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의 신문 구독 - 세상 읽기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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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7 18:21
백 목사님은 평생 조선일보를 구독했다. 동아일보를 싫어 했다. 그 분의 생애 기간에 동아일보는 좌편향이었다.
백 목사님 때문에 공회 목회자 거의 전부는 조선일보를 평생 구독한다. 그래서 남이 보면 총공회 기관지로 착각 할 정도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백 목사님 돌아 가셨을 때 나는 조선일보에 '백영희 순교 및 장례 일정'을 4단 광고로 발주했다. 1989년에는 신문의 면수가 아주 적었다. 사회면에 하단 전체 광고를 차지했고 당시 2천만원을 지출했다.
동아일보 부산 지사 측에서 다음 날 서부교회로 찾아 왔다. 서부교회 16명 장로님 중에 한 분을 대동했다.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고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않으면 동아일보 죽이기라고 했다. 서부교회의 분위기를 전해 드렸다. 정치 사회 세상과 아주 등을 대고 살고 있으며, 가신 분이 평생 조선일보를 구독했는데 전국 지명도가 있어 장례와 함께 순교 소식은 전해야 했으니 순교 당일 전국의 방송과 언론이 오보를 냈기 때문에 이를 해명하는 내용을 담았고, 그리고 원칙적으로 교계와 달리 이런 광고나 안내 자체를 하지 않는 곳이며 비용도 막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부탁을 했고, 옆에 계신 장로님의 안면과 인연으로 압박을 했고, 나중에는 협박을 하고 나섰다. 비판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그 분도 또 서부교회와 총공회 교단도 이단으로 수십 년 도배를 당해 왔으니 동아일보가 보탠다고 달라 질 것도 없다. 마음대로 하시라.' 이 말을 할 때 내 목소리는 상당히 높아 져 있었다.
한 주간이 더 지난 다음에 부산의 대표적 진보 좌파 성향의 기독교 신문에서 다시 나를 찾았다. 광고 부탁을 했다. 기독교 신문 5개지에 광고가 나갔으니 자기들 것도 부탁을 한다고 했다. 이미 장례가 끝나고 장례에 관련 된 비용 지출은 끝이 난 상태였다. 동아일보 거절 때처럼 다시 설명했다. 5개 기독교 신문사는 순교 당일 서부교회를 먼저 찾아 왔고 그 자리에서 사건을 설명했으며 순교 또는 순직으로 보도를 해 주셔서 고마웠고, 그 보도와 관계 없이 장례 일정과 순교라는 점을 알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신문 쪽은 내게 협박을 했다. 이 신문의 실질적 배후는 이인모 장기수를 북한에 올려 보낸다며 가장 설친 인물이다. 나는 그 분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 폭언 폭행 등 인권 유린을 참으로 많이 당했다. 그리고 그 쪽의 성향을 잘 안다. 남들에게는 평생 '사랑, 용서, 평화, 성결'을 외친다. 그런데 그 쪽 집안은 거의 다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폭언 폭행 인권 유린에 절어 있는데 나는 초등학교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구구절절이 그런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부류라 해서 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광고를 더 이상 발주하지 않는다니까 협박을 했다. 동아일보 때와 마찬 가지로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동아일보보다 과연 수준도 낮고 곳곳을 다니며 어떤 언행을 했는지 눈에 잘 보였다. 그 신문은 목사님의 순교와 장례를 두고 보도를 통해 실컷 분풀이를 했다. 그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 오늘도 평양만 오매불망 바라 보며 춘향의 절개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그 쪽에 최 핵심들을 잘 안다. 언젠가 나와 직접 마주 할 기회는 없지 않을 듯하다. 나는 그런 기회가 되면 50년대부터 시작 된 그 쪽의 족보적 언행까지 다 거론할 마음이다.
다음 글은 3378번에 올라 간 댓글이다. 이 곳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이 나라에 썩어 빠진 보수 미제 앞잡이가 아니다. 동시에 이 나라에 더더욱 썩어 빠진 진보 좌파 자유주의 신학도 아니다. 이 곳은 천국을 향한 일념의 신앙 전념 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세상은 교회를 돕든 탄압하든 세상 그 자체를 교회와 한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
70년대까지는 백 목사님이 '조선일보'를 직접 읽었다. 매일. 설교 때 사건 인용이 많았다. 직접 읽기 어려울 때는 가족이나 주변 심부름 하는 사람에게 신문을 읽도록 시켜서 들었다. 라디오도 들었다.
80년대가 되면서 나는 한 번씩 목사님께 신문을 읽어 드릴 일이 있었다. 그 때 알게 되었다. 목사님은 그 당시 제목만 읽게 부탁했다는 것을, 물론 작은 제목을 포함했다. 그 때는 어리둥절했다. 제목만으로 어떻게 그 속에 내용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설교 때 세상 소식이나 지식을 인용할 때 오류가 많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나는 제목을 보면 얽힌 사연과 내용이 거의 다 보인다. 심지어 신문에 아예 언급도 하지 않은 그 사건, 그 보도 과정에 빼 놓은 세세한 것이 잘 보인다. 그러면서 그 기자와 언론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 어떤 내용을 가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몰아 가려는 것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백 목사님의 세상에 대한 판단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설교록에 나오는 상식과 다르거나 잘못 된 지식이나 언급은 거의 거의 전부가 옳았다. 내가 요즘 윗글의 어느 분이 지적하듯이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번씩 듣는다. 주변에서 들을 때는 대화가 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더 설명을 한다. 그 이후에는 내게 적대감은 가질지라도 논리적으로 또 사실 판단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은 윗글을 비판한 분들과 같은 성향의 분들이 98%가 모여 사는 곳이다.
(추가)
나는 1986년부터 TIME지를 구독해서 읽었다. 당시 미국에서 직접 구독해야 했다. 목사님이 시켜서 그러했다. 목사님은 한국의 소식에 휘둘리는 그런 눈치 없는 분이 아니었다. TIME지 비용은 목사님이 지출했고 이런 이야기는 모두 설교록에도 나온다. 자기 소개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장점을 최대한 묻어 버리고 말씀 연구에만 주력을 하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실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 언급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곳의 글이 비실명으로 적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곳을 비판하는 것이야 고마운 일이지만 아주 바보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계신다. 그런 분들이 너무 심하게 불행해 지지 않도록 최근에 평생에 적지 않는 개인적 글을 좀 적고 있다. 1998년부터 pkist가 운영될 때 수만 개의 글을 적으면서도 개인 사항을 극히 피해 왔었다. 그냥 공회가 그런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겉옷과 검을 조금 챙기고 있다. 세상이 부추긴다 하여 교회까지도 공회 안에서도 심지어 목사님의 가족들까지도 설교를 막고 나서되 법원의 결정이 백 목사님과 교회와 총공회 결정보다 더 앞 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광고 관련 몇 가지를 우선 소개했다.
나는 언론들과 관계는 나를 잘 아는 공회의 어떤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 쪽을 아는 것이 많다. 또 영향력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를 열로 부풀리고 열을 백으로 올리지만 공회는 백을 열로 식히고 열을 다시 하나로 만든 뒤에 그마저도 슬쩍 묻어 버리고 싶은 곳이다. 조선일보 2000만원, 국민일보 600만원, 다른 기독교 신문이 50만원에서 1백만원 정도라고 기억이 되는데 어디 메모가 있어 정확한 것은 찾아 봐야 한다. 그리고 언론 쪽에 잘 아는 분이 내게 귀뜸을 해 줬다. 당시 광고를 가져 오면 지사에서 50%를 가진다고. 그러니 언론을 운영하는 곳에서는 혈안이 될 것이고, 지사도 오죽하겠는가? 당시 압력을 넣으려고 왔던 장로님은 다른 곳에서 장로가 되어 서부교회로 들어 왔던 분이다. 동아일보 측에서는 서부교회 16명 장로 중에 1명을 통해 들어 오면 통한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서부교회의 구조와 운영 원리는 당시에 장로 16명이 농성을 해도 되지 않을 때다. 그런 곳을 원래의 서부교회와 원래의 공회라고 한다. 백영희 목회의 내면이기도 하다.
백 목사님 때문에 공회 목회자 거의 전부는 조선일보를 평생 구독한다. 그래서 남이 보면 총공회 기관지로 착각 할 정도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백 목사님 돌아 가셨을 때 나는 조선일보에 '백영희 순교 및 장례 일정'을 4단 광고로 발주했다. 1989년에는 신문의 면수가 아주 적었다. 사회면에 하단 전체 광고를 차지했고 당시 2천만원을 지출했다.
동아일보 부산 지사 측에서 다음 날 서부교회로 찾아 왔다. 서부교회 16명 장로님 중에 한 분을 대동했다.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고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않으면 동아일보 죽이기라고 했다. 서부교회의 분위기를 전해 드렸다. 정치 사회 세상과 아주 등을 대고 살고 있으며, 가신 분이 평생 조선일보를 구독했는데 전국 지명도가 있어 장례와 함께 순교 소식은 전해야 했으니 순교 당일 전국의 방송과 언론이 오보를 냈기 때문에 이를 해명하는 내용을 담았고, 그리고 원칙적으로 교계와 달리 이런 광고나 안내 자체를 하지 않는 곳이며 비용도 막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부탁을 했고, 옆에 계신 장로님의 안면과 인연으로 압박을 했고, 나중에는 협박을 하고 나섰다. 비판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그 분도 또 서부교회와 총공회 교단도 이단으로 수십 년 도배를 당해 왔으니 동아일보가 보탠다고 달라 질 것도 없다. 마음대로 하시라.' 이 말을 할 때 내 목소리는 상당히 높아 져 있었다.
한 주간이 더 지난 다음에 부산의 대표적 진보 좌파 성향의 기독교 신문에서 다시 나를 찾았다. 광고 부탁을 했다. 기독교 신문 5개지에 광고가 나갔으니 자기들 것도 부탁을 한다고 했다. 이미 장례가 끝나고 장례에 관련 된 비용 지출은 끝이 난 상태였다. 동아일보 거절 때처럼 다시 설명했다. 5개 기독교 신문사는 순교 당일 서부교회를 먼저 찾아 왔고 그 자리에서 사건을 설명했으며 순교 또는 순직으로 보도를 해 주셔서 고마웠고, 그 보도와 관계 없이 장례 일정과 순교라는 점을 알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신문 쪽은 내게 협박을 했다. 이 신문의 실질적 배후는 이인모 장기수를 북한에 올려 보낸다며 가장 설친 인물이다. 나는 그 분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 폭언 폭행 등 인권 유린을 참으로 많이 당했다. 그리고 그 쪽의 성향을 잘 안다. 남들에게는 평생 '사랑, 용서, 평화, 성결'을 외친다. 그런데 그 쪽 집안은 거의 다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폭언 폭행 인권 유린에 절어 있는데 나는 초등학교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구구절절이 그런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부류라 해서 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광고를 더 이상 발주하지 않는다니까 협박을 했다. 동아일보 때와 마찬 가지로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동아일보보다 과연 수준도 낮고 곳곳을 다니며 어떤 언행을 했는지 눈에 잘 보였다. 그 신문은 목사님의 순교와 장례를 두고 보도를 통해 실컷 분풀이를 했다. 그 신문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 오늘도 평양만 오매불망 바라 보며 춘향의 절개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그 쪽에 최 핵심들을 잘 안다. 언젠가 나와 직접 마주 할 기회는 없지 않을 듯하다. 나는 그런 기회가 되면 50년대부터 시작 된 그 쪽의 족보적 언행까지 다 거론할 마음이다.
다음 글은 3378번에 올라 간 댓글이다. 이 곳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이 나라에 썩어 빠진 보수 미제 앞잡이가 아니다. 동시에 이 나라에 더더욱 썩어 빠진 진보 좌파 자유주의 신학도 아니다. 이 곳은 천국을 향한 일념의 신앙 전념 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세상은 교회를 돕든 탄압하든 세상 그 자체를 교회와 한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
70년대까지는 백 목사님이 '조선일보'를 직접 읽었다. 매일. 설교 때 사건 인용이 많았다. 직접 읽기 어려울 때는 가족이나 주변 심부름 하는 사람에게 신문을 읽도록 시켜서 들었다. 라디오도 들었다.
80년대가 되면서 나는 한 번씩 목사님께 신문을 읽어 드릴 일이 있었다. 그 때 알게 되었다. 목사님은 그 당시 제목만 읽게 부탁했다는 것을, 물론 작은 제목을 포함했다. 그 때는 어리둥절했다. 제목만으로 어떻게 그 속에 내용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설교 때 세상 소식이나 지식을 인용할 때 오류가 많았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나는 제목을 보면 얽힌 사연과 내용이 거의 다 보인다. 심지어 신문에 아예 언급도 하지 않은 그 사건, 그 보도 과정에 빼 놓은 세세한 것이 잘 보인다. 그러면서 그 기자와 언론이 무엇에 화가 났는지 어떤 내용을 가감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몰아 가려는 것도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백 목사님의 세상에 대한 판단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설교록에 나오는 상식과 다르거나 잘못 된 지식이나 언급은 거의 거의 전부가 옳았다. 내가 요즘 윗글의 어느 분이 지적하듯이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번씩 듣는다. 주변에서 들을 때는 대화가 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더 설명을 한다. 그 이후에는 내게 적대감은 가질지라도 논리적으로 또 사실 판단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은 윗글을 비판한 분들과 같은 성향의 분들이 98%가 모여 사는 곳이다.
(추가)
나는 1986년부터 TIME지를 구독해서 읽었다. 당시 미국에서 직접 구독해야 했다. 목사님이 시켜서 그러했다. 목사님은 한국의 소식에 휘둘리는 그런 눈치 없는 분이 아니었다. TIME지 비용은 목사님이 지출했고 이런 이야기는 모두 설교록에도 나온다. 자기 소개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장점을 최대한 묻어 버리고 말씀 연구에만 주력을 하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실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 언급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곳의 글이 비실명으로 적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곳을 비판하는 것이야 고마운 일이지만 아주 바보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계신다. 그런 분들이 너무 심하게 불행해 지지 않도록 최근에 평생에 적지 않는 개인적 글을 좀 적고 있다. 1998년부터 pkist가 운영될 때 수만 개의 글을 적으면서도 개인 사항을 극히 피해 왔었다. 그냥 공회가 그런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겉옷과 검을 조금 챙기고 있다. 세상이 부추긴다 하여 교회까지도 공회 안에서도 심지어 목사님의 가족들까지도 설교를 막고 나서되 법원의 결정이 백 목사님과 교회와 총공회 결정보다 더 앞 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광고 관련 몇 가지를 우선 소개했다.
나는 언론들과 관계는 나를 잘 아는 공회의 어떤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 쪽을 아는 것이 많다. 또 영향력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를 열로 부풀리고 열을 백으로 올리지만 공회는 백을 열로 식히고 열을 다시 하나로 만든 뒤에 그마저도 슬쩍 묻어 버리고 싶은 곳이다. 조선일보 2000만원, 국민일보 600만원, 다른 기독교 신문이 50만원에서 1백만원 정도라고 기억이 되는데 어디 메모가 있어 정확한 것은 찾아 봐야 한다. 그리고 언론 쪽에 잘 아는 분이 내게 귀뜸을 해 줬다. 당시 광고를 가져 오면 지사에서 50%를 가진다고. 그러니 언론을 운영하는 곳에서는 혈안이 될 것이고, 지사도 오죽하겠는가? 당시 압력을 넣으려고 왔던 장로님은 다른 곳에서 장로가 되어 서부교회로 들어 왔던 분이다. 동아일보 측에서는 서부교회 16명 장로 중에 1명을 통해 들어 오면 통한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서부교회의 구조와 운영 원리는 당시에 장로 16명이 농성을 해도 되지 않을 때다. 그런 곳을 원래의 서부교회와 원래의 공회라고 한다. 백영희 목회의 내면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