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2학년의 고민 - 오른뺨을 맞으면 어떻게 하나?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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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3:00
공회는 1957년부터 전국 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사경회를 진행했다.
내년은 내일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지만 올해 5월과 8월은 우리에게 주신 '한 날 괴로움'이었다.
언론과 세상이 지켜 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집회를 예년처럼 진행했다. 대신, 가지는 말은 하지 않았다.
5월의 320명, 8월의 360명, 대략 이 숫자가 연구소가 운영하는 공회의 역량이라고 본다. 많다면 엄청 많고 적다면 너무 왜소하다.
이 번 집회에도 여전히 보석 같은 주일학생들이 앞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백 목사님 집회를 제대로 참석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거의 대부분 강단에 제일 가깝거나 두번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당시 성인이었다. 그런데 연구소의 부공3 집회에 제일 앞 자리는 주교생이나 중간반 학생들이 모두 앉는다. 시킨다고 될까? 싫은데도 그렇게 앉았다면 엄청난 가정교육과 아이들의 절제 인내력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적 하나님의 능력이다.
5월과 8월에 제일 잘 보이는 앞 좌석에 2학년 아이가 보였다.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동생들을 앉혀 놓고 출석하는 교회의 주일 오전과 오후 장년반 설교 말씀을 새김질로 설명하고 핵심을 짚던 학생이다. 또 공회의 다른 그 또래 학생은 1년 읽은 성경이 15독, 내가 어릴 때 교회에서 읽으라고 강조하면 시편 134편만 읽고 보고했다. 그 보고조차 깨끗하지 않았다. 이 학생의 읽은 것은 부모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보배들이 한 번씩 보일 때 목회자는 비로소 목회의 의미를 느낀다.
이 번 집회에 또 다른 2학년짜리가 왔었다. 한 번은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맞으라'는 말씀 때문에 학교에서 어린 아이가 힘들게 하는데 혼을 내지 못했다 한다. 이 아이를 그냥 두면 과도하게 희생을 당하겠다 싶어 대화를 시작했다. 안 봐도 부모님과 주변 주일학교 선생님이 해결해 주지는 않았을 듯하다.
이 보석같은 아이와의 대화다.
'너! 학교에서 작은 동생들이 너를 괴롭히면 혼을 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지.'
'성경 말씀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맞으라 했잖아요?'
'그래, 말씀 때문에 네가 참으면 복이 있지.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보자. 그러면 너를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지?'
'예. 나쁜 일이에요.'
'네가 동생에게 맞고도 참으면 너는 복이 되지만 동생은 자꾸 나쁜 사람이 되겠지?'
'예.'
'네가 맞아 주는 것이 동생에게 복이 되면 왼뺨까지 맞아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왼뺨까지 때린 동생이 점점 나쁜 사람이 되면 동생을 나쁜 사람 만들지 않도록 맞아 주지 말아야 한다. 내가 손해를 봐도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되면 손해를 봐야 한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상대방을 나쁘게 만들면 상대방이 나빠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는 나를 때리는 아이를 나도 때리면 되나요?'
'맞아 주는 것이 좋으면 맞아 주고, 더 맞아 주는 것이 그 아이가 자꾸 좋은 아이가 되겠다 하면 더 맞아 주거라. 그런데 네가 맞아 주면 그 아이가 나쁜 아이가 되겠다 싶으면 네가 그 아이에게, 안 돼!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은 죄야! 그렇게 가르쳐 주고 막는 것이 옳다.'
나는 이런 이치를 백 목사님께 배울 때까지는 몰랐다.
그냥 성경은 좋게 좋게 말을 하는 것이니 그렇게 적었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다 보니 실행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면 무골호인이 되고 바보가 되고 남으로 죄를 짓게 만든다.
대부분 사람은 상대방을 때리면서 왼뺨도 돌려 대! 이렇게 성경을 악용한다. 아예 이런 말씀을 말 같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백 목사님의 설교에 '오른 뺨 왼 뺨'에 대한 마태복음 5장 39절이다.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주신 말씀이 37절에서 '악으로 좇아' 나는 일을 금지했다. 악이란? 자기 중심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 시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 중심으로 살다 보면 나를 치게 된다. 내 오른 뺨을 때리게 된다. 상대방이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 나를 치게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이 되어 맞상대하게 되어 있다. 어떤 손해를 봐도 자기 중심으로 사는 상대방 때문에 나도 자기 중심이 되면 내가 상대방에게 1대 맞고 10대를 때려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인이다.
아이는 말씀을 듣거나 접하면 그 말씀을 진짜라고 생각한다. 이 것이 복이 있는 원래 모습이다. 나처럼 말씀을 들으면 체질적으로 의심하고 머리에 넣고 이해득실을 살피는 사람은 명석하다. 그런데 스스로 속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 말씀이 마5:39에 대한 해석의 방향이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직접 주해를 하지 않았다.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대신 방향을 제시했다. 방향을 잡고 맞춰 보면 마5:39은 해석이 된다. 역사적으로 마5:39 만큼 실행하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운 성구도 없다. 대개 교리적으로 얽힐 때 난해절이라 한다. 마5:39은 교리적으로는 하등 어려울 것이 없다. 실행이 불가능하다. 백 목사님 설교록을 이 연구소가 30여년 목숨 걸고 '무조건 무제한 전한' 이유는 이런 좋은 내용 때문이다.
그런데 왜 부산공회1, 2, 서부교회, 대구공회는 이런 일을 그토록 비판을 할까? 가족들이 저작권으로 막고 나선 것만 모두들 비판할 듯하다. 가족들의 행동에는 각 공회들의 이런 분위기가 토양이 되었다고 본다. 괜찮은 것이 있으면? 그렇다. 혼자 먹어야 자기에게 유리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가? 부공2의 행정실장님이며 부공2의 막후 운영자는 글자를 읽기가 어려워 그렇다고 한다. 나는 다 읽는다. 그런데 내가 읽으면 즉시 무조건 무제한 공개를 해 버린다. 그러면 목사들은 교인보다 더 아는 것이 없어 진다. 어느 목사가 좋아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필기가 난해하다는 말을 명분이라고 생각하고, 내심은 달리 본다. 그 읽을 수 없다는 필기집, 그 필기집을 받아 온 김부호 김윤수 목사님들은 이말출 권사님께 이 필기 노트를 세계 만방에 전하겠다고 '조건부' 약속으로 받아 나왔다. 그리고 그 일부를 출간하는 것이 유리할 상황이 되자 실제 출간을 했었다. 그런데 더 공개를 하라고 하자 갑자기 난해를 이유로 막아 버렸다.
초등학교 2학년 안팎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훗날 목회자가 된다면 현재 우리 각 공회들의 훌륭한 목사님들처럼 훌륭해 질 수 있을까? 이대로 자란다면 훨씬 뛰어 날 것으로 본다. 10년만 이들이 변치 않으면 충분하다. 20대에 접어 들면 엘리보다 나은 사무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10세 안팎의 이들에게는 10대라는 10년이 가로 막고 있다. 이 10년은 노아 때 홍수와도 같고, 출애굽 때 홍해 바다와도 같다. 준비하고, 믿고, 따라 나서면 쉽게 건널 것이고 이 연구소의 차세대가 되면 현재 지도자와 현재 달려 가는 모든 직원들을 따라 잡고 그들의 30대가 가까우면 전체 총공회와 연구소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도 남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귀신이 누군가? 때로는 뱀처럼 그들을 슬슬 옆으로 끌어 갈 것이고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위협하여 그들을 좌로나 우로나 피하게 만들 것이다. 이 10대의 시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이들이 스스로 헤치고 나간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를 스승으로 맞는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 공회에 이 아이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가 지금은 예배당 안에서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된 이들처럼 될 수 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현재까지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그들의 부모가 될 것이다. 부모가 자기보다 속도가 느린 아이는 자기 수준까지 끌어 올릴 때 선생이 된다. 그런데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그 부모 이상으로 끌어 올려 주시려고 할 때 부모는 자기 수준에서 아이를 붙들어 두려고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성경에서 자라 나오는 아이를 지켜 보며 '하나님께 맡긴' 복을 기억한다.
누가복음 1장 66절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내년은 내일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지만 올해 5월과 8월은 우리에게 주신 '한 날 괴로움'이었다.
언론과 세상이 지켜 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집회를 예년처럼 진행했다. 대신, 가지는 말은 하지 않았다.
5월의 320명, 8월의 360명, 대략 이 숫자가 연구소가 운영하는 공회의 역량이라고 본다. 많다면 엄청 많고 적다면 너무 왜소하다.
이 번 집회에도 여전히 보석 같은 주일학생들이 앞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백 목사님 집회를 제대로 참석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거의 대부분 강단에 제일 가깝거나 두번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당시 성인이었다. 그런데 연구소의 부공3 집회에 제일 앞 자리는 주교생이나 중간반 학생들이 모두 앉는다. 시킨다고 될까? 싫은데도 그렇게 앉았다면 엄청난 가정교육과 아이들의 절제 인내력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전적 하나님의 능력이다.
5월과 8월에 제일 잘 보이는 앞 좌석에 2학년 아이가 보였다.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동생들을 앉혀 놓고 출석하는 교회의 주일 오전과 오후 장년반 설교 말씀을 새김질로 설명하고 핵심을 짚던 학생이다. 또 공회의 다른 그 또래 학생은 1년 읽은 성경이 15독, 내가 어릴 때 교회에서 읽으라고 강조하면 시편 134편만 읽고 보고했다. 그 보고조차 깨끗하지 않았다. 이 학생의 읽은 것은 부모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보배들이 한 번씩 보일 때 목회자는 비로소 목회의 의미를 느낀다.
이 번 집회에 또 다른 2학년짜리가 왔었다. 한 번은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맞으라'는 말씀 때문에 학교에서 어린 아이가 힘들게 하는데 혼을 내지 못했다 한다. 이 아이를 그냥 두면 과도하게 희생을 당하겠다 싶어 대화를 시작했다. 안 봐도 부모님과 주변 주일학교 선생님이 해결해 주지는 않았을 듯하다.
이 보석같은 아이와의 대화다.
'너! 학교에서 작은 동생들이 너를 괴롭히면 혼을 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지.'
'성경 말씀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맞으라 했잖아요?'
'그래, 말씀 때문에 네가 참으면 복이 있지.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보자. 그러면 너를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지?'
'예. 나쁜 일이에요.'
'네가 동생에게 맞고도 참으면 너는 복이 되지만 동생은 자꾸 나쁜 사람이 되겠지?'
'예.'
'네가 맞아 주는 것이 동생에게 복이 되면 왼뺨까지 맞아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왼뺨까지 때린 동생이 점점 나쁜 사람이 되면 동생을 나쁜 사람 만들지 않도록 맞아 주지 말아야 한다. 내가 손해를 봐도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되면 손해를 봐야 한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상대방을 나쁘게 만들면 상대방이 나빠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는 나를 때리는 아이를 나도 때리면 되나요?'
'맞아 주는 것이 좋으면 맞아 주고, 더 맞아 주는 것이 그 아이가 자꾸 좋은 아이가 되겠다 하면 더 맞아 주거라. 그런데 네가 맞아 주면 그 아이가 나쁜 아이가 되겠다 싶으면 네가 그 아이에게, 안 돼!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은 죄야! 그렇게 가르쳐 주고 막는 것이 옳다.'
나는 이런 이치를 백 목사님께 배울 때까지는 몰랐다.
그냥 성경은 좋게 좋게 말을 하는 것이니 그렇게 적었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많다 보니 실행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면 무골호인이 되고 바보가 되고 남으로 죄를 짓게 만든다.
대부분 사람은 상대방을 때리면서 왼뺨도 돌려 대! 이렇게 성경을 악용한다. 아예 이런 말씀을 말 같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백 목사님의 설교에 '오른 뺨 왼 뺨'에 대한 마태복음 5장 39절이다.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주신 말씀이 37절에서 '악으로 좇아' 나는 일을 금지했다. 악이란? 자기 중심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 시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 중심으로 살다 보면 나를 치게 된다. 내 오른 뺨을 때리게 된다. 상대방이 자기 중심으로 살면서 나를 치게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이 되어 맞상대하게 되어 있다. 어떤 손해를 봐도 자기 중심으로 사는 상대방 때문에 나도 자기 중심이 되면 내가 상대방에게 1대 맞고 10대를 때려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인이다.
아이는 말씀을 듣거나 접하면 그 말씀을 진짜라고 생각한다. 이 것이 복이 있는 원래 모습이다. 나처럼 말씀을 들으면 체질적으로 의심하고 머리에 넣고 이해득실을 살피는 사람은 명석하다. 그런데 스스로 속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 말씀이 마5:39에 대한 해석의 방향이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직접 주해를 하지 않았다.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대신 방향을 제시했다. 방향을 잡고 맞춰 보면 마5:39은 해석이 된다. 역사적으로 마5:39 만큼 실행하기 어렵고 깨닫기 어려운 성구도 없다. 대개 교리적으로 얽힐 때 난해절이라 한다. 마5:39은 교리적으로는 하등 어려울 것이 없다. 실행이 불가능하다. 백 목사님 설교록을 이 연구소가 30여년 목숨 걸고 '무조건 무제한 전한' 이유는 이런 좋은 내용 때문이다.
그런데 왜 부산공회1, 2, 서부교회, 대구공회는 이런 일을 그토록 비판을 할까? 가족들이 저작권으로 막고 나선 것만 모두들 비판할 듯하다. 가족들의 행동에는 각 공회들의 이런 분위기가 토양이 되었다고 본다. 괜찮은 것이 있으면? 그렇다. 혼자 먹어야 자기에게 유리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가? 부공2의 행정실장님이며 부공2의 막후 운영자는 글자를 읽기가 어려워 그렇다고 한다. 나는 다 읽는다. 그런데 내가 읽으면 즉시 무조건 무제한 공개를 해 버린다. 그러면 목사들은 교인보다 더 아는 것이 없어 진다. 어느 목사가 좋아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필기가 난해하다는 말을 명분이라고 생각하고, 내심은 달리 본다. 그 읽을 수 없다는 필기집, 그 필기집을 받아 온 김부호 김윤수 목사님들은 이말출 권사님께 이 필기 노트를 세계 만방에 전하겠다고 '조건부' 약속으로 받아 나왔다. 그리고 그 일부를 출간하는 것이 유리할 상황이 되자 실제 출간을 했었다. 그런데 더 공개를 하라고 하자 갑자기 난해를 이유로 막아 버렸다.
초등학교 2학년 안팎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이 훗날 목회자가 된다면 현재 우리 각 공회들의 훌륭한 목사님들처럼 훌륭해 질 수 있을까? 이대로 자란다면 훨씬 뛰어 날 것으로 본다. 10년만 이들이 변치 않으면 충분하다. 20대에 접어 들면 엘리보다 나은 사무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10세 안팎의 이들에게는 10대라는 10년이 가로 막고 있다. 이 10년은 노아 때 홍수와도 같고, 출애굽 때 홍해 바다와도 같다. 준비하고, 믿고, 따라 나서면 쉽게 건널 것이고 이 연구소의 차세대가 되면 현재 지도자와 현재 달려 가는 모든 직원들을 따라 잡고 그들의 30대가 가까우면 전체 총공회와 연구소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도 남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귀신이 누군가? 때로는 뱀처럼 그들을 슬슬 옆으로 끌어 갈 것이고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위협하여 그들을 좌로나 우로나 피하게 만들 것이다. 이 10대의 시기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이들이 스스로 헤치고 나간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를 스승으로 맞는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 공회에 이 아이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가 지금은 예배당 안에서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된 이들처럼 될 수 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현재까지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그들의 부모가 될 것이다. 부모가 자기보다 속도가 느린 아이는 자기 수준까지 끌어 올릴 때 선생이 된다. 그런데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그 부모 이상으로 끌어 올려 주시려고 할 때 부모는 자기 수준에서 아이를 붙들어 두려고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성경에서 자라 나오는 아이를 지켜 보며 '하나님께 맡긴' 복을 기억한다.
누가복음 1장 66절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