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호, 고마운 목사님을 벌써 돌아 보게 된다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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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8 21:38
1979년으로 기억 되는 어느 휴가 나온 날,
당시 서부교회 4층은 전부 양성원으로 사용되었으나 중앙에 백 목사님 방이 하나 있고 그 방 옆에는 대티 고개에서 옮긴 서부교회의 마지막 청년방이 있었다. 이 곳에서 이민영 유종환 서윤호 네 분과 잠깐 함께 했다. 말하자면 서부교회 역사의 청년방 마지막 팀들이다. 서 목사님은 남포동에서 신문을 팔았고 유종환 선생님은 현장 목사로 기억한다. 서윤호 선생님이 성경 전체를 암송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자 바로 시험해 보자고 했다. 성경 아무 곳이나 펴서 몇 줄을 읽어 보라 했다. 중간을 폈고 읽었다. 이사야서였다고 기억이 된다. 한 줄 읽어 나가자 함께 읽고 있었다. 그 분은 시력 때문에 성경을 읽지 못한다. 두어 곳을 테스트 하고 그냥 말았다.
이 때부터 1991년 1월에 서영호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부임하던 순간까지 그 분과 나는 서로가 세상에서 제일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1980년 제대 후 노동을 시작할 때, 장사를 할 때, 연구소 출근하고 학교 졸업을 할 때, 이듬해 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유학 출발을 할 때 서윤호 목사님은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가족이라도 할 수 없는 수고를 해 주셨다. 유치원 보내는 어머니 역할이랄까, 타향 살이 처음 시키는 어머니의 손길에 아버지의 인생사 안내까지 모두 도맡았다. 그리고 '네 손에서 백영희 조직신학은 나와야 하고, 너 외에는 없다.' 만날 때마다 한 시도 잊지 못할 이야기를 주입 시켰다. 아직도 그 분과의 첨예한 논쟁만큼 깊이 들어 가 본 상대는 없다. 그 말은 내가 직접 접했던 인물 중에서는 제일 깊었다는 뜻이다.
나는 시골에서 살다 신앙에 철이 들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 나에게 공회의 전국 교회들과 교역자들과 백 목사님의 공회적 행적을 낱낱이 알려 준 인물은 이민영 목사님이다. 부친 이진헌 목사님이 목사 서열이 앞 순위다 보니 공회 핵심 회의는 물론 백 목사님 앞에서 처리 되는 사적 대화를 듣고 일일이 내게 전달해 줬다. 이 덕분에 나는 평생 공회의 역사에 관해서는 공회 1세대 원로들과 그 때 일을 함께 앉았던 것처럼 이야기 했다. 백태영 이재순 백영침 등 1세대는 이미 다 가셨다. 그러니 각 공회 최고 원로들께 마치 그들의 선배처럼 과거를 술회한다. 그러니 건방지다는 죄목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필요한 지식은 이렇게라도 주신다. 그 소식을 전해 준 이민영 목사님은 그 소식들을 그의 목회나 이 노선에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사용했다.
나에게 서부교회 백 목사님이 오신 첫 날부터 일반 교인들이 듣고 보고 담아야 하는 것은 서윤호 목사님으로부터 전달 받았다. 나는 1977년에 서부교회로 왔으나 1952년 7월에 서부교회를 겪은 사람처럼 이야기 한다. 누구와 이야기 해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그 때 있었던 듯하고 상대방은 실제 있었으나 마치 없었던 분처럼 되어 버린다. 백 목사님 전기를 적을 때는 백 목사님 족보부터 살피는 바람에 백 목사님의 자녀들조차 자신들의 어릴 때를 내게 듣고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나는 목사님을 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으나 필요한 분들을 통해 접했고 그 중에 서윤호 목사님을 통해 가장 깊은 곳곳을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립 되지 않은 공회의 교리 요약은 우리의 가장 큰 과제였다. 이 문제로 우리는 우리만이 마치 교회사적 사명이나 임무를 독점한 듯, 또는 전매 허가를 가진 듯했다.
1991년 1월, 서영호 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하면서 우리는 서로 나뉘었다. 서윤호 목사님은 서부교회를 막 부임한 형님의 목회에 놓여 있는 서부교회의 암초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미 나로부터 당시 가장 깊은 내용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님의 서부교회 안착을 도와야 할 사명을 느꼈을 것 같다. 백 목사님의 생전 마지막 기간과 장례, 그리고 이후 전개 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의 내막은 나를 통해 서윤호 목사님은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임한 서 목사님에 대하여 나와 연구소 측은 부임과 동시에 아예 상관치 않지만 나와 연구소를 움직여 서 목사님을 밀어 내고 싶었던 반대 측은 예측이 불가능했고 밀어 낼 힘이 넘쳤다. 서윤호 목사님이 서영호 목사님을 비롯하여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을 늘 내게 다 말을 했듯이 나 역시도 그렇게 했었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는 서로의 자기 측에게 치명적이 될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로 함께 할 더 큰 가치가 있었다. 형님의 부임과 동시에 서윤호 목사님의 방향은 형님을 위해 움직였고 나와는 자연스럽게 다시 서로 연락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어제까지 함께 자기 길을 걸어 왔으나 서윤호 목사님은 주변에 내게 대해 이전 좋았던 시절을 좋게 소개해 왔음을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다. 나는 사이트를 통해 내 마음을 늘 그렇게 주변과 모두에게 적어 왔다. 내게 모든 면에서 지극히 도움을 주신 분, 나와 함께 연구소의 오늘까지 작업을 함께 했더라면 더 없이 소중했을 분, 공회가 가진 보배로운 그 분의 가치성을 두고 생각할 때 나는 총공회 거의 대부분이 서윤호 목사님의 형님을 우리 나라 최고의 학자라거나 세계적인 보배라는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동생 서윤호 목사님의 가치를 오히려 그렇게 평가해 왔었다. 그런 보배로운 분과 어느 날 다시 예전에 함께 약속한 사명을 같이 할 날을 늘 그려 왔다. 그런데 어제 가셨다. 그렇다면 서윤호라는 보배는 내게 과거 도와 주신 것으로 주님이 막았다. 그런 인물은 다시 만들 수도 없고 다시 접할 길도 없을 듯하다. 그 대신 그 분보다 훨씬 못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이 사명에 더욱 중요하게 역할 하실 분들을 따로 만나게 하시지 않을까?
어린 주일학생이 자라서 나와 동역을 하든지
공회의 어디에 묻혀 있던 어느 교인이 문득 어느 날 내게 연락을 해서 그렇게 되든지
또는 공회를 전혀 모르고 살던 어느 교계의 보배가 어느 날 나와 만나 이 글의 이야기를 하게 되든지
주님이 귀하게 만들고 이 노선에 주신 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너무 아쉬운 분이다. 고마운 분이다.
장례를 내가 가서 주관하게 된다면 그 분은 나를 칭찬하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많은 생각을 하며
이 곳을 찾되 이 곳의 가치를 아는 분들에게 나의 기억과 가치를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삼게 적어 봤다.
당시 서부교회 4층은 전부 양성원으로 사용되었으나 중앙에 백 목사님 방이 하나 있고 그 방 옆에는 대티 고개에서 옮긴 서부교회의 마지막 청년방이 있었다. 이 곳에서 이민영 유종환 서윤호 네 분과 잠깐 함께 했다. 말하자면 서부교회 역사의 청년방 마지막 팀들이다. 서 목사님은 남포동에서 신문을 팔았고 유종환 선생님은 현장 목사로 기억한다. 서윤호 선생님이 성경 전체를 암송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자 바로 시험해 보자고 했다. 성경 아무 곳이나 펴서 몇 줄을 읽어 보라 했다. 중간을 폈고 읽었다. 이사야서였다고 기억이 된다. 한 줄 읽어 나가자 함께 읽고 있었다. 그 분은 시력 때문에 성경을 읽지 못한다. 두어 곳을 테스트 하고 그냥 말았다.
이 때부터 1991년 1월에 서영호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부임하던 순간까지 그 분과 나는 서로가 세상에서 제일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1980년 제대 후 노동을 시작할 때, 장사를 할 때, 연구소 출근하고 학교 졸업을 할 때, 이듬해 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유학 출발을 할 때 서윤호 목사님은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가족이라도 할 수 없는 수고를 해 주셨다. 유치원 보내는 어머니 역할이랄까, 타향 살이 처음 시키는 어머니의 손길에 아버지의 인생사 안내까지 모두 도맡았다. 그리고 '네 손에서 백영희 조직신학은 나와야 하고, 너 외에는 없다.' 만날 때마다 한 시도 잊지 못할 이야기를 주입 시켰다. 아직도 그 분과의 첨예한 논쟁만큼 깊이 들어 가 본 상대는 없다. 그 말은 내가 직접 접했던 인물 중에서는 제일 깊었다는 뜻이다.
나는 시골에서 살다 신앙에 철이 들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 나에게 공회의 전국 교회들과 교역자들과 백 목사님의 공회적 행적을 낱낱이 알려 준 인물은 이민영 목사님이다. 부친 이진헌 목사님이 목사 서열이 앞 순위다 보니 공회 핵심 회의는 물론 백 목사님 앞에서 처리 되는 사적 대화를 듣고 일일이 내게 전달해 줬다. 이 덕분에 나는 평생 공회의 역사에 관해서는 공회 1세대 원로들과 그 때 일을 함께 앉았던 것처럼 이야기 했다. 백태영 이재순 백영침 등 1세대는 이미 다 가셨다. 그러니 각 공회 최고 원로들께 마치 그들의 선배처럼 과거를 술회한다. 그러니 건방지다는 죄목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필요한 지식은 이렇게라도 주신다. 그 소식을 전해 준 이민영 목사님은 그 소식들을 그의 목회나 이 노선에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사용했다.
나에게 서부교회 백 목사님이 오신 첫 날부터 일반 교인들이 듣고 보고 담아야 하는 것은 서윤호 목사님으로부터 전달 받았다. 나는 1977년에 서부교회로 왔으나 1952년 7월에 서부교회를 겪은 사람처럼 이야기 한다. 누구와 이야기 해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그 때 있었던 듯하고 상대방은 실제 있었으나 마치 없었던 분처럼 되어 버린다. 백 목사님 전기를 적을 때는 백 목사님 족보부터 살피는 바람에 백 목사님의 자녀들조차 자신들의 어릴 때를 내게 듣고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나는 목사님을 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으나 필요한 분들을 통해 접했고 그 중에 서윤호 목사님을 통해 가장 깊은 곳곳을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립 되지 않은 공회의 교리 요약은 우리의 가장 큰 과제였다. 이 문제로 우리는 우리만이 마치 교회사적 사명이나 임무를 독점한 듯, 또는 전매 허가를 가진 듯했다.
1991년 1월, 서영호 목사님이 서부교회로 부임하면서 우리는 서로 나뉘었다. 서윤호 목사님은 서부교회를 막 부임한 형님의 목회에 놓여 있는 서부교회의 암초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미 나로부터 당시 가장 깊은 내용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님의 서부교회 안착을 도와야 할 사명을 느꼈을 것 같다. 백 목사님의 생전 마지막 기간과 장례, 그리고 이후 전개 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의 내막은 나를 통해 서윤호 목사님은 가장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임한 서 목사님에 대하여 나와 연구소 측은 부임과 동시에 아예 상관치 않지만 나와 연구소를 움직여 서 목사님을 밀어 내고 싶었던 반대 측은 예측이 불가능했고 밀어 낼 힘이 넘쳤다. 서윤호 목사님이 서영호 목사님을 비롯하여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을 늘 내게 다 말을 했듯이 나 역시도 그렇게 했었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는 서로의 자기 측에게 치명적이 될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로 함께 할 더 큰 가치가 있었다. 형님의 부임과 동시에 서윤호 목사님의 방향은 형님을 위해 움직였고 나와는 자연스럽게 다시 서로 연락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어제까지 함께 자기 길을 걸어 왔으나 서윤호 목사님은 주변에 내게 대해 이전 좋았던 시절을 좋게 소개해 왔음을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다. 나는 사이트를 통해 내 마음을 늘 그렇게 주변과 모두에게 적어 왔다. 내게 모든 면에서 지극히 도움을 주신 분, 나와 함께 연구소의 오늘까지 작업을 함께 했더라면 더 없이 소중했을 분, 공회가 가진 보배로운 그 분의 가치성을 두고 생각할 때 나는 총공회 거의 대부분이 서윤호 목사님의 형님을 우리 나라 최고의 학자라거나 세계적인 보배라는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동생 서윤호 목사님의 가치를 오히려 그렇게 평가해 왔었다. 그런 보배로운 분과 어느 날 다시 예전에 함께 약속한 사명을 같이 할 날을 늘 그려 왔다. 그런데 어제 가셨다. 그렇다면 서윤호라는 보배는 내게 과거 도와 주신 것으로 주님이 막았다. 그런 인물은 다시 만들 수도 없고 다시 접할 길도 없을 듯하다. 그 대신 그 분보다 훨씬 못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이 사명에 더욱 중요하게 역할 하실 분들을 따로 만나게 하시지 않을까?
어린 주일학생이 자라서 나와 동역을 하든지
공회의 어디에 묻혀 있던 어느 교인이 문득 어느 날 내게 연락을 해서 그렇게 되든지
또는 공회를 전혀 모르고 살던 어느 교계의 보배가 어느 날 나와 만나 이 글의 이야기를 하게 되든지
주님이 귀하게 만들고 이 노선에 주신 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너무 아쉬운 분이다. 고마운 분이다.
장례를 내가 가서 주관하게 된다면 그 분은 나를 칭찬하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많은 생각을 하며
이 곳을 찾되 이 곳의 가치를 아는 분들에게 나의 기억과 가치를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삼게 적어 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