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학교의 교회 박해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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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기독교 학교의 교회 박해

담당 0 4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다. 그냥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 전국이 민주와 인권을 가장 잘 지킨다고 알고 있을 듯하다.
1969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한 전교생이 시내를 휩쓸며 데모를 했고 학교는 부추겼고 경찰은 철저히 당했다.
당시 전국의 데모 중 지방의 시골 고등학교 전교생이 나서자 4.19처럼 될까 하여 중앙정보부가 적극 나섰던 사건이 되었다.
정보부는 주동 학생 10명을 퇴학 시키게 했으나 교장이 거부하고 교육청은 해임을 시켜 내 졸업장은 교장 대리로 발급됐다.


학교는 '정의, 진리는 이긴다.'는 것인데 이 학교가 말하는 진리나 정의는 세상의 민주주의가 기준이지 성경 기준은 아니었다.
나는 초등 1964년부터 고교 1976년 2월까지 다니면서 정의와 진리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었고 공회 기준과 늘 혼란스러웠다.
1977년에 서부교회를 출석하면서 3개월 동안 성경의 정의와 진리를 가르치는 백 목사님 설교에 깊은 고민이 점점 더해 졌다.
3개월이 지나면서 성경과 세상의 표현과 기준이란 아예 다른 것임이 확정 되고 오늘까지 그 하나만 가지고도 감사가 넘친다.


바로 앞에 적은 글에서 학교 때문에 45년만에 51년만에 친구라는 줄을 붙들고 여러 곳에 부탁하며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다.
친구들은 대부분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친구들이 '자네는 목사 하는 것이 평생 천직' 그런 표현까지 나오고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고신 친구들은 음악 시간에 그 시골에서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고 SFC 등으로 누가 봐도 믿는 표시가 났었다.
나는 교회를 다닌다는 표시를 그렇게 내지 않았고 목사 된 친구들도 많으니 그냥 안부나 전할 것인데 왜 그렇게 기억을 할까?




당시 기독교 학교인데 종교 탄압을 심하게 받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개인 경험이지만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겠다 싶었다.
고2 때로 기억이 된다. 진학 실적이 시원치 않다며 학교는 밤 자습을 예외 없이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저녁 예배까지 금했다.
많지는 않으나 수요일 저녁 예배가 문제 되자 학교 강당에서 전교생 예배로 대신하고 개인 별 시내 교회 출석을 금지 시켰다.
학교의 기율이 엄했기 때문에 모두 참석했다. 한 번을 참석했으나 예배 분위기가 아주 달라서 원래 다니던 교회를 갔다 왔다.


진학에 전력하던 학교로서 어느 학교도 시도하지 못할 방법들을 거침 없이 집행해 온 학교장은 그 성격이 또한 폭발적이다.
저녁 자습을 의무화 하면서 심지어 지각 조퇴를 일반 수업 시간처럼 반영하여 처벌하겠다고 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기독교 학교가 정권의 독재를 두고 보지 말라며 학생들에게 행동에 나서라고 하는 상황에,
방과 후 저녁 예배를 자기 교회에 갔다가 밤 자습에 오겠다는 학생을 처벌할 수 있을까? 학교장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교장실에 따로 불렀다. 주일은 지킬 예배지만 평일 저녁 예배는 그렇지 않다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 때 성경을 잘 몰랐다.
일제 때 일본에서 신학을 했고 해방 후 미국에서 2차례나 신학교를 거친 학교장이다. 성경으로 따지고 이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도 꼼짝하지 않고 있자 그냥 나가라 했다. 그리고 강제 시행은 없어 졌다. 친구들이 그 것을 기억했을까?
그리고 1975년 5월 집회, 나는 19일부터 23일까지 4박 5일을 참석했다. 대입을 앞두고 3학년의 가장 중요하던 시점이었다.


신앙은 있어도 5월에 집회 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교회 조사님이 시대가 위험하니 모두 참석해서 회개하자는 말씀을 따랐다.
교회 안에서도 조사님 한 분만 좋아 하셨고 나머지는 모두 의아했고 걱정을 했었다. 학교 분위기로는 최악을 각오해야 했다.
고신을 극히 비판했던 학교였기 때문에 공회 비판은 아예 전교생이 참석하는 채플 시간까지 심각하게 비판하는 정도였다.
나는 공회 교회를 다니는 학생이었지 그 때까지는 공회의 가치나 특별한 점을 따로 배우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잘 몰랐었다.


한 해 전, 8월 방학에 고신 교회 학생인 외가 형이 SFC 서울 대회를 참석하자 교사가 서울까지 와서 데려 온 적이 있었다.
나는 5월 학기 중이었다. 삼각 함수를 배울 주간이었다. 금요일 새벽예배를 끝내고 교통 문제로 오후에 학교를 출석했다.
건물에 들어 섰으나 아무도 없었다. 조금 있으니 전교생의 긴급 집합이 있었다며 친구들이 몰려 왔다. 통고 내용은 이렇다.
앞으로 무단 결석은 바로 유기정학, 2회째면 무기정학, 다음에는 퇴학.. 대략 이런 식이었다. 나 하나를 겨냥한 것이다.


나는 3년간 내내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민주와 인권을 이 나라 최고로 외친다는 기독교 학교에서 종교 탄압을 받았다.
이 학교는 오늘까지도 이 나라 전교조를 비롯하여 무슨 인권이나 민주화라는 이름이 들어 간 곳에는 아주 특별한 곳이다.
나는 오늘까지 그 학교와 관련 된 우리 사회의 뉴스를 수 없이 접한다. 그 때마다 나는 그 곳에서 종교 탄압을 받았는데..
평생 그 때 기억이 생생하다. 최근 조국 소식이란 남에게 가혹하고 자기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는데 내게는 참 익숙하다.


이 때 경험과 백 목사님이 이 면을 조심 시켰고 강조했기 때문에, 내가 말한 기준을 내게 적용한다면? 이 생각을 많이 한다.
밤 자습 문제와 5월 집회를 돌아 보면 그 학교로서는 굉장히 큰 사건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신앙의 투사로 기억한 듯하다.
모두가 공부에 매진했고 나는 전학년 평균 20등은 유지했고 10등 안에도 들었다. 그 학교의 이 성적은 공부가 전부였다.
최근 여러 친구들과 연락 중에 나온 '천직이 목사..'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과 연락하지 않은 나의 미안함을 좀 덜 수 있었다.


이 글은 공회 노선으로 살다 보면 흔하게 겪는 공회인들의 생활 중 하나다. 나보다 더한 분도 덜한 분도 있을 것이나
우리의 걸음이 이렇다는 것을 이 노선에서 처음 출발하거나 현재 이런 문제로 어려운 분들에게 참고로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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