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 명분주의, 내용 실리주의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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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1 13:25
(바로 된 개혁. 지킬 것과 고칠 것은 구별한다.)
공무원 학자 어른은 명분주의로 흐른다. 장사는 실리주의다. 우리 나라는 형식 명분이 강하고 일본은 실리를 추구한다.
일본이 실리주의라면 왜 일본에는 그토록 오래 된 기업이 많고 고택들이 전국에 그렇게 가득한다. 한국에는 아예 없는가.
제대로 된 실리주의는 옛 것을 남겨서 낫다면 끝장을 볼 자세로 옛 것을 지킨다. 어설픈 명분주의는 명분과 실리를 다 잃는다.
(천주교, 개혁교, 그리고 오늘)
천주교는 역사와 옛 것과 명분을 앞에 세웠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더 오래 된 기독교의 본질은 모조리 도륙을 내 버렸다.
교회는 개혁주의를 앞에 세워 실리를 추구했다. 천주교와 비교해 보면 천주교보다 더 오래 된 초대교회까지 붙들고 있다.
장로교의 전통과 정통을 붙들고 있다는 자칭 개혁주의는 자기들 필요한 것만 개혁하고 손해 볼 것은 천주교처럼 거부한다.
공회는 장로교의 고칠 점과 더 나아 갈 방향은 거침 없이 그렇게 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붙들 것은 오늘도 붙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로교의 개혁주의가 값지게 고수해야 할 것은 오늘 그들 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도 없다. 모두 공회에 있다.
이런 표현을 알아 듣는 분이 며칠 전 방문을 했다. 개혁주의가 소중히 고수하고자 하는 정말 귀한 것은 공회에만 남아 있다.
예배와 강단과 찬송과 성경과 말씀과 경건을 두고 100년 전 한국 교회가 그 초기에 고수했던 것은 아마 공회에만 있을 듯하다.
(공회의 '개혁론')
중생 된 영과 하나님 앞에 설 신령한 교회는 변치 않는다. 그러나 중생 된 성도의 마음과 행위와 이 땅 위에 교회는 변한다.
어린 것이 자라 가기도 하고, 오판하여 곁 길도 간다. 돌아 오기도 하고 돌아 오는 속도도 다르며 아주 가 버리기도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도 했다. 항상 깨어 있으라 했고 늘 회개할 것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천하에 제일 잘 믿는다는 교황도 베드로도 목회자도 신학자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모두가 자라기 위해 애쓸 일이다.
그렇다면 공회의 '개혁주의' 공회의 '개혁론'은 쉽게 도출 된다. 성경에 옳은 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바꾸지 않는다. 못한다.
성경에 틀린 것은 언제라도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고친다. 성경에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신중하게 연구해 본다.
주일 예배를 10시와 11시를 두고는 성경에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각 교회가 신앙에 유익을 위해 각자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애매하거나 자유로 결정할 수 있다 해도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처럼 계속 지켜 보면 더 나은 것이 나온다.
더 낫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 때는 더 나은 것을 향해 바꾸거나 고치거나 새로 시작한다. 이 것이 공회의 개혁주의론이다.
(공회의 외형 유지와 변경)
공회는 일제 때 선교사들이 번역한 성경과 찬송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은 번역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은 정확무오가 없다. 그러나 더 정확한 것이 있고 덜 좋은 번역은 있다. 더 좋은 번역이 나온다면 당연히 따를 것이다.
번역자의 언어력은 갈수록 좋아 진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수천 년 전의 기록이다. 세월이 갈수록 정확성에서 멀어 진다.
'누워서 떡 먹기'를 번역 시키면 국어 영어에 능통한 국내인 외국인 한인 2세도 하지 못한다. 우리 말로 물어도 모두 모른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기록했다. 찬송은 그 성경으로 살아 본 감사다. 세월이 갈수록 언어력은 발달하나 그 뜻과 멀어 진다.
지금 신학자는 천국 자체를 믿지도 않는데 무슨 천국을 번역하겠는가? KJV가 성경이면 NIV는 주해서라 해야 할 정도다.
공회는 세례 학습 집사 목사 등의 임명 과정부터 주일 예배 기도와찬송에 이르도록 한국 교회 초기 모습을 지금도 갖고 있다.
공회는 주일학교의 전도와 교육을 두고 세상 학교의 교육과정과 철학을 배껴 온 역사적 주일학교를 송두리째 개혁을 했다.
60년이 지난 오늘에 되돌아 봐도 주일학교에 관한 한 천주교를 개혁한 칼빈의 개혁이라고 칭송하고 싶다. 혹 반론이 있을까?
공회의 택함과 예정론은 칼빈의 택함과 예정에서 더 강하게 더 엄하게 나가고 있다. 그러나 구원론은 바뀐 듯이 가르친다.
바뀌었는가? 바꾼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만들었고 곳곳에 잠복 된 과제를 풀어 버렸다. 이 것이 진정한 개혁이 아닐까?
교회 이름처럼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아무리 낡았다고 핀잔을 듣고 심지어 교인들이 옆 교회로 가도 바꾸지 않고 있다.
개혁교회를 주장하는 교회들, 교회의 이름이 지역의 이름으로 붙이고 그 이름을 고수하는 곳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개혁이란 교황을 없애는 역사적 개혁만 아니라 교회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세상 유행에 얹는 것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굳이 고칠 것이 없고 고쳐서 정말 역사적으로 되돌아 볼 때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면 최대한 옛 것을 고수해야 하지 않을까?
고수할 것을 고수할 수 있고 고수할 때라야, 정말 고칠 것을 고치는 데 주력하고 전력하고 고쳐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혁은, 진정한 개혁을 하려면, 고치지 말 것을 고치지 않으려 하는 기본 자세를 먼저 가지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주님과 말씀 때문에 부모 처자 전토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과 말씀 때문이 아닐 때 가족과 재산에 애착해야 한다.
주님과 말씀이 버리라 하지 않을 때 가족과 재산에 철저한 이유는 가족과 재산까지 버리라 할 때 제대로 버리기 위해서다.
평소 별 일이 없는데도 부모에게 부부 사이에 자녀에게 재산에게 대충대충 살다가 주님과 말씀 때문에 그런 것을 버리면,
주님과 말씀 때문에 버린 것인지, 원래 별 관심도 없는 것이고 떼 냈으면 싶은데 마침 잘 됐다 하고 버린 것이 될 수 있다.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려면 6일을 철저히 살아야 한다. 순교를 하려면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해야 순교에 지원할 수가 있다.
돈이 우습고, 돈을 예사로 사용하고, 평소 돈을 벌기도 귀찮은 사람이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설교를 한다면? 문제가 있다.
죄 되지 않은 것은 건강이든 가족이든 경제든 주님이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해 맡긴 것이다. 평소에는 관리의 책임이 있다.
개혁과 보수를 두고, 지킬 것과 고칠 것을 두고, 겉으로 형식적 명분에만 매이지 말고 또 내용을 보며 실리주의를 향하되,
양면을 잘 살펴야 할 듯하다. 교회나 시대를 두고 말하기 전에 자기 내면의 자기 절제와 충성부터 살펴 봐야 할 주안점이다.
공무원 학자 어른은 명분주의로 흐른다. 장사는 실리주의다. 우리 나라는 형식 명분이 강하고 일본은 실리를 추구한다.
일본이 실리주의라면 왜 일본에는 그토록 오래 된 기업이 많고 고택들이 전국에 그렇게 가득한다. 한국에는 아예 없는가.
제대로 된 실리주의는 옛 것을 남겨서 낫다면 끝장을 볼 자세로 옛 것을 지킨다. 어설픈 명분주의는 명분과 실리를 다 잃는다.
(천주교, 개혁교, 그리고 오늘)
천주교는 역사와 옛 것과 명분을 앞에 세웠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더 오래 된 기독교의 본질은 모조리 도륙을 내 버렸다.
교회는 개혁주의를 앞에 세워 실리를 추구했다. 천주교와 비교해 보면 천주교보다 더 오래 된 초대교회까지 붙들고 있다.
장로교의 전통과 정통을 붙들고 있다는 자칭 개혁주의는 자기들 필요한 것만 개혁하고 손해 볼 것은 천주교처럼 거부한다.
공회는 장로교의 고칠 점과 더 나아 갈 방향은 거침 없이 그렇게 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붙들 것은 오늘도 붙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로교의 개혁주의가 값지게 고수해야 할 것은 오늘 그들 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도 없다. 모두 공회에 있다.
이런 표현을 알아 듣는 분이 며칠 전 방문을 했다. 개혁주의가 소중히 고수하고자 하는 정말 귀한 것은 공회에만 남아 있다.
예배와 강단과 찬송과 성경과 말씀과 경건을 두고 100년 전 한국 교회가 그 초기에 고수했던 것은 아마 공회에만 있을 듯하다.
(공회의 '개혁론')
중생 된 영과 하나님 앞에 설 신령한 교회는 변치 않는다. 그러나 중생 된 성도의 마음과 행위와 이 땅 위에 교회는 변한다.
어린 것이 자라 가기도 하고, 오판하여 곁 길도 간다. 돌아 오기도 하고 돌아 오는 속도도 다르며 아주 가 버리기도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도 했다. 항상 깨어 있으라 했고 늘 회개할 것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천하에 제일 잘 믿는다는 교황도 베드로도 목회자도 신학자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모두가 자라기 위해 애쓸 일이다.
그렇다면 공회의 '개혁주의' 공회의 '개혁론'은 쉽게 도출 된다. 성경에 옳은 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바꾸지 않는다. 못한다.
성경에 틀린 것은 언제라도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고친다. 성경에 옳고 그른 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신중하게 연구해 본다.
주일 예배를 10시와 11시를 두고는 성경에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다. 각 교회가 신앙에 유익을 위해 각자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애매하거나 자유로 결정할 수 있다 해도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처럼 계속 지켜 보면 더 나은 것이 나온다.
더 낫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 때는 더 나은 것을 향해 바꾸거나 고치거나 새로 시작한다. 이 것이 공회의 개혁주의론이다.
(공회의 외형 유지와 변경)
공회는 일제 때 선교사들이 번역한 성경과 찬송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은 번역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은 정확무오가 없다. 그러나 더 정확한 것이 있고 덜 좋은 번역은 있다. 더 좋은 번역이 나온다면 당연히 따를 것이다.
번역자의 언어력은 갈수록 좋아 진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수천 년 전의 기록이다. 세월이 갈수록 정확성에서 멀어 진다.
'누워서 떡 먹기'를 번역 시키면 국어 영어에 능통한 국내인 외국인 한인 2세도 하지 못한다. 우리 말로 물어도 모두 모른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기록했다. 찬송은 그 성경으로 살아 본 감사다. 세월이 갈수록 언어력은 발달하나 그 뜻과 멀어 진다.
지금 신학자는 천국 자체를 믿지도 않는데 무슨 천국을 번역하겠는가? KJV가 성경이면 NIV는 주해서라 해야 할 정도다.
공회는 세례 학습 집사 목사 등의 임명 과정부터 주일 예배 기도와찬송에 이르도록 한국 교회 초기 모습을 지금도 갖고 있다.
공회는 주일학교의 전도와 교육을 두고 세상 학교의 교육과정과 철학을 배껴 온 역사적 주일학교를 송두리째 개혁을 했다.
60년이 지난 오늘에 되돌아 봐도 주일학교에 관한 한 천주교를 개혁한 칼빈의 개혁이라고 칭송하고 싶다. 혹 반론이 있을까?
공회의 택함과 예정론은 칼빈의 택함과 예정에서 더 강하게 더 엄하게 나가고 있다. 그러나 구원론은 바뀐 듯이 가르친다.
바뀌었는가? 바꾼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만들었고 곳곳에 잠복 된 과제를 풀어 버렸다. 이 것이 진정한 개혁이 아닐까?
교회 이름처럼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아무리 낡았다고 핀잔을 듣고 심지어 교인들이 옆 교회로 가도 바꾸지 않고 있다.
개혁교회를 주장하는 교회들, 교회의 이름이 지역의 이름으로 붙이고 그 이름을 고수하는 곳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개혁이란 교황을 없애는 역사적 개혁만 아니라 교회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세상 유행에 얹는 것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굳이 고칠 것이 없고 고쳐서 정말 역사적으로 되돌아 볼 때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면 최대한 옛 것을 고수해야 하지 않을까?
고수할 것을 고수할 수 있고 고수할 때라야, 정말 고칠 것을 고치는 데 주력하고 전력하고 고쳐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혁은, 진정한 개혁을 하려면, 고치지 말 것을 고치지 않으려 하는 기본 자세를 먼저 가지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주님과 말씀 때문에 부모 처자 전토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과 말씀 때문이 아닐 때 가족과 재산에 애착해야 한다.
주님과 말씀이 버리라 하지 않을 때 가족과 재산에 철저한 이유는 가족과 재산까지 버리라 할 때 제대로 버리기 위해서다.
평소 별 일이 없는데도 부모에게 부부 사이에 자녀에게 재산에게 대충대충 살다가 주님과 말씀 때문에 그런 것을 버리면,
주님과 말씀 때문에 버린 것인지, 원래 별 관심도 없는 것이고 떼 냈으면 싶은데 마침 잘 됐다 하고 버린 것이 될 수 있다.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려면 6일을 철저히 살아야 한다. 순교를 하려면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해야 순교에 지원할 수가 있다.
돈이 우습고, 돈을 예사로 사용하고, 평소 돈을 벌기도 귀찮은 사람이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설교를 한다면? 문제가 있다.
죄 되지 않은 것은 건강이든 가족이든 경제든 주님이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해 맡긴 것이다. 평소에는 관리의 책임이 있다.
개혁과 보수를 두고, 지킬 것과 고칠 것을 두고, 겉으로 형식적 명분에만 매이지 말고 또 내용을 보며 실리주의를 향하되,
양면을 잘 살펴야 할 듯하다. 교회나 시대를 두고 말하기 전에 자기 내면의 자기 절제와 충성부터 살펴 봐야 할 주안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