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두고, 많은 것을 얻게 된다. - 극한 상황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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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7 11:54
* 목차
1. 세상 고난사와 공회 신앙 2. 환경에 따른 사람의 심리 변화 3. 지혜로운 대처 방법 4. 극한 상황에 대한 분석
(1. 세상 고난사와 공회 신앙 )
공회 신앙은
누가 봐도 좀 오래 지켜 보거나 갑자기 마주치면 평범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좀 이상하다. 볼수록 답답해 진다.
그런데 좋게 본다면 안전하며 신중하고 위험성이 덜하다. 그렇다면 노인용 신앙이라 하면 될 듯하다. 실제 그렇다.
아이들로부터 청년들로 올라 갈수록 무엇을 해도 불안하다. 위험한 일이 많아 진다. 나이가 많아 지면 반대가 된다.
공회는 그 구성원과 분위기와 흐름을 볼 때 세상에 흔하게 보이는 사고나 사건이 훨씬 덜한 편이다. 조심을 했으니 그렇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따로 인도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일들을 한 번씩 주신다. 그래서 공회에도 있을 것은 다 있다.
다만 적은 편이다. 다만 확실히 아주 적은 편이다. 그 말은 없지 않다. 있다. 별별 일이 다 있다. 그 모든 일을 거의 접하게 된다.
1989년의 공회 전성기 그 이전의 것도 그 누구보다 많이 접하고 겪고 아는 위치에 있었다. 이후는 더욱 그렇게 되고 살아 왔다.
여러 사건 중에서 집회를 참석한 교인이나 예배당 공사 중에 발생했던 사망 사고들처럼 또는 그 비슷한 극단적 일도 있었다.
(2. 환경에 따른 사람의 심리 변화)
생존이 어려울 때는
사람의 본능이 살아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과정은 안스럽지만 그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극한 선택을 하는 경우는 적다.
생존이 어렵던 예전에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 것은 객관적으로 더 이상 길이 없어 그렇다. 눈에 보이는 극한 상황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 살기가 좋아 졌다. 그래서 예전의 생존 개념으로 보면 지금은 생존을 위해 노력할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극한 선택은 너무 많다. 상황은 그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생존에 내몰리지 않게 되면 또 하나의 함정이 기다린다.
안일해 지는 것이 이유다.
몸이 힘들면 몸이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사적 노력을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 진다.
눈 앞에 닥친 먹는 문제만 해결하려 한다. 그 것만 해결 되면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된다. 그런데 확실히 살기가 좋아 지면?
우리 몸이 생존을 걱정하지 않게 되는 분위기를 감지하면 우리의 마음은 이제 평화를 선포한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이 된다.
바로 이 순간 이 마음에게 무엇이 스치기라도 하면 평화가 깨진다며 화를 낸다. 그렇게까지 되면서 마음은 풀어 져 버린다.
(3. 지혜로운 대처 방법)
이 풀어 진 마음이란
그냥 뭐든지 쉽게 생각하고 사는 방향으로 간다. 인생의 목표도 가치관도 모두 바뀐다. 잔소리도 듣지 않으려 하게 된다.
그래서 배 고플 때는 이래저래 주변에서 악을 쓰고 주먹이 오간다. 세상이 좋아 지면 모두가 부드러워 지고 예절이 생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자기 싫은 것은 듣고 싶지도 않고 또 남에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예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가 살펴 주든 서로가 경쟁하고 견제하고 부딪히든 어떤 분쟁도 극소화가 되면 마음은 이제 마음 놓고 주저 앉아 버린다.
세상이 이렇다 해도
자기가 자기 마음을 잘 통제를 하면 이런 함정이나 이런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자기 환경은 여전히 좋다.
세상과 자기 주변은 좋아 질 대로 좋아 졌고, 그런 중에 자기 마음을 잘 조심 시키고 늘 붙들고 있으면 정신에 문제가 없다.
험해 진다고 험한 자기를 만들지 않고 좋게 지키는 것이 필요하듯이 좋아 진다고 방심하지 않고 자기를 붙들면 더 좋아 진다.
결국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시는 환경을 과제로 받아 들고 그 환경에 따라 내가 어떻게 순종을 하느냐는 문제가 된다.
(4. 극한 상황에 대한 분석)
과거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 지금 모든 사람은 찬송을 하며 평생을 살아도 부족하다. 그러나 상대적 불행감이라는 것이 있다.
어렵지 않은데 주변과 비교를 하면서 어렵다고 느끼게 만든다. 세상이 발전을 할수록 이 격차는 커진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생각 하나로 바꾸면 되는데 만일 바꾸지 못한다면 마지막 단계를 선택한다. 이 글에서는 그 선택에 대한 분석만 해 본다.
그 최종의 선택마저도 장단점이 함께 있다. 가족은 불행이라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만 할까? 아니다.
우선, 살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대한 책임을 아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도 지나 치게 책임감을 느낀다.
책임감이란 좋지 않은가? 많아도 탈이고 적어도 탈이다. 무책임은 천하를 어지럽힌다. 과도한 책임은 자기를 주저 앉힌다.
살기를 포기하는 사람, 죄책감을 가졌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다. 책임감이 있다. 남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니 체면이라도 있다.
우리는 이 나라 최고의 인간들까지 무책임 무체면으로 막 가는 사정을 안다. 천하를 주저 앉히고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산다.
여기까지 살피면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사람, 그 가족과 주변에게는 참으로 문제가 많으나 한 사람 자체로는 좋은 사람이다.
좋기만 할까? 좋기만 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시지 않았다.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이 땅 위에서는 늘 양면을 주신다.
자기 인생은 누구 것인가? 부모 것이다. 부모 허락 없이 결정하면 부모에게 도적이 된다. 결혼을 했다면 가족과 선약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 살피면 하나님이 주셨다. 여전히 하나님 것이다. 주인 결정 없이 처분하면 그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기회'라는 것을 차단하는 죄가 된다. 우리에게 실수와 죄와 넘어 지는 과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실수하도록 죄를 짓도록 주저 앉도록 세상을 만들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 두셨다. 따라서 인간은 실수와 죄를 피할 수는 없다.
왜 주셨을까? 주저 앉아 봐야 서서 걷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비로소 느낀다. 아파 봐야 건강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
죄와 실수와 넘어 지게 한 것은 다음에는 그 죄와 그 실수는 이기라는 기회다. 넘어 지게 한 것은 더 높게 뛸 기회가 된다.
한두 사람이면 적기 어렵다.
주변에 얼굴을 보고 사는 사람들의 상황을 적으면 실명이 아니라도 서로가 안다. 그 큰 슬픔에 어떻게 짐을 더 얹을 수 있나!
한둘이 아니고 서넛이 아니면 숲에 숨은 것처럼 안면이 조금 가려 졌다 치고 적어 본다. 기회를 뺏는 죄, 이 죄가 가장 크다.
이 것은 성화라는 구원의 순서를 건설구원으로 분석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다. 건설을 다시 더 나눌 수 있어야 느낄 수 있다.
대입 본 고사 하나로 결정하던 것은 기본구원이다. 건설구원이란 개념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모든 것을 전부 계량화를 한다.
매 순간의 선택을 계산해 본다.
이 것은 천국을 가는 문제가 아니다. 천국의 유무는 우리가 알기도 전에 또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선택에 의하여 결정 됐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의심이든 확신을 하든 마찬 가지다. 인지 한 후 문제다.
내 마음이 신앙을 향해 뭔가 움직이는 순간, 이후 마지막 숨을 멎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늘 계산이 되어 진다.
어떤 분야, 어떤 순간, 어떤 행동, 어떤 생각 하나까지도 말씀에 맞는지 일일이 총점에 영향을 미친다. 이 것이 건설구원이다.
인간이 세상을 사는 이유?
불택자 불신자는 일단 신앙을 기준으로 살피면 사람이 아니니 제외한다. 믿는 우리, 우리만을 두고 계산을 하며 따져 본다.
믿는 사람은 잘 믿든 못 믿든, 믿은 척만 했든 실제 좀 믿어 본 적이 있었든,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모두가 믿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잘못, 가장 오판이란, 이후의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 이 것을 교리에서는 '절망'의 죄라 한다.
말씀을 어기면 죄, 마음대로 살면 불의, 혼자 다니면 하나님과 원수, 이후를 포기하면 절망의 죄가 된다. 평소에 새길 문제다.
이 노선을 모르는 이들과는
이 교리가 정확한지 가능성은 있는지 따지다 보면 종교 분쟁만 일어 난다. 배우거나 연구하려는 분들이면 설명해야 한다.
공회 이전의 죄는 그 어떤 죄든지 죄를 어떻게 분류하든지 공회의 대속 교리에서 말하는 죄 4가지 중에 첫째 죄 내에 있다.
공회는 초보의 죄를 말씀에 잘못 된 것으로 본다. 두 번째 단계의 죄는 말씀에는 다 맞추는데 속으로 자기가 결정한 불의다.
세 번째는 말씀에도 맞고 하나님의 뜻에도 따랐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불편하면 하나님과 원수 또는 불목의 죄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절망이다.
이 절망이란 세상을 살아 가는데 그냥 사람이 포기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대속은 해결을 해 주셨다.
인간의 한계라면, 과학과 우연을 기댄다 해도 할 수가 없다면, 인간으로서는 길이 없다. 그렇다면 최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믿는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활의 대속이라는 것이 있다. 이 대속은 죄를 해결해 주셨는데 구체적으로 4가지 죄 문제다.
그 4가지 중에 마지막이 바로 인간 단독으로는 어떤 경우라도 불가능한 상태, 그 상태가 없게 해 주셨다. 바로 '소망'의 교리다.
그렇다면 죄의 등급을 매길 때도
십계명과 일반 성경 말씀을 어기는 죄는 우리 주변에 흔하다. 우리도 마찬 가지다. 이 죄 문제로 모두들 고민이 많다.
그러나 공회처럼 죄를 4가지로 살피고 주님의 사죄를 4가지로 살피게 되면 말씀을 어긴 죄도 죄지만 그 죄 위에 죄가 문제다.
초등학교 1학년 문제도 어렵기는 어려우나 문제는 중학교 문제에 고교 시험 문제에 대학 문제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교 문제에도 절절 매는데 그 이상이라면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난이도는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문제만 풀고 나면
그리고 그 방식으로 '인내'라는 계속을 이어 가면 대학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문제도 주님이 직접 다 풀어 주신다.
절대로 풀 수가 없어 보이는 마지막 한계가 나올 때, 그 한계를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사활 대속의 4번째, 소망의 은혜다.
소망이란 우리 생각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은 불의의 죄가 된다. 성경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고, 우리는 현재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맡길 뿐이다. 이 때 해결하는 것이 '소망'이다.
1. 세상 고난사와 공회 신앙 2. 환경에 따른 사람의 심리 변화 3. 지혜로운 대처 방법 4. 극한 상황에 대한 분석
(1. 세상 고난사와 공회 신앙 )
공회 신앙은
누가 봐도 좀 오래 지켜 보거나 갑자기 마주치면 평범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좀 이상하다. 볼수록 답답해 진다.
그런데 좋게 본다면 안전하며 신중하고 위험성이 덜하다. 그렇다면 노인용 신앙이라 하면 될 듯하다. 실제 그렇다.
아이들로부터 청년들로 올라 갈수록 무엇을 해도 불안하다. 위험한 일이 많아 진다. 나이가 많아 지면 반대가 된다.
공회는 그 구성원과 분위기와 흐름을 볼 때 세상에 흔하게 보이는 사고나 사건이 훨씬 덜한 편이다. 조심을 했으니 그렇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따로 인도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일들을 한 번씩 주신다. 그래서 공회에도 있을 것은 다 있다.
다만 적은 편이다. 다만 확실히 아주 적은 편이다. 그 말은 없지 않다. 있다. 별별 일이 다 있다. 그 모든 일을 거의 접하게 된다.
1989년의 공회 전성기 그 이전의 것도 그 누구보다 많이 접하고 겪고 아는 위치에 있었다. 이후는 더욱 그렇게 되고 살아 왔다.
여러 사건 중에서 집회를 참석한 교인이나 예배당 공사 중에 발생했던 사망 사고들처럼 또는 그 비슷한 극단적 일도 있었다.
(2. 환경에 따른 사람의 심리 변화)
생존이 어려울 때는
사람의 본능이 살아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과정은 안스럽지만 그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극한 선택을 하는 경우는 적다.
생존이 어렵던 예전에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 것은 객관적으로 더 이상 길이 없어 그렇다. 눈에 보이는 극한 상황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 살기가 좋아 졌다. 그래서 예전의 생존 개념으로 보면 지금은 생존을 위해 노력할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극한 선택은 너무 많다. 상황은 그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생존에 내몰리지 않게 되면 또 하나의 함정이 기다린다.
안일해 지는 것이 이유다.
몸이 힘들면 몸이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사적 노력을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 진다.
눈 앞에 닥친 먹는 문제만 해결하려 한다. 그 것만 해결 되면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된다. 그런데 확실히 살기가 좋아 지면?
우리 몸이 생존을 걱정하지 않게 되는 분위기를 감지하면 우리의 마음은 이제 평화를 선포한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이 된다.
바로 이 순간 이 마음에게 무엇이 스치기라도 하면 평화가 깨진다며 화를 낸다. 그렇게까지 되면서 마음은 풀어 져 버린다.
(3. 지혜로운 대처 방법)
이 풀어 진 마음이란
그냥 뭐든지 쉽게 생각하고 사는 방향으로 간다. 인생의 목표도 가치관도 모두 바뀐다. 잔소리도 듣지 않으려 하게 된다.
그래서 배 고플 때는 이래저래 주변에서 악을 쓰고 주먹이 오간다. 세상이 좋아 지면 모두가 부드러워 지고 예절이 생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자기 싫은 것은 듣고 싶지도 않고 또 남에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예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가 살펴 주든 서로가 경쟁하고 견제하고 부딪히든 어떤 분쟁도 극소화가 되면 마음은 이제 마음 놓고 주저 앉아 버린다.
세상이 이렇다 해도
자기가 자기 마음을 잘 통제를 하면 이런 함정이나 이런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자기 환경은 여전히 좋다.
세상과 자기 주변은 좋아 질 대로 좋아 졌고, 그런 중에 자기 마음을 잘 조심 시키고 늘 붙들고 있으면 정신에 문제가 없다.
험해 진다고 험한 자기를 만들지 않고 좋게 지키는 것이 필요하듯이 좋아 진다고 방심하지 않고 자기를 붙들면 더 좋아 진다.
결국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시는 환경을 과제로 받아 들고 그 환경에 따라 내가 어떻게 순종을 하느냐는 문제가 된다.
(4. 극한 상황에 대한 분석)
과거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 지금 모든 사람은 찬송을 하며 평생을 살아도 부족하다. 그러나 상대적 불행감이라는 것이 있다.
어렵지 않은데 주변과 비교를 하면서 어렵다고 느끼게 만든다. 세상이 발전을 할수록 이 격차는 커진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생각 하나로 바꾸면 되는데 만일 바꾸지 못한다면 마지막 단계를 선택한다. 이 글에서는 그 선택에 대한 분석만 해 본다.
그 최종의 선택마저도 장단점이 함께 있다. 가족은 불행이라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만 할까? 아니다.
우선, 살기를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대한 책임을 아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도 지나 치게 책임감을 느낀다.
책임감이란 좋지 않은가? 많아도 탈이고 적어도 탈이다. 무책임은 천하를 어지럽힌다. 과도한 책임은 자기를 주저 앉힌다.
살기를 포기하는 사람, 죄책감을 가졌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다. 책임감이 있다. 남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니 체면이라도 있다.
우리는 이 나라 최고의 인간들까지 무책임 무체면으로 막 가는 사정을 안다. 천하를 주저 앉히고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산다.
여기까지 살피면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사람, 그 가족과 주변에게는 참으로 문제가 많으나 한 사람 자체로는 좋은 사람이다.
좋기만 할까? 좋기만 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시지 않았다.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이 땅 위에서는 늘 양면을 주신다.
자기 인생은 누구 것인가? 부모 것이다. 부모 허락 없이 결정하면 부모에게 도적이 된다. 결혼을 했다면 가족과 선약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 살피면 하나님이 주셨다. 여전히 하나님 것이다. 주인 결정 없이 처분하면 그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기회'라는 것을 차단하는 죄가 된다. 우리에게 실수와 죄와 넘어 지는 과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다.
실수하도록 죄를 짓도록 주저 앉도록 세상을 만들 때부터 그렇게 만들어 두셨다. 따라서 인간은 실수와 죄를 피할 수는 없다.
왜 주셨을까? 주저 앉아 봐야 서서 걷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비로소 느낀다. 아파 봐야 건강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
죄와 실수와 넘어 지게 한 것은 다음에는 그 죄와 그 실수는 이기라는 기회다. 넘어 지게 한 것은 더 높게 뛸 기회가 된다.
한두 사람이면 적기 어렵다.
주변에 얼굴을 보고 사는 사람들의 상황을 적으면 실명이 아니라도 서로가 안다. 그 큰 슬픔에 어떻게 짐을 더 얹을 수 있나!
한둘이 아니고 서넛이 아니면 숲에 숨은 것처럼 안면이 조금 가려 졌다 치고 적어 본다. 기회를 뺏는 죄, 이 죄가 가장 크다.
이 것은 성화라는 구원의 순서를 건설구원으로 분석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다. 건설을 다시 더 나눌 수 있어야 느낄 수 있다.
대입 본 고사 하나로 결정하던 것은 기본구원이다. 건설구원이란 개념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모든 것을 전부 계량화를 한다.
매 순간의 선택을 계산해 본다.
이 것은 천국을 가는 문제가 아니다. 천국의 유무는 우리가 알기도 전에 또 세상이 생기기도 전에 선택에 의하여 결정 됐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의심이든 확신을 하든 마찬 가지다. 인지 한 후 문제다.
내 마음이 신앙을 향해 뭔가 움직이는 순간, 이후 마지막 숨을 멎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늘 계산이 되어 진다.
어떤 분야, 어떤 순간, 어떤 행동, 어떤 생각 하나까지도 말씀에 맞는지 일일이 총점에 영향을 미친다. 이 것이 건설구원이다.
인간이 세상을 사는 이유?
불택자 불신자는 일단 신앙을 기준으로 살피면 사람이 아니니 제외한다. 믿는 우리, 우리만을 두고 계산을 하며 따져 본다.
믿는 사람은 잘 믿든 못 믿든, 믿은 척만 했든 실제 좀 믿어 본 적이 있었든,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모두가 믿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잘못, 가장 오판이란, 이후의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 이 것을 교리에서는 '절망'의 죄라 한다.
말씀을 어기면 죄, 마음대로 살면 불의, 혼자 다니면 하나님과 원수, 이후를 포기하면 절망의 죄가 된다. 평소에 새길 문제다.
이 노선을 모르는 이들과는
이 교리가 정확한지 가능성은 있는지 따지다 보면 종교 분쟁만 일어 난다. 배우거나 연구하려는 분들이면 설명해야 한다.
공회 이전의 죄는 그 어떤 죄든지 죄를 어떻게 분류하든지 공회의 대속 교리에서 말하는 죄 4가지 중에 첫째 죄 내에 있다.
공회는 초보의 죄를 말씀에 잘못 된 것으로 본다. 두 번째 단계의 죄는 말씀에는 다 맞추는데 속으로 자기가 결정한 불의다.
세 번째는 말씀에도 맞고 하나님의 뜻에도 따랐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불편하면 하나님과 원수 또는 불목의 죄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절망이다.
이 절망이란 세상을 살아 가는데 그냥 사람이 포기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대속은 해결을 해 주셨다.
인간의 한계라면, 과학과 우연을 기댄다 해도 할 수가 없다면, 인간으로서는 길이 없다. 그렇다면 최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믿는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활의 대속이라는 것이 있다. 이 대속은 죄를 해결해 주셨는데 구체적으로 4가지 죄 문제다.
그 4가지 중에 마지막이 바로 인간 단독으로는 어떤 경우라도 불가능한 상태, 그 상태가 없게 해 주셨다. 바로 '소망'의 교리다.
그렇다면 죄의 등급을 매길 때도
십계명과 일반 성경 말씀을 어기는 죄는 우리 주변에 흔하다. 우리도 마찬 가지다. 이 죄 문제로 모두들 고민이 많다.
그러나 공회처럼 죄를 4가지로 살피고 주님의 사죄를 4가지로 살피게 되면 말씀을 어긴 죄도 죄지만 그 죄 위에 죄가 문제다.
초등학교 1학년 문제도 어렵기는 어려우나 문제는 중학교 문제에 고교 시험 문제에 대학 문제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교 문제에도 절절 매는데 그 이상이라면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난이도는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문제만 풀고 나면
그리고 그 방식으로 '인내'라는 계속을 이어 가면 대학뿐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문제도 주님이 직접 다 풀어 주신다.
절대로 풀 수가 없어 보이는 마지막 한계가 나올 때, 그 한계를 해결해 주시는 은혜가 사활 대속의 4번째, 소망의 은혜다.
소망이란 우리 생각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은 불의의 죄가 된다. 성경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고, 우리는 현재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머지는 맡길 뿐이다. 이 때 해결하는 것이 '소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