다. 자본주의 이론은 훗날 형성 된다.
공산주의 사회는 만들어 질 수 없다. 그런데 공산주의 이론이 먼저 형성 된 후 강제로 만들어 봤다. 그 결과 처참하게 망했다.
집합 교육은 성공한다. 성공 사례를 연구한 것이 교육학이다. 열린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억지로 만들면? 교육이 없어 진다.
역사적 결혼은 인류를 오늘까지 발전 시켰다. 개방 결혼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가정조차 없어 진다.
재벌이란 이론과 학문이 억지로 만들어 형성 되는 것이 아니다. 혹시 만들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대로 두면 저절로 망한다.
저절로 되지 않을 때 애가 타면 국가가 억지로 만들 수 있다. 만든 뒤에 얼른 자율로 돌려야 한국처럼 계속 살아 남게 된다.
완전히 자생적으로 재벌이 된 서구와 달리 정부가 만들어 낸 한국의 재벌은 자율로 돌려 생존은 했지만 부작용이 많았다.
공산주의처럼, 열린교육처럼, 개방가정처럼 처음부터 망할 경우가 아니라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리를 잡게 되어 있다.
(청교도 신앙)
한 때는 초대교회를 만들자는 운동이 많았다. 초대교회가 되려고 노력한 교회치고 초대교회적인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성경으로 실제 운영을 한 교회들이 초대교회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보면서 초대교회 라고 한 교회는 좀 안다.
20여년? 안팎으로 복구주의 신앙이 많아 지면서 청교도 신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이 많았다. 공회 출신들도 많았다.
초대교회나 청교도 신앙은 그 것을 공부해서 그리 되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이론에서 그치고 흉내만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개혁교회, 청교도 신앙, 한국의 선교 초기를 노래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만들 여건도 신앙도 실력도 없다. 그러나 자연 발생적으로 그렇게 된 교회는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왕정 국가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것은 식민지가 되고 미국에 의하여 해방이 되어 진 상황, 그 한 번만 기회였다.
오늘 북한은 남한과 같은 나라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한다. 만주가 중극으로부터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어도 안 된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와 로마의 박해라는 역사적 인도 하에서만 가능했다. 천주교 때문에 개혁교회가 나온 것처럼.
청교도 신앙은 영국의 왕정과 천주교가 갈등하는 상황 때문에 누구의 계획이 아니라 그냥 청교도 신앙이 형성이 되었다.
한국의 초기 선교도 초대교회적이고, 개혁교회적이며, 청교도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선교 초기를 재현하지 못한다.
그 좋은 교회들을 왜 오늘 재현하지 못하는가? 오늘은, 오늘을 펼치며 인도하는 주님의 오늘의 교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로마라는 이방 제국의 미신 탄압이 없었다. 온 세상이 다 교회인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박해 했었다.
바른 신앙이라면 진리 고수의 노력은 같고 진리를 양보하지 않으려면 갖은 고난과 희생을 겪어야 하는 모습은 모두 같다.
그러나 로마 이방을 주신 주님의 인도와 천주교 치하를 주신 주님의 인도 방향과 영국 왕정을 주신 주님의 사명은 달랐다.
오늘 우리에게는 한국 교회의 초기 은혜를 재현하는 환경을 주지 않고 그 때 교회가 상상도 못할 또 다른 세상을 주셨다.
초대교회처럼, 개혁교회처럼, 청교도처럼, 한국의 선교 초기처럼, 오늘도 신앙의 이치와 원리와 노선은 꼭 같을 것이나
우리에게 주신 위치와 사명은 과거 교회가 겪어 보지 못한 세상을 상대해야 한다. 역사 이후 모든 교회는 늘 그러 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오늘의 우리는 과거를 참고는 하되 외형까지 꼭 같은 시험 문제가 출제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사명을 향해 시간을 아끼고 노력이 분산 되지 않도록 오늘의 시대적 방향에 집중을 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교 초기와 신사참배와 6.25 전란이라는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거의 문제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의 신학자, 당시의 어떤 목회자라도, 심지어 출옥성도 순교자들의 설교도 분석을 해 보면 신론에 이단처럼 보였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신앙에 문제 되거나 그들이 곁 길을 가지 않았다. 이미 1500년 전 천주교 이전에 확정을 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가 엄마 아빠를 바꿔 부른다고 남의 집 아이 되는가? 그럴 수 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도 호칭에 실수가 많다.
20세 안팎에 옆 집의 오빠 동생으로 지내다 30대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오빠 동생이라는 부부도 적지 않다.
그 부부의 호칭이 좀 나아 지고 좋아 지면 더 좋다. 그렇다고 오빠 동생이라고 서로 부른다고 가족의 신분이 달라 지는가?
엄마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둘이 낳은 둘째 여자 아이가 첫 째를 오빠라 부른다고 그 집 아빠와 아들이 형제가 되나?
유독 한국 교회만 삼위일체로 끝 없이 논쟁을 한다. 구원론으로 서로 이단이라 난리다. 이론을 위한 이론 세계에 빠졌다.
어느 조직 신학자라도 그가 자기 집에서 초등학교 아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은 무슨 말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칼세돈 교리만 주문처럼 반복하고 그칠까? 알아 듣게 하려고 설명을 할 듯하다. 설명을 시작하면 거의 다 틀린 말이 된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불교와 천주교는 아예 주문만 외우지 벌대로 무슨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교회는 설명을 많이 한다.
어린 사람을 길러 가다 보면 가르치는 사람도 알아 가게 된다. 시행착오를 거친다. 남에게만 엄한 잣대를 대는 것이 문제다.
공회란 무엇인가? 최근에 유독 질문을 많이 받는다. 설명을 하다 달리 들었다는 분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고 해 드린다.
달리 설명할 수도 있다. 모르고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도 많다. 나도 고쳐 가며 더 나아 져 가고 있다. 이 것이 성장이다.
다만 아주 명확한 것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드린다. 과거, 공회의 원래는 이렇다... 그러나 오늘의 선택은 자유라고 ...
말씀으로 실제 살아 보면, 저절로 알아 지고 고쳐 진다. 또 자라 간다. 또 한 말씀으로 살아 보면 된다. 반복하다 보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