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기만 할 것인가, 배워서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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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6 12:10
몇백 년에 나올 인물이란 한 사람의 일생에 접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백 년이면 확률이 높으나 몇백 년이면 그렇지 않다.
나는 몇백 년에 한 번 나올 정도의 인물을 접해 봤다. 세상 표현으로는 횡재를 했다. 그러나 삼8:1처럼 횡재만은 아닐 수 있다.
한 인물이 너무 위대하면 그 빛의 강렬함만큼 그 빛 때문에 만들어 지는 어두움이 너무 강하다. 빛 때문이 거지 근성 때문이다.
빛이 강하면 그 빛 가운데 살면서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은혜라 하나 반대로 보면 얻어 먹고 사는 거지 근성이다.
시대적 인물을 만든 하나님은 전능이다. 내게도 아버지다. 그를 그렇게 만들듯이 하나님은 나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아닌가?
이 것은 내 식이 아니라 백영희고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시골의 허무한 분이 시대적 인물이 되었다.
1945년에 해방이 되며 3년간 미군이 남한을 운영했다. 구호물이 많이 들어 왔다. 1950년부터 전쟁 때문에 구호가 급증했다.
당시 구호 대상은 한국 사회지만 거리나 하역 여건상 지역적으로는 부산 경남에 그리고 우선 대상은 이 지역의 교인이었다.
전쟁으로 교회 체계가 없어 진 상태이나 부산 경남이 주무대가 된 고신은 건재했고 구호물은 고신에 대량으로 배정 되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교회에 구호품이 넘치게 되자 부산에 있던 고려신학교도 그 혜택을 누렸고 신학생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백영희는 구호품에 정신 없는 고신 목회자들과 신학교와 신학생들을 지켜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우리는 서자입니까?'
주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면 받지만 미국을 통해서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 이 것은 백영희의 오기 고집인가, 신앙 원리인가?
공회는 공회 교인이 아닌 외부 교회나 교인이 돕는 것은 사양한다. 공회 교회는 같은 교회라도 다른 교회의 도움을 거절한다.
물론 젖먹이는 어머니의 젖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10세가 젖을 물고 20세가 아버지 등에 엎힌다? 공회가 아니다.
연구소가 운영하는 부공3의 교회들은 한 교회도 빠짐 없이 개척할 때마다 이 약속을 반복한다. 듣기가 싫도록 반복 고지한다.
신앙 노선이 같고 먼저 도움 받은 교회가 이 노선으로 시작하는 다음 교회의 초기를 돕되, 그 교회는 다시 다른 교회를 돕는다.
돕는 방법도 유아의 생존처럼 최소화에 그친다. 목회자들은 자녀들의 중학교 공부도 독학을 시키며 혹독함에 모범을 보인다.
자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가 타면 목회를 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 목회자가 되었다면 공직의 위치와 사명 때문에 불가피하다.
이런 연장선에서 한 시대를 감당하던 지도자가 있으면 우리는 많은 면에서 배운다. 도움을 받는다.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런데 도움을 받아 보면 도움 받는 것이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될 수 있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구조로 변형이 되어 버린다.
이 것이 숙달이 되면 받는 데 전문가, 거지 근성이 생기고 거지가 단체가 되면 이제 얻어 먹는 방법과 효율까지 더하게 된다.
최근 사회적으로 좌파 정권 내 좌파 골수들이 온 나라와 온 국민의 진액을 빼 먹는 실상이 낱낱이 드러 나고 있다. 필연이다.
공회 내에도 그들 중에 제일 핵심들이 있고, 그 핵심들 주변에서 몰래 적극 지지하는 성향들이 있다. 이 글은 그 면이 아니다.
좋게 말해서 발전적으로 긍정적으로 본다 해도 지도자 밑에서 단순 암기만 하고 단순 반복만 하고 단순 실행만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세월 속에 지도자를 데려 가면 녹음기처럼 기계로 남는 사람, 김유신의 말처럼 반복에 익은 동물 같은 사람이 생긴다.
공회의 장점은 참으로 많다. 그러나 이 좋은 노선에 있는 우리의 현재는 이 노선의 자동 음성 장치인가, 길들여 진 짐승인가?
그 때 그 좋았던 분위기를 기억하며 그 때 하던 그 말, 그 행동, 그 습관, 그 걸음으로 오늘도 그대로만 걸어 가고 있는 중인가?
유대인들은 2천 년에 마무리 된 구약의 분위기만 붙들고 오늘 2천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대로다. 2천 년을 변치 않고 있다.
천주교는 불신자도 그들 스스도 다 아는 천주교 내부의 모순과 잘못을 알면서도 개혁 교회의 역사 5백 년을 변치 않고 있다.
북한은 천하 공산당이 다 굶고 다 망하고 다 폐기 해 버린 그 사상을 지금도 붙들고 사회주의의 마지막 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공회 안에는 서부교회 4층 식구들과 서성교회 1층을 중심으로 한 백순희 백명희 사모님들의 추종자들이 있다. 30여 년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 중에는 30여 년 전 각오로 오늘의 십자군 전쟁에 칼을 가는 이들이 있을까? 설쳤던 이들은 다 없어 졌다.
그들과 반대로 고치기만 하면 좋아 진다며 '개혁'의 이름으로 본질 자체를 바꾸고 없앴던 분들,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를 돌아 본다. 우리 역시 연구소를 중심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 봐야 한다.
연구소가 1998년부터 사이트를 운영하며 모든 자료와 발언과 연구의 조건을 없애고 옳은 것 하나만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연구소의 진심은 이후 사이트의 운영을 통해 전해 졌고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들과 교인들이 유입 되기 시작했었다.
모두가 갈급하던 차에 오아시스를 발견 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동네에 흔한 우물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풀려 졌다.
이 곳의 초기 주력은 직업이 없어 목회하는 사람, 담배를 끊기 위해 온 사람, 성격이 편협하여 달리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맞선을 보면 멀리 살기 때문에 생전에 처음 보는 사람이 좋아 보이듯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좋아 보이는 것처럼
이 곳은 사이트로 이 노선을 소개하다 보니 이 곳을 운영하는 교회와 직원들이 마치 소개 내용처럼 되어 진 줄로 알려 졌다.
그렇지 않다고 무수히 밝혔지만 외부에서는 그렇게 본 모양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도 신앙으로도 위대한 분들이 찾아 왔다.
우리는 접시 수준인데 오는 분들은 고래도 있고 잉어도 있고 가물치도 있었다. 한 번 퍼드득 하고 나니 그릇 밖으로 나간다.
이 곳은 피라미나 올 만한 곳이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관상용 거북이나 숨 쉬고 가면 좋을 만한 곳이다. 이 곳이 그렇다.
돌고래 같이 훌륭하며 우수한 분들이 뛰어 드니 이 곳의 경제와 소속 교회는 평소의 못난 그 신앙 그 수준조차 깨질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눈치가 아주 빠른 분들은 몇 달, 학습이 좀 필요한 분들은 1년에서 몇 년, 또 우리처럼 못난 사람은 평생 계신다.
꼭 1명, 그는 한 달만에 만사를 다 파악을 했지만 자기의 약속의 최소한을 지키느라고 10년을 머문 분도 있다. 대단한 분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강조한다. 또 기록은 남기려 한다. 이 노선은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 노선의 선택은 최상이다.
그러나 이 노선을 걸어 가며 이 노선의 본부를 자처하는 곳은 이 곳은 물론 서부교회도 부산공회들도 대구공회도 비슷하다.
모두 조건만 되면 밖으로 나갈 사람들인데 기회를 놓쳐서 이 노선에 있다. 있다 보니 이 노선을 남들에게는 자랑도 한다.
그런데 나갈 기회가 있고 나가면 물 만난 고기가 될 분인데도 이 노선을 지킨 분은 부산공회2에서 종신한 송종섭 한분이다.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해 왔으나 살아 가면서 가끔 한 분씩 있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돌아 보면 아니었다.
공회나 되니 그런 사람, 그런 인격, 그런 신앙가도 목회자 이름으로 또는 공회 교인으로 있었을 뿐이다. 적응 불능자들이다.
이 글을 적는 부공3의 연구소는 공회들 중에서도 자타가 모두 알고 있지만 이 노선 외에는 송곳 꽂을 인물들이 되지 못한다.
연구소가 운영하는 부공3 교회들과 지도자들이란 이 노선을 안내하는 것까지가 사명이지 그들 자체가 표상은 아니다.
나는 몇백 년에 한 번 나올 정도의 인물을 접해 봤다. 세상 표현으로는 횡재를 했다. 그러나 삼8:1처럼 횡재만은 아닐 수 있다.
한 인물이 너무 위대하면 그 빛의 강렬함만큼 그 빛 때문에 만들어 지는 어두움이 너무 강하다. 빛 때문이 거지 근성 때문이다.
빛이 강하면 그 빛 가운데 살면서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은혜라 하나 반대로 보면 얻어 먹고 사는 거지 근성이다.
시대적 인물을 만든 하나님은 전능이다. 내게도 아버지다. 그를 그렇게 만들듯이 하나님은 나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아닌가?
이 것은 내 식이 아니라 백영희고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시골의 허무한 분이 시대적 인물이 되었다.
1945년에 해방이 되며 3년간 미군이 남한을 운영했다. 구호물이 많이 들어 왔다. 1950년부터 전쟁 때문에 구호가 급증했다.
당시 구호 대상은 한국 사회지만 거리나 하역 여건상 지역적으로는 부산 경남에 그리고 우선 대상은 이 지역의 교인이었다.
전쟁으로 교회 체계가 없어 진 상태이나 부산 경남이 주무대가 된 고신은 건재했고 구호물은 고신에 대량으로 배정 되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교회에 구호품이 넘치게 되자 부산에 있던 고려신학교도 그 혜택을 누렸고 신학생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백영희는 구호품에 정신 없는 고신 목회자들과 신학교와 신학생들을 지켜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우리는 서자입니까?'
주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면 받지만 미국을 통해서 주는 것은 받지 않겠다? 이 것은 백영희의 오기 고집인가, 신앙 원리인가?
공회는 공회 교인이 아닌 외부 교회나 교인이 돕는 것은 사양한다. 공회 교회는 같은 교회라도 다른 교회의 도움을 거절한다.
물론 젖먹이는 어머니의 젖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런데 10세가 젖을 물고 20세가 아버지 등에 엎힌다? 공회가 아니다.
연구소가 운영하는 부공3의 교회들은 한 교회도 빠짐 없이 개척할 때마다 이 약속을 반복한다. 듣기가 싫도록 반복 고지한다.
신앙 노선이 같고 먼저 도움 받은 교회가 이 노선으로 시작하는 다음 교회의 초기를 돕되, 그 교회는 다시 다른 교회를 돕는다.
돕는 방법도 유아의 생존처럼 최소화에 그친다. 목회자들은 자녀들의 중학교 공부도 독학을 시키며 혹독함에 모범을 보인다.
자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가 타면 목회를 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 목회자가 되었다면 공직의 위치와 사명 때문에 불가피하다.
이런 연장선에서 한 시대를 감당하던 지도자가 있으면 우리는 많은 면에서 배운다. 도움을 받는다.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런데 도움을 받아 보면 도움 받는 것이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될 수 있다.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구조로 변형이 되어 버린다.
이 것이 숙달이 되면 받는 데 전문가, 거지 근성이 생기고 거지가 단체가 되면 이제 얻어 먹는 방법과 효율까지 더하게 된다.
최근 사회적으로 좌파 정권 내 좌파 골수들이 온 나라와 온 국민의 진액을 빼 먹는 실상이 낱낱이 드러 나고 있다. 필연이다.
공회 내에도 그들 중에 제일 핵심들이 있고, 그 핵심들 주변에서 몰래 적극 지지하는 성향들이 있다. 이 글은 그 면이 아니다.
좋게 말해서 발전적으로 긍정적으로 본다 해도 지도자 밑에서 단순 암기만 하고 단순 반복만 하고 단순 실행만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세월 속에 지도자를 데려 가면 녹음기처럼 기계로 남는 사람, 김유신의 말처럼 반복에 익은 동물 같은 사람이 생긴다.
공회의 장점은 참으로 많다. 그러나 이 좋은 노선에 있는 우리의 현재는 이 노선의 자동 음성 장치인가, 길들여 진 짐승인가?
그 때 그 좋았던 분위기를 기억하며 그 때 하던 그 말, 그 행동, 그 습관, 그 걸음으로 오늘도 그대로만 걸어 가고 있는 중인가?
유대인들은 2천 년에 마무리 된 구약의 분위기만 붙들고 오늘 2천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대로다. 2천 년을 변치 않고 있다.
천주교는 불신자도 그들 스스도 다 아는 천주교 내부의 모순과 잘못을 알면서도 개혁 교회의 역사 5백 년을 변치 않고 있다.
북한은 천하 공산당이 다 굶고 다 망하고 다 폐기 해 버린 그 사상을 지금도 붙들고 사회주의의 마지막 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공회 안에는 서부교회 4층 식구들과 서성교회 1층을 중심으로 한 백순희 백명희 사모님들의 추종자들이 있다. 30여 년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 중에는 30여 년 전 각오로 오늘의 십자군 전쟁에 칼을 가는 이들이 있을까? 설쳤던 이들은 다 없어 졌다.
그들과 반대로 고치기만 하면 좋아 진다며 '개혁'의 이름으로 본질 자체를 바꾸고 없앴던 분들,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를 돌아 본다. 우리 역시 연구소를 중심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 봐야 한다.
연구소가 1998년부터 사이트를 운영하며 모든 자료와 발언과 연구의 조건을 없애고 옳은 것 하나만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연구소의 진심은 이후 사이트의 운영을 통해 전해 졌고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들과 교인들이 유입 되기 시작했었다.
모두가 갈급하던 차에 오아시스를 발견 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동네에 흔한 우물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풀려 졌다.
이 곳의 초기 주력은 직업이 없어 목회하는 사람, 담배를 끊기 위해 온 사람, 성격이 편협하여 달리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맞선을 보면 멀리 살기 때문에 생전에 처음 보는 사람이 좋아 보이듯이,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좋아 보이는 것처럼
이 곳은 사이트로 이 노선을 소개하다 보니 이 곳을 운영하는 교회와 직원들이 마치 소개 내용처럼 되어 진 줄로 알려 졌다.
그렇지 않다고 무수히 밝혔지만 외부에서는 그렇게 본 모양이다. 그래서 세상으로도 신앙으로도 위대한 분들이 찾아 왔다.
우리는 접시 수준인데 오는 분들은 고래도 있고 잉어도 있고 가물치도 있었다. 한 번 퍼드득 하고 나니 그릇 밖으로 나간다.
이 곳은 피라미나 올 만한 곳이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관상용 거북이나 숨 쉬고 가면 좋을 만한 곳이다. 이 곳이 그렇다.
돌고래 같이 훌륭하며 우수한 분들이 뛰어 드니 이 곳의 경제와 소속 교회는 평소의 못난 그 신앙 그 수준조차 깨질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눈치가 아주 빠른 분들은 몇 달, 학습이 좀 필요한 분들은 1년에서 몇 년, 또 우리처럼 못난 사람은 평생 계신다.
꼭 1명, 그는 한 달만에 만사를 다 파악을 했지만 자기의 약속의 최소한을 지키느라고 10년을 머문 분도 있다. 대단한 분이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강조한다. 또 기록은 남기려 한다. 이 노선은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 노선의 선택은 최상이다.
그러나 이 노선을 걸어 가며 이 노선의 본부를 자처하는 곳은 이 곳은 물론 서부교회도 부산공회들도 대구공회도 비슷하다.
모두 조건만 되면 밖으로 나갈 사람들인데 기회를 놓쳐서 이 노선에 있다. 있다 보니 이 노선을 남들에게는 자랑도 한다.
그런데 나갈 기회가 있고 나가면 물 만난 고기가 될 분인데도 이 노선을 지킨 분은 부산공회2에서 종신한 송종섭 한분이다.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해 왔으나 살아 가면서 가끔 한 분씩 있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돌아 보면 아니었다.
공회나 되니 그런 사람, 그런 인격, 그런 신앙가도 목회자 이름으로 또는 공회 교인으로 있었을 뿐이다. 적응 불능자들이다.
이 글을 적는 부공3의 연구소는 공회들 중에서도 자타가 모두 알고 있지만 이 노선 외에는 송곳 꽂을 인물들이 되지 못한다.
연구소가 운영하는 부공3 교회들과 지도자들이란 이 노선을 안내하는 것까지가 사명이지 그들 자체가 표상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