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셈법, 신앙의 셈법 - 손익을 기준으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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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1 13:17
준 것과 받은 것을 계산해 본 뒤에 남으면 잘한 것이고 모자라면 손해를 본것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결과를 추구하는 것이 '경제'의 정의다. 이 것은 생명의 본능이며 국가와 어떤 집단이라도 다 해당 되는 세상의 진리다. 타락 후 자기 중심이 된 결과다. 부부의 결혼도 상대방의 인물 성격 헌신을 계산해서 서로 남는 장사를 하느라고 그렇게 맞추기 어렵다. 혹시 사랑에 빠져 이런 계산을 하지는 않는 이들은 평생 속을 앓는다.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사람은 정신병이 좀 심각한 사람이다.
신앙의 셈법에서 '꼭 같은 복음의 결과'를 두고
최선은, 나의 것을 최대한 투자하여 나를 위한 결과는 최소화가 되는 것이고
차선은, 나의 것을 최대한 투자했는데 나를 위한 결과가 좋아 지는 것이다.
최악은, 나의 것은 최소한 투자했고 나를 위한 결과가 최대가 되는 것이다.
공회의 앞서 간 분들로 살펴 보면
공회 최고의 목회자인 홍순철 전성수 서영준 목사님들은 주님을 위해 충성했고 그들로부터 공회의 결실은 많았다.
홍순철은 가장 충성했고 가장 일찍 돌아 가셨다. 제일 큰 수입을 보고 갔다. 참 죄송한 것은 그 남겨진 가족들이었다.
서영준은 홍순철 다음으로 충성했고 두번째로 가셨다. 홍 목사님보다 약간 손해를 본 듯하다. 가족들은 백 목사님이 살폈다.
전성수는 홍순철 서영준 이상으로 충성했으나 가장 늦게 가셨다. 가족의 고난은 엄청 났다. 김영웅 목사가 뒤를 살폈다고 한다.
홍순철 서영준 전성수와 같은 연배인데 그들과 비교하면 충성은 절반 또는 10분의 1되기 어려운 분들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고 그들의 교회로부터 별별 혜택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일반 직업을 가졌다면 그렇게 잘 나갔을까?
이렇게 의심이 될 분들이 너무 많다. 세상적으로는 참 복되게 살았다. 신앙적으로는 반대가 된다.
이런 정신을 실제로 밀고 나가면 부공3처럼 내부에서도 견디지를 못해 뛰쳐 나간다.
그래도 부공3, 이 연구소는 갈 데까지는 그렇게 가 보려고 한다.
1987.8.19. 서영준 목사님의 묘소를 살피러 갔던 자리에서 부공3은 이민영 장영목 두 분에게 이런 길을 가자고 제안했다.
한 분은 흔쾌히 약속했고 한 분은 마지 못해 답을 했다.
1989.8.27. 부공3의 길을 가자고 이 연구소 인원들은 다시 약속했다.
1987.9. 부산연구소에서 밀려 나던 시기에 다시 약속했을 때는 오늘의 부공3이 확연하게 드러 났다.
2013.4. 저작권 소송이 들어 왔을 때 다시 제안을 했다. 일부는 원래 약속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다 하고 일부는 망설였다. 일부는 지금 반대 측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열심히 하기 바란다. 그러나 1998년 5월에 동천교회를 개척할 때 장영목 목사와의 약속 때를 기억하면 좋겠다. 장 목사는 교인만 많이 오면 교리나 노선은 개의치 않겠고 어떤 수단이라도 다 하겠다고 했다. 교인만 많아지면 총공회가 전부 장 목사를 따를 것이고 그 때 가서 다시 이 노선에 갖다 놓겠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동천교회 이름으로 이 노선만 지켜 보겠다고 했다. 3년이면 거의 결과가 드러 날 테니 그 때 가서 장 목사의 선택이 옳으면 우리가 따라 가고 동천의 선택이 옳으면 우리에게로 얼른 다시 오라 했다. 그래서 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실험을 했다.
1989.8.27. 직후의 대구공회와 나뉠 때도 같은 약속을 했다. 사후의 첫 회의인 9월 교역자회를 통해 백태영 목사의 대구공회가 3분의 2라는 다수를 가지고 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파악했다. 그래서 대구공회의 중추 3인이 부산공회의 중추 3인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그 때 부산공회 핵심은 이영인 이민영 장영목이다. 3명은 꼭 같은 입장을 상대 3인에게 각각 다른 자리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전했다. 대구공회측이 원하는 모든 방법을 부산공회에게 강제로 적용 시키려 말고 대구공회측 교회들만 열심히 해 보시고, 또 부산공회는 부공식을 대구공회 측에 강제하지 않고 부공식으로 열심히 살아 보면, 연말이면 어느 정도 결과를 짐작하지 않을까, 연말 가지고 안 된다면 1 - 3년이면 열매가 환하지 않을까. 총공회는 모두가 집안 친지 고향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비교가 쉽다. 한 쪽이 기술로 힘으로 공작으로 밀어 붙이지 말고 각자 자기들 식으로 해 보자고 했다.
대구공회는 이름도 바꾸고 찬송도 바꾸고 율동도 하고 놀러도 가고 전국의 타 교단 행사도 다니고 남녀 좌석도 섞어 보고
부산공회는 재독 중심으로 복습을 하면서 과거 길을 지켜 보는 것을 말한다.
결과는 환하게 나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대구공회가 오히려 부산공회들보다 더 보수적인 정도다. 그렇다면 1989년 8월 이후의 양측 갈등에 대해서는 대구공회가 얼른 오판이라 해야 한다. 그 말 하나를 인정하는 순간 대구공회는 오늘의 총공회 대표가 된다. 30년 전을 잊으려 하고 묻으려 하고 피하면 오늘의 총공회 대표 자리는 스스로 버리는 것이 된다. 부공1과 부공2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저작권 하나가 나오자 총공회 전부는 다 죽어 버렸다. 숨 소리 하나가 나오지 않는다. 손해를 보니까.
저작권 문제가 하필이면 왜 숨어 지내는 부공3에만 집중하나! 이 곳이 총공회 생명이고 숨통이니까 그렇다.
다른 공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지 않나? 왜 우리가 총공회 본류인데 부공3을 향하느냐고?
그래서 복음 운동은 막상 일이 터지면 누가 주인이며 어디가 심장인지 누가 지켜 왔는지 표가 나는 것이다.
이 곳이 자기 선전을 해서가 아니다. 수백 건의 고소를 왜 여수 신풍리 바닷가에 몰아 붙나? 신풍은 공회의 지역적 무명의 객지다.
신앙의 셈법에서 '꼭 같은 복음의 결과'를 두고
최선은, 나의 것을 최대한 투자하여 나를 위한 결과는 최소화가 되는 것이고
차선은, 나의 것을 최대한 투자했는데 나를 위한 결과가 좋아 지는 것이다.
최악은, 나의 것은 최소한 투자했고 나를 위한 결과가 최대가 되는 것이다.
공회의 앞서 간 분들로 살펴 보면
공회 최고의 목회자인 홍순철 전성수 서영준 목사님들은 주님을 위해 충성했고 그들로부터 공회의 결실은 많았다.
홍순철은 가장 충성했고 가장 일찍 돌아 가셨다. 제일 큰 수입을 보고 갔다. 참 죄송한 것은 그 남겨진 가족들이었다.
서영준은 홍순철 다음으로 충성했고 두번째로 가셨다. 홍 목사님보다 약간 손해를 본 듯하다. 가족들은 백 목사님이 살폈다.
전성수는 홍순철 서영준 이상으로 충성했으나 가장 늦게 가셨다. 가족의 고난은 엄청 났다. 김영웅 목사가 뒤를 살폈다고 한다.
홍순철 서영준 전성수와 같은 연배인데 그들과 비교하면 충성은 절반 또는 10분의 1되기 어려운 분들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고 그들의 교회로부터 별별 혜택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일반 직업을 가졌다면 그렇게 잘 나갔을까?
이렇게 의심이 될 분들이 너무 많다. 세상적으로는 참 복되게 살았다. 신앙적으로는 반대가 된다.
이런 정신을 실제로 밀고 나가면 부공3처럼 내부에서도 견디지를 못해 뛰쳐 나간다.
그래도 부공3, 이 연구소는 갈 데까지는 그렇게 가 보려고 한다.
1987.8.19. 서영준 목사님의 묘소를 살피러 갔던 자리에서 부공3은 이민영 장영목 두 분에게 이런 길을 가자고 제안했다.
한 분은 흔쾌히 약속했고 한 분은 마지 못해 답을 했다.
1989.8.27. 부공3의 길을 가자고 이 연구소 인원들은 다시 약속했다.
1987.9. 부산연구소에서 밀려 나던 시기에 다시 약속했을 때는 오늘의 부공3이 확연하게 드러 났다.
2013.4. 저작권 소송이 들어 왔을 때 다시 제안을 했다. 일부는 원래 약속했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다 하고 일부는 망설였다. 일부는 지금 반대 측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열심히 하기 바란다. 그러나 1998년 5월에 동천교회를 개척할 때 장영목 목사와의 약속 때를 기억하면 좋겠다. 장 목사는 교인만 많이 오면 교리나 노선은 개의치 않겠고 어떤 수단이라도 다 하겠다고 했다. 교인만 많아지면 총공회가 전부 장 목사를 따를 것이고 그 때 가서 다시 이 노선에 갖다 놓겠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동천교회 이름으로 이 노선만 지켜 보겠다고 했다. 3년이면 거의 결과가 드러 날 테니 그 때 가서 장 목사의 선택이 옳으면 우리가 따라 가고 동천의 선택이 옳으면 우리에게로 얼른 다시 오라 했다. 그래서 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실험을 했다.
1989.8.27. 직후의 대구공회와 나뉠 때도 같은 약속을 했다. 사후의 첫 회의인 9월 교역자회를 통해 백태영 목사의 대구공회가 3분의 2라는 다수를 가지고 쉽게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파악했다. 그래서 대구공회의 중추 3인이 부산공회의 중추 3인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그 때 부산공회 핵심은 이영인 이민영 장영목이다. 3명은 꼭 같은 입장을 상대 3인에게 각각 다른 자리에서 각각 개별적으로 전했다. 대구공회측이 원하는 모든 방법을 부산공회에게 강제로 적용 시키려 말고 대구공회측 교회들만 열심히 해 보시고, 또 부산공회는 부공식을 대구공회 측에 강제하지 않고 부공식으로 열심히 살아 보면, 연말이면 어느 정도 결과를 짐작하지 않을까, 연말 가지고 안 된다면 1 - 3년이면 열매가 환하지 않을까. 총공회는 모두가 집안 친지 고향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비교가 쉽다. 한 쪽이 기술로 힘으로 공작으로 밀어 붙이지 말고 각자 자기들 식으로 해 보자고 했다.
대구공회는 이름도 바꾸고 찬송도 바꾸고 율동도 하고 놀러도 가고 전국의 타 교단 행사도 다니고 남녀 좌석도 섞어 보고
부산공회는 재독 중심으로 복습을 하면서 과거 길을 지켜 보는 것을 말한다.
결과는 환하게 나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대구공회가 오히려 부산공회들보다 더 보수적인 정도다. 그렇다면 1989년 8월 이후의 양측 갈등에 대해서는 대구공회가 얼른 오판이라 해야 한다. 그 말 하나를 인정하는 순간 대구공회는 오늘의 총공회 대표가 된다. 30년 전을 잊으려 하고 묻으려 하고 피하면 오늘의 총공회 대표 자리는 스스로 버리는 것이 된다. 부공1과 부공2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저작권 하나가 나오자 총공회 전부는 다 죽어 버렸다. 숨 소리 하나가 나오지 않는다. 손해를 보니까.
저작권 문제가 하필이면 왜 숨어 지내는 부공3에만 집중하나! 이 곳이 총공회 생명이고 숨통이니까 그렇다.
다른 공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지 않나? 왜 우리가 총공회 본류인데 부공3을 향하느냐고?
그래서 복음 운동은 막상 일이 터지면 누가 주인이며 어디가 심장인지 누가 지켜 왔는지 표가 나는 것이다.
이 곳이 자기 선전을 해서가 아니다. 수백 건의 고소를 왜 여수 신풍리 바닷가에 몰아 붙나? 신풍은 공회의 지역적 무명의 객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