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방역에 대한 판결들을 보며 - 5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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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코로나 방역에 대한 판결들을 보며 - 5

담당 0 8
(유리하면 합하자고 한다.)
* 세상 나라들의 말 장난
우리 나라는 현재 이웃을 삼킬 힘이 없다. 삼켜 지지 않을 방어조차 힘겹다. 이럴 때 세상은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고 한다.
일본의 16세기 임진왜란, 19세기 말에 힘을 기른 일본이 청일 전쟁, 노일 전쟁, 1차 2차 대전으로 힘을 길렀고 침략에 나섰다.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고구려가 중국의 절반을 점령했다고 자랑한다. 속으로는 힘이 부럽다. 불리하니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 국가가 있을까? 타락한 세상은 강하면 먹고 약하면 먹힌다. 단 하나의 길밖에 없다.

* 교회는 그렇지 않은가?
고신은 합동이 다시 합하자고 할 때마다 펄펄 뛴다. 1960년대에 당해 본 경험 때문이다. 참 철도 없었다. 뻔한 행동을 했었다.
그런데 고신은 재건 합신 순장 서울고려 심지어 공회에게까지 교단을 합하자 한다. 이 때 이들이 하는 말은 화평과 단결이다.
먹겠다는 뜻이다. 거부하는 쪽은? 먹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총공회는 그렇지 않을까? 부공3 외에는 지금까지 다 이런 식이다.
부공3은 그렇지 않은가? 아직 어디를 가질 정도가 되지 않으니 아직은 그러지 않았다. 앞으로 그렇게 될 때를 보면 알 듯하다.



(교회의 정교 분리 노선)
천주교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 져 왔다고 주장한다. 250여 년을 로마제국에게 늘 당했다. 그 때는 정교 분리를 주장했었다.
주후 313년에 기독교 자유가 선포 되었다. 곧 이어 교회에게 특권이 주어 지기 시작했다. 이 때 거절하고 반대를 해야 했다.
로마 황제가 교회를 특별 대우할 때 로마 교회는 감사히 받았다. 세력을 키운 교회는 이제 로마 황제를 이길 정도가 되었다.
교회가 그 세력을 무럭무럭 길러서 이제 로마 제국과 유럽 세계를 다 휩쓸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황제 위에 교황이 앉았다.

세계교회사에서 세상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진 교회가 세상 권세를 가지면 교회가 오염이 된다고 거절한 사례가 있을까?
교인치고 돈을 벌 수 있는데 조절하는 사람이 있을까? 학생치고 진학 할 수 있는 더 좋은 학교와 직장이 있는데 거절할까?
거절했다면 세상의 여러 면을 따져 보고 거절을 했을까, 딱 신앙 하나만을 보고 거절을 했을까? 없지는 않으나 흔치도 않다.
월급을 깎는 목사도 있고 정년을 5년 일찍 하는 성자도 있다. 그 배경을 분석해 보면 그로 인해 얻는 세상의 다른 것이 있다.


성철 때문에 불교는 한 때 덕을 봤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도를 닦았느니 대통령이 와도 만나 주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중이 중 노릇했다고 난리니 불교도 인물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기독교다. 기독교는 대통령을 만나지 못해서 데모를 한다.
대통령을 고르기 위해 투쟁한다. 대통령을 만나고 오면 그렇게 평생 자랑을 한다. 교세 자랑 때문에 지도자들은 분주하다.
불교는 중이라도 하나 있다. 기독교에는 목사가 1명도 없다. 천주교야 중세부터 정치 단체로 전향했으니 말할 가치도 없다.

기독교는 일제 시기에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서양 열국의 세상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국 교회는 일제 말기 일본의 힘 앞에 굴복하고 그들 시키는 대로 했다. 해방이 되자 미국에 압도 되어 친미파 교회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상 나라 입장에서야 그 이상이 없는 지도자지만 기독교와 이 정권은 정교 분리가 아니라 융합을 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28년의 불교 정권에게 기독교는 많이 당했다. 오늘까지 교회는 세상과 세상 때문에 싸운다.



(코로나 방역을 앞세운 교회 박해)
현 정권은 태생적으로 반 기독교다. 해방 된 조국에서 기독교 탄압을 가장 심하게 했다.의 군사 불교 정권도 이러지는 않았다.
교회가 세상 권력을 탐했으니 정권에게 어떻게 당해도 할 말은 없다. 교회가 자초한 것이다. 그래도 교회 탄압이 심각하다.
급기야 법원에 소송을 통해 정권과 맞서고 있다. 정권은 반 기독교라도 사법부는 신앙의 양심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가?
국회가 반 기독교 법을 만들면 국회와 싸우고 안 되면 국회의원을 당선 시켜 국회의 입법 과정에서부터 세상과 싸울 것인가?

정권이든 국회든 사법부든, 교회 밖의 세상은 그냥 세상일 뿐이다. 그들과는 타협도, 조정도, 소송도, 무력 충돌도 아니 된다.
정권은 우파 좌파 친기독 반기독이든 그들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 친기독의 우파 정권도 교회에 끼치는 좌파 못지 않다.
사람이 죽는 것은 질병 때문인가? 교통사고로도 죽는다. 사람의 원수가 옆 집뿐인가? 자식이 더 원수 노릇하는 경우가 많다.
우파가 정권을 잡던 시절,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정권이 세상적으로는 잘 했을지라도 우리 교회에게 덕 될 것이 있었던가?


세상이 교회를 돕는 것은 그냥 버려 두는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관심조차 좋지 않다. 그냥 세상은 세상끼리 싸우라.
방역 문제로 법원에 고소한 교회들은 처음에는 패소했다. 최근 법원이 정권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너무 심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법원도 넓게 보면 세상인데 법원이 행정부와 권력 투쟁 때문에 제동을 걸 수도 있고 또 필요해서 그럴 수도 있다.
행정부 조처가 불리하다며 법원에 갔다가 법원조차 교회가 받아 들일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면 법원에게는 순종할 것인가?

교회는 세상의 이 쪽에 당했다고 세상 저 쪽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세상은 세상일 뿐이다. 사법부를 믿었다면 그 것이 죄다.
그냥 있는데 우리를 도우면 고마운 것이고, 그냥 있었는데 우리를 치면 우리는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 교회다.
형사 처벌은 우리가 피할 수가 없다. 세상이 와서 치는 것이다. 예수님이 헤롯이나 빌라도에게 유대인을 고소하며 버텼던가?
세계로교회 서부교회 은평 어느 교회는 부럽다. 강한 곳이다. 잘 믿는 곳이다. 그러나 법원에 소송으로 맞선 것은 곤란하다.



(방역은 방역에서 그치지 않는다.)
겉만 보면 '방역'이라는 세계적 비상 상황으로 세상은 교회를 마음껏 쳤다. 겉은 방역이란 무기고 속은 교회를 향한 칼이다.
방역 조처가 심했다고 방역 당국의 행동을 법원에 고소를 하면 오른 주먹에게 맞았다고 왼 주먹에게 호소하는 셈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교회의 신앙 결정권을 교회가 쥐고 있어야 교회인데 그 결정권을 법원이란 세상에게 준 것이다.
세상 중에 정부는 원래 좀 조폭 정도다. 어느 나라든 법원은 경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세상의 조폭과 경찰은 세상일 뿐이다.

세상 조폭에게 맞았다고 세상 경찰에게 구제를 신청하면 다음에 덜 맞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게 교회를 넘긴 셈이다.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넘겼던가? 오늘도 예수님이 맡긴 십자가의 길, 구원의 이 길을 세상에게 넘긴다면 그 것도 가룟이다.
세상은 정체성이건 자존심이건 철학이건 가릴 것 없다. 상대에게 하나라도 가져 오면 된다. 명분은 그냥 말로 때우면 된다.
교회도 그런가? 교회의 명분은 교리며 노선이다. 이 것은 주님과 연결에 생명선이다. 이 것을 끊으면 그냥 세상이 된다.

방역 문제로 전국 곳곳의 교회들과 세계로교회 서부교회에서도 예배라는 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그렇지 않다. 예배를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예배보다 그 예배를 원하는 주님의 뜻이 먼저다.
주님이 목숨 걸고 지키라는 예배는 목숨 걸고 지킨다. 주님이 목숨 걸고 지킬 예배가 아니라면 주님을 따르는 연결이 먼저다.
천주교와 불교는 신앙의 형식이 본질이다. 법당과 성당을 지켜야 하고 미사와 불법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 그림도 그렇다.

교회는 예배당이 불 탈 때 목숨 걸고 끌 수도 있다. 불에 타는 예배당을 지켜만 봐야 할 때도 있다. 함부로 목숨 걸지 않는다.
예배의 방법과 순서도 목사와 교회와 교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천주교나 불교처럼 예배의 형식이 중요하다면 지켜야 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이런 것을 신앙 자유, 교회 자유에 맡긴다. 어느 교회 어느 목사의 어느 예배나 설교를 묶어 두지 않는다.
짧든 길든, 말씀 중심으로 하든 순복음처럼 하든, 또 예배 하나를 우리처럼 한 번에 드리든 여러 부로 나누든 각 교회 자유다.

공회는 주일 오전 예배를 시간으로 여러 번 나누거나 공간을 새신자 일반 예배로 나누지 않는다. 나눈다고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른 교회는 그렇게 나누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교회의 발전과 역량이라고 대대적으로 말한다.
방역 때문에 시간을 나누고 장소를 나누면 안 되는가? 나누는 것이 죄라면 방역도 아닌데 평소 나눈 것은 죄가 되지 않는가?
평소 그렇게 나눈 이유는 그 교회가 그렇게 나눈 것이다. 방역은 나누기 싫은데 시간과 공간을 나누라니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누지 못하겠다고 목숨을 걸지 말고 나누든 합하든 교회가 교회를 결정하는데 왜 간섭하느냐고 따져야 한다.
예배에 교인이 10%가 오든 50%가 오든 100%가 오든 교회의 예배는 교회가 결정하는 것이니 개입 말라고 맞서야 한다.
예배에 참석 제한을 목숨 걸고 막는 것이 옳다고 말하려면 왜 평소에 각 교회는 예배의 시간과 공간으로 교인들을 나눴나?
신약 예배는 이 산에도 저 산에도 이 방법도 저 방법도 해제가 되었다. 다만 주님께 붙들려 움직이는 '산' 예배가 문제다.


산 예배의 정의를 살아 있는 교인과 목사가 모인 것이라고 정의를 해 놓았으니 죽어도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산 예배, 살아 있는 예배, 생명성의 예배의 '생명'이란 하나님과 연결이다. 매 예배에 주님이 원하는 인도 그 뜻에 연결이다.
그 교회에 새 교인을 시간과 공간을 따로 떼어 가르치는 것이 그 교회에 대한 주님의 현실적 인도라면 그 순종이 산 예배다.
공회 교회에게는 예배를 남녀노소 신앙 정도를 따지지 말고 함께 드리는 것이 맞다고 깨닫게 했으니 우리는 그렇게 했다.

주일에 아이가 많아도 유아실을 따로 두지 않으려는 것이 공회 예배다. 감당이 되지 않으면 유아실에 따로 떼 놓아도 된다.
휠체어를 탄 분, 감기가 심해서 기침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분처럼 여러 이유가 있으면 최소한으로 떼 놓는다.
방역 때문에 공무원들이 예배실의 공간 분리나 공간 사용에 제한을 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각 교회가 결정하면 된다.
우리처럼 독감은 별 것도 아니니 그냥 진행한다. 막으면 막히는 그 곳에 서서 진행한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게 묻지 않는다.

정권과 가까운 교계 지도자들은 정권자들과 만나서 별별 것을 수용하고 별별 것을 요구하여 주고 받고 거래를 성사 시켰다.
1개를 주고 9개를 가져 왔다면 대단한 것이다. 10개를 다 잃을 뻔했는데.. 그런데 9개를 가져 와도 교회의 결정권을 넘기면?
그 것은 주님을 넘긴 것이고, 생명을 던진 것이다. 10개를 다 얻어 온다 해도 세상이 줘서 가져 왔다면 그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게 무허가 신학교를 종합대학교로 허가를 받아 오고, 일반 병원을 대학병원으로 승인을 받아 왔다면 좋은 것인가?


지금 세상과 타협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법원에 가고 각종 문제로 부딪히는 형태를 보면 신사참배 때와 동일하다.
총독부와 타협을 해서 예배 때 어디까지는 하고 어디까지는 하지 않기로 조정을 해서 교회가 우선 숨을 쉴 수는 있다.
여기서 얻은 것은 신앙 어린 사람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고, 여기서 잃은 것은 세상에게 교회를 넘긴 것이다.
교회가 교회를 세상에게 넘겨 주고,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어린 신앙에게 환란을 이길 준비 기회를 가져 올 수가 있을까?

교회가 법인을 만들어 세상의 각종 이익을 평소에 취했다. 이런 교회는 이런 방역 건을 두고는 타협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세상 학위를 받아 신학자로 교수로 활동을 했고 무대를 만들기 위해 교육법으로 대학을 설립해서 신학대학이 됐다.
교회의 예배는 방역에 중단하지 못한다고 맞서면서 신학교의 신학생 강의는 예배가 아니며 신학교에는 예배가 없는가?
신학교의 신학 강좌, 신학교의 예배, 신학교의 강의와 개강 예배는 정부 시키는 대로 전부 하면서 교회 예배만 문제가 되나?

신학교와 교회가 다른가? 이미 다르다 생각하여 교회를 기르는 목사 교육 과정의 예배와 교육하는 교회를 세상에게 넘겼다.
박사 학위를 가진 분들, 정규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장을 가진 분들, 그들의 인식으로는 이런 문제를 대처하기 어렵다.
이들이 교계 간판을 가지고 기독교의 대표나 되고 정식이나 되는 것처럼 한 쪽은 타협하고 한 쪽은 대처를 하니 고통스럽다.
이들을 야단 치자니 교계 내분으로 치닫고 그들이 여론으로 이단이라고 별 건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그냥 두자니 막 나간다.



지금 적는 내용은, 백 목사님을 알고 설교록을 좀 읽은 분들은 설교록에 없는 방역 문제인데도 어디서 들은 듯 할 것이다.
그리고 공회의 인식과 근본과 대처의 방법도 아주 익은 듯할 것이다. 재주 있는 분들은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를 앞설 듯하다.
벌써 알고 있었다 할 듯하다. 그리고 이런 설명과 저런 논리와 이런저런 과거 자료와 사례를 가지고 설명도 더 잘할 듯하다.
알지만, 자신의 예배와 그 동안 교회 운영이 이미 이런 덪에 빠져 자신의 발이 무겁지 않을까? 그래서 부공3이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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