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예배와 설교의 변모 - 발전인가 파행인가?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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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교회와 예배와 설교의 변모 - 발전인가 파행인가?

담당 0 1
(발전인가, 고장인가)

인류는 아담과 노아 1명으로부터 출발했다. 사는 곳이 달라 지며 세월이 지나 가면서 오늘처럼 천차만별이 되었다.
교회는 성경을 함께 가졌다. 주님의 승천 후 성령의 시대가 되면서 교회는 오늘처럼 천하 각국으로 흩어 형성 된다.
인류가 세계 각국으로 흩어 져 살며 하나님께서 기후와 토양과 환경을 달리 주셨으므로 음식과 생활은 달라 졌다.
다른 것 그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니다. 환경에 적응을 했을 뿐이다. 교회도 서로 다른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 어디에 살아도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였다. 오늘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인류가 생겼다.
기계에도 고장이 있고 나무도 동물도 장애가 있고 고장이 있다. 죄값의 종류 중에 하나다. 인간도 장애자가 많았다.
그런데 선후천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장 난 것이 좋은 것이라며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동성 문제를 말한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자랑이고 아이 낳지 않는 것이 지성이란다. 사는 곳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달라도 이러지 않았다.
이런 것은 발전이거나 사는 국가와 사회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변질이며 괴상한 것이며 나쁜 것이다.
결혼이 늦어 지다 이제 비결혼이 떳떳해 지고, 남녀가 바뀌는 것을 고장으로 보지 않고 병원에 가서 아예 바꿔 버린다.
이 곳에서 사회를 평론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신앙과 예배는 세상의 발전 과정에 변질 되는 상황보다 일찍 그렇다.




(예배와 교회의 원래 모습)

공회는 1936년 처음 출발할 때부터 특식이나 간식 없는 예배와 설교로만 내려 왔다.
당시 교회는 어디나 다 비슷했다. 초대교회와 개혁교회와 청교도의 예배와 생활과 설교가 실은 다 그러하다.

주일과 예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산군이 밀고 내려 오나 직장 문제가 생기나 가정이 파탄이 나도 그냥 그대로였다.
농경사회가 산업화가 되고 사무실 근무가 많아 진다고 주일을 흔들거나 그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지켰다.
순복음의 '할렐루야! 아멘!'이 전국 강단을 흔들 때도 그러기 이전에도 필요하면 했고, 그냥 공연히 간주로 넣지는 않았다.
방언을 정죄 할 때도 방언을 하지 않으면 중생도 되지 않은 취급을 할 때도 우리는 그냥 그 찬송 그 기도 그 말씀뿐이었다.
전국 교회가 비전센터를 짓고 교육관을 마련하고, 학생운동을 해도, 단기선교 성지순례를 해도 우리는 해 본 적이 없다.


이 것을 식탁과 일상 생활로 말하면, 하루 세끼 밥과 나물 반찬이 전부였고 온 종일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운동의 전부였다.
햄버거 피자 짜장면 레스토랑 외식 간식 사이다 콜라 맥주... 공회는 모른다. 멀다. 헬스클럽 피트니스 수영장? 모른다.
교회의 운영에, 예배의 진행에, 설교의 곳곳에 별별 특식 간식 유행식이 끼어 들고 주일과 신앙에도 무슨 행사가 많은지...
모든 교회가 모두 해 본 것, 공회는 하지 않음으로 감사하고 할 줄도 모른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은 것이 우리 자랑이다.
남이 하는 것을 하지 않음, 그 자체를 특기인 줄 알고 수염을 기르고 고무신을 신는 그런 식이 아니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 이슬비 전도, 어머니 예배, 아버지 예배, CCM, 헌신예배, 특새, 부활절 연합예배... 왠 아이디어가 이리 많은가?
그런 곳곳마다 내 거는 구호는 모두 '개혁주의' '청교도' '초대교회로 돌아 가자' '말씀으로'.... 구호도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백 목사님이 가시자 총공회 내에도 북쪽 교회로부터 북조 이스라엘 같은 일들이 벌어 졌다. 급기야 예루살렘 안에까지도..
그러나 유다 땅 베들레헴 에브라다 부근에 몇몇은 구약의 레갑 족속처럼 광야 40년의 연장선이고 싶다. 아직은 유지한다.



(발전의 이름으로 진행 된 탈선)

온갖 종류의 음식이 끝없이 개발 되며 온 인류는 에덴동산의 열매나 채소보다 나은 식탁으로 지상 낙원이 되는 듯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 건강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좀 보고 있다. 왠 일인가? 옛 것이 좋단다.
채취 시대의 호밀이 더 낫단다. 방아 기술이 나오기 전에 통채로 먹던 그 원시의 식문화가 건강의 비결이라며 난리다.
없어서 먹지 못했던 그 서럽고 억울하던 배고픔의 시대, 하루 세끼를 먹는다고 생각하기 어렵던 때가 더욱 더 좋다한다.
간헐적 단? 더 먹을 수 있는데 덜 먹는 것이 낫단다. 먹고자 하는 욕심과 싸워 이기는 비법이 첨단 건강법으로 소개 된다.

다른 교회들의 교회 운영법과 예배 진행 모습과 그들의 신앙 생활에 사고 방식과 형태와 속에 든 흐름을 비교해 본다.
공회만은 일제 때 초기 선교사들이 만든 찬송가를 지금도 그대로 사용한다. 이제 와서 보니 명품에 명품 찬송가란다.
CCM이 수십 년 한국 교회의 찬송과 찬양을 휩쓸었는데 알 만한 신학자들과 찬송학자들은 건강에 나쁜 음료수라 한다.
세상의 유식, 상식, 소식, 농담, 교양, 애국이든 교양이든 별별 설교법이 다 지나 갔지만 이제 보니 모두 맹물에 헛물이다.

이제 음식 문화도 생활의 흐름도 가족의 구성과 관계도 국가의 가치관과 변모하는 상황도, 누구도 제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물어 보고 있다. 이 것이 가정이냐고? 이 것이 발전이며 이 것이 그렇게 바라고 달려 온 그 목표였느냐고?
오늘의 가족 문화? 가정 파괴가 아닌가! 오늘의 국가와 사회의 모습? 망국에 망나니 짓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 것이 있나?
문제는 교회다. 코로나로 전국을 1년 반동안 흔들어 보았다.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것이 교회라더니 교회가 없어질 판이다.




(참, 어지간히 바꿔 봤지만)

이 아침에 공회가 지난 반 세기 모든 교단과 교회들이 발전과 혁식과 새로운 은혜라며 열광하며 달려 온 과거를 돌아 본다.
그 어떤 교단이나 운동이나 신학이나 교회나 신앙의 걸출한 인물들이 수도 없는 부흥법과 인기몰이로 난리가 날 때에도
공회는 선교사들에게 처음 배운 것을 기어코 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 보며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고쳤다.
그 결과 신앙의 건설이 구원 후에 꼭 중요했고 그 교리적 배경이 성경에 있었기 때문에 건설구원 기능구원을 밝혔었다.
목회자의 전횡이 있기 직전, 앞으로 문제가 되겠다 싶었던 1970년, 공회는 교역자 시무투표로 일단 우리를 살펴 봤다.
이런 식의 몇 가지 외에는 일제 때 번역한 그 미개하다는 1935년 번역을 아직도 붙들고 있다. 예배의 진행도 설교도 그렇다.
성경 본문을 읽고, 그 본문에 주신 말씀만 주목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놓이니 현실과 말씀을 나란히 비교해 본다.

그러니 웅변도 필요가 없고, 달변도 필요치 않다. 인기몰이에 관심이 없으니 단색의 옷에 단조로운 언행으로 설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집사도 일반 교인도 반사도 주일 강단에 세운다. 설교는 말씀으로 살아 본 사람이면 설교할 수가 있다.
공회의 반사가 그랬고 공회의 구역장도 그렇다. 별도 교재나 교육이나 수료증이나 자격 기준을 따로 두지 않아 왔다.
마찬 가지로 목회자도, 목회자가 필요하면 교인 중에 교인 생활을 잘해 온 교인을 나이에 상관 없이 바로 임명하고 보낸다.

시스템이 없다고 비판을 하든, 체계적이지 않다고 우려를 하든, 우리는 이 방법이 가장 신앙답고 성경답다고 생각한다.
음식도 별별 발전을 거듭한 끝에 이제 마지막으로 구석기 미개인들의 채취식으로 돌아 가고 있다. 운동법도 다 그렇다.
먹고 살기 위해 다녀야 했고, 기어야 했고, 오르고 내려야 했으며, 펴고 굽혔다. 그 생활이 바로 모두 운동이었다.


발전의 끝이 어디를 향할지 몰라 모든 국가들은 최첨단에 서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발전의 방향에 자기를 세우려고 부모나 본인들은 공부를 하고 경력을 갖추고 있다.
교회들이 위기에 빠진 말세라면서 그 대책으로 현대화 된 건물, 설비,
오늘 교인들의 시선을 끌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예배의 진행과 설교가 진화를 거듭해 왔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향해 '성인병을 향해 달려 온' 바보들의 행진으로 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타락 후 우리에게 주신 출산과 얼굴에 땀 흘려 일하는 방법이 세상 발전보다 나은 자연법이 아닐까?
신앙 생활이란 성경을 성경 그대로 차분히 읽고 그대로 살려 하면 되지 않을까? 교회는 역사 교회가 준 길이면 되지 않나?
한 눈에 봐도 성령의 은혜가 교회를 붙들고 운영했던 초대교회, 개혁교회, 청교도, 그리고 가깝게는 한국의 초기 교회...
그들이 어떻게 설교했고, 그들이 어떤 찬송을 했고, 그들의 가정과 신앙과 그들의 한 주간과 그들의 주일은 어떠했던가?
무조건 복사해서 배끼듯이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마다 시대마다 주시는 사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다. 초가 지붕이 기와 지붕 교회가 되고, 벽돌 건물로 되는 발전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매일 같이 쏟아 지는 찬송가조차 세상 유행가를 그렇게 꼭 빼 닮아야 하고 반주와 열광도 그렇게 같아야 하는가?
말씀을 읽고 내가 말씀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가, 내가 그리는 나의 세상과 나의 방식에 따라 교회와 예배를 바꿔야 하는가?

건강식? 좀 덜 먹고 좀 험하게 먹으면 된다. 이 것이 원래에 가깝다. 이 것이 발전 된 어떤 고급식보다 낫다.
건강을 위한 운동? 그냥 아이 많이 낳고 땀 흘려 먹여 살리다 보면 해결이 된다. 이 것이 가장 좋은 운동법이다.
이 것을 벗어 나면 온갖 성인병 만성병이 줄을 이어 들이 닥친다. 이를 막으려 항생제에 약제에 수술 시술을 동원하면?
생사람만 잡는다. 여우가 곡식 창고에 들어 갔다가 실컷 먹고, 빠져 나오기 위해 먹어 찐 살을 다 빼고야 나온다.




(공회 사람이니, 공회 예찬론을 적어 본다)

무식한 공회에 감사하다.
우직한 이 노선을 다시 감사한다.
세상의 발전에 늘 한두 걸음 뒤에서 따라 온 지난 세월이 감사하다.


나이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의 노화는 죄의 값이니 달게 받으면 된다. 더하여, 노숙함과 원숙함으로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돌아 보고 세상의 빠른 변모와 비교를 하면서 만사를 다시 감사해 본다.



고향과 출신 집안과 성장 과정이 워낙 보잘 것이 없다 보니 패배주의가 되고 현실 순응주의가 되어 그럴까?
나는 1964년 3월에 수세식 화장실에다 물에 녹는 휴지를 사용해 봤다. 화장실은 호주 것이고 휴지는 당시 미제였다.
나는 1964년에 서양 선고사들의 2층 붉은 벽돌집의 벽난로가 있고 나무 창살에 햇빛이 들어 오는 교실에서 공부했다.
나는 1964년에 매주 미국에서 직접 가져 온 화면으로 미국의 선진 세계를 접했다. 미국 영어 교과서로 공부도 했다.

무슨 그 시골에 그런 요상한 경험이 있었을까?
오늘 이런 발전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도록 미리 시식을 시켜 주셨다고 생각한다.


세상 발전도, 그만 이 정도에서 멈추어 서 봐야 한다. 더 나아 가면 이제는 천 길 낭떠러지가 될 듯하다.
요즘 학교가 학교인가? 요즘 결혼이 결혼인가? 요즘 나라가 나라인가? 아무리 돈이 많고 좋아 져도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나?

세상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돌아 본다.
그래도 종교라 한다면, 코로나 정도는 넘어 서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교회라 한다면, 국가의 탄압에 300만원 과태료는 내고라도 버텨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놀고 싶고 아무리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해도 교회와 예배와 찬송과 설교와 기도까지 이렇게 해서 되겠는가?



이 모든 말은 쉬워 보인다.
그런데 이미 현대 생활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1박 2일의 자연 체험은 할 수 있어도 산골에서 아주 살아 보려면 어렵다.

이 노선,
좋아 하는 사람은 아직도 있다. 과거에도 많았다. 한 때는 수 없이 밀려 들었고 어떤 때는 밀려 나가기도 했다.
문제는 한 때 체험 학습이거나 하나의 과정을 밟는 몇 년이 아니라, 자기의 평생의 생활이 되는 것이 문제다.

미개하던 시절의 험식을 건강 때문에 약 먹듯이 먹으면 그 것도 심리적으로 좋지 않아서 결국 건강에 좋지 않을 듯하다.
미개식의 험식을 즐겨 보고 기쁜 마음으로 대해 보면 현대식을 은근히 뛰어 넘는 맛이 있다.
한 번 놀아 보는 데는 남의 여자가 낫지 않을까? 그런 맛에 쏠리게 되면 평생 난잡해 진다.
집 음식에 나를 맞추듯이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속에 내게 주신 은혜와 감사를 찾아 보면 살아갈수록 더 깊어 지고 좋아 진다.

교회와 예배와 말씀과 신앙은 어느 쪽일까?
한 번의 감성적인 감동에 취해 보려고 이벤트 식으로 교회를 운영하지 말고
하루 세끼 밥 먹듯이 그냥 평생을 늘 그 같은 모양이라도 늘 그 같은 속에서 늘 새로운 감사를 만나 봤으면.
나는 이 노선에서 이런 이상적이고 이론적인 꿈을 찾았다. 그리고 그 세월이 갈수록 감사해서 이 곳에서 열심히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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