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씩 드러 내는 주님, 드러 나는 교회들 - 공회를 중심으로
담당
5
4
2020.08.31 11:18
여러 교회 중에 하나며, 여러 교인 중에 하나인데
연단을 위해 또는 신앙의 광고를 위해 유독 주님이 표시를 내고 드러 내는 교회나 교인이 있다.
1. 이 번 방역 상황과 공회 교회들의 대처
공회 교회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해 보인다. 초기에 아예 예배를 없애 버린 신앙 없는 대처라 해도 이 번 상황은 방역 상황이어서 그리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광화문에 데모 하러 나간 공회 교회는 없을 것이니 공연히 세상을 자극하여 세상과 세상 식으로 싸울 교회는 공회에 없다. 그래서 지나치게 우로 치우친 교회도 없을 듯하다. 대부분 공회 교회들은 조금 아쉽게 일찍 문을 닫은 교회도 있고, 예배를 정성껏 이어 나간 교회도 있다. 어떤 교회들은 그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닐 듯하나 좀 무리하게 나간 교회도 있다. 이 무리하게 지나치게 나간 듯이 보였다는 것은 다른 교회가 볼 때 그렇지 공회의 원래 모습에서 본다면 더욱 공회 교회다운 좋은 모습이다.
8월 19일에 서울과 수도권은 모든 교회에 단 1명의 교인도 출입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비록 주님이 세상에게 준 세상의 권리지만 교회만을 콕 찍어서 예배의 문만 그런 식으로 닫으면 그 권리를 주신 주님이 그렇게 조처한 인간의 뒤꼭지를 겨누고 계신다. 언젠가는 좋지 않은 일이 크게 생길 것이다. 교회로서는 그런 이들에게 동정을 보내는 것이 맞다. 모르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 번 방역 상황에서 외부에 드러 난 공회의 교회를 살피고 있다.
2. 공회 교회의 사례 - 세상과 불가피하게 충돌한 경우
공회 역사를 통해 공회 교회가 공회의 신앙에 따라 당연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오해하여 공연히 시비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공회 교회가 세상에게 마치 나쁜 집단처럼 오해를 받은 경우만 살펴 본다. 전국 사건으로 알려진 경우만
첫째, 1949년 위천교회 국기배례사건
거창의 위천교회로 부임한 백영희 조사님 때문에 1950년 3월 1일에 국기배례 거부 사건이 발생한다. 교회로서는 당연히 거부하는 것이 맞고, 막 출발한 정부는 반정부 활동으로 오해할 만 했고 그래서 총칼로 진압을 할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 교회는 마치 반정부 단체처럼 또는 반국가 반란 세력처럼 오해를 받았다. 탄압하는 경찰과 핍박 받는 위천교회 주일학생들은 서로가 할 일을 너무 잘했다. 이 사건은 아주 조기에 잘 해결이 되었다. 국가가 오해를 했다면서 제도를 바꾸고 국기배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변경했다.
이 사건이 국무회의를 통해 국가의 제도를 바꾸기까지 된 과정에는 빨치산 본부가 있던 적접 지역인 위천의 지역성, 전국의 곳곳에서 벌어 진 다른 사건들, 경남도지사가 양성봉이라는 인물 등이 관계가 되어 발생했다. 하나님은 사회적 사건을 만드시려고 미리 조처를 해 두셨다.
둘째, 1973년 남천교회 국기배례사건
전국의 공회 교회들은 어디나 10월 유신 후 강화 된 국기배례 문제를 두고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제천의 남천교회만 그렇게 된 것처럼 사회 문제가 된 것은 백영침 목사님이 담임이었고, 남천교회의 지리적 여건이 작용했다. 물론 남천교회의 규모가 그렇게 될 정도였다. 또한 학교에서 문제가 될 때 주일학생들과 주일학교는 비록 신앙은 제대로 지켰으나 세상을 상대하는 표현이 위천 때와 달랐다. 제천의 당시 검사가 거창에 근무를 했고 거창 시절에 공회가 집회를 하면 백영희 목사님의 고향인 도평의 백씨 집안 문제로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이 검사 역시 백 씨다. 이 사건은 무리하게 백영침 목사님을 구속 처리했고 대법원까지 간 사건에서 공회는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검사의 기소가 무리였다고 밝혀 졌다.
지금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는 드물지만 유신 때는 국가 기강 때문에 사법기관의 국가 질서에 관련 된 이런 처리가 뒤집어 지는 경우는 없다고 할 시절이다. 되 돌아 당시를 살펴 봐도 유신 정국도 특이했고, 유신의 국가 상황 때문에 국기배례를 그렇게 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남천교회의 규모와 신앙과 담임 목회자와 교회의 자체 표현의 문제 때문에 검찰은 무리했다. 그리고 대법원의 판례까지 남기며 공회는 한국 교회에 소리 없이 큰 빛이 되었다.
세째, 1979년의 서부교회 주일학교 미아 사건
조갑제 기자가 교회를 비판하려고 마음 먹고 취재를 하다가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로 사회면 톱 기사를 올렸다. 이 날을 기준으로 백영희, 부산서부교회, 총공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다시는 잊혀 질 수 없는 교회로 유명해 졌다. 그 영향이 끼친 것은 이루 말을 할 수 없다. 그냥 한 때 이름을 날리다 잊혀 지는 유행성 인기가 아니라 교회가 가장 교회답게 운영 되면서 외부에서 볼 때도 가장 이상적인 사례가 되었다.
1천여 명 교회의 반사와 보조반사들은 오로지 자기 맡은 골목에 자기 학생을 교회로 데려 왔고 가르친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숫자가 출석 8천명 평균에 재적이 2만 5천명을 넘기며 성탄절과 여름성경학교 때는 1만 3천명 출석이 단일 장소의 아침 8시 30분에 이루어 지니 그 과정에 미아는 수 없이 발생 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아동 안전과 미아 예방과 인권 등의 기준으로 본다면 초대형 인권 유린의 사례로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정원 4명의 택시에 아이를 13명 15명까지 태우고 교회 앞에 줄줄이 내려 놓았고 시내 버스 1대에 1백여 명 학생들이 쏟아 져 내리는 것은 아동의 안전 등에 치명적인 위협 요소였다. 지금 방역 문제의 안전과 생명과 건강 문제로 단속하는 상황과 비교한다면 그 위협은 실로 대단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교회로 와야 할 학생을 데려 왔고, 당시의 교회 역량은 단 1대의 교회 차량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많은 학생은 전부 걸어서 오거나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와야 했다. 교회는 자랑스럽게 잘 했다. 국내외 모든 언론이 탄복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가 구조적으로 발생하니 한 번은 큰 사건으로 비화가 될까 싶어 경찰은 우려해야 했고 언론은 취재를 했다. 그 기자 이름이 조갑제다.
네째, 1989년 백영희 순교 사건
1979년부터 만 10년 전국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고, 세계 10대 교회이자 서울을 제외 한 전국 최대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하는 강단에서 1천명 새벽예배 교인의 눈 앞에서 영상 촬영이 진행되며 살해됐다.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에게는 평화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순교의 위대한 장면이었고, 세상 언론은 초대형 교회의 목사가 설교를 하다 피살 된 것은 뉴스거리로서는 호재였다. 모든 방송과 언론이 마치 자기 교인에게 무슨 원한이나 있어 당한 것처럼 일단 보도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서부교회의 예배당 분위기, 백 목사님의 설교, 당시 교인들의 상황, 격변의 시대 상황까지 모든 것이 맞아 떨어 졌다. 순교의 실제 내용을 알리기 위해 장례의 광고 형식을 통해 교인에 의한 피살이 아니라 평소 소원하던 순교였음을 알렸고 기독교 신문들은 거의 다 실상을 잘 전하여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오늘까지 한국 교회가 감히 평을 할 수도 없는 차원으로 남아 있다.
다섯째, 2020년 8월의 동문교회 소식
방역 문제는 화재처럼 주일에도 대처를 해야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화재가 온 집이 불타고 사람이 죽고 온 마을과 도시를 삼킬 정도의 화재가 아니라 냄비에 물이 없어 냄비 하나가 타 버리고 끝나는 화재 때문에 주일을 포기할 수 있을까? 겨울만 되면 돌아 다니는 독감과 여름마다 기승을 부리는 눈병도 전염병이라 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교회 문을 닫아야 할까? 현재 방역 문제는 정부가 방역 비상 상황이라 하니 그들에게 하나님이 맡겨 놓은 권한을 존중하여 따로 항의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군담이 쉬임 없이 나온다.
예배당 문 앞에 식당들은 마스크도 없이, 바짝 붙어 앉아, 촘촘히 음식을 나누는데 교회의 점심 시간은 단 1명도 앉아서는 안 된다면서 그 이유를 국가적 방역 위기라 한다. 이런 것을 종교 탄압이라 한다. 먹고 놀고 지하철과 온 나라는 흥청망청하면서 교회만을 콕 찍어서 방역 교과서에 나오는 최대치로 단속을 한다. 이런 선상에서 교회만 예배당에 1명도 출입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 이 곳은 세상이고, 세상의 주인은 세상 사람이다. 교회는 이런 세상에게 신세를 지며 주민등록을 올려 놓고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누구를 왕으로 만들든 어떤 법을 만들든 누구를 혼내주든 교회는 교회가 아는 지식이 있고 판단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아 네로처럼 되고 평양 김 씨들처럼 되는지 안다. 때로는 설명을 하면서 만류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교회가 주소를 두고 활동을 하는 이 곳은 교회가 다스리고 운영하는 천국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치면 교회는 당할 수밖에 없다.
동문교회는 2백여 명 정도 되는 교회로 기억한다. 그런데 위치가 하필 주택가다. 언론과 정부에서 교회만 원수로 지목하고 설치다 보니 동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언론사에 신고하면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 동문교회는 전국 교회 대표들이나 서울지역 교회 연합회에 가지도 않을 교회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곳이 아니다. 다른 교회들은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동문교회는 서울의 중심지에서 예배 시간이 되면 예배를 드린다. 인민군이 와도 일제가 막고 나서도 동문교회는 공회 교회들 중에 하나다. 그냥 예배를 드리는 교회다. 다른 교단 다른 교회들은 예배가 목숨과 같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예배 시간에 야유회도 가고 체육관을 빌려 놀이 행사도 하고 바쁘면 주일도 예배도 뒤로 밀어 버린다. 그런 교회가 예배를 생명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동문교회는 직장이 떨어져도, 가정이 깨어져도, 진학이 막혀도, 예배를 지켜 온 교회다.
그런데 동문교회가 방역 문제를 반대하는가? 철저히 잘 준수하는 교회다. 만일 정부가 동문교회 주변의 식당과 마트와 대중교통을 전부 다 막고 서울시와 구청의 직원들이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단 1명도 모이지 말자 한다면? 사태가 심각하니 고민을 했을 듯하다. 그렇다 해도 교회를 오는 분들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예배 외에는 할 일을 다하면서 예배만을 막고 나서니 세상이 공연히 예배를 치는 핑계로 봤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만일 대문을 힘으로 막고 나선다면 경찰이나 공무원의 멱살을 잡아 끌어 내면서 들어 갔을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 나오고 있다. 막으면 막히나 막지 않는 예배당을 미리 주저 앉을 만큼 방역 문제가 주변 주민과 이웃의 생사를 좌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한 가지 덧붙여 본다.
공회는 막힐 때까지는 간다는 것이 예배당 가는 원칙이다. 어떤 순간을 막힌다고 생각하는가?
공무원이 직접 대문 앞을 몸으로 막으면 공회 교회는 어느 교회라도 더 이상 들어 가지 않는다.
몸으로 막겠다고 통고하면? 통고에는 상관하지 않는 교회도 있고 통고를 막혔다고 보는 교회도 있다.
몸으로 막기 전에 통고를 하고, 통고를 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도록 이 정도에서 멈춰 달라고 할 때를 막혔다고 보는 교회도 있다. 이 선을 결정하는 것은 각 교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 것은 공회가 일괄적으로 제시할 수가 없다.
사례를 가지고 살펴 볼 수는 있다.
백 목사님이 1952년 7월에 서부교회를 부임했다. 그 직전까지 거창의 위천교회와 개명교회에 있었다. 이 곳은 우리 나라에서 적설량이 가장 많은 덕유산 향적봉의 건너 편이다. 향적봉 너머가 무주 리조트로 유명한 스키장이다. 강원도보다 적설량은 더 많다. 눈 많은 거창에서 살며 눈 속을 다니며 산에 기도를 했고 심방을 했던 분이다. 1952년 12월, 부산의 첫 겨울에 눈이 많이 왔다. 새벽예배에 장년반은 노인 1명만 오고 전부 결석했다. 주일학생으로 주일학교 새벽예배를 온 사람은 서영호 목사님의 동생들인 서길자 서윤호 남매와 친구 1명이 있었다. 백 목사님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고 있던 1963년 4월에 그 해 겨울의 눈 이야기를 했다. 인민군 앞에 목숨 걸고 믿어야 하며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을 견디는 것이 교인의 기본인데 눈이 한 번 왔다고 예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무슨 환란을 입에 담느냐고 호통을 했다.
부산에서만 사는 사람에게 눈과 덕유산 자락에서 사는 사람의 눈은 다르다. 부산과 여수에는 눈이 살짝 덮이면 차들이 전부 거북이가 된다. 그리고 차량 운행을 기피한다. 중부권만 되어도 쌓인 눈 위를 쌩쌩 달린다. 그런데 노인 1명이 새벽예배를 왔고, 주일학생 3명이 새벽예배를 왔다. 나머지는 그 노인과 그 아이들의 중간이다. 그렇다면 할 말이 없게 된다. 서길자 서윤호.. 이 분들이 서영호 목사님 동생들이다. 소리 없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걸어 가는 분들이다. 그 신앙을 논하기 전에 그 가정 그 식구들의 인품과 사람으로서 기본을 갖춘 이런 모습을 볼 때 공회의 우리 일반 교인들은 사실 너무 저질이다. 그런 분들과 공회 이름으로 함께 신앙 생활하는 것이 송구스럽다.
동문교회,
부럽다.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 번 방역 상황에서 전국의 공회 교회들 중에 유일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주님은 마치 유일한 사례처럼 표시를 내셨다. 이렇게 한 번 쓰시고 나면 주님은 그 뒤에 늘 챙겨 주시는 배려가 있다. 이제 동문교회는 향후 오랜 세월 우리 공회 신앙의 노선에 표상이다. 그 교회에 이 번 일이 지나고 나면 제대로 믿으려는 진실한 교인들이 많이 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빌고 싶다. 또 동문교회 출신들이 공회 내 곳곳에 큰 기둥들이 되면 좋겠다.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 번에 이렇게 쓰셨으니 지난 날도 훌륭했다는 뜻일 것이고 이 번 기회를 통해 이제는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차원에서 쓰실 것이다. 이 번 표시가 그런 표시다.
서울의 번동교회 청량리교회 새공릉교회 아현동교회 등은 동문교회에 앞 설 교회지 같이 설 정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번만은 동문교회를 선발했다. 그래서 공회의 대표 교회가 되었다. 전국의 거의 모든 공회 교회들은 마음 속으로 버가모교인들처럼 안디바가 순교를 할 때 마음으로 함께 하는 자세로 동문교회를 향할 듯하다. 다른 교회들은 막힐 때까지는 예배를 진행한다. 그 막히는 순간을 어느 선으로 정하는지만 서로 조금 다를 뿐이다.
동문교회의 이상규 목사님, 그 목사님이 계시는 곳임을 기억하고 싶다. 백 목사님 사후 평생 서로 따로 걸어 가고 있으나 그 중심은 변하지 않을 분 중에 한 분이다. 그리고 동문교회에는 공회사를 아는 분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공회의 중심이며 출발 가정들이 있다. 방역 문제로 세상 살이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교회들의 안팎 행태가 참으로 갑갑했는데 동문교회 소식을 접하며 비로소 막힌 숨이 내려 가고 얹혀 있던 음식이 제대로 싹 내려 갔다. 30일 주일에 동문교회와 함께 이름이 나온 교회가 서대문구 영천교회였는데 아마 사직동교회의 터널 너머 영천교회일 듯하다. 고신교회다. 조갑제 기자가 이 곳에 집사님으로 계신다고 들었다. 그 교회라면 다른 면으로 인연이 좀 있다. 내용은 잘 모르겠다. 또 기자의 정치 성향 때문에 혹시 교회가 영향을 받았다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르는 곳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동문교회의 자세와 발언은 공회의 원래 모습이 맞다.
연단을 위해 또는 신앙의 광고를 위해 유독 주님이 표시를 내고 드러 내는 교회나 교인이 있다.
1. 이 번 방역 상황과 공회 교회들의 대처
공회 교회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해 보인다. 초기에 아예 예배를 없애 버린 신앙 없는 대처라 해도 이 번 상황은 방역 상황이어서 그리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광화문에 데모 하러 나간 공회 교회는 없을 것이니 공연히 세상을 자극하여 세상과 세상 식으로 싸울 교회는 공회에 없다. 그래서 지나치게 우로 치우친 교회도 없을 듯하다. 대부분 공회 교회들은 조금 아쉽게 일찍 문을 닫은 교회도 있고, 예배를 정성껏 이어 나간 교회도 있다. 어떤 교회들은 그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닐 듯하나 좀 무리하게 나간 교회도 있다. 이 무리하게 지나치게 나간 듯이 보였다는 것은 다른 교회가 볼 때 그렇지 공회의 원래 모습에서 본다면 더욱 공회 교회다운 좋은 모습이다.
8월 19일에 서울과 수도권은 모든 교회에 단 1명의 교인도 출입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비록 주님이 세상에게 준 세상의 권리지만 교회만을 콕 찍어서 예배의 문만 그런 식으로 닫으면 그 권리를 주신 주님이 그렇게 조처한 인간의 뒤꼭지를 겨누고 계신다. 언젠가는 좋지 않은 일이 크게 생길 것이다. 교회로서는 그런 이들에게 동정을 보내는 것이 맞다. 모르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 번 방역 상황에서 외부에 드러 난 공회의 교회를 살피고 있다.
2. 공회 교회의 사례 - 세상과 불가피하게 충돌한 경우
공회 역사를 통해 공회 교회가 공회의 신앙에 따라 당연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데 세상이 교회를 오해하여 공연히 시비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공회 교회가 세상에게 마치 나쁜 집단처럼 오해를 받은 경우만 살펴 본다. 전국 사건으로 알려진 경우만
첫째, 1949년 위천교회 국기배례사건
거창의 위천교회로 부임한 백영희 조사님 때문에 1950년 3월 1일에 국기배례 거부 사건이 발생한다. 교회로서는 당연히 거부하는 것이 맞고, 막 출발한 정부는 반정부 활동으로 오해할 만 했고 그래서 총칼로 진압을 할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 교회는 마치 반정부 단체처럼 또는 반국가 반란 세력처럼 오해를 받았다. 탄압하는 경찰과 핍박 받는 위천교회 주일학생들은 서로가 할 일을 너무 잘했다. 이 사건은 아주 조기에 잘 해결이 되었다. 국가가 오해를 했다면서 제도를 바꾸고 국기배례를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변경했다.
이 사건이 국무회의를 통해 국가의 제도를 바꾸기까지 된 과정에는 빨치산 본부가 있던 적접 지역인 위천의 지역성, 전국의 곳곳에서 벌어 진 다른 사건들, 경남도지사가 양성봉이라는 인물 등이 관계가 되어 발생했다. 하나님은 사회적 사건을 만드시려고 미리 조처를 해 두셨다.
둘째, 1973년 남천교회 국기배례사건
전국의 공회 교회들은 어디나 10월 유신 후 강화 된 국기배례 문제를 두고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제천의 남천교회만 그렇게 된 것처럼 사회 문제가 된 것은 백영침 목사님이 담임이었고, 남천교회의 지리적 여건이 작용했다. 물론 남천교회의 규모가 그렇게 될 정도였다. 또한 학교에서 문제가 될 때 주일학생들과 주일학교는 비록 신앙은 제대로 지켰으나 세상을 상대하는 표현이 위천 때와 달랐다. 제천의 당시 검사가 거창에 근무를 했고 거창 시절에 공회가 집회를 하면 백영희 목사님의 고향인 도평의 백씨 집안 문제로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이 검사 역시 백 씨다. 이 사건은 무리하게 백영침 목사님을 구속 처리했고 대법원까지 간 사건에서 공회는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검사의 기소가 무리였다고 밝혀 졌다.
지금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는 드물지만 유신 때는 국가 기강 때문에 사법기관의 국가 질서에 관련 된 이런 처리가 뒤집어 지는 경우는 없다고 할 시절이다. 되 돌아 당시를 살펴 봐도 유신 정국도 특이했고, 유신의 국가 상황 때문에 국기배례를 그렇게 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남천교회의 규모와 신앙과 담임 목회자와 교회의 자체 표현의 문제 때문에 검찰은 무리했다. 그리고 대법원의 판례까지 남기며 공회는 한국 교회에 소리 없이 큰 빛이 되었다.
세째, 1979년의 서부교회 주일학교 미아 사건
조갑제 기자가 교회를 비판하려고 마음 먹고 취재를 하다가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로 사회면 톱 기사를 올렸다. 이 날을 기준으로 백영희, 부산서부교회, 총공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다시는 잊혀 질 수 없는 교회로 유명해 졌다. 그 영향이 끼친 것은 이루 말을 할 수 없다. 그냥 한 때 이름을 날리다 잊혀 지는 유행성 인기가 아니라 교회가 가장 교회답게 운영 되면서 외부에서 볼 때도 가장 이상적인 사례가 되었다.
1천여 명 교회의 반사와 보조반사들은 오로지 자기 맡은 골목에 자기 학생을 교회로 데려 왔고 가르친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숫자가 출석 8천명 평균에 재적이 2만 5천명을 넘기며 성탄절과 여름성경학교 때는 1만 3천명 출석이 단일 장소의 아침 8시 30분에 이루어 지니 그 과정에 미아는 수 없이 발생 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아동 안전과 미아 예방과 인권 등의 기준으로 본다면 초대형 인권 유린의 사례로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정원 4명의 택시에 아이를 13명 15명까지 태우고 교회 앞에 줄줄이 내려 놓았고 시내 버스 1대에 1백여 명 학생들이 쏟아 져 내리는 것은 아동의 안전 등에 치명적인 위협 요소였다. 지금 방역 문제의 안전과 생명과 건강 문제로 단속하는 상황과 비교한다면 그 위협은 실로 대단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교회로 와야 할 학생을 데려 왔고, 당시의 교회 역량은 단 1대의 교회 차량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많은 학생은 전부 걸어서 오거나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와야 했다. 교회는 자랑스럽게 잘 했다. 국내외 모든 언론이 탄복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가 구조적으로 발생하니 한 번은 큰 사건으로 비화가 될까 싶어 경찰은 우려해야 했고 언론은 취재를 했다. 그 기자 이름이 조갑제다.
네째, 1989년 백영희 순교 사건
1979년부터 만 10년 전국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고, 세계 10대 교회이자 서울을 제외 한 전국 최대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하는 강단에서 1천명 새벽예배 교인의 눈 앞에서 영상 촬영이 진행되며 살해됐다.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에게는 평화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순교의 위대한 장면이었고, 세상 언론은 초대형 교회의 목사가 설교를 하다 피살 된 것은 뉴스거리로서는 호재였다. 모든 방송과 언론이 마치 자기 교인에게 무슨 원한이나 있어 당한 것처럼 일단 보도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서부교회의 예배당 분위기, 백 목사님의 설교, 당시 교인들의 상황, 격변의 시대 상황까지 모든 것이 맞아 떨어 졌다. 순교의 실제 내용을 알리기 위해 장례의 광고 형식을 통해 교인에 의한 피살이 아니라 평소 소원하던 순교였음을 알렸고 기독교 신문들은 거의 다 실상을 잘 전하여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오늘까지 한국 교회가 감히 평을 할 수도 없는 차원으로 남아 있다.
다섯째, 2020년 8월의 동문교회 소식
방역 문제는 화재처럼 주일에도 대처를 해야 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화재가 온 집이 불타고 사람이 죽고 온 마을과 도시를 삼킬 정도의 화재가 아니라 냄비에 물이 없어 냄비 하나가 타 버리고 끝나는 화재 때문에 주일을 포기할 수 있을까? 겨울만 되면 돌아 다니는 독감과 여름마다 기승을 부리는 눈병도 전염병이라 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교회 문을 닫아야 할까? 현재 방역 문제는 정부가 방역 비상 상황이라 하니 그들에게 하나님이 맡겨 놓은 권한을 존중하여 따로 항의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군담이 쉬임 없이 나온다.
예배당 문 앞에 식당들은 마스크도 없이, 바짝 붙어 앉아, 촘촘히 음식을 나누는데 교회의 점심 시간은 단 1명도 앉아서는 안 된다면서 그 이유를 국가적 방역 위기라 한다. 이런 것을 종교 탄압이라 한다. 먹고 놀고 지하철과 온 나라는 흥청망청하면서 교회만을 콕 찍어서 방역 교과서에 나오는 최대치로 단속을 한다. 이런 선상에서 교회만 예배당에 1명도 출입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 이 곳은 세상이고, 세상의 주인은 세상 사람이다. 교회는 이런 세상에게 신세를 지며 주민등록을 올려 놓고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누구를 왕으로 만들든 어떤 법을 만들든 누구를 혼내주든 교회는 교회가 아는 지식이 있고 판단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아 네로처럼 되고 평양 김 씨들처럼 되는지 안다. 때로는 설명을 하면서 만류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교회가 주소를 두고 활동을 하는 이 곳은 교회가 다스리고 운영하는 천국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를 치면 교회는 당할 수밖에 없다.
동문교회는 2백여 명 정도 되는 교회로 기억한다. 그런데 위치가 하필 주택가다. 언론과 정부에서 교회만 원수로 지목하고 설치다 보니 동네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라도 언론사에 신고하면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 동문교회는 전국 교회 대표들이나 서울지역 교회 연합회에 가지도 않을 교회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곳이 아니다. 다른 교회들은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동문교회는 서울의 중심지에서 예배 시간이 되면 예배를 드린다. 인민군이 와도 일제가 막고 나서도 동문교회는 공회 교회들 중에 하나다. 그냥 예배를 드리는 교회다. 다른 교단 다른 교회들은 예배가 목숨과 같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예배 시간에 야유회도 가고 체육관을 빌려 놀이 행사도 하고 바쁘면 주일도 예배도 뒤로 밀어 버린다. 그런 교회가 예배를 생명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동문교회는 직장이 떨어져도, 가정이 깨어져도, 진학이 막혀도, 예배를 지켜 온 교회다.
그런데 동문교회가 방역 문제를 반대하는가? 철저히 잘 준수하는 교회다. 만일 정부가 동문교회 주변의 식당과 마트와 대중교통을 전부 다 막고 서울시와 구청의 직원들이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단 1명도 모이지 말자 한다면? 사태가 심각하니 고민을 했을 듯하다. 그렇다 해도 교회를 오는 분들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예배 외에는 할 일을 다하면서 예배만을 막고 나서니 세상이 공연히 예배를 치는 핑계로 봤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만일 대문을 힘으로 막고 나선다면 경찰이나 공무원의 멱살을 잡아 끌어 내면서 들어 갔을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 나오고 있다. 막으면 막히나 막지 않는 예배당을 미리 주저 앉을 만큼 방역 문제가 주변 주민과 이웃의 생사를 좌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한 가지 덧붙여 본다.
공회는 막힐 때까지는 간다는 것이 예배당 가는 원칙이다. 어떤 순간을 막힌다고 생각하는가?
공무원이 직접 대문 앞을 몸으로 막으면 공회 교회는 어느 교회라도 더 이상 들어 가지 않는다.
몸으로 막겠다고 통고하면? 통고에는 상관하지 않는 교회도 있고 통고를 막혔다고 보는 교회도 있다.
몸으로 막기 전에 통고를 하고, 통고를 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도록 이 정도에서 멈춰 달라고 할 때를 막혔다고 보는 교회도 있다. 이 선을 결정하는 것은 각 교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 것은 공회가 일괄적으로 제시할 수가 없다.
사례를 가지고 살펴 볼 수는 있다.
백 목사님이 1952년 7월에 서부교회를 부임했다. 그 직전까지 거창의 위천교회와 개명교회에 있었다. 이 곳은 우리 나라에서 적설량이 가장 많은 덕유산 향적봉의 건너 편이다. 향적봉 너머가 무주 리조트로 유명한 스키장이다. 강원도보다 적설량은 더 많다. 눈 많은 거창에서 살며 눈 속을 다니며 산에 기도를 했고 심방을 했던 분이다. 1952년 12월, 부산의 첫 겨울에 눈이 많이 왔다. 새벽예배에 장년반은 노인 1명만 오고 전부 결석했다. 주일학생으로 주일학교 새벽예배를 온 사람은 서영호 목사님의 동생들인 서길자 서윤호 남매와 친구 1명이 있었다. 백 목사님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고 있던 1963년 4월에 그 해 겨울의 눈 이야기를 했다. 인민군 앞에 목숨 걸고 믿어야 하며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을 견디는 것이 교인의 기본인데 눈이 한 번 왔다고 예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무슨 환란을 입에 담느냐고 호통을 했다.
부산에서만 사는 사람에게 눈과 덕유산 자락에서 사는 사람의 눈은 다르다. 부산과 여수에는 눈이 살짝 덮이면 차들이 전부 거북이가 된다. 그리고 차량 운행을 기피한다. 중부권만 되어도 쌓인 눈 위를 쌩쌩 달린다. 그런데 노인 1명이 새벽예배를 왔고, 주일학생 3명이 새벽예배를 왔다. 나머지는 그 노인과 그 아이들의 중간이다. 그렇다면 할 말이 없게 된다. 서길자 서윤호.. 이 분들이 서영호 목사님 동생들이다. 소리 없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끝까지 걸어 가는 분들이다. 그 신앙을 논하기 전에 그 가정 그 식구들의 인품과 사람으로서 기본을 갖춘 이런 모습을 볼 때 공회의 우리 일반 교인들은 사실 너무 저질이다. 그런 분들과 공회 이름으로 함께 신앙 생활하는 것이 송구스럽다.
동문교회,
부럽다.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 번 방역 상황에서 전국의 공회 교회들 중에 유일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주님은 마치 유일한 사례처럼 표시를 내셨다. 이렇게 한 번 쓰시고 나면 주님은 그 뒤에 늘 챙겨 주시는 배려가 있다. 이제 동문교회는 향후 오랜 세월 우리 공회 신앙의 노선에 표상이다. 그 교회에 이 번 일이 지나고 나면 제대로 믿으려는 진실한 교인들이 많이 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빌고 싶다. 또 동문교회 출신들이 공회 내 곳곳에 큰 기둥들이 되면 좋겠다.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 번에 이렇게 쓰셨으니 지난 날도 훌륭했다는 뜻일 것이고 이 번 기회를 통해 이제는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차원에서 쓰실 것이다. 이 번 표시가 그런 표시다.
서울의 번동교회 청량리교회 새공릉교회 아현동교회 등은 동문교회에 앞 설 교회지 같이 설 정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번만은 동문교회를 선발했다. 그래서 공회의 대표 교회가 되었다. 전국의 거의 모든 공회 교회들은 마음 속으로 버가모교인들처럼 안디바가 순교를 할 때 마음으로 함께 하는 자세로 동문교회를 향할 듯하다. 다른 교회들은 막힐 때까지는 예배를 진행한다. 그 막히는 순간을 어느 선으로 정하는지만 서로 조금 다를 뿐이다.
동문교회의 이상규 목사님, 그 목사님이 계시는 곳임을 기억하고 싶다. 백 목사님 사후 평생 서로 따로 걸어 가고 있으나 그 중심은 변하지 않을 분 중에 한 분이다. 그리고 동문교회에는 공회사를 아는 분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공회의 중심이며 출발 가정들이 있다. 방역 문제로 세상 살이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교회들의 안팎 행태가 참으로 갑갑했는데 동문교회 소식을 접하며 비로소 막힌 숨이 내려 가고 얹혀 있던 음식이 제대로 싹 내려 갔다. 30일 주일에 동문교회와 함께 이름이 나온 교회가 서대문구 영천교회였는데 아마 사직동교회의 터널 너머 영천교회일 듯하다. 고신교회다. 조갑제 기자가 이 곳에 집사님으로 계신다고 들었다. 그 교회라면 다른 면으로 인연이 좀 있다. 내용은 잘 모르겠다. 또 기자의 정치 성향 때문에 혹시 교회가 영향을 받았다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르는 곳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동문교회의 자세와 발언은 공회의 원래 모습이 맞다.

1950년 위천교회 시 경찰 고발 > 1973년 남천교회 경찰 고발 > 2020년 동문교회 경찰 고발
이 3가지는 신앙으로 살아 가는 길에 피할 수 없는 일이니 교회의 잘못은 없고 국가의 잘못도 없습니다. 천국이 세상 속에 신세를 지는 과정에 필할 수 없이 일어 난 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처벌을 잘 하시고, 동문교회를 공회의 신앙을 대표하여 처벌을 잘 받으시되, 세월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고 오늘의 방역 조처에 대하여 방역당국이 좀 심했는지 동문교회의 대처가 조금 심했는지 열매가 나올 것입니다. 최종 판단은 그 때 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동문교회가 든든하여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