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사와 총공회 전사 - 시대와 흐름을 읽어 본다.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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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9 14:37
(6.25 전쟁의 기억)
얼마 전까지 6.25 전쟁은 60년 전부터 배운 것이 전부였다. 90년대부터 정부가 방향을 바꿀 때 굳어 진 나는 바꾸지 않았다.
6.25 전쟁의 본질과 참상은 학교가 아니라 나는 가정과 주변과 교회에서 익혔다. 부모와 주변과 공회는 극한 상황을 거쳤다.
6.25의 본질은 교육으로 바꿀 상황이 아니다. 다만 오늘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을 하는 문제일 뿐이다. 각자 재구성을 한다.
최근에 6.25를 깊게 살펴 보았다. 집중한 분야는 국군의 패전 과정이다. 이길 때는 볼 것도 없다. 질 때를 봐야 배울 것이 있다.
(신앙의 침체기)
신앙의 불이 붙으면 어디 던져 놓아도 주변을 신앙으로 만들지 끌려 가지 않는다. 시대도 환경도 어떤 불리한 것도 넘어 선다.
신앙의 불이 식으면 에덴동산에 갖다 놓아도 선악과를 먹고야 만다. 몸이 약하면 온갖 병이 다 생긴다. 어디 있어도 들어 온다.
신앙으로 발전이 없게 되면 신앙은 바로 침체기에 접어 든다. 애매한 상태가 있는 듯하나 실은 순식간에 신앙이 바뀌게 된다.
신앙에 열심이 있을 때는 틀려도 고치고 돌아 선다. 충성을 하고도 부족하다 말한다. 침체기로 돌아 서면 온갖 죄가 시작 된다.
(1950.6.25의 전쟁 발발, 1989.8.27의 백영희 사망)
* 전쟁 초기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막 가는 무식이거나 나쁜 인간이다. 이 쪽은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공격을 느끼지 못했을까? 알았다. 다만 그렇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불시에 기습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백영희의 사망, 그의 평생 설교와 걸음 그리고 89년 직전의 사회와 설교 내용을 안다면 백영희의 사망은 우리로서 예측했다.
불의의 순교는 피할 수 없다고 봤다. 다만 평화시라는 점에서 외부인이 볼 때 순교라고 인정 될 표시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기습으로 밀고 오자 서울은 3일만에 함락 되었다. 이 정도면 더 볼 것도 없이 끝장이 난 것이다. 전방과 수도가 무너졌다.
서울이 함락 되고 정부가 피난을 갔으며 군 주력이 전방과 서울에서 황급히 퇴각했다. 좁은 국토에 이 정도면 끝 난 것이다.
백영희의 순교, 그 순간 그렇게 숨을 거두자 장례 3일 절차가 진행이 되면서 공회의 본질과 모습은 바로 밑 바닥이 보였다.
생전 직전 10년을 집요하게 반대한 측이 즉각 공회를 장악했고 서부교회와 전국은 당연히 따랐으니 공회는 이미 끝 났다.
* 개전 3개월
서울까지 3일만에 점령한 인민군은 행복한 고민이었다. 완전 점령에 이르는 방법과 이후를 생각하며 방법론을 따져 봤다.
서울을 점령하고 3일이나 느긋히 놀았다. 그리고 전격전이 아니었다. 쥐 잡은 고양이의 행복한 고민이었다. 실익을 따졌다.
목사님 돌아 가신 날이 주일이고 월요일에 전국과 서부교회 대표가 모였다. 이 노선을 완전히 바꾸는 방법을 따지고 있었다.
그들이 안심하던 장례 3일에 연구소는 공회의 본질을 지켜 냈고 이후 3개월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훗날을 대비했다.
이 번 글의 연구는 바로 이 3개월 문제다. 기습은 불시였으나 퇴각은 놀라 도망을 가느냐 훗날을 계산하며 준비하느냐였다.
이길 때는 없던 힘도 나온다. 이길 때는 어떻게 해도 이긴다. 아무 문제가 없다. 질 때는 정신을 잃는다. 훗날을 잃어 버린다.
백영희 사망, 서부교회와 총공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황 대처가 전부였다.
6.25의 기습처럼 그 분은 가셨다. 그 자체는 어찌 할 수 없었으나 앞으로 대처는 생각을 해야 했다. 훗날을 고려해야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무조건 숨는 사람, 총까지 버리고 뿔뿔이 도망 가는 군인, 벌써 앞잡이가 되려고 눈치 보는 사람..
그런데 2차세계 대전을 경험하며 전략에 눈을 뜬 일본군 출신들은 이겨도 보고 져도 봤다. 후퇴하는 모습이 체계적이었다.
목사님 장례가 끝이 나자 바로 서부교회의 후임 결정이 있었다. 연구소는 재독에 적합한 인물을 모셨다. 모두 이상해 했다.
그리고 장례 다음 주간의 교역자회와 이어 지는 공회 소집 등에 목사님 사후에 가야 할 길을 두고 차분히 대처를 내 나갔다.
군 주력이 모여 있는 전방과 서울이 3일에 함락 되었으나 낙동강까지 가는 데는 1개월이 걸렸다. 급습을 해도 그런 법이다.
첫 3일에 국군을 괴멸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도주한 패잔병들이 단계적으로 막아 나섰다. 이 후퇴가 반격의 준비가 되었다.
목사님이 가신 당시 지도부는 생전에 목사님께 거의 저항적이었다. 그러나 서부교회와 공회에는 이 노선의 뿌리가 깊었다.
이 노선의 지도자는 후임 없이 갔으나 설명만 하면 이해하는 교인들은 많았다. 연구소는 후임이 아니라 안내자로 움직였다.
온 나라는 인민군이 점령하여 부산 함락이 시간 문제처럼 느껴 졌다. 그러나 전쟁의 속성을 아는 사람들은 전환점을 느꼈다.
후퇴하며 한 달을 버티는 동안에 미군이 참전을 했다. 이들은 멀리서 오고 뭐든지 좀 느리지만 물량과 저력은 많고 강했다.
목사님이 갑자기 가시니 타 교단처럼 조직상 지도부가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마음껏 처리할 수 있는 줄 안다. 공회를 몰랐다.
공회를 지키며 이 노선을 방어 하는 쪽은 보이는 지도자는 없어도 이 노선의 자료와 연구와 논리와 현장 대응력을 가졌다.
낙동강까지 밀고 간 인민군이 개전 3달이 지나던 9월까지 강을 건너지 못하자 전쟁을 아는 이들은 미군의 반격을 예상했다.
반격을 한다면 미군의 과거를 아는 이들은 상륙 작전이 될 것이나 위치만 예측하지 못할 뿐이다. 즉, 침략 전쟁은 실패한다.
목사님 장례가 끝나면 이 노선을 바꿀 이들은 그들이 서부교회를 맡고 공회와 전국 교회를 일거에 해결한다고 생각했다.
3개월 동안 논리적으로 늘 당하고 현장은 밀고 당기게 되자 알 만한 사람은 서부교회와 공회의 주력은 살아 남는다고 봤다.
* 인천 상륙 작전
9월 15일, 기습으로 후퇴한 3개월에 미군은 허리를 잘랐고 서울은 9월 28일에 수복한다.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 져 버렸다.
미군은 유럽까지 세계를 함께 봐야 하니 38선 정도에서 주저했다. 사실 이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감성적이다.
목사님 가신 지 3개월을 서부교회와 총공회적으로 온갖 분쟁이 있었으나 3개월이 지나며 오늘의 부산공회는 생존을 한다.
서부교회의 주도권은 원 노선이 확보했고 반대자는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전국 공회도 나갈 사람과 지킬 사람이 정리 됐다.
기습을 당해 낙동강까지 밀렸다 극적으로 승기를 잡았으니 인간의 마음이 원래 38선에서 머물 리가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복수로 불 타는 힘은 탄력이 붙어 이 참에 아주 끝장 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들 배후의 소련과 중국은 쉽지 않다.
백영희 사망과 함께 서부교회와 공회의 이 노선은 바로 끝이 난다고 했는데 의외로 서부교회와 공회의 중심을 지켜 냈다.
생존 위기를 넘기자 이 참에 서영호를 비롯 중도를 대폭 확보해서 대세를 잡으려 나섰다. 신앙의 기본 성향을 잊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잊었고 미국의 본질적 이익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북진 통일로 질주하게 되자 역습을 받는다.
다 이겨 놓았다고 생각했고 거저 줏어 먹는다고 생각하였는데 중공군이 휩쓸고 내려 왔다. 1950년 1.4 후퇴를 하게 된다.
원래 신앙이란 좁은 길이다. 생명을 가진 쪽이 소수다. 교회의 외부 대세는 항상 넓은 쪽이다. 목사님 생전은 예외적이었다.
부산공회는 자기 힘을 망각하고 기분 좋게 외부인을 끌어 들여 외부 통일을 추구했다. 바로 이 틈에 내부는 역습을 당했다.
인천상륙으로 서울을 회복하고 전쟁 초 38선 정도만 지켰다면 피해도 최소화 하면서 극단적 학습을 통해 적절했을 터인데
솟구치는 일시적 힘을 항구적인 자기 능력으로 오판하고 북진을 밀어 붙였다. 이제 3년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치닫게 된다.
서부교회와 부산공회를 확보한 정도에서 전국 3분의 2를 가진 대구공회에게 그들 성향을 인정하고 세월에 맡겼어야 했다.
대구공회를 대부분 흡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중도 측을 흡수했는데 이들이 이후 부산공회를 대구공회로 만들 주력이었다.
* 전쟁과 오늘까지의 과정
인간이 보면 6.25 전쟁은 조금 조심하면 막을 수 있었다. 상륙 작전 후 38선을 확보한 뒤 안정적으로 발전했으면 좋았다.
그런데 북진 통일로 나가는 바람에 잃은 것은 너무 많았으나 이 소모전 때문에 미국의 동맹이 되면서 세계적 나라가 된다.
서부교회와 부공을 확보한 정도에서 대구공회는 그들대로 조금 자유롭게 믿게 뒀으면 서로가 발전하고 좋았을 듯하다.
그런데 과욕을 부리다 부산공회는 대구공회가 아니라 대구공회 성향에게 삼켰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부공3이 출발한다.
전쟁이 1950년 말까지 끝날 수 있었는데 1953년까지 이어 진 손실과 불행은 인간이 모르는 더 큰 복에 대한 투자가 되었다.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번복과 반복과 회전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운영하면서 믿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목사님 장례는 갑작스런 불행인데 그의 사후 여러 번복과 반복을 통해 공회는 결국 외형이 아니라 내용적 발전이 있었다.
오늘 한국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다. 오늘 이 노선의 중심에 선 우리는 미미하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은 어떠 할까?
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후퇴'하는 과정을 최근에 늘 살펴 보고 있다. 전문 서적까지 살피고 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이 나라의 발전은 너무 잘 아는 것이어서 따로 살피지 않아도 쉽다. 또 잘 안다. 늘 설명해 왔다. 이 곳에도 관련 글이 많다.
목사님의 장례 후 서부교회와 총공회에 닥친 불행은 구 사이트에서 당시 뿌려진 삐라들까지 생생하게 전부 공개해 왔었다.
그러나 장례와 이후 일련의 불행을 통해 주님은 이 노선의 다음을 위해 씨를 뿌리고 움을 준비하는 일은 가끔 조금 적었다.
이제 이 나라는 조금만 조심하면 늘 선진국인 나라들처럼 될 수 있다. 아직은 잠깐 방심하면 실패한 선진국이 될 수도 있다.
지금 거의 막바지인 듯하다. 철 없는 이론가들은 나라를 거덜 내려 사력을 다한다. 이 것만 넘어 서면 안정된 선진국이 된다.
목사님 가신 후 32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외형은 작아도 신앙과 공회는 원래 내용이 전부다. 부공3 이 곳은 소망은 있다.
이 소망이 지금 안정적으로 대대를 이어 갈지 마지막 기회를 맞는 듯하다. 계대의 신앙은 조직 대신 신앙의 노선에 있다.
목사님 사후 모두가 희망이 없다 할 때, 일단 당시 사명을 붙들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도 당시 최선을 다한 것은 충성이다.
앞이 보여야 힘이 나고 가능성이 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으면 있는 힘도 가능성도 빼앗긴다. 패전이 아니라 몰락이 된다.
개인의 신앙이 침체기에 들어 서고 이제 다시 일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한 가정이나 교회가 그렇게 된다 해도..
이 노선 공회 차원도 원리는 같다. 좋을 때 은혜로울 때 희망이 보일 때가 아니라 그 반대일 때, 이 때가 정말 최종 고비다.
전쟁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전투에 패해도 전쟁을 이기기 위해 패전을 승전으로 돌릴 목표를 두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이길 때를 보지 말았으면 한다. 이 때는 강아지 떼도 신이 나서 잘 싸운다. 질 때, 넘어 질 때, 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바로 이 때가 우리의 신앙에 진정한 밤중이다. 오히려 등불을 켜고 주님을 맞아 모두가 빛을 거둘 때 빛을 밝히면 좋겠다.
이 노선, 우리의 신앙은 은혜로울 때가 아니라 은혜롭지 않은 교회와 공회와 환경과 주변일 때. 이 때 공회는 빛이 난다.
얼마 전까지 6.25 전쟁은 60년 전부터 배운 것이 전부였다. 90년대부터 정부가 방향을 바꿀 때 굳어 진 나는 바꾸지 않았다.
6.25 전쟁의 본질과 참상은 학교가 아니라 나는 가정과 주변과 교회에서 익혔다. 부모와 주변과 공회는 극한 상황을 거쳤다.
6.25의 본질은 교육으로 바꿀 상황이 아니다. 다만 오늘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을 하는 문제일 뿐이다. 각자 재구성을 한다.
최근에 6.25를 깊게 살펴 보았다. 집중한 분야는 국군의 패전 과정이다. 이길 때는 볼 것도 없다. 질 때를 봐야 배울 것이 있다.
(신앙의 침체기)
신앙의 불이 붙으면 어디 던져 놓아도 주변을 신앙으로 만들지 끌려 가지 않는다. 시대도 환경도 어떤 불리한 것도 넘어 선다.
신앙의 불이 식으면 에덴동산에 갖다 놓아도 선악과를 먹고야 만다. 몸이 약하면 온갖 병이 다 생긴다. 어디 있어도 들어 온다.
신앙으로 발전이 없게 되면 신앙은 바로 침체기에 접어 든다. 애매한 상태가 있는 듯하나 실은 순식간에 신앙이 바뀌게 된다.
신앙에 열심이 있을 때는 틀려도 고치고 돌아 선다. 충성을 하고도 부족하다 말한다. 침체기로 돌아 서면 온갖 죄가 시작 된다.
(1950.6.25의 전쟁 발발, 1989.8.27의 백영희 사망)
* 전쟁 초기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막 가는 무식이거나 나쁜 인간이다. 이 쪽은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공격을 느끼지 못했을까? 알았다. 다만 그렇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불시에 기습했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백영희의 사망, 그의 평생 설교와 걸음 그리고 89년 직전의 사회와 설교 내용을 안다면 백영희의 사망은 우리로서 예측했다.
불의의 순교는 피할 수 없다고 봤다. 다만 평화시라는 점에서 외부인이 볼 때 순교라고 인정 될 표시는 어려울 것으로 봤다.
기습으로 밀고 오자 서울은 3일만에 함락 되었다. 이 정도면 더 볼 것도 없이 끝장이 난 것이다. 전방과 수도가 무너졌다.
서울이 함락 되고 정부가 피난을 갔으며 군 주력이 전방과 서울에서 황급히 퇴각했다. 좁은 국토에 이 정도면 끝 난 것이다.
백영희의 순교, 그 순간 그렇게 숨을 거두자 장례 3일 절차가 진행이 되면서 공회의 본질과 모습은 바로 밑 바닥이 보였다.
생전 직전 10년을 집요하게 반대한 측이 즉각 공회를 장악했고 서부교회와 전국은 당연히 따랐으니 공회는 이미 끝 났다.
* 개전 3개월
서울까지 3일만에 점령한 인민군은 행복한 고민이었다. 완전 점령에 이르는 방법과 이후를 생각하며 방법론을 따져 봤다.
서울을 점령하고 3일이나 느긋히 놀았다. 그리고 전격전이 아니었다. 쥐 잡은 고양이의 행복한 고민이었다. 실익을 따졌다.
목사님 돌아 가신 날이 주일이고 월요일에 전국과 서부교회 대표가 모였다. 이 노선을 완전히 바꾸는 방법을 따지고 있었다.
그들이 안심하던 장례 3일에 연구소는 공회의 본질을 지켜 냈고 이후 3개월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훗날을 대비했다.
이 번 글의 연구는 바로 이 3개월 문제다. 기습은 불시였으나 퇴각은 놀라 도망을 가느냐 훗날을 계산하며 준비하느냐였다.
이길 때는 없던 힘도 나온다. 이길 때는 어떻게 해도 이긴다. 아무 문제가 없다. 질 때는 정신을 잃는다. 훗날을 잃어 버린다.
백영희 사망, 서부교회와 총공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황 대처가 전부였다.
6.25의 기습처럼 그 분은 가셨다. 그 자체는 어찌 할 수 없었으나 앞으로 대처는 생각을 해야 했다. 훗날을 고려해야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무조건 숨는 사람, 총까지 버리고 뿔뿔이 도망 가는 군인, 벌써 앞잡이가 되려고 눈치 보는 사람..
그런데 2차세계 대전을 경험하며 전략에 눈을 뜬 일본군 출신들은 이겨도 보고 져도 봤다. 후퇴하는 모습이 체계적이었다.
목사님 장례가 끝이 나자 바로 서부교회의 후임 결정이 있었다. 연구소는 재독에 적합한 인물을 모셨다. 모두 이상해 했다.
그리고 장례 다음 주간의 교역자회와 이어 지는 공회 소집 등에 목사님 사후에 가야 할 길을 두고 차분히 대처를 내 나갔다.
군 주력이 모여 있는 전방과 서울이 3일에 함락 되었으나 낙동강까지 가는 데는 1개월이 걸렸다. 급습을 해도 그런 법이다.
첫 3일에 국군을 괴멸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도주한 패잔병들이 단계적으로 막아 나섰다. 이 후퇴가 반격의 준비가 되었다.
목사님이 가신 당시 지도부는 생전에 목사님께 거의 저항적이었다. 그러나 서부교회와 공회에는 이 노선의 뿌리가 깊었다.
이 노선의 지도자는 후임 없이 갔으나 설명만 하면 이해하는 교인들은 많았다. 연구소는 후임이 아니라 안내자로 움직였다.
온 나라는 인민군이 점령하여 부산 함락이 시간 문제처럼 느껴 졌다. 그러나 전쟁의 속성을 아는 사람들은 전환점을 느꼈다.
후퇴하며 한 달을 버티는 동안에 미군이 참전을 했다. 이들은 멀리서 오고 뭐든지 좀 느리지만 물량과 저력은 많고 강했다.
목사님이 갑자기 가시니 타 교단처럼 조직상 지도부가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마음껏 처리할 수 있는 줄 안다. 공회를 몰랐다.
공회를 지키며 이 노선을 방어 하는 쪽은 보이는 지도자는 없어도 이 노선의 자료와 연구와 논리와 현장 대응력을 가졌다.
낙동강까지 밀고 간 인민군이 개전 3달이 지나던 9월까지 강을 건너지 못하자 전쟁을 아는 이들은 미군의 반격을 예상했다.
반격을 한다면 미군의 과거를 아는 이들은 상륙 작전이 될 것이나 위치만 예측하지 못할 뿐이다. 즉, 침략 전쟁은 실패한다.
목사님 장례가 끝나면 이 노선을 바꿀 이들은 그들이 서부교회를 맡고 공회와 전국 교회를 일거에 해결한다고 생각했다.
3개월 동안 논리적으로 늘 당하고 현장은 밀고 당기게 되자 알 만한 사람은 서부교회와 공회의 주력은 살아 남는다고 봤다.
* 인천 상륙 작전
9월 15일, 기습으로 후퇴한 3개월에 미군은 허리를 잘랐고 서울은 9월 28일에 수복한다.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 져 버렸다.
미군은 유럽까지 세계를 함께 봐야 하니 38선 정도에서 주저했다. 사실 이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감성적이다.
목사님 가신 지 3개월을 서부교회와 총공회적으로 온갖 분쟁이 있었으나 3개월이 지나며 오늘의 부산공회는 생존을 한다.
서부교회의 주도권은 원 노선이 확보했고 반대자는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전국 공회도 나갈 사람과 지킬 사람이 정리 됐다.
기습을 당해 낙동강까지 밀렸다 극적으로 승기를 잡았으니 인간의 마음이 원래 38선에서 머물 리가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복수로 불 타는 힘은 탄력이 붙어 이 참에 아주 끝장 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들 배후의 소련과 중국은 쉽지 않다.
백영희 사망과 함께 서부교회와 공회의 이 노선은 바로 끝이 난다고 했는데 의외로 서부교회와 공회의 중심을 지켜 냈다.
생존 위기를 넘기자 이 참에 서영호를 비롯 중도를 대폭 확보해서 대세를 잡으려 나섰다. 신앙의 기본 성향을 잊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저력은 잊었고 미국의 본질적 이익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북진 통일로 질주하게 되자 역습을 받는다.
다 이겨 놓았다고 생각했고 거저 줏어 먹는다고 생각하였는데 중공군이 휩쓸고 내려 왔다. 1950년 1.4 후퇴를 하게 된다.
원래 신앙이란 좁은 길이다. 생명을 가진 쪽이 소수다. 교회의 외부 대세는 항상 넓은 쪽이다. 목사님 생전은 예외적이었다.
부산공회는 자기 힘을 망각하고 기분 좋게 외부인을 끌어 들여 외부 통일을 추구했다. 바로 이 틈에 내부는 역습을 당했다.
인천상륙으로 서울을 회복하고 전쟁 초 38선 정도만 지켰다면 피해도 최소화 하면서 극단적 학습을 통해 적절했을 터인데
솟구치는 일시적 힘을 항구적인 자기 능력으로 오판하고 북진을 밀어 붙였다. 이제 3년의 전쟁은 소모전으로 치닫게 된다.
서부교회와 부산공회를 확보한 정도에서 전국 3분의 2를 가진 대구공회에게 그들 성향을 인정하고 세월에 맡겼어야 했다.
대구공회를 대부분 흡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중도 측을 흡수했는데 이들이 이후 부산공회를 대구공회로 만들 주력이었다.
* 전쟁과 오늘까지의 과정
인간이 보면 6.25 전쟁은 조금 조심하면 막을 수 있었다. 상륙 작전 후 38선을 확보한 뒤 안정적으로 발전했으면 좋았다.
그런데 북진 통일로 나가는 바람에 잃은 것은 너무 많았으나 이 소모전 때문에 미국의 동맹이 되면서 세계적 나라가 된다.
서부교회와 부공을 확보한 정도에서 대구공회는 그들대로 조금 자유롭게 믿게 뒀으면 서로가 발전하고 좋았을 듯하다.
그런데 과욕을 부리다 부산공회는 대구공회가 아니라 대구공회 성향에게 삼켰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부공3이 출발한다.
전쟁이 1950년 말까지 끝날 수 있었는데 1953년까지 이어 진 손실과 불행은 인간이 모르는 더 큰 복에 대한 투자가 되었다.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번복과 반복과 회전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운영하면서 믿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목사님 장례는 갑작스런 불행인데 그의 사후 여러 번복과 반복을 통해 공회는 결국 외형이 아니라 내용적 발전이 있었다.
오늘 한국은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다. 오늘 이 노선의 중심에 선 우리는 미미하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은 어떠 할까?
나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후퇴'하는 과정을 최근에 늘 살펴 보고 있다. 전문 서적까지 살피고 있다.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이 나라의 발전은 너무 잘 아는 것이어서 따로 살피지 않아도 쉽다. 또 잘 안다. 늘 설명해 왔다. 이 곳에도 관련 글이 많다.
목사님의 장례 후 서부교회와 총공회에 닥친 불행은 구 사이트에서 당시 뿌려진 삐라들까지 생생하게 전부 공개해 왔었다.
그러나 장례와 이후 일련의 불행을 통해 주님은 이 노선의 다음을 위해 씨를 뿌리고 움을 준비하는 일은 가끔 조금 적었다.
이제 이 나라는 조금만 조심하면 늘 선진국인 나라들처럼 될 수 있다. 아직은 잠깐 방심하면 실패한 선진국이 될 수도 있다.
지금 거의 막바지인 듯하다. 철 없는 이론가들은 나라를 거덜 내려 사력을 다한다. 이 것만 넘어 서면 안정된 선진국이 된다.
목사님 가신 후 32년이 지나고 있다. 비록 외형은 작아도 신앙과 공회는 원래 내용이 전부다. 부공3 이 곳은 소망은 있다.
이 소망이 지금 안정적으로 대대를 이어 갈지 마지막 기회를 맞는 듯하다. 계대의 신앙은 조직 대신 신앙의 노선에 있다.
목사님 사후 모두가 희망이 없다 할 때, 일단 당시 사명을 붙들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도 당시 최선을 다한 것은 충성이다.
앞이 보여야 힘이 나고 가능성이 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으면 있는 힘도 가능성도 빼앗긴다. 패전이 아니라 몰락이 된다.
개인의 신앙이 침체기에 들어 서고 이제 다시 일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한 가정이나 교회가 그렇게 된다 해도..
이 노선 공회 차원도 원리는 같다. 좋을 때 은혜로울 때 희망이 보일 때가 아니라 그 반대일 때, 이 때가 정말 최종 고비다.
전쟁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전투에 패해도 전쟁을 이기기 위해 패전을 승전으로 돌릴 목표를 두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
이길 때를 보지 말았으면 한다. 이 때는 강아지 떼도 신이 나서 잘 싸운다. 질 때, 넘어 질 때, 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바로 이 때가 우리의 신앙에 진정한 밤중이다. 오히려 등불을 켜고 주님을 맞아 모두가 빛을 거둘 때 빛을 밝히면 좋겠다.
이 노선, 우리의 신앙은 은혜로울 때가 아니라 은혜롭지 않은 교회와 공회와 환경과 주변일 때. 이 때 공회는 빛이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