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의 고학력과 신앙의 해체화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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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9 13:04
(초대교회)
세계 교회가 교파와 종파를 떠나 '초대교회'를 흠모한다. 그 때가 옳았고 좋았다는 뜻이다. 모두가 초대교회를 노래 부른다.
초대교회는 이러지 않았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식이다. 이래야 초대교회와 같아 진다. 너희 교회는 초대교회와 다르다...
신학에서도 각 교회의 설교에서도 초대교회를 신앙의 표준이며 최고의 절정 모습으로 소개한다. 초대교회는 어떠 했을까?
* 외롭고 어려웠다.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 질 때였다.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안에서도 신생 종파였다. 그래서 이단으로 지목을 받았다.
중세와 지금은 초대교회의 수고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의 상식이 되었고 대세가 되었고 세상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초대교회가 특별했던 것은 시기적으로 초기여서가 아니다. 외롭고 어려워 주님을 찾았고, 주님이 역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풍요롭지만 오늘도 주님이 원하는 길을 걸어 가려면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야 하고 외롭고 힘들게 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를 하고 선교를 했다 라는 행위를 보지 말고 극한 어려움 속에 그들의 사명에 충실했음을 봐야 한다.
오늘은 밥 대신 천국에 대한 사모의 구제가 필요하고 미개국 선교와 동시에 자기 내면의 강퍆을 선교해야 할 시기다. .
저소득에 비만이 많고 일하기 싫어 굶는 사람에게 배고픈 시절처럼 음식 주는 구제를 통해 초대교회가 될 수 있을까?
* 박해가 많았다.
처음 시작하기 때문에 외롭고 어려운 것은 세월 속에 해결이 되지만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에 교회는 목숨을 걸었다.
죽을 지경이니 대충 믿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목숨 걸고 믿었다. 생명을 걸고 전했고 받는 사람도 그래서 신중했다.
구경 삼아 교회를 다닐 수 없었고, 남들 따라 행사 차원에서 전도를 다니지 않았으며 관광과 선교를 뒤섞지 않았다.
지금은 휴가를 내어 평소 가 보지 않은 오지 탐험으로 해외 문화 체험 차원에서 선교를 간다. 선교가 덤이 되는 정도다.
국내의 종교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도 선교사의 신변은 UN과 세계 언론과 국내 외교가 보호하며 지켜 본다.
맹수가 다니는 정글 속으로 선교를 가는 것이 아니라 사파리 차량 안에서 맹수가 사는 모습을 근접 관광을 하는 정도다.
목숨이 절박할 때 기도가 능력이 되는데 체험학습 수준의 오늘에 우리 기도는 절박이 없으니 초대교회가 될 수가 없다.
* 배운 교인이 없었다.
초대교회는 읽을 것도 배울 것도 볼 것도 없었다. 성경도 많이 읽을 방법이 없었다. 성경책이 드물었고 글을 몰랐었다.
읽은 사람이 소개해 주면 몇 마디 외워서 기억하고 새겨야 했다. 오늘은 주머니 안에도 휴대폰 안에도 성경이 있다.
글을 모르니 있어도 읽을 줄도 모르고 성경을 가진 사람도 휴대가 어려우니 읽는 것이 불편했다. 모든 것이 불리했다.
그러니 말씀을 접할 때 눈과 귀와 마음을 모았다. 필기조차 없으니 마음에 담아야 했다. 말씀은 적지만 깊이 새겼다.
지금은 책 속에 휴대폰 속에 문자와 음성 부호로만 성경이 대기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이 그 말씀에 집중할 수가 없다.
대신에 진학 진로 취업 생존을 위해 봐야 하고 읽고 외울 것이 너무 많다. 말씀이 따로 들어 가 앉을 자리가 거의 없다.
말씀을 읽고 가질 기회가 너무 넘치다 보니 무식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한 말씀에 모든 것을 기울이던 모습이 없다.
(고학력의 신앙 해체)
고학력이 되면서 목사가 읽은 신학서를 교인도 읽고, 목사가 사용하는 원어의 어휘력과 숫자까지 교인들이 지켜 보고 있다.
몇 마디 써 먹는 정도이지 실제 어느 정도인지 신학 용어와 원어 수준까지 손바닥의 휴대폰으로 검색하며 평가를 하고 있다.
신학자가 아닌 일반 목회자는 교인과 신학 분야로 비교해도 앞 선다 하기가 어려워 졌다. 정보와 자료가 넘치기 때문이다.
전교 1등하던 서울대 나온 교인이 성경에 관심을 갖는 순간 그 학교 중간이나 바닥을 헤매던 목사를 신학에서도 앞 지른다.
사회 전체적으로 고학력과 함께 정보와 통신의 발전이 발달하게 되자 교인들이 성경에 궁금한 것을 각자 직접 찾고 있다.
목사는 설교 때만 자기 교회의 강조할 점이나 전하는 정도고 성경과 신앙과 교회의 전문 지식은 교인들이 불편 없이 안다.
이런 흐름은 결국 교회 안에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이제는 교인까지 신학이 일반화 되면서 그 만큼 신앙이 줄어 든다.
신앙은 없어 지고 교인까지 그 머리 속에 신앙을 신학으로 상대하고 분석하고 써 먹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신앙 멸종이다.
신앙 실체가 낮아지고 희미해 지면 신앙이라는 것이 미신이 된다. 신앙이 실행을 무시하고 신학으로 가면 신앙이 없어 진다.
(이 노선의 과제)
공회는 백영희 설교의 성경 중심적 교리 설교 때문에 초기부터 신앙의 연경화가 극심했다. 굳이 말하자면 신학화다.
그런데 백영희부터 신학에 무식했고 교인들의 수준도 무식했기 때문에 신앙의 신학화는 성경화를 넘어 서지 않았다.
신학화로 가지 않고 연경화까지만 간 공회의 신앙은 갈수록 교리와 지식이 깊어 갔고 그 정도의 실행은 어렵지 않아
비록 완벽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타 교단과 비교하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교파든지 주일에 대한 신학은 완벽하다. 그러나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교회는 없다. 공회는 아직도 철저하다.
예를 들면 이런 점을 말한다. 학습력 없는 사람의 신학 일변도는 허상이 되고 학습력이 있는 사람은 이론가에 그친다.
공회는 무식하다. 그런데 시대의 발달에 따라 성경 읽은 정도는 무난해 졌다. 그 성경으로 자기를 살펴 보면 연경이다.
연경까지가 공회가 조심하는 이론의 마지막 단계다. 신학까지는 교인이 갈 필요도 없지만 건너 가기는 너무 위험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연구소는 1998년의 사이트 개설 때 고민을 많이 했다. 대량의 자료를 제공하면 신학으로 가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아주 가끔 이 노선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있고, 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반에게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실행하며 다시 살피고 나가는 길이 좋은데 선을 넘어 지식 중심으로 달려 가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자기 책임이다.
세계 교회가 교파와 종파를 떠나 '초대교회'를 흠모한다. 그 때가 옳았고 좋았다는 뜻이다. 모두가 초대교회를 노래 부른다.
초대교회는 이러지 않았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식이다. 이래야 초대교회와 같아 진다. 너희 교회는 초대교회와 다르다...
신학에서도 각 교회의 설교에서도 초대교회를 신앙의 표준이며 최고의 절정 모습으로 소개한다. 초대교회는 어떠 했을까?
* 외롭고 어려웠다.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 질 때였다.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안에서도 신생 종파였다. 그래서 이단으로 지목을 받았다.
중세와 지금은 초대교회의 수고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의 상식이 되었고 대세가 되었고 세상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초대교회가 특별했던 것은 시기적으로 초기여서가 아니다. 외롭고 어려워 주님을 찾았고, 주님이 역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풍요롭지만 오늘도 주님이 원하는 길을 걸어 가려면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야 하고 외롭고 힘들게 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를 하고 선교를 했다 라는 행위를 보지 말고 극한 어려움 속에 그들의 사명에 충실했음을 봐야 한다.
오늘은 밥 대신 천국에 대한 사모의 구제가 필요하고 미개국 선교와 동시에 자기 내면의 강퍆을 선교해야 할 시기다. .
저소득에 비만이 많고 일하기 싫어 굶는 사람에게 배고픈 시절처럼 음식 주는 구제를 통해 초대교회가 될 수 있을까?
* 박해가 많았다.
처음 시작하기 때문에 외롭고 어려운 것은 세월 속에 해결이 되지만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에 교회는 목숨을 걸었다.
죽을 지경이니 대충 믿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목숨 걸고 믿었다. 생명을 걸고 전했고 받는 사람도 그래서 신중했다.
구경 삼아 교회를 다닐 수 없었고, 남들 따라 행사 차원에서 전도를 다니지 않았으며 관광과 선교를 뒤섞지 않았다.
지금은 휴가를 내어 평소 가 보지 않은 오지 탐험으로 해외 문화 체험 차원에서 선교를 간다. 선교가 덤이 되는 정도다.
국내의 종교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도 선교사의 신변은 UN과 세계 언론과 국내 외교가 보호하며 지켜 본다.
맹수가 다니는 정글 속으로 선교를 가는 것이 아니라 사파리 차량 안에서 맹수가 사는 모습을 근접 관광을 하는 정도다.
목숨이 절박할 때 기도가 능력이 되는데 체험학습 수준의 오늘에 우리 기도는 절박이 없으니 초대교회가 될 수가 없다.
* 배운 교인이 없었다.
초대교회는 읽을 것도 배울 것도 볼 것도 없었다. 성경도 많이 읽을 방법이 없었다. 성경책이 드물었고 글을 몰랐었다.
읽은 사람이 소개해 주면 몇 마디 외워서 기억하고 새겨야 했다. 오늘은 주머니 안에도 휴대폰 안에도 성경이 있다.
글을 모르니 있어도 읽을 줄도 모르고 성경을 가진 사람도 휴대가 어려우니 읽는 것이 불편했다. 모든 것이 불리했다.
그러니 말씀을 접할 때 눈과 귀와 마음을 모았다. 필기조차 없으니 마음에 담아야 했다. 말씀은 적지만 깊이 새겼다.
지금은 책 속에 휴대폰 속에 문자와 음성 부호로만 성경이 대기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이 그 말씀에 집중할 수가 없다.
대신에 진학 진로 취업 생존을 위해 봐야 하고 읽고 외울 것이 너무 많다. 말씀이 따로 들어 가 앉을 자리가 거의 없다.
말씀을 읽고 가질 기회가 너무 넘치다 보니 무식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한 말씀에 모든 것을 기울이던 모습이 없다.
(고학력의 신앙 해체)
고학력이 되면서 목사가 읽은 신학서를 교인도 읽고, 목사가 사용하는 원어의 어휘력과 숫자까지 교인들이 지켜 보고 있다.
몇 마디 써 먹는 정도이지 실제 어느 정도인지 신학 용어와 원어 수준까지 손바닥의 휴대폰으로 검색하며 평가를 하고 있다.
신학자가 아닌 일반 목회자는 교인과 신학 분야로 비교해도 앞 선다 하기가 어려워 졌다. 정보와 자료가 넘치기 때문이다.
전교 1등하던 서울대 나온 교인이 성경에 관심을 갖는 순간 그 학교 중간이나 바닥을 헤매던 목사를 신학에서도 앞 지른다.
사회 전체적으로 고학력과 함께 정보와 통신의 발전이 발달하게 되자 교인들이 성경에 궁금한 것을 각자 직접 찾고 있다.
목사는 설교 때만 자기 교회의 강조할 점이나 전하는 정도고 성경과 신앙과 교회의 전문 지식은 교인들이 불편 없이 안다.
이런 흐름은 결국 교회 안에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고 이제는 교인까지 신학이 일반화 되면서 그 만큼 신앙이 줄어 든다.
신앙은 없어 지고 교인까지 그 머리 속에 신앙을 신학으로 상대하고 분석하고 써 먹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신앙 멸종이다.
신앙 실체가 낮아지고 희미해 지면 신앙이라는 것이 미신이 된다. 신앙이 실행을 무시하고 신학으로 가면 신앙이 없어 진다.
(이 노선의 과제)
공회는 백영희 설교의 성경 중심적 교리 설교 때문에 초기부터 신앙의 연경화가 극심했다. 굳이 말하자면 신학화다.
그런데 백영희부터 신학에 무식했고 교인들의 수준도 무식했기 때문에 신앙의 신학화는 성경화를 넘어 서지 않았다.
신학화로 가지 않고 연경화까지만 간 공회의 신앙은 갈수록 교리와 지식이 깊어 갔고 그 정도의 실행은 어렵지 않아
비록 완벽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타 교단과 비교하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교파든지 주일에 대한 신학은 완벽하다. 그러나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교회는 없다. 공회는 아직도 철저하다.
예를 들면 이런 점을 말한다. 학습력 없는 사람의 신학 일변도는 허상이 되고 학습력이 있는 사람은 이론가에 그친다.
공회는 무식하다. 그런데 시대의 발달에 따라 성경 읽은 정도는 무난해 졌다. 그 성경으로 자기를 살펴 보면 연경이다.
연경까지가 공회가 조심하는 이론의 마지막 단계다. 신학까지는 교인이 갈 필요도 없지만 건너 가기는 너무 위험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연구소는 1998년의 사이트 개설 때 고민을 많이 했다. 대량의 자료를 제공하면 신학으로 가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아주 가끔 이 노선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있고, 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반에게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실행하며 다시 살피고 나가는 길이 좋은데 선을 넘어 지식 중심으로 달려 가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자기 책임이다.

조직신학은 전체에서 부분을 보는 망원경, 성구 제시 불가.
굳이 따진다면,
공회는 조직신학이 강한가? 성경신학이 강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