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이론, 건설로 포장한 파괴 이론
이단을 대처하는 전문가는 남의 비리와 틀린 점만 들여다 본다. 정화조에 머리를 넣고 일일이 만져 본다.
정화조가 있어야 한다. 몸 속에도 대소변 통이 있다. 그런데 덮어 놓는다. 자연적으로 처리 되게 한다.
교회가 이단을 대처할 때는 늘 대소변을 생각하면 과유불급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귀신은 이단을 만들어 이단에 끌리는 사람을 우선 수입으로 삼는다.
귀신의 다음 수입은 이단 논쟁 때문에 싫증을 내는 사람으로 수입을 삼는다. 이 것도 저 것도 싫다는 사람이 귀신의 것이다.
귀신의 마지막 수입은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이단을 반대했는데 뒤에 보니 이단 포교자가 된다.
돈을 벌어 본 야당은 야당 노릇을 할 수 있다.
돈을 벌어 보지 않은 야당은 나라의 좀 벌레밖에 하지 못한다.
학생 때부터 부모 주는 돈으로 국가 발전에 티와 점과 흠만 찾던 이들이 지금은 국가의 안보와 경제를 논하고 있다.
목회를 해 보지 않은 이들이 교회를 논하듯이
믿어 보지도 않은 이들이 한국의 교계를 그들이 그려 본 이상의 세계로 실험을 하려는 것처럼.
자기 아들의 배에 칼을 들이 대며 실험을 하지는 않을 이들이다.
공회 노선의 여러 특색 중에 '실체' '실무' '실행'라는 강조가 있다.
연보를 해 본 목회자, 연보를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땀을 흘려 본 목회자, 교인들에게 땀을 강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본 여성, 아이를 논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전도를 해 본 교인, 전도인이 될 수 있다. 전도인을 거쳐 본 사람, 전도사가 될 수 있다.
전도는 하지 않고 공부만 한 신학도는 신학자가 될 수는 있지만 전도사 될 수는 없다.
전도사를 만드려면 신학자라야 할까, 전도사라야 할까? 우리는 전도사라고 생각한다.
공회는 신학교로 목회자를 만들지 않고 교인 생활을 잘 한 사람을 목회자로 선발한다.
이단 전문가치고 목회를 제대로 한 사람은 없다.
이단 전문가치고 목회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반대로 목회에 성공한 사람은 이단과 싸움을 전문하지 않는다. 그들을 쳐다 볼 시간이 없다.
앞으로 질주하여 달리다 보면 이단이 옆에 붙지를 못한다. 이단과 싸우는 방법이 이렇다.
교회가 세상과 싸우는 방법도 그렇다.
세상의 틀린 점을 연구하기 전에 세상을 초월해 버린다. 세상이 찔러 볼 틈이 없다.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제 코가 석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