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일 목사님 가정 - 사모님 별세를 들으며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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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12:20
소식 게시판의 10689번(21.8.30)에 소개 된 진학일 목사님은 고신의 역사에도 고비고비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우리 공회로서는 1949년부터 시작 된 위천교회 주일학교 사건과 1950년의 6.25 전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분이다. 진 목사님의 평생은 공회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어서 연구소는 이미 관련 면담과 여러 연구를 진행했고 지금도 개인적으로 가깝게 소식을 받고 있다. 이 곳을 방문하는 분들과 함께 몇 가지를 가지고자 한다.
(진 목사님의 아들)
1974년이었던 고2 때인지 고3 때인지 기억은 잘 없다. 전교생의 운동장 조회 때 '국기에 대하여 경례'가 있었다. 나는 키가 중간이라 대열 속에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옆 줄에 있던 한 학년 밑에 학급 반장이 제일 앞에 선 상태에서 경례를 하지 않았다. 고신 학생이었다. 단번에 표시가 나자 소동이 벌어 졌다. 기독교 학교이며 학교장은 일제 때 일본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 생활을 했던 분이다. 일제 경찰의 고문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손톱 밑에 대나무 가시를 찔러 넣는 것이라 했고 자신이 직접 겪은 고문은 철봉을 잡은 양손가락을 죽도로 내려 쳤다고 한다. 그 순간 때리는 일경의 눈을 끝까지 응시하니 섬찍 했는지 그냥 두더라고 했다. 공회의 환란 대처법과는 다르지만 이런 고비를 넘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고문 받은 이야기를 늘 들었다. 그런데 국기 경례를 하지 못한다는 학생을 기독교 학교에서 강제로 시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을 늘 노래 부르던 학교였다. 당시 논리는 미국의 미군들이 성조기에 경례를 한다고 했다. 우리를 선교한 그들이 우상에게 절한 것이겠느냐고 했다. 그 학생은 끝까지 하지 않고 버텼다. 어떤 어려움을 더 당했는지 기억은 없다. 그 학생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전교생 틈에 숨어 별 문제 없이 지나 갔다. 나는 가슴이 두근 거렸던 정도였고 내가 저 앞 자리에 선다면? 나는 그 학생만큼 당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1977년 서부교회를 다니면서 백 목사님은 국기배례 사건을 설교 중에 한 번씩 거론했다. 위천교회 시절 천세욱 주교 부장과 진학일 주교 반사 두 사람이 주교생 전체를 이끌고 그 위험하던 적접 지역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내용이다. 천세욱 주교 부장, 그 분은 6학년 담임이었다. 그 분은 수업 시간에 국기배례를 이긴 이야기를 가끔 했고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비장했다. 그 비장한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어려운 가운데 이겼다는 느낌만은 있었다. 빨치산 아래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도 늘 했다. 그런데 백 목사님 이름은 전혀 말하지 않아서 물랐다. 당시 그 분은 고신의 장로님이었다. 진학일 선생님의 이름을 들을 때 비로소 고교 때 그 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버지의 해방 후 경험과 신앙을 아들이 당당하게 이어 받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대단히 부럽고 또 나의 평소 수준으로 볼 때 한 차원 높은 학생이었다. 그 학교 반장이라면 공부도 잘 했다는 뜻이다. 당시에도 그 부친이 고신의 창남교회 목사님이라는 말은 들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1997년에 위천교회 주일학생들의 국기배례 사건을 출간하게 되면서 천세욱 목사님을 통해 그 때 사건과 함께 진학일 목사님에 대하여 잘 듣게 되었다.
(진 목사님의 연락)
국기배례 사건이 출간 된 세월이 많이 지난 어느 날 진 목사님은 미주 생활을 끝내고 국내 자녀 옆에 있을 예정이라며 전화를 주셨다. 국기 배례의 책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내용이 아주 정확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을 했는지도 물어 오셨다. 국기 배례의 사건 자체는 정확하나 그 주변의 한 가지는 수정을 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셨다. 한 가정의 아픈 과거이니 굳이 표현하지 않고 그냥 넘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지혜롭고도 감사한 말씀이었다. 시간이 더 지났고 공회 내의 전쟁 전후 여러 자료를 확인할 일이 있어 2016년에 면담을 요청했고 지금까지 여러 면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 너무 특이한 경력, 지나 온 날들 때문에 공회는 진 목사님과 그 가정에 감사한 일이 참 많다. 부공3, 이 곳의 연구소뿐이 아니라 우리 전부가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웬 일인지 백 목사님을 계승한다는 공회들은 백 목사님이 계셨다면 따로 인사하고 챙겨 볼 분들을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주남선 목사님의 자녀 주경순 권사님과 주경효 장로님, 이인재 목사님의 가정, 천세욱 목사님의 가정, 진 목사님의 가정 등에 대하여 이 곳은 백 목사님의 이름으로 장례나 기타 건으로 인사를 표시해 왔다. 이왕이면 서부교회의 이름이나 대구공회처럼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의 거대 단체가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는 분들도 좋을 듯하다. 시골 어느 한 교회로 느낄 곳에서 이런 인사를 하게 되면 인사를 받는 분들도 입장이 참 난감할 듯하다. 인사란 당연히 감사히 받아야 하는데 인사하는 인물과 교회가 너무 부족하다. 서부교회나 대구공회는 백 목사님이 미워서 그 분의 이름을 일부로 팽개 치는 것일까? 공회가 금해 온 인사는 넘치게 다 하면서...
5개 공회들과 서부교회나 공회 내 유명한 분들이 모두 팽개치다 보니 이어 지는 노선의 복과 이어 지는 노선의 의무라는 것은 시골에 작은 곳 하나가 혼자 다 차지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짐이 되어 그런 것은 아니다. 인사를 받는 분들께 미안해서 그렇다. 시골 어느 한 골목에서 총공회와 서부교회를 교계적으로 전부 대표하다 시피 하니 이 작은 골목에 소복하게 쌓여 지는 복을 향해 늘 미안한 마음이다. 공회와 상관도 없고 공회가 굳이 피해야 할 자리는 혈안이 되어 쫓아 다니면서..
(진 목사님의 아들)
1974년이었던 고2 때인지 고3 때인지 기억은 잘 없다. 전교생의 운동장 조회 때 '국기에 대하여 경례'가 있었다. 나는 키가 중간이라 대열 속에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옆 줄에 있던 한 학년 밑에 학급 반장이 제일 앞에 선 상태에서 경례를 하지 않았다. 고신 학생이었다. 단번에 표시가 나자 소동이 벌어 졌다. 기독교 학교이며 학교장은 일제 때 일본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 생활을 했던 분이다. 일제 경찰의 고문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손톱 밑에 대나무 가시를 찔러 넣는 것이라 했고 자신이 직접 겪은 고문은 철봉을 잡은 양손가락을 죽도로 내려 쳤다고 한다. 그 순간 때리는 일경의 눈을 끝까지 응시하니 섬찍 했는지 그냥 두더라고 했다. 공회의 환란 대처법과는 다르지만 이런 고비를 넘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고문 받은 이야기를 늘 들었다. 그런데 국기 경례를 하지 못한다는 학생을 기독교 학교에서 강제로 시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을 늘 노래 부르던 학교였다. 당시 논리는 미국의 미군들이 성조기에 경례를 한다고 했다. 우리를 선교한 그들이 우상에게 절한 것이겠느냐고 했다. 그 학생은 끝까지 하지 않고 버텼다. 어떤 어려움을 더 당했는지 기억은 없다. 그 학생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전교생 틈에 숨어 별 문제 없이 지나 갔다. 나는 가슴이 두근 거렸던 정도였고 내가 저 앞 자리에 선다면? 나는 그 학생만큼 당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1977년 서부교회를 다니면서 백 목사님은 국기배례 사건을 설교 중에 한 번씩 거론했다. 위천교회 시절 천세욱 주교 부장과 진학일 주교 반사 두 사람이 주교생 전체를 이끌고 그 위험하던 적접 지역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내용이다. 천세욱 주교 부장, 그 분은 6학년 담임이었다. 그 분은 수업 시간에 국기배례를 이긴 이야기를 가끔 했고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비장했다. 그 비장한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어려운 가운데 이겼다는 느낌만은 있었다. 빨치산 아래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도 늘 했다. 그런데 백 목사님 이름은 전혀 말하지 않아서 물랐다. 당시 그 분은 고신의 장로님이었다. 진학일 선생님의 이름을 들을 때 비로소 고교 때 그 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버지의 해방 후 경험과 신앙을 아들이 당당하게 이어 받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대단히 부럽고 또 나의 평소 수준으로 볼 때 한 차원 높은 학생이었다. 그 학교 반장이라면 공부도 잘 했다는 뜻이다. 당시에도 그 부친이 고신의 창남교회 목사님이라는 말은 들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1997년에 위천교회 주일학생들의 국기배례 사건을 출간하게 되면서 천세욱 목사님을 통해 그 때 사건과 함께 진학일 목사님에 대하여 잘 듣게 되었다.
(진 목사님의 연락)
국기배례 사건이 출간 된 세월이 많이 지난 어느 날 진 목사님은 미주 생활을 끝내고 국내 자녀 옆에 있을 예정이라며 전화를 주셨다. 국기 배례의 책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내용이 아주 정확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을 했는지도 물어 오셨다. 국기 배례의 사건 자체는 정확하나 그 주변의 한 가지는 수정을 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셨다. 한 가정의 아픈 과거이니 굳이 표현하지 않고 그냥 넘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지혜롭고도 감사한 말씀이었다. 시간이 더 지났고 공회 내의 전쟁 전후 여러 자료를 확인할 일이 있어 2016년에 면담을 요청했고 지금까지 여러 면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 너무 특이한 경력, 지나 온 날들 때문에 공회는 진 목사님과 그 가정에 감사한 일이 참 많다. 부공3, 이 곳의 연구소뿐이 아니라 우리 전부가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웬 일인지 백 목사님을 계승한다는 공회들은 백 목사님이 계셨다면 따로 인사하고 챙겨 볼 분들을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주남선 목사님의 자녀 주경순 권사님과 주경효 장로님, 이인재 목사님의 가정, 천세욱 목사님의 가정, 진 목사님의 가정 등에 대하여 이 곳은 백 목사님의 이름으로 장례나 기타 건으로 인사를 표시해 왔다. 이왕이면 서부교회의 이름이나 대구공회처럼 누가 봐도 인정할 정도의 거대 단체가 인사를 하면 인사를 받는 분들도 좋을 듯하다. 시골 어느 한 교회로 느낄 곳에서 이런 인사를 하게 되면 인사를 받는 분들도 입장이 참 난감할 듯하다. 인사란 당연히 감사히 받아야 하는데 인사하는 인물과 교회가 너무 부족하다. 서부교회나 대구공회는 백 목사님이 미워서 그 분의 이름을 일부로 팽개 치는 것일까? 공회가 금해 온 인사는 넘치게 다 하면서...
5개 공회들과 서부교회나 공회 내 유명한 분들이 모두 팽개치다 보니 이어 지는 노선의 복과 이어 지는 노선의 의무라는 것은 시골에 작은 곳 하나가 혼자 다 차지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짐이 되어 그런 것은 아니다. 인사를 받는 분들께 미안해서 그렇다. 시골 어느 한 골목에서 총공회와 서부교회를 교계적으로 전부 대표하다 시피 하니 이 작은 골목에 소복하게 쌓여 지는 복을 향해 늘 미안한 마음이다. 공회와 상관도 없고 공회가 굳이 피해야 할 자리는 혈안이 되어 쫓아 다니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