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 제1의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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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8 00:00
작년 12월 이전에는 백 목사님의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이름만 머리에 떠 올렸습니다. 7 남매 자녀분들, 20 명의 손주분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며 헤아리며 건강과 신앙을 위해 기도하고 이 노선을 위해 희생했고 이 노선의 이름이 얹혀 있는 분들이니 영육 간에 영광 된 길을 주시도록 기도해 왔습니다.
작년 12월부터는 과거 기도와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너무 큰 은혜를 받은 가정이고 세상 면으로 너무 훌륭하여 이제는 이 가정 모든 분들이 복음의 전면에 나선다 해도 세상에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으니 7 가정의 32 명 최정예 인재들이 이 노선의 번역과 증거 일선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다 보니 가정 별로 과거와 달리 세세히 기도합니다. 기도를 해 갈수록 백영희 가족사에 대해 깊어 지고 있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해 일반 내용은 세세히 알지만 그 자료를 묵상하며 체계화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최근에는 제 기도의 3 분의 1 정도를 쏟고 있습니다.
가족 중에 제일 중심 인물을 떠 올리면 기도에 힘을 얻습니다. 저절로 기도는 강해 집니다. 이유가 있는 기도, 배경을 가진 기도, 주님이 이런 면을 붙들고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중언부언이 아니니.
- 60 년의 공회인
1953년 출생하여 소속이든 장소적으로든 공회를 단 한 번도 벗어 나 보지 않았던 분이니 참 공회인입니다. 공회사는 서부교회사요 서부교회사는 백영희사입니다. 서부교회가 공회의 전부는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모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1952년에 서부교회로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1953년에 출생을 했으니 이 분은 1952년 서부교회에서 생을 시작했습니다. 서부교회사와 이 분의 생애사는 기간적으로 외부적으로까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공회사의 중심인 백영희사 60년에서 단 한 해도 단 한 번도 벗어 난 적이 없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공회가 없는 곳에서 해외 생활을 했고 이 기간은 타 교단의 교회에 교인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 60 년의 서부교인
1983년부터 1987년 기간은 서부교회 외부에 있었습니다. 1983년에서 85년까지는 청주교회를 맡아 목회를 했고, 1985년에서 87년까지는 부산 광안동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서부교회 후계자로 지명 된 후 서부교회를 이어 갈 수 있도록 지교회 목회와 개쳑 목회를 한 것이므로 서부교회 생활의 연장선이었고 서부교회를 위한 서부교회 파견 생활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은 후계자로 확정 지웠으나 백태영 목사님은 실력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맡기면 남들이 욕하지 않겠냐고 반발했고 목사님은 지교회와 개척 교회의 2 종류 경험을 통해 경험과 실력을 쌓고 또 비판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도록 파견한 것입니다. 백태영 목사님 자신은 훗날 어떻게 했던가? 백태영 목사님은 외부적으로 공회 2인자처럼 보였고 내용적으로는 이 노선의 내부 적이었습니다. 대구공회의 출발은 백태영이라는 인물의 인식에서부터 그 불행이 시작 되었습니다.
- 60 년의 지사충성
공회와 서부교회 안에서 출생으로부터 60 년을 채우려면 교회에서 사는 가정에만 해당 됩니다. 교회의 규모가 대형화 된 뒤에는 서부교회 내에서 출생하고 평생을 사는 이들이 많아 집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흐트러 짐이 없고 비어 있는 때가 없도록 신앙에 전념하고 산 인물은 이 분뿐입니다. 바울처럼 신앙을 알지 못하던 시기도 있는 법이고, 베드로처럼 신앙에 침체기나 탈선기도 한 번씩 가지는 것이 우리들인데 이 분은 그 평생이 요셉처럼 디모데처럼 모태로부터 오늘까지 60 년의 세월이 한결입니다. 인격도 행위도 사상도 걸음걸이도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우리처럼 풀어 지거나 울타리를 잠깐 벗어 나서 돌아 오는 수가 없었습니다. 늘 긴장 속에 충성하며 자기 맡은 길에 주력했습니다. 만사와 매사에 자신을 다하고 산 생활이 특별합니다.
- 60 년의 시기마다
출생 첫 10 년의 어린 시절은 오로지 순종으로 서부교회와 공회의 모범 학생이었고
10대의 10년은 이 노선의 발전기와 함께 청순하게 탄탄하게 모든 면으로 자라 갔고
20대의 10년은 주일학교 반사로 중간반 반사로 목회자로 정말 지사충성 일꾼이었고
30대의 10년은 이 노선의 지도자로 목회자로 후계자로 공회의 중심에 중심이었으며
40대로부터 현재까지 20 년은 이 노선을 바로 세우느라고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니 완전일 수는 없으나 우리의 눈으로 본다면 참 공회인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으로서 이처럼 모든 면에서 참 공회인으로 살아 온 분도 없고 아는 것과 행함에 비교할 사람이 없으니 공회와 서부교회가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이 노선의 제1의 인재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인재의 영육에 강건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홈은 과거 부족은 많아도 현재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분이 없는 길은 너무 외롭고 힘들고 위험스러워 이 홈을 위해서라도 그 분을 향한 기도의 열심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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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서부교회 1기 중간반을 맡았고, 1989년부터 2012년까지 백 목사님 사후 중간반을 맡은 부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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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기 기간의 출석이 매주 평균 2천여 명이었고 재적이 6천여 명이었으니, 한해 연 출석인원이 10만 명이며 집집으로 방문한 연 심방 학생이 30만 명이었습니다. 30여 명 남녀 중간반사의 5 년 심방이면 150만 회가 됩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라는 10대의 위기 연령에 대한 서부교회 중간반의 충성을 숫자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그 기간 전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충성이었습니다. 이 기간의 10대가 지금 40대가 되었고 이 나라 전국 교회의 가장 핵심적 청년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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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간반 제도의 첫 수고와 함께 중간반 제도의 정착에 수고한 분이 백명희 여반 부장 선생님입니다. 주일학교의 이름에 가려 일반 교회에는 덜 알려 졌으나 내부적으로 중간반이란 주일학교의 2부 주일학교로, 장년반으로 넘어 가는 학생들의 지도로, 위기의 10대를 지도하는 교회의 핵심 반사들로, 그리고 주일학교 반사 시절 최고의 반사 출신 중에 선발하는 원칙 때문에 실은 서부교회 주교 반사의 최우수 모임이었고 그 중간반 제도에는 서영준 목사님 부부가 계셨습니다. 여반은 서 목사님 당시에도 백 부장님이 사실 상 지도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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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과 세계에 뻗쳐 있는 서부교회 중간반 출신들이 그 언젠가 또는 항상 과거 중고등학교 시절의 신앙이 특별하여 서부교회 소식이 궁금할 때마다 중간반 부장 선생님의 안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노선, 이 노선의 복음 운동에는 주님의 특별한 이름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과 이 노선의 복음 운동을 위해 백명희 사모님의 영육의 강건을 기도할 때, 주님의 은혜를 더 크게 구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