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남북 장로교와 한국의 선교 지역 - 보수 진보를 기준으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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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13:44
(연세대 의료원, 국제진료소장)
한 번씩 인요한 소장님의 글이나 강연 자료를 접한다. 감명 깊고 구구절절이 동감이 된다. 내가 그 분의 가치를 설명하면 웬만한 전문가들보다 낫거나, 나을 면이 있지 않을까? 그의 사상과 인생,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와 전혀 다르게 나는 그 분의 의미를 설명할 사연들이 있다.
(미국의 남북 교회를 비교한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을 비교한다면 차별이 아니라 사실 관계로 설명할 내용이 많고 뚜렷하다. 장로교 침례교를 비교해도 그렇다. 미국의 오늘이 아니라 미국은 1860년대에 남북 전쟁을 했다. 쌍방이 처참하게 싸웠고 그 감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00년 전 한국 선교의 초기,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은 미국의 남북 장로교의 출신을 따라 한국에서의 인식과 행동에도 차이가 많다. 인요한 박사는 평소 '미국의 남부 장로교' 출신임을 강조하며 정통 신앙의 뿌리를 거론한다.
미국의 북부는 대도시의 상업과 공업으로 먼저 발전을 하였고 자연스럽게 청교도 정신이 먼저 없어 졌고 온갖 속화 타락에 물 들었다. 같은 침례교와 같은 장로교라도 남 쪽은 주로 농업을 하여 촌스럽다. 그 대신 보수적이다. 신앙적으로는 '정통 보수는 남쪽' '진보 자유는 북쪽'이다. 남장로교 남침례교라는 표현은 앞뒤가 꽁 막힌 근본주의라고 보면 된다. 북장로교 북침례교는 세상에 친근하다 보면 된다. 세월 속에 이런 구분은 많이 흐려 졌지만 여전히 이런 분위기를 모르면 미국과 미국의 교회를 모르는 사람이다.
한국의 선교는 남북 전쟁이 끝난 20년이 지나던 1880년대에 시작 되었고 일본 식민지 시기가 지속 되던 1900년대 초반 내내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모르고 선교사를 대하면 그냥 미국 출신 선교사들이고 미국의 남북 교회를 알고 보면 남북 선교부들의 차이는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남북 선교회의 한국 지역의 성향)
현재 우리 나라 지도를 놓고 보면 부산 경남에서 경북 충북을 거쳐 서울까지 올라 가면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 대세다. 반대로 목포 여수에서 광주 전주로 서울까지 올라 가면 진보 교단이 대세다. 원래 통합 교단은 여수 순천이 지역적 기반인데 WCC의 중심이다. 그 바람에 교회적으로 통합 교단은 당연히 진보 자유주의로 분류해야 하나 최근 한국의 사회와 교회가 워낙 좌측으로 기울어 지는 바람에 이 통합 교단이 순수 신학적으로만 진보 자유로 분류 되지 실제 눈에 보이는 평가는 마치 보수에 중심처럼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또 신앙의 근본인 신학적으로 봐도, 또 양측을 수평 비교를 해 버리면 통합 교단은 진보측이고, 합동과 고신은 보수측이다.
지역적으로 비교하는 이유는, 한국을 선교한 미국의 북장로교회가 관할했거나 관할한 지역은 신사참배 때 거세게 거부함으로 해방 후에 신사참배 거부 교회들이 위치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이 모인 고신을 해방 후에 제거한 후 오늘의 합동 교단과 분열하고 WCC의 중심에 선 교단은 전남북이 지역적 배경이다. 여수 순천은 거의 통합 교단이다. 그런데 여수 순천을 석권한 통합 교단의 선교를 도 맡고 그들의 신앙을 가르치고 해방 후 막대한 선교부 재산을 물려 준 미국의 남장로교회, 이들은 북장로교회와 비교조차 거부할 만큼 보수적이다. 왜 보수적 남 장로 교단이 가르치고 기른 전남북은 펼쳐 놓고 이렇게 신앙이 넓고 자유로운가? 왜 미국에서 그렇게 신앙이 넓고 자유로웠던 북 장로 교단이 가르친 곳은 그렇게 골수 신앙으로 한국 교회사를 기록하고 있을까?
(확정은 짓지 못하고, 짐작만 해 본다)
신앙의 세계를 거친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사와 실제 평소 살아 가는 신앙의 현장을 통해 '신학'과 '역사학'이 고증하는 방법과 다른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이 것을 주관이라고 배척하는 것이 학문의 세계니 학자들에게 학설로 말할 수는 없고, 그냥 혼자 가능성을 짚어 본다.
1. 소속 교단과 목회자의 차이
고신 교단에 속했으나 통합 교단보다 넓은 목회자가 있다. 통합 교단에 속했으나 고신 교단보다 더 보수적인 목회자도 있다. 교단이란 대체적 흐름을 말한다. 남한 학자 중에 북쪽 교수보다 더 붉은 이들도 있고, 평양의 골수 공산당원 속에 남한보다 더 자본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 미국의 북장로교에 속했으나 19세기 20세기에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 대부분은 남장로교회와 비교할 때 개인적으로 더 철저하게 보수 신앙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 중에서 북장로교 선교사에 비해 더욱 타협적인 인물들도 있을 수 있다.
2. 선교지의 원래 차이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가 전남북을 철저히 보수 신앙으로 가르쳤지만 이 지역의 진보적 성향을 바꾸지 못하여 진보 교회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면 미국 북 장로교회가 대충 가르쳤는데 영남과 평양에 교회들이 원래 보수적이어서 신앙조차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가르치던 선교사들의 변화
술을 좋아 하던 아버지가 아들의 음주가 극단적이 되면 아들을 위해 술을 끊는 수가 있다. 술을 마시지 않던 아버지가 아들이 약간의 술로 인생을 좋게 살아 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조금 먹는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미국에서는 신앙이 자유로웠는데 한국의 숨 막힐 미신을 타파하느라고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전적 성경 그대로를 고수하게 되고 그들이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선교사들이 말려야 할 만큼 평양과 영남 지역의 교회가 보수적이 되고 신사참배에 극단적으로 반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남장로교의 철저한 선교사들이 미신 많은 호남 바닷가를 전도하다 우선 믿도록 하기 위해 넉넉하게 전도를 하고, 그 과정에 넉넉한 지역민들이 선교사의 호의를 받아 들여 교회를 다니면서도 미신을 끊지 않고 융합적으로 믿으며 교회가 급격히 부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까지도 호남의 전도와 교회 부흥은 극적으로 뜨겁다. 영남은 오늘도 숨이 막힐 만큼 복음화가 되지 않는다. 호남의 교회 발전이 극적으로 빨라 지게 되자 어느 한 순간에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 기준으로 한국 교인을 다듬을 수가 없게 되고 신사참배 환란이 막상 닥쳤을 때 극단적으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이 종교와 저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교인들이 아직도 두 길을 넘나 드는 넉넉함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굳이 신사참배 때문에 극한 투쟁에 나설 필요가 없다.
(오늘을 통해 한 세대 앞을 재구성해 본다)
조선 초를 오늘 우리가 재구성하는 것은 참 어렵다. 아주 빗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직접 전도를 받고 일제 때 신사참배가 오기 전에 믿던 이들, 그들이 신사참배의 환란과 해방을 거친 후 최근에 죽으며 오늘 우리를 직접 가르치고 그들의 평생과 그들의 첫 신앙을 낱낱이 설명하고 보여 준 이들은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충분하다.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조수옥 박인순 손명복 등은 80년대 90년대까지 생존했었다. 한국 교회 분열사에 제일 유명한 인물인 한상동도 1970년대까지 생존하며 한국 교회사의 산 증인이었다. 현재 한국교회의 중진 대부분과 원로 전부는 이들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한국 선교의 1세대로 전도 받고 해방 후 2세대를 가르친 이들을 통해 미국의 남북 장로교 선교부의 신앙 성향과 한국 내 선교지의 성향이 왜 반대처럼 보이는지를 살펴 보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은 여기까지만 적고자 한다. 학문적 결과가 필요한 분이 계신다면 논문 제목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방향을 잡은 다음 관련 자료를 모은다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전남북을 선교하고 가르친 미국의 그 억세고 철저한 남 장로교는 신사참배로 순교한 한국 교인을 1명도 배출하지 못한 줄 알았다. 손양원은 지역적으로 여수에서 투옥을 당했으나 이 분의 신앙은 경남에서 선교 받고 배우가 자란 다음에 목회자로 초빙 받아 여수로 왔다. 이기풍도 평양 출신으로 선교와 목회 때문에 여수에 있다 순교했다. 이들을 순교자로 만든 신앙은 남 장로교가 아니다. 얼마 전 안용준 목사님과 심봉한 집사님이 순천의 남장로교 선교부 뜰에 이름이 있었고 이 2명은 남 장로교가 전도하고 신앙으로 만들었음을 여러 과정을 통해 직접 확인을 했다. 그런데 확인을 하는 순간 나는 첫 질문이 마음에 떠올랐다. 왜 이들을 해방 후 2000년대가 되기까지 순교자로 이 지역과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통합 교단에서 순교자 이름에 올리지 않았을까? 이 지역이 이런 식의 순교를 너무 지나 치다고 봤기 때문이라,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료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자유주의 신앙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와서 그들에게 전도 받고 그들에게 배운 이들의 신앙이 너무 곧고 잘 자라게 되자 그들을 가르친 선교사들의 신앙이 본국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해 지면서 오히려 선교자가 선교지 교인들의 신앙에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순천 쪽에 온, 철저한 선교사들은 순천의 넉넉한 인심에 그들이 미국에서 가져 온 독한 신앙을 넉넉하게 펼쳐 놓고 후퇴한 것은 아닐까? 세월 속에 양 쪽을 겪어 보고 또 미국에서 그들을 접해 보면서 느낀 바다. 이 문제는 고신과 통합의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논쟁에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본 연구소가 기본적으로 집중하지 않는 성향 때문에 이 정도만 적어 본다.
한 번씩 인요한 소장님의 글이나 강연 자료를 접한다. 감명 깊고 구구절절이 동감이 된다. 내가 그 분의 가치를 설명하면 웬만한 전문가들보다 낫거나, 나을 면이 있지 않을까? 그의 사상과 인생,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와 전혀 다르게 나는 그 분의 의미를 설명할 사연들이 있다.
(미국의 남북 교회를 비교한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을 비교한다면 차별이 아니라 사실 관계로 설명할 내용이 많고 뚜렷하다. 장로교 침례교를 비교해도 그렇다. 미국의 오늘이 아니라 미국은 1860년대에 남북 전쟁을 했다. 쌍방이 처참하게 싸웠고 그 감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00년 전 한국 선교의 초기,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은 미국의 남북 장로교의 출신을 따라 한국에서의 인식과 행동에도 차이가 많다. 인요한 박사는 평소 '미국의 남부 장로교' 출신임을 강조하며 정통 신앙의 뿌리를 거론한다.
미국의 북부는 대도시의 상업과 공업으로 먼저 발전을 하였고 자연스럽게 청교도 정신이 먼저 없어 졌고 온갖 속화 타락에 물 들었다. 같은 침례교와 같은 장로교라도 남 쪽은 주로 농업을 하여 촌스럽다. 그 대신 보수적이다. 신앙적으로는 '정통 보수는 남쪽' '진보 자유는 북쪽'이다. 남장로교 남침례교라는 표현은 앞뒤가 꽁 막힌 근본주의라고 보면 된다. 북장로교 북침례교는 세상에 친근하다 보면 된다. 세월 속에 이런 구분은 많이 흐려 졌지만 여전히 이런 분위기를 모르면 미국과 미국의 교회를 모르는 사람이다.
한국의 선교는 남북 전쟁이 끝난 20년이 지나던 1880년대에 시작 되었고 일본 식민지 시기가 지속 되던 1900년대 초반 내내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모르고 선교사를 대하면 그냥 미국 출신 선교사들이고 미국의 남북 교회를 알고 보면 남북 선교부들의 차이는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남북 선교회의 한국 지역의 성향)
현재 우리 나라 지도를 놓고 보면 부산 경남에서 경북 충북을 거쳐 서울까지 올라 가면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 대세다. 반대로 목포 여수에서 광주 전주로 서울까지 올라 가면 진보 교단이 대세다. 원래 통합 교단은 여수 순천이 지역적 기반인데 WCC의 중심이다. 그 바람에 교회적으로 통합 교단은 당연히 진보 자유주의로 분류해야 하나 최근 한국의 사회와 교회가 워낙 좌측으로 기울어 지는 바람에 이 통합 교단이 순수 신학적으로만 진보 자유로 분류 되지 실제 눈에 보이는 평가는 마치 보수에 중심처럼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또 신앙의 근본인 신학적으로 봐도, 또 양측을 수평 비교를 해 버리면 통합 교단은 진보측이고, 합동과 고신은 보수측이다.
지역적으로 비교하는 이유는, 한국을 선교한 미국의 북장로교회가 관할했거나 관할한 지역은 신사참배 때 거세게 거부함으로 해방 후에 신사참배 거부 교회들이 위치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이 모인 고신을 해방 후에 제거한 후 오늘의 합동 교단과 분열하고 WCC의 중심에 선 교단은 전남북이 지역적 배경이다. 여수 순천은 거의 통합 교단이다. 그런데 여수 순천을 석권한 통합 교단의 선교를 도 맡고 그들의 신앙을 가르치고 해방 후 막대한 선교부 재산을 물려 준 미국의 남장로교회, 이들은 북장로교회와 비교조차 거부할 만큼 보수적이다. 왜 보수적 남 장로 교단이 가르치고 기른 전남북은 펼쳐 놓고 이렇게 신앙이 넓고 자유로운가? 왜 미국에서 그렇게 신앙이 넓고 자유로웠던 북 장로 교단이 가르친 곳은 그렇게 골수 신앙으로 한국 교회사를 기록하고 있을까?
(확정은 짓지 못하고, 짐작만 해 본다)
신앙의 세계를 거친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사와 실제 평소 살아 가는 신앙의 현장을 통해 '신학'과 '역사학'이 고증하는 방법과 다른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이 것을 주관이라고 배척하는 것이 학문의 세계니 학자들에게 학설로 말할 수는 없고, 그냥 혼자 가능성을 짚어 본다.
1. 소속 교단과 목회자의 차이
고신 교단에 속했으나 통합 교단보다 넓은 목회자가 있다. 통합 교단에 속했으나 고신 교단보다 더 보수적인 목회자도 있다. 교단이란 대체적 흐름을 말한다. 남한 학자 중에 북쪽 교수보다 더 붉은 이들도 있고, 평양의 골수 공산당원 속에 남한보다 더 자본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 미국의 북장로교에 속했으나 19세기 20세기에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 대부분은 남장로교회와 비교할 때 개인적으로 더 철저하게 보수 신앙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 중에서 북장로교 선교사에 비해 더욱 타협적인 인물들도 있을 수 있다.
2. 선교지의 원래 차이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가 전남북을 철저히 보수 신앙으로 가르쳤지만 이 지역의 진보적 성향을 바꾸지 못하여 진보 교회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면 미국 북 장로교회가 대충 가르쳤는데 영남과 평양에 교회들이 원래 보수적이어서 신앙조차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가르치던 선교사들의 변화
술을 좋아 하던 아버지가 아들의 음주가 극단적이 되면 아들을 위해 술을 끊는 수가 있다. 술을 마시지 않던 아버지가 아들이 약간의 술로 인생을 좋게 살아 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조금 먹는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미국에서는 신앙이 자유로웠는데 한국의 숨 막힐 미신을 타파하느라고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전적 성경 그대로를 고수하게 되고 그들이 그렇게까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선교사들이 말려야 할 만큼 평양과 영남 지역의 교회가 보수적이 되고 신사참배에 극단적으로 반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남장로교의 철저한 선교사들이 미신 많은 호남 바닷가를 전도하다 우선 믿도록 하기 위해 넉넉하게 전도를 하고, 그 과정에 넉넉한 지역민들이 선교사의 호의를 받아 들여 교회를 다니면서도 미신을 끊지 않고 융합적으로 믿으며 교회가 급격히 부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까지도 호남의 전도와 교회 부흥은 극적으로 뜨겁다. 영남은 오늘도 숨이 막힐 만큼 복음화가 되지 않는다. 호남의 교회 발전이 극적으로 빨라 지게 되자 어느 한 순간에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 기준으로 한국 교인을 다듬을 수가 없게 되고 신사참배 환란이 막상 닥쳤을 때 극단적으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이 종교와 저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교인들이 아직도 두 길을 넘나 드는 넉넉함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굳이 신사참배 때문에 극한 투쟁에 나설 필요가 없다.
(오늘을 통해 한 세대 앞을 재구성해 본다)
조선 초를 오늘 우리가 재구성하는 것은 참 어렵다. 아주 빗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직접 전도를 받고 일제 때 신사참배가 오기 전에 믿던 이들, 그들이 신사참배의 환란과 해방을 거친 후 최근에 죽으며 오늘 우리를 직접 가르치고 그들의 평생과 그들의 첫 신앙을 낱낱이 설명하고 보여 준 이들은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충분하다. 박윤선 이인재 백영희 조수옥 박인순 손명복 등은 80년대 90년대까지 생존했었다. 한국 교회 분열사에 제일 유명한 인물인 한상동도 1970년대까지 생존하며 한국 교회사의 산 증인이었다. 현재 한국교회의 중진 대부분과 원로 전부는 이들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한국 선교의 1세대로 전도 받고 해방 후 2세대를 가르친 이들을 통해 미국의 남북 장로교 선교부의 신앙 성향과 한국 내 선교지의 성향이 왜 반대처럼 보이는지를 살펴 보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은 여기까지만 적고자 한다. 학문적 결과가 필요한 분이 계신다면 논문 제목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방향을 잡은 다음 관련 자료를 모은다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전남북을 선교하고 가르친 미국의 그 억세고 철저한 남 장로교는 신사참배로 순교한 한국 교인을 1명도 배출하지 못한 줄 알았다. 손양원은 지역적으로 여수에서 투옥을 당했으나 이 분의 신앙은 경남에서 선교 받고 배우가 자란 다음에 목회자로 초빙 받아 여수로 왔다. 이기풍도 평양 출신으로 선교와 목회 때문에 여수에 있다 순교했다. 이들을 순교자로 만든 신앙은 남 장로교가 아니다. 얼마 전 안용준 목사님과 심봉한 집사님이 순천의 남장로교 선교부 뜰에 이름이 있었고 이 2명은 남 장로교가 전도하고 신앙으로 만들었음을 여러 과정을 통해 직접 확인을 했다. 그런데 확인을 하는 순간 나는 첫 질문이 마음에 떠올랐다. 왜 이들을 해방 후 2000년대가 되기까지 순교자로 이 지역과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통합 교단에서 순교자 이름에 올리지 않았을까? 이 지역이 이런 식의 순교를 너무 지나 치다고 봤기 때문이라,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료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자유주의 신앙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와서 그들에게 전도 받고 그들에게 배운 이들의 신앙이 너무 곧고 잘 자라게 되자 그들을 가르친 선교사들의 신앙이 본국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해 지면서 오히려 선교자가 선교지 교인들의 신앙에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순천 쪽에 온, 철저한 선교사들은 순천의 넉넉한 인심에 그들이 미국에서 가져 온 독한 신앙을 넉넉하게 펼쳐 놓고 후퇴한 것은 아닐까? 세월 속에 양 쪽을 겪어 보고 또 미국에서 그들을 접해 보면서 느낀 바다. 이 문제는 고신과 통합의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논쟁에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본 연구소가 기본적으로 집중하지 않는 성향 때문에 이 정도만 적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