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복음성가.. 세상으로 끌고 가는 기관차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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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2 13:30
(감성 중심의 복음성가)
복음성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년이 좀 넘었다. 검색을 해 보니 전용대 목사님의 찬송인데 찬송가에 올라 갔는지는 모르겠다. 1883년에 만들어 진 통일찬송가까지는 무슨 곡이 있는지 가끔 들여다 봤으나 이제는 찬송가 종류가 몇 가지인지도 혼란스럽고 찬송가 안에 이단보다 기독교에 해독을 더 심하게 끼친 이들의 횡설수설이 많은 듯하여 참고용으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정도 열풍이면 찬송가 안에 들어 가야 할 듯하지만 교단들과 찬송가 위원들의 이해 관계가 더 중요하니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철물이 필요하면 시내의 여객선 터미널로 간다.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대로의 철물점에 들어 가려는 순간 좀 애매하게 보이는 분이 내 앞에서 갑자기 '내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에게는 돈을 주지 않는다. 노래까지 부르는 것을 보니 정신 문제도 없다. 그냥 일을 보고 있으니 지나 가면서 욕인지 애매한 말을 던지고 간다. 교회를 욕하는 말을 듣는 순간 새로 나온 찬송인데 내가 교인처럼 보여 낚시를 던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 찬송은 유독 많이 들렸다.
그 분은 한 눈에 일해서 돈을 버는 모습이 아니다. 시내를 다니며 좀 얻게 되면 어디 가서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전형적인 그런 모습이었다. 속으로 복음성가를 쥐어 박았다. 한 줄만 들어도 분위기는 파악이 되었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처럼 세상의 쓴 맛을 다 보고 나서 주님께 돌아 온 고백이었다. 그 찬송의 내용은 좋다. 그런 좌절에서 돌아 오도록 교회가 전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그렇게 늘 살고 있는 면도 있다. 그런데 그 찬송이 감성 중심으로 불려 지다 보니 지나 가는 사람에게 돈을 얻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릴 때의 각설이 기억)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은 아주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그 중간쯤이었다. 시골의 도심으로 형성이 되어 있으나 학교 가는 길에는 논밭이 흔했다. 그래서 시골 생활은 해 보지 않았으나 시골을 구경은 해 봤다. 도시 생활은 하지 못했으나 도시 생활을 느낄 수는 있었다. 어중간한 면도 있으나 한 편으로 성장 과정에 양 쪽을 겪어 본 것은 내게 평생 귀하게 사용 된다. 겨울이 되면 아침 식사가 늦어 진다. 꼭 밥 얻으러 오는 걸인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또는 그 시대가 그러 했으니 어릴 때 '작년에 왔던 각설이..' 노래를 예사 불렀다.
평생 그 분들에게 죄송하다. 찾아 오는 이들에게 밥 한 그릇 주는 정도가 내가 본 전부다. 요즘 모두가 칭찬하는 복지나 입양이나 따로 살펴 드리는 일은 없었다. 여름이 되면 도심을 지나는 냇가의 넓은 백사장에 가마니로 막을 친다. 광대패 약장사 별별 구경거리를 보여 준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모두가 가니까 따라 간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나 웬지 흥이 난다. 주변의 사람들, 그 분위기에 일단 들뜬다. 징이나 꾕과리 소리는 그 곡을 몰라도 흥분을 일으킨다. 그리고 몇 마디 나오는 노래는 바로 머리에 와 담겨 버렸다.
옛날 시골의 5일 시장에는 12개 읍면의 군 주민이 한꺼번에 몰린다. 오늘은 프로 경기장에 몰리는 정도로 비교할 수 있을까? 다른 소리는 그냥 넋을 잃고 쳐다 보고 말 정도다. 약장수의 말은 아주 다르다. 눈에 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온다. 어린 나도 한창 듣다 보면 돈을 주고 뭔가 사게 될 것 같다. 자극, 관심, 감성, 분위기.. 를 말하고 있다. 따지고 살피고 비교하고 결과를 보면서 한 단계씩 거쳐 가는 것이 없다. 모두를 한꺼번에 다 몰아 간다. 대중은 쉽게 선동이 된다. 우선은 좋다. 그러나 우선 좋은 것은 뒤에 문제가 있다.
(찬양을 할 때)
왜 몸을 움직이는가? 왜 팔을 들고 흔드는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냥을 하고 불을 피우고 밤새 춤을 추는 모습, 한 잔 먹은 옛 선비들이 평소 그렇게 점잖은 사람들인데 결국 어깨가 들썩이며 팔을 흔든다. 밤 무대 청소년들은 온 몸으로 뛰고 구른다. 그 행동 그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출렁이는 그들을 누구 출렁이게 했는지 그 원인을 살피고 있다. 멋 모르고 주변을 따라 뛰고 구르다 보면 제 부모를 팔아 넘기는 수도 있고 자기 인생을 불 태울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신중해야 한다. 신중하면 흥이 나지 않는다.
찬양을 할 때 왜 몸을 흔들까? 손을 왜 위로 들까? 2 가지 유형이 있다. 마음이 말씀으로 살피다 보면 후회 결심 간절에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리면 머리도 몸도 손도 그냥 있지 못하게 된다. 또 하나는 팔을 흔들고 몸을 흔들면 몸에 묶여 있는 마음이 일단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에게 회개 결심 애절을 절여 넣으면 크게 흔들린다. 키를 넣으면 스타터 모터가 엔진을 돌린다. 그러면 엔진이 바퀴를 돌린다. 이 것이 좋고 정상이다. 그런데 스타터가 약할 때 엔진과 바퀴를 연결 시킨 상태에서 차를 굴리면 바퀴가 엔진을 돌려 버린다.
누가 문희옥의 신앙 간증을 소개해 줬다. 한 때 최고의 가수였다고 한다. 그가 3년간 실명을 밝히지 않고 뒷자리에 앉았던 교회는 40여명의 작은 교회인데 설교가 통밀가루처럼 입자가 거칠었다고 했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설교, 카스테라나 케이크 식으로 살살 녹는 설교가 대세인데 이 곳에서는 말씀으로 또박또박 비교를 하며 생각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3년을 다닌 끝에 실명을 밝히고 교인으로 등록을 했다고 한다. 연예인이 모이는 교회, 연예인들이 만든 교회는 흔히 상상을 하는 그런 교회다. 이 분은 아주 달랐던 모양이다.
신앙이라고 한다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기를 꺾느라고 투쟁해 보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 달래 주고 울어 주고 밀어 주고 업어 주는 곳이라면? 그 곳은 유아원이 아닐까... 유아 취급을 하면 인격 모독이라고 반발을 한다. 말로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당신이라고 올려 주고 행동으로는 어린 아이 취급을 해 주는 것은 연극이며 이중이며 유치한 것이 아닌가? 문희옥의 간증 자료를 하나 소개한다. 흔하고 흔한 개종 이야기가 아니다. 공회, 우리로서 한 번 돌아 봐야 할 자료다. 자료 속에 귀한 보배들을 찾아 내 봤으면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yQ7OQ0fMSg
복음성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년이 좀 넘었다. 검색을 해 보니 전용대 목사님의 찬송인데 찬송가에 올라 갔는지는 모르겠다. 1883년에 만들어 진 통일찬송가까지는 무슨 곡이 있는지 가끔 들여다 봤으나 이제는 찬송가 종류가 몇 가지인지도 혼란스럽고 찬송가 안에 이단보다 기독교에 해독을 더 심하게 끼친 이들의 횡설수설이 많은 듯하여 참고용으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정도 열풍이면 찬송가 안에 들어 가야 할 듯하지만 교단들과 찬송가 위원들의 이해 관계가 더 중요하니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철물이 필요하면 시내의 여객선 터미널로 간다.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대로의 철물점에 들어 가려는 순간 좀 애매하게 보이는 분이 내 앞에서 갑자기 '내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에게는 돈을 주지 않는다. 노래까지 부르는 것을 보니 정신 문제도 없다. 그냥 일을 보고 있으니 지나 가면서 욕인지 애매한 말을 던지고 간다. 교회를 욕하는 말을 듣는 순간 새로 나온 찬송인데 내가 교인처럼 보여 낚시를 던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 찬송은 유독 많이 들렸다.
그 분은 한 눈에 일해서 돈을 버는 모습이 아니다. 시내를 다니며 좀 얻게 되면 어디 가서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전형적인 그런 모습이었다. 속으로 복음성가를 쥐어 박았다. 한 줄만 들어도 분위기는 파악이 되었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처럼 세상의 쓴 맛을 다 보고 나서 주님께 돌아 온 고백이었다. 그 찬송의 내용은 좋다. 그런 좌절에서 돌아 오도록 교회가 전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그렇게 늘 살고 있는 면도 있다. 그런데 그 찬송이 감성 중심으로 불려 지다 보니 지나 가는 사람에게 돈을 얻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릴 때의 각설이 기억)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은 아주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그 중간쯤이었다. 시골의 도심으로 형성이 되어 있으나 학교 가는 길에는 논밭이 흔했다. 그래서 시골 생활은 해 보지 않았으나 시골을 구경은 해 봤다. 도시 생활은 하지 못했으나 도시 생활을 느낄 수는 있었다. 어중간한 면도 있으나 한 편으로 성장 과정에 양 쪽을 겪어 본 것은 내게 평생 귀하게 사용 된다. 겨울이 되면 아침 식사가 늦어 진다. 꼭 밥 얻으러 오는 걸인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또는 그 시대가 그러 했으니 어릴 때 '작년에 왔던 각설이..' 노래를 예사 불렀다.
평생 그 분들에게 죄송하다. 찾아 오는 이들에게 밥 한 그릇 주는 정도가 내가 본 전부다. 요즘 모두가 칭찬하는 복지나 입양이나 따로 살펴 드리는 일은 없었다. 여름이 되면 도심을 지나는 냇가의 넓은 백사장에 가마니로 막을 친다. 광대패 약장사 별별 구경거리를 보여 준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모두가 가니까 따라 간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나 웬지 흥이 난다. 주변의 사람들, 그 분위기에 일단 들뜬다. 징이나 꾕과리 소리는 그 곡을 몰라도 흥분을 일으킨다. 그리고 몇 마디 나오는 노래는 바로 머리에 와 담겨 버렸다.
옛날 시골의 5일 시장에는 12개 읍면의 군 주민이 한꺼번에 몰린다. 오늘은 프로 경기장에 몰리는 정도로 비교할 수 있을까? 다른 소리는 그냥 넋을 잃고 쳐다 보고 말 정도다. 약장수의 말은 아주 다르다. 눈에 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온다. 어린 나도 한창 듣다 보면 돈을 주고 뭔가 사게 될 것 같다. 자극, 관심, 감성, 분위기.. 를 말하고 있다. 따지고 살피고 비교하고 결과를 보면서 한 단계씩 거쳐 가는 것이 없다. 모두를 한꺼번에 다 몰아 간다. 대중은 쉽게 선동이 된다. 우선은 좋다. 그러나 우선 좋은 것은 뒤에 문제가 있다.
(찬양을 할 때)
왜 몸을 움직이는가? 왜 팔을 들고 흔드는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냥을 하고 불을 피우고 밤새 춤을 추는 모습, 한 잔 먹은 옛 선비들이 평소 그렇게 점잖은 사람들인데 결국 어깨가 들썩이며 팔을 흔든다. 밤 무대 청소년들은 온 몸으로 뛰고 구른다. 그 행동 그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출렁이는 그들을 누구 출렁이게 했는지 그 원인을 살피고 있다. 멋 모르고 주변을 따라 뛰고 구르다 보면 제 부모를 팔아 넘기는 수도 있고 자기 인생을 불 태울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신중해야 한다. 신중하면 흥이 나지 않는다.
찬양을 할 때 왜 몸을 흔들까? 손을 왜 위로 들까? 2 가지 유형이 있다. 마음이 말씀으로 살피다 보면 후회 결심 간절에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리면 머리도 몸도 손도 그냥 있지 못하게 된다. 또 하나는 팔을 흔들고 몸을 흔들면 몸에 묶여 있는 마음이 일단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에게 회개 결심 애절을 절여 넣으면 크게 흔들린다. 키를 넣으면 스타터 모터가 엔진을 돌린다. 그러면 엔진이 바퀴를 돌린다. 이 것이 좋고 정상이다. 그런데 스타터가 약할 때 엔진과 바퀴를 연결 시킨 상태에서 차를 굴리면 바퀴가 엔진을 돌려 버린다.
누가 문희옥의 신앙 간증을 소개해 줬다. 한 때 최고의 가수였다고 한다. 그가 3년간 실명을 밝히지 않고 뒷자리에 앉았던 교회는 40여명의 작은 교회인데 설교가 통밀가루처럼 입자가 거칠었다고 했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설교, 카스테라나 케이크 식으로 살살 녹는 설교가 대세인데 이 곳에서는 말씀으로 또박또박 비교를 하며 생각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3년을 다닌 끝에 실명을 밝히고 교인으로 등록을 했다고 한다. 연예인이 모이는 교회, 연예인들이 만든 교회는 흔히 상상을 하는 그런 교회다. 이 분은 아주 달랐던 모양이다.
신앙이라고 한다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자기를 꺾느라고 투쟁해 보는 것이 기본이 아닐까? 달래 주고 울어 주고 밀어 주고 업어 주는 곳이라면? 그 곳은 유아원이 아닐까... 유아 취급을 하면 인격 모독이라고 반발을 한다. 말로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당신이라고 올려 주고 행동으로는 어린 아이 취급을 해 주는 것은 연극이며 이중이며 유치한 것이 아닌가? 문희옥의 간증 자료를 하나 소개한다. 흔하고 흔한 개종 이야기가 아니다. 공회, 우리로서 한 번 돌아 봐야 할 자료다. 자료 속에 귀한 보배들을 찾아 내 봤으면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yQ7OQ0fMS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