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랫길, 선택 후 급가속의 원칙
담당
0
0
2020.04.10 18:22
1.백영희, 그의 첫 실수로 얻은 평생의 복
백영희 평생에 수없이 반복하는 단어들이 몇 개가 있다. 이 것만 모아 보면 백영희의 속과 궤적을 가장 쉽게 그리고 누구나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교리와 설교와 교회 운영의 세부적인 면은 두고, 신앙의 노선을 두고 말할 때는 '갈랫길'이 그렇게 많다. 백영희 스스로 첫 신앙의 첫 순간부터 갈랫길을 두고 그렇게 고뇌를 했고 그의 평생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했다. 믿기 전에 '하늘'은 있다, 그런데 어느 종교를 선택해야 할지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이 부분이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그의 평생이 그렇게 특별했다. 기독교를 택했고 그는 바르게 선택했음을 명확하게 알았다. 그런데 기독교를 택하고 첫 주일이 지나자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지, 전적 은혜인지를 두고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했고 안식교 전도인을 따라 개종을 해 버린다. 그는 평생에 단 한 번의 잘못 된 선택을 했고 그 시기는 믿은 첫 주간에 발생했다. 이 탈선 때문에 그는 평생 두 번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지 않게 되는가? 첫 신앙의 첫 선택으로 그는 가진 천국을 떠나 지옥을 경험했다. 바로 이 실수가 그의 평생에 '두 길의 갈랫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노선 결정 문제에 관한 한 크나 큰 복이 되었다.
2. 평생 가르치며 늘 강조했던 부탁
항상 두 길! 오직 한 길!
연구소 직원 한 분이 내신 표어다. 백 목사님께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 표어를 듣는 순간 이 표현은 백영희의 '신앙 노선'과 '노선 선택'에 관한 모든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짧게 담아 낸 명언이다.
Always two ways!
Only one way!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 멋 있지 않은가?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시 중에 시다. 이 시도 또 저작권으로 고소를 쏟아 놓을지... 불쌍하고 불행한 분들. 이제 주변을 전도하고 맡은 몇 사람을 잘 기르는 데 여생을 주력하면 좋겠다. 남의 집을 허무는 두더쥐나 남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의 불행한 위치를 벗어 났으면 좋겠다. 그들 중 어떤 이와는 아주 짧게 잠깐 지나 친 적이 몇 번 있다. 그들 중 여러 사람과는 내 인생에 가장 많고 중요하고 깊이 함께 했다. 두 번째 경우의 이들을 보며 느끼는 점이다.
3. 갈랫길, 선택 후의 급가속 원리
항상 두 길, 오직 한 길!
그런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고자 한다. 실은 부연 설명이다. 좋은 시나 그림이나 음악일수록 점 하나만 더해 버리면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버린다. 그리 될까 많이 망설였다. 그런데 더하지 않고는 이 멋 있고 중요하고 평생 생명보다 귀하게 붙들어야 할 가치가 겉돌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시도해 본다. 항상 두 길이나 이 두 길이 어떤 때는 한 길로 모일 때가 있다. 두 길이 한 동안 한 배를 타는 경우가 있다. 독일과 전쟁하며 소련과 미국은 5년을 함께 걸었다. 바로 이런 순간, '항상 두 길'을 잊으면 당한다. 소련도 미국도 '항상 두 길'이므로 때가 되면 서로 나뉘고 서로 목숨 걸고 싸울 것을 알았다. '오직 한 길'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다.
그런데 두 길이 합해 지며 한 동안 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서로 나뉠 때가 있다. 이 지점을 갈랫길이라 한다. 원래 두 원수가 한 길을 가는 수도 있지만 원래 하나 된 동지들이 한 길로 끝까지 가야 하는데 갈랫길을 만나고 그 갈랫길에서 서로 나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이 갈랫길은 이전까지 동지로 걸어 온 이들에게 각자의 실제 정체를 드러 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면서 '항상 두 길, 오직 한 길'의 원칙과 현실을 내 놓으셨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사람이 필요 때문에 한 길을 걸을 때는 사실 큰 문제가 없다. 두 도둑이 역할 분담을 했으니 때가 되면 나뉠 것이고 그 때를 준비하면서 동업을 하는 매 순간 늘 나뉠 때를 준비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또는 두 팀이 실제 하나가 되어 한 길을 걸어 가는 경우는 문제가 많다. 갈랫길은 오게 되어 있고, 서로 같은 줄로 알았던 이들이 갈랫길 때문에 각자의 길을 가는 과정에 나뉘게 되면 둘이 지난 날 공통의 적으로 삼았던 원수보다 서로가 더 싸움을 하게 된다.
남한의 여당과 야당은 아무리 서로가 다르고 싸운다 해도 북한의 평양보다 상대방을 더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재 양당은 상대방이 평양보다 더 나쁘다는 상황이다. 평양은 그대로 둔다 해도 남한의 상대 당은 꼭 망하는 꼴을 봐야 하고, 그래서 북한에 대한 증오보다 더하다. 집권당은 내적으로도 평양은 대화가 가능하고 남한 내 야당은 분해를 시키고 싶어 하는 듯하다. 현재 야당은 북한 정권은 이제 저절로 망해서 없어 지겠지만 주사파로 지목한 집권당은 이 땅에서 아주 사라져야 한다는 듯하다. 연구소의 걸음은 어떤 타 교파가 좋다 해도 일단 총공회 내의 공회들을 늘 우선해 왔다. 연구소에서 최근의 소송 건들 때문에 갈랫을 삼아 나뉜 저 쪽 사람들은 총공회 소속의 다른 공회들보다 이 곳을 더 적대하고 있다. 심지어 공회 외부의 모든 교계와 비교해도 그렇다. 물론 불신자보다 더 나쁘게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갈랫길' 이전에 함께 하다 나뉘는 이들이 미리 '갈랫길'의 원리를 파악하지 않으면 피하기 어렵다. 연구소는 오늘도 공산당보다는 남한의 무신론자가 낫고, 무신론자보다는 불교나 유교 같은 종교인들이 더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국내 교회들이 불신자나 불교보다 더 나쁘게 보는 신천지 같은 기독교 이단을 불교나 천주교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리고 감리교 계열보다 장로교 계열을 낫게 보고, 어떤 교회들보다 그래도 총공회 내의 공회들이 낫다고 본다. 이 가치 비교가 중요한 것은 화가 난다고 상대편 신앙인들을 타 교단보다 더 욕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지 않는 행동이 따르기 때문이다. 지금 연구소를 상대로 고소 사건을 수도 없이 쏟아 붓는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총공회를 비판하거나 이탈 시킨 이들을 상대로 했던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 때는 그러지 않았다. 현재 연구소 직원들은 평생 공회 외부를 상대로 공회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왔다.
왜 이렇게까지 달라 지게 되는가?
갈랫길 이전에 함께 걷던 이들이 갈랫길을 만나면서 자기 속에 된 대로 나뉘게 되는데 나뉘는 딱 그 순간만 본다면 일반 사람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워 보인다. 지난 날 같은 자료로 같은 주장을 했고 같은 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나뉘는 그 순간에 나뉘는 양측이 서로 자기들이 선택한 길이 더 나은 길이라고 선전을 하는데 너무 비슷해서 차이를 발견하기가 극히 어렵다. 당사자들은 서로가 안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속에 무엇이 문제며 지향점이 무엇인지 안다. 그런데 함께 해 온 세월에 지켜 보는 주변 사람을 하나라도 끌어 들이기 위해 양쪽은 선전전을 벌이든 해명을 하든 남이 보면 서로 옳다고 논쟁을 하게 된다. 남들은 몰라도 당사자들끼리는 한 쪽이 막 가는 거짓말을 남들이 잘 모르게 풀어 놓고 있음을 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나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양쪽이 선택한 길은 서로 멀어 지게 되고 멀리 떨어 지게 된다. 어느 정도로 빨리 달라 지며 멀어 질까? 가속도가 붙는다. 급가속이라 해야 한다. 급가속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소 한 길을 걸을 때 mm 단위로 달랐던 차이가 갈랫길을 지난 후에는 며칠 후에 보면 cm 단위로 차이가 난다. 몇 달이 지나면 m 단위가 된다. 이 때쯤이면 누구든 대충 보면 안다. 1년쯤 지나면 불신자가 봐도 알 만큼 km 단위로 멀어 진다. 양측이 함께 했던 지난 날 전체를 본다면 cm 단위로 달라 지는 데 몇 년이 걸려야 한다. 대구공회와 부산공회가 나뉠 때, 그 이전에 공회를 이탈한 교회들이 나뉠 때, 그 이전에 고신과 합동 교단이 나뉠 때도 다 그러했다.
연구소 직원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하나 둘씩 함께 모였고 1989년경 어느 정도 감이 잡혔었다. 그리고 2013년에 외부로 표시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갈랫길이 나타 났다. 지금 7년이 지났다. 이제는 그들이 남한 내 양당이 다른 정도로 보인다. 한 쪽은 북한을 죽어도 믿을 수 있으며 북핵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니 남한은 발을 뻗고 자도 된다는 정도다. 군대도 풀어 헤치느라고 정신이 없다. 한 쪽은 북한을 천하의 원수로 삼으면서 상대방을 북한보다 더 나쁘게 보고 있는 정도다. 연구소 이 곳에서 수십 년을 일하다 나뉜 이들의 내면을 보여 주시려고 국제 관계와 국내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부로 이렇게 만들며 우리 앞에 전개 시키고 있다.
백영희 평생에 수없이 반복하는 단어들이 몇 개가 있다. 이 것만 모아 보면 백영희의 속과 궤적을 가장 쉽게 그리고 누구나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교리와 설교와 교회 운영의 세부적인 면은 두고, 신앙의 노선을 두고 말할 때는 '갈랫길'이 그렇게 많다. 백영희 스스로 첫 신앙의 첫 순간부터 갈랫길을 두고 그렇게 고뇌를 했고 그의 평생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러했다. 믿기 전에 '하늘'은 있다, 그런데 어느 종교를 선택해야 할지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이 부분이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그의 평생이 그렇게 특별했다. 기독교를 택했고 그는 바르게 선택했음을 명확하게 알았다. 그런데 기독교를 택하고 첫 주일이 지나자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지, 전적 은혜인지를 두고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했고 안식교 전도인을 따라 개종을 해 버린다. 그는 평생에 단 한 번의 잘못 된 선택을 했고 그 시기는 믿은 첫 주간에 발생했다. 이 탈선 때문에 그는 평생 두 번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지 않게 되는가? 첫 신앙의 첫 선택으로 그는 가진 천국을 떠나 지옥을 경험했다. 바로 이 실수가 그의 평생에 '두 길의 갈랫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노선 결정 문제에 관한 한 크나 큰 복이 되었다.
2. 평생 가르치며 늘 강조했던 부탁
항상 두 길! 오직 한 길!
연구소 직원 한 분이 내신 표어다. 백 목사님께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 표어를 듣는 순간 이 표현은 백영희의 '신앙 노선'과 '노선 선택'에 관한 모든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짧게 담아 낸 명언이다.
Always two ways!
Only one way!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 멋 있지 않은가? 너무 절묘하지 않은가? 시 중에 시다. 이 시도 또 저작권으로 고소를 쏟아 놓을지... 불쌍하고 불행한 분들. 이제 주변을 전도하고 맡은 몇 사람을 잘 기르는 데 여생을 주력하면 좋겠다. 남의 집을 허무는 두더쥐나 남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의 불행한 위치를 벗어 났으면 좋겠다. 그들 중 어떤 이와는 아주 짧게 잠깐 지나 친 적이 몇 번 있다. 그들 중 여러 사람과는 내 인생에 가장 많고 중요하고 깊이 함께 했다. 두 번째 경우의 이들을 보며 느끼는 점이다.
3. 갈랫길, 선택 후의 급가속 원리
항상 두 길, 오직 한 길!
그런데, 여기에 하나를 더하고자 한다. 실은 부연 설명이다. 좋은 시나 그림이나 음악일수록 점 하나만 더해 버리면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버린다. 그리 될까 많이 망설였다. 그런데 더하지 않고는 이 멋 있고 중요하고 평생 생명보다 귀하게 붙들어야 할 가치가 겉돌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시도해 본다. 항상 두 길이나 이 두 길이 어떤 때는 한 길로 모일 때가 있다. 두 길이 한 동안 한 배를 타는 경우가 있다. 독일과 전쟁하며 소련과 미국은 5년을 함께 걸었다. 바로 이런 순간, '항상 두 길'을 잊으면 당한다. 소련도 미국도 '항상 두 길'이므로 때가 되면 서로 나뉘고 서로 목숨 걸고 싸울 것을 알았다. '오직 한 길'을 알기 때문이다. 인생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다.
그런데 두 길이 합해 지며 한 동안 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서로 나뉠 때가 있다. 이 지점을 갈랫길이라 한다. 원래 두 원수가 한 길을 가는 수도 있지만 원래 하나 된 동지들이 한 길로 끝까지 가야 하는데 갈랫길을 만나고 그 갈랫길에서 서로 나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이 갈랫길은 이전까지 동지로 걸어 온 이들에게 각자의 실제 정체를 드러 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면서 '항상 두 길, 오직 한 길'의 원칙과 현실을 내 놓으셨다. 처음부터 서로 다른 사람이 필요 때문에 한 길을 걸을 때는 사실 큰 문제가 없다. 두 도둑이 역할 분담을 했으니 때가 되면 나뉠 것이고 그 때를 준비하면서 동업을 하는 매 순간 늘 나뉠 때를 준비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또는 두 팀이 실제 하나가 되어 한 길을 걸어 가는 경우는 문제가 많다. 갈랫길은 오게 되어 있고, 서로 같은 줄로 알았던 이들이 갈랫길 때문에 각자의 길을 가는 과정에 나뉘게 되면 둘이 지난 날 공통의 적으로 삼았던 원수보다 서로가 더 싸움을 하게 된다.
남한의 여당과 야당은 아무리 서로가 다르고 싸운다 해도 북한의 평양보다 상대방을 더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재 양당은 상대방이 평양보다 더 나쁘다는 상황이다. 평양은 그대로 둔다 해도 남한의 상대 당은 꼭 망하는 꼴을 봐야 하고, 그래서 북한에 대한 증오보다 더하다. 집권당은 내적으로도 평양은 대화가 가능하고 남한 내 야당은 분해를 시키고 싶어 하는 듯하다. 현재 야당은 북한 정권은 이제 저절로 망해서 없어 지겠지만 주사파로 지목한 집권당은 이 땅에서 아주 사라져야 한다는 듯하다. 연구소의 걸음은 어떤 타 교파가 좋다 해도 일단 총공회 내의 공회들을 늘 우선해 왔다. 연구소에서 최근의 소송 건들 때문에 갈랫을 삼아 나뉜 저 쪽 사람들은 총공회 소속의 다른 공회들보다 이 곳을 더 적대하고 있다. 심지어 공회 외부의 모든 교계와 비교해도 그렇다. 물론 불신자보다 더 나쁘게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갈랫길' 이전에 함께 하다 나뉘는 이들이 미리 '갈랫길'의 원리를 파악하지 않으면 피하기 어렵다. 연구소는 오늘도 공산당보다는 남한의 무신론자가 낫고, 무신론자보다는 불교나 유교 같은 종교인들이 더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국내 교회들이 불신자나 불교보다 더 나쁘게 보는 신천지 같은 기독교 이단을 불교나 천주교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리고 감리교 계열보다 장로교 계열을 낫게 보고, 어떤 교회들보다 그래도 총공회 내의 공회들이 낫다고 본다. 이 가치 비교가 중요한 것은 화가 난다고 상대편 신앙인들을 타 교단보다 더 욕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지 않는 행동이 따르기 때문이다. 지금 연구소를 상대로 고소 사건을 수도 없이 쏟아 붓는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총공회를 비판하거나 이탈 시킨 이들을 상대로 했던 일이 없다는 점이다. 그 때는 그러지 않았다. 현재 연구소 직원들은 평생 공회 외부를 상대로 공회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져 왔다.
왜 이렇게까지 달라 지게 되는가?
갈랫길 이전에 함께 걷던 이들이 갈랫길을 만나면서 자기 속에 된 대로 나뉘게 되는데 나뉘는 딱 그 순간만 본다면 일반 사람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워 보인다. 지난 날 같은 자료로 같은 주장을 했고 같은 길을 걸어 왔기 때문에 나뉘는 그 순간에 나뉘는 양측이 서로 자기들이 선택한 길이 더 나은 길이라고 선전을 하는데 너무 비슷해서 차이를 발견하기가 극히 어렵다. 당사자들은 서로가 안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속에 무엇이 문제며 지향점이 무엇인지 안다. 그런데 함께 해 온 세월에 지켜 보는 주변 사람을 하나라도 끌어 들이기 위해 양쪽은 선전전을 벌이든 해명을 하든 남이 보면 서로 옳다고 논쟁을 하게 된다. 남들은 몰라도 당사자들끼리는 한 쪽이 막 가는 거짓말을 남들이 잘 모르게 풀어 놓고 있음을 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나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양쪽이 선택한 길은 서로 멀어 지게 되고 멀리 떨어 지게 된다. 어느 정도로 빨리 달라 지며 멀어 질까? 가속도가 붙는다. 급가속이라 해야 한다. 급가속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소 한 길을 걸을 때 mm 단위로 달랐던 차이가 갈랫길을 지난 후에는 며칠 후에 보면 cm 단위로 차이가 난다. 몇 달이 지나면 m 단위가 된다. 이 때쯤이면 누구든 대충 보면 안다. 1년쯤 지나면 불신자가 봐도 알 만큼 km 단위로 멀어 진다. 양측이 함께 했던 지난 날 전체를 본다면 cm 단위로 달라 지는 데 몇 년이 걸려야 한다. 대구공회와 부산공회가 나뉠 때, 그 이전에 공회를 이탈한 교회들이 나뉠 때, 그 이전에 고신과 합동 교단이 나뉠 때도 다 그러했다.
연구소 직원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하나 둘씩 함께 모였고 1989년경 어느 정도 감이 잡혔었다. 그리고 2013년에 외부로 표시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갈랫길이 나타 났다. 지금 7년이 지났다. 이제는 그들이 남한 내 양당이 다른 정도로 보인다. 한 쪽은 북한을 죽어도 믿을 수 있으며 북핵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니 남한은 발을 뻗고 자도 된다는 정도다. 군대도 풀어 헤치느라고 정신이 없다. 한 쪽은 북한을 천하의 원수로 삼으면서 상대방을 북한보다 더 나쁘게 보고 있는 정도다. 연구소 이 곳에서 수십 년을 일하다 나뉜 이들의 내면을 보여 주시려고 국제 관계와 국내 상황을 하나님께서 일부로 이렇게 만들며 우리 앞에 전개 시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