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와 이운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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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6 12:48
1. 백영희 연혁 상의 집안들
예수님은 이스라엘 북쪽인 갈릴리 사람이었고 평생을 함께 한 제자들과 주변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집안은 이스라엘의 남쪽인 유대 고을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가지던 순간 바로 세례 요한의 집을 찾아 갑니다. 예수님의 친 부모를 빼면 세례 요한의 집안은 예수님을 그 출생 전부터 알고 왔으며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백 목사님과 평생 신앙으로 맺어 온 분들 중에 개인 관계로 알려 진 분들은 참 많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집안 단위로 관계 된 분들을 최근 살펴 봐야 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출생지인 거창군 도평 마을의 가족 외에 평생 신앙으로 함께 해 온 집안 단위는 많지 않습니다. 보통 알려 진 분들은 1952년에 백 목사님의 부산 부임 후 서부교회와 공회 형성 과정에 관계 된 집안들입니다. 1952년 전으로 들어 가면 보통 개명교회를 생각하지만 그 곳은 백 목사님의 20대 이후 사신 곳이고 출생 때부터 살펴 보면 도평뿐인데 아다시피 이 곳은 친가입니다.
2. 이운길 집안
* 김봉선 부인
도평 집안을 제외하면서도 백 목사님의 출생 때부터 관계를 맺어 왔다고 하면 이운길 집안입니다. 부인인 김봉선은 도평 바로 위의 성기마을 출신이며 모태 신앙이면서도 도평의 윗 마을이어서 서로가 불신 시절부터 집안끼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도평의 백 목사님은 초등학교를 웅양으로 다닐 때 성기 마을을 거쳐야 했고, 성기 마을은 읍으로 가려면 도평을 거쳐야 했습니다. 성기 마을의 특성 때문에 백 목사님의 부친은 성기 마을에 김봉선 집안 외의 사람들과는 접촉을 조심 시켰습니다. 백 목사님이 웅양으로 학교를 다닌 후부터 성기는 무조건 거쳐 가는 곳이고, 성기 마을의 교회를 김봉선 부친과 백부가 설립을 했기 때문에 더욱 관계는 깊어 집니다.
* 개명 시절
백 목사님은 19세 결혼을 하면서 이듬해 1929년 20세부터 술도가 사업을 위해 도평의 고향에서 부인이 살던 고제면 개명리로 갑니다. 1949년 위천교회 전도사로 부임할 때까지 만 20년을 개명에서 살며 믿게 되고 신사참배 환란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 개명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봉산 마을이고 개명과 봉산은 고제면 소재지인 농산을 중심으로 모두가 생활권입니다. 초등학교도 같습니다. 이운길은 봉산 마을 사람입니다. 백 목사님이 매일 들르는 고제면소재지에서 1925년부터 1936년까지 머슴 살이를 하며 백 목사님의 잘 나가던 불신 시절을 지켜 봤습니다. 이 시기에 백 목사님의 동생들이 먼저 농산교회를 다니며 모두 함께 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이 지역의 한 면에 교인이라면 집안보다 더 가깝왔습니다. 백 목사님이 1936년 믿으며 고제면 전체의 시선을 끌 때 이운길의 가족들은 이미 신앙으로 먼저 믿던 백 목사님 동생들 때문에 이미 제일 가까운 상태이니 이 때 개명교회 초기 교인들은 아직도 불신 시절이었습니다.
* 이후
앞에서 설명한 것은 설교록에 없고 또 개명과 거창지방에서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운길 집안의 대부분도 어린 시절이어서 잘 모르는 역사입니다. 1939년 개명교회를 개척하던 시점에 백 목사님은 순교를 이미 각오했고 신사참배 환란이 시작 되지만 봉산 마을의 이운길 집안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면서 일제 말기를 그냥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주남선 목사님의 가정에 백 목사님이 보내 드릴 양식이 있으면 이운길을 심부름 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눈치가 있고 날랜 사람인데 몇 안 되는 믿는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돌아 와 경제가 좋았고 또 진실성만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변판원 선생님의 순교집에 주인공은 변판원이나 봉산교회의 설립과 그 배경을 제공하는 집안이 바로 이운길 집안입니다. 이운길의 모친이 봉산교회를 1937년에 개척하며, 이운길은 백 목사님의 지도를 받아 1955.3.5에 양혜원교회라는 현 동산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리고 1959년 백 목사님이 고신에서 제명 당할 때 창동교회를 세웁니다. 당시 공회의 중심지이며 발생지인 거창 전체를 통해 거창읍교회는 주남선 목사님이 계셨던 거창 지역 교회들의 본부였고 공회 교회들은 몇십 명 정도의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동교회 위산교회 가조교회 창북교회 등이 출발을 했거나 막 출발을 준비하던 상태였는데, 이운길은 거창읍교회의 차기 장로로 선임 되어 공회 전체의 거창 지역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거창 전체를 통해 제일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공회의 제일 중심 가정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이 거창을 방문하는 소식이 들리면 시내 밖까지 늘 마중을 나가던 관계입니다.
3. 관계를 살피는 것은
백 목사님의 친가를 제외하면 총공회 전체를 통해 역사적으로나 또 전국과 서부교회 내의 공회 교인으로 활동해 온 집안을 꼽는다면 아마 비견할 집안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중에는 잘 믿으면 중심 인물도 나오고, 그 중에는 잘못 믿는 경우 귀신 노릇도 보통 이상으로 하게 됩니다. 현재 그 집안은 1982년 이래로 일단 '백영희목회연구소'에 관한한 거의 전부며 절대 역할과 인원을 형성해 왔습니다.
백 목사님 생전에 소장을 제외한 제일 요직에만 6명이 연구소 직원이었습니다. 연구부 업무부 인쇄부 편집부 자료실의 책임자들이 모두 그 집안입니다. 또한 이들은 단순히 직원으로만 활동하지 않고 백 목사님의 미국 자녀분들의 한국 방문에 개인적으로 안내를 맡아 양쪽 집안은 집안 차원에서 모두가 직접 다 아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최근의 연구소 문제는 흔히들 백 목사님의 자녀들과 이영인 목사의 집안 대결처럼 비춰 지기도 합니다. 또 연구소의 내부 문제는 형과 동생의 집안 싸움이라는 조롱도 있습니다. 서로가 자신은 옳고, 서로가 상대방이 큰 귀신에 잡혀 있다고 불쌍하다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나 둘 중에 한 곳은 틀려도 그냥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작정하고 곁길로 나갔다고 보입니다. 말하자면 천 길 낭떠러지로 달려 갔다 보입니다.
백도영 목사님의 고소 내용처럼 백영희 설교는 자녀만의 사유재산임이 하나님 앞에 옳고 바른 것이면
이영인 목사와 그 주변의 연구소 직원들은 총공회와 백영희 목사님의 가장 생명 되는 교훈 도둑놈들이 됩니다. 백 목사님이 자녀들만 이 설교를 소유하라고 시켰는데 이를 가로채려 한 죄가 됩니다. 백 목사님의 교훈이 자녀들의 소유가 확실하다면 서부교회도 각 공회들도 모든 결정권을 자녀분들에게 바로 내어 드리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공회와 서부교회는 교훈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백도영 목사님의 고소 내용이 잘못 된 것이면
고소자는 말할 것 없고 고소를 동의한 나머지 식구들과 심지어 백도영 목사님의 편을 들고 지지한 이운길 가정의 식구들도 잘못일 것입니다. 최종 결정은 대법원이 결정한다고 믿으면 총공회의 최종 주인은 세상이 될 것이고, 세상 결정은 세상 사는 과정의 환경일 뿐이고 내용은 오로지 하나님이 결정한다고 한다면 이미 옳고 틀린 것은 모두 드러 났다고 보입니다. 백 목사님은 장장 10만쪽의 자료를 남겼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질문들이 많아서 한 번 모아 봤습니다.
만일
예수님은 이스라엘 북쪽인 갈릴리 사람이었고 평생을 함께 한 제자들과 주변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집안은 이스라엘의 남쪽인 유대 고을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가지던 순간 바로 세례 요한의 집을 찾아 갑니다. 예수님의 친 부모를 빼면 세례 요한의 집안은 예수님을 그 출생 전부터 알고 왔으며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백 목사님과 평생 신앙으로 맺어 온 분들 중에 개인 관계로 알려 진 분들은 참 많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집안 단위로 관계 된 분들을 최근 살펴 봐야 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출생지인 거창군 도평 마을의 가족 외에 평생 신앙으로 함께 해 온 집안 단위는 많지 않습니다. 보통 알려 진 분들은 1952년에 백 목사님의 부산 부임 후 서부교회와 공회 형성 과정에 관계 된 집안들입니다. 1952년 전으로 들어 가면 보통 개명교회를 생각하지만 그 곳은 백 목사님의 20대 이후 사신 곳이고 출생 때부터 살펴 보면 도평뿐인데 아다시피 이 곳은 친가입니다.
2. 이운길 집안
* 김봉선 부인
도평 집안을 제외하면서도 백 목사님의 출생 때부터 관계를 맺어 왔다고 하면 이운길 집안입니다. 부인인 김봉선은 도평 바로 위의 성기마을 출신이며 모태 신앙이면서도 도평의 윗 마을이어서 서로가 불신 시절부터 집안끼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도평의 백 목사님은 초등학교를 웅양으로 다닐 때 성기 마을을 거쳐야 했고, 성기 마을은 읍으로 가려면 도평을 거쳐야 했습니다. 성기 마을의 특성 때문에 백 목사님의 부친은 성기 마을에 김봉선 집안 외의 사람들과는 접촉을 조심 시켰습니다. 백 목사님이 웅양으로 학교를 다닌 후부터 성기는 무조건 거쳐 가는 곳이고, 성기 마을의 교회를 김봉선 부친과 백부가 설립을 했기 때문에 더욱 관계는 깊어 집니다.
* 개명 시절
백 목사님은 19세 결혼을 하면서 이듬해 1929년 20세부터 술도가 사업을 위해 도평의 고향에서 부인이 살던 고제면 개명리로 갑니다. 1949년 위천교회 전도사로 부임할 때까지 만 20년을 개명에서 살며 믿게 되고 신사참배 환란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 개명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봉산 마을이고 개명과 봉산은 고제면 소재지인 농산을 중심으로 모두가 생활권입니다. 초등학교도 같습니다. 이운길은 봉산 마을 사람입니다. 백 목사님이 매일 들르는 고제면소재지에서 1925년부터 1936년까지 머슴 살이를 하며 백 목사님의 잘 나가던 불신 시절을 지켜 봤습니다. 이 시기에 백 목사님의 동생들이 먼저 농산교회를 다니며 모두 함께 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이 지역의 한 면에 교인이라면 집안보다 더 가깝왔습니다. 백 목사님이 1936년 믿으며 고제면 전체의 시선을 끌 때 이운길의 가족들은 이미 신앙으로 먼저 믿던 백 목사님 동생들 때문에 이미 제일 가까운 상태이니 이 때 개명교회 초기 교인들은 아직도 불신 시절이었습니다.
* 이후
앞에서 설명한 것은 설교록에 없고 또 개명과 거창지방에서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운길 집안의 대부분도 어린 시절이어서 잘 모르는 역사입니다. 1939년 개명교회를 개척하던 시점에 백 목사님은 순교를 이미 각오했고 신사참배 환란이 시작 되지만 봉산 마을의 이운길 집안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면서 일제 말기를 그냥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주남선 목사님의 가정에 백 목사님이 보내 드릴 양식이 있으면 이운길을 심부름 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눈치가 있고 날랜 사람인데 몇 안 되는 믿는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돌아 와 경제가 좋았고 또 진실성만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변판원 선생님의 순교집에 주인공은 변판원이나 봉산교회의 설립과 그 배경을 제공하는 집안이 바로 이운길 집안입니다. 이운길의 모친이 봉산교회를 1937년에 개척하며, 이운길은 백 목사님의 지도를 받아 1955.3.5에 양혜원교회라는 현 동산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리고 1959년 백 목사님이 고신에서 제명 당할 때 창동교회를 세웁니다. 당시 공회의 중심지이며 발생지인 거창 전체를 통해 거창읍교회는 주남선 목사님이 계셨던 거창 지역 교회들의 본부였고 공회 교회들은 몇십 명 정도의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동교회 위산교회 가조교회 창북교회 등이 출발을 했거나 막 출발을 준비하던 상태였는데, 이운길은 거창읍교회의 차기 장로로 선임 되어 공회 전체의 거창 지역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거창 전체를 통해 제일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고 공회의 제일 중심 가정이었습니다. 백 목사님이 거창을 방문하는 소식이 들리면 시내 밖까지 늘 마중을 나가던 관계입니다.
3. 관계를 살피는 것은
백 목사님의 친가를 제외하면 총공회 전체를 통해 역사적으로나 또 전국과 서부교회 내의 공회 교인으로 활동해 온 집안을 꼽는다면 아마 비견할 집안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중에는 잘 믿으면 중심 인물도 나오고, 그 중에는 잘못 믿는 경우 귀신 노릇도 보통 이상으로 하게 됩니다. 현재 그 집안은 1982년 이래로 일단 '백영희목회연구소'에 관한한 거의 전부며 절대 역할과 인원을 형성해 왔습니다.
백 목사님 생전에 소장을 제외한 제일 요직에만 6명이 연구소 직원이었습니다. 연구부 업무부 인쇄부 편집부 자료실의 책임자들이 모두 그 집안입니다. 또한 이들은 단순히 직원으로만 활동하지 않고 백 목사님의 미국 자녀분들의 한국 방문에 개인적으로 안내를 맡아 양쪽 집안은 집안 차원에서 모두가 직접 다 아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최근의 연구소 문제는 흔히들 백 목사님의 자녀들과 이영인 목사의 집안 대결처럼 비춰 지기도 합니다. 또 연구소의 내부 문제는 형과 동생의 집안 싸움이라는 조롱도 있습니다. 서로가 자신은 옳고, 서로가 상대방이 큰 귀신에 잡혀 있다고 불쌍하다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나 둘 중에 한 곳은 틀려도 그냥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작정하고 곁길로 나갔다고 보입니다. 말하자면 천 길 낭떠러지로 달려 갔다 보입니다.
백도영 목사님의 고소 내용처럼 백영희 설교는 자녀만의 사유재산임이 하나님 앞에 옳고 바른 것이면
이영인 목사와 그 주변의 연구소 직원들은 총공회와 백영희 목사님의 가장 생명 되는 교훈 도둑놈들이 됩니다. 백 목사님이 자녀들만 이 설교를 소유하라고 시켰는데 이를 가로채려 한 죄가 됩니다. 백 목사님의 교훈이 자녀들의 소유가 확실하다면 서부교회도 각 공회들도 모든 결정권을 자녀분들에게 바로 내어 드리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공회와 서부교회는 교훈으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백도영 목사님의 고소 내용이 잘못 된 것이면
고소자는 말할 것 없고 고소를 동의한 나머지 식구들과 심지어 백도영 목사님의 편을 들고 지지한 이운길 가정의 식구들도 잘못일 것입니다. 최종 결정은 대법원이 결정한다고 믿으면 총공회의 최종 주인은 세상이 될 것이고, 세상 결정은 세상 사는 과정의 환경일 뿐이고 내용은 오로지 하나님이 결정한다고 한다면 이미 옳고 틀린 것은 모두 드러 났다고 보입니다. 백 목사님은 장장 10만쪽의 자료를 남겼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질문들이 많아서 한 번 모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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