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2년이 지나 가며 남긴 것들 - 교회는 무엇과 싸웠던가?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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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코로나 2년이 지나 가며 남긴 것들 - 교회는 무엇과 싸웠던가?

담당 3 0
(목적 의식. 어디를 향하고 있나)
초등학교 때는 아침에 제일 먼저 도착하기 경쟁도 있었다. 온 종일 수업 시간에 장난만 치고 공부는 하지 않는데 등교는 1등..
남자 아이들은 딱지 따먹기에 그 날 하루의 학교 생활에 목표를 두기도 했다. 딱지를 많이 따 오는 것이 등교하는 목표였다.
중학교가 되면 주먹질이 목표가 된 친구, 친구 돈을 뜯기 위해 출석하는 친구, 보통은 그냥 가야 하니 밀려서 학교를 다닌다.
나는 초중고 12년 과정에 12개의 학년 개근상을 받았다. 1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녔던고? 가니 갔다.

고3을 지나며 철이 들었고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오로지 신앙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신앙에 필요해서 대충 붙여 놓았다.
고3을 지나면서는 판단의 잘못은 있어도 나를 지켜 보는 이들은 교회가 전부라 할 만큼 된 듯하다. 목적이 생겼다. 목표였다.
그러자 바로 고민이 생겼다. 신앙에 매진을 하는데 신앙의 열심을 어느 쪽에 맞출 것인가? 조사님은 백영희를 소개해 주셨다.
이 분은 가끔 접할 그런 정도의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 시대적 역사적 차원의 인물이라고 했다. 멋도 모르고 그런 줄 알았다.

어릴 때, 특히 성장 과정에 어느 한 순간에 한 마디는 한 인생을 아주 고착을 시켜 버린다. 그 분이 그렇다는 것은 말뿐이다.
그런데 소개하는 표현이 거창했기 때문에 믿은 것도 아니고 안 믿은 것도 아니고 그런가.. 라는 담담한 정도로 와 닿았었다.
평소 좋아서 잘 따랐던 목회자가 '시대적' '역사적' 인물이라고 했으니 그 분이 그런 정도인가 라는 긍정적 선입견이 생겼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 속속들이 세밀하게 자료와 논리로 내게 소개한 분보다 더 강하게 소개하기까지는, 세월이 걸렸다.


(전투 교회, 무엇과 싸우는가?)
교회의 목표, 교회의 전투, 규모에 있는가? 그렇다면 교인수와 예배당 건축을 위해 교리도 설교도 노선도 뒤를 따라야 한다.
교리의 연구와 전파가 목표인가? 재미가 없어 교인이 줄고 없어 져도 신학 강좌로 밤낮을 보내야 한다. 지성적 교회가 된다.
무식하고 나이 많은 교인이 모인 시골 교회는 교회의 목표를 부흥이나 신학 교리에 둘 수 없다. 노인 요양 보호가 목적이다.
교회도 상고 공고 인문고처럼 특성화 할 수 있을까? 교회의 본질은 단일성이다. 다르게 보일 수는 있으나 본질은 하나이다.

이 땅 위에 교회는 타락한 세상 안에서 하늘을 향하게 된다는 점에서 전투를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는 전투 교회이다.
전투를 피할 수는 없는데, 교회의 전투 대상은 무엇일까? 교회의 본질을 지키려 하다 보면 저절로 원수가 누구인지 보인다.
하나님과 관계를 끊으려 하면 안팎의 누구든 어떤 것이든 그 것이 원수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할 때 막으면 그 것이 원수다.
하나님과 연결에 가장 표시 나는 것은 말씀이다. 교회의 사명은 우선 예배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고 예배로 모이는 것이다.

시골 교회든, 해외 교회든, 선교든, 가정 교회든, 대형 교회든, 잘 믿든 못 믿든 일단 교회라면 주일 예배는 교회의 본질이다.
예배의 중심은 말씀으로 주님 뜻을 찾고 말씀으로 한 주간을 시작한다. 각자 형편과 활동은 다 다르다. 예배는 그 출발이다.
학교의 수업은 빠질 수 있다. 정부의 회의도 그럴 수 있다. 법원도 재판을 연기할 수 있다. 교회의 주일 예배는 바꿀 수 없다.
이 것을 명확하게 하려면 교회를 없애고 싶은 국가, 정치, 세력에게 눈에 보이는 몸이나 돈이나 세상의 자기 것을 손해 본다.


코로나 방역 문제가 2020년 1월에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중국 폐렴이 한국으로 밀려 오게 되자 국가는 예배를 금지 시켰다.
회사 운영에 필요하면 모여도 된다. 예배는 안 된다. 식당은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교회는 안 된다. 교회의 예배만 막아 댔다.
겉으로는 방역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 내용을 보면 그리고 지난 2년을 돌아 보면 방역을 이유로 교회를 힘껏 짓밟아 버렸다.
그런데 교회란 예배당이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 모신 교인들을 말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잡아 갈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를 짓밟았다고 하는가? 예배로 모이지 않으면 교인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 진다. 이 것이 문제다.
교회마다 예배 시간이 있다. 다른 모임들은 조절이 가능하다. 교인의 형편도 다 다르다. 교회의 예배는 정한 대로 가야 한다.
교회가 정한 예배, 교회는 지켜 내야 한다. 그 교회의 목사부터 그 교회의 교인들은 각자 자기 형편과 신앙에 따라 결정한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의 예배를 지켜 낼 때 총칼을 들고 교인을 동원하여 힘으로 관철하지 않는다. 그냥 진행하려 할 뿐이다.

진행을 하다가 막히면? 막힌 곳이 바로 예배 드릴 곳이다. 그 예배가 믿기 싫은 다른 사람의 땅이면 그 사람을 침해하게 된다.
막히면 막히지만 교회는 교회 스스로 예배를 멈추지는 않는다. 살기가 어렵다고 죽으면 자살이다.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다.
세상이 막아서 막히면 막힌 형편이 예배의 형편이다. 세상이 막지 않는데 예배를 멈추거나 바꾸면 세상이 손 댄 것이 아니다.
이 번 2년의 코로나 방역 기간을 통해 한국 교회는 전부가 알아서 예배를 포기했다. 막힌 곳에서 예배를 드린 교회는 참 적다.


그리고, 2년이 다 지나 가고 이제 곧 방역 제한 조처를 해제한다고 한다. 지난 2년 돌아 보면 코메디를 했다. 난리 굿을 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 백두산이 들썩이도록 몰이꾼들이 난리를 부리고 사냥꾼들이 설쳤는데 마지막 잡은 것은 쥐 한 마리였다.
배가 부르면 이런 짓을 한다. 배가 고프면 시켜도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세상과 교회에 먹을 것이 넘치니 흥청망청 보냈다.
지난 2년, 교회는 누구와 어떻게 싸웠던가? 세상에게 교회의 고삐를 내어 주고 세상과 교회가 적절히 짜고 치며 연극을 했다.

교회 입장이 좀 딱해 보이면 정부가 발표를 부풀려 가며 교회가 예배를 포기해도 될 정도로 분위기를 띄워 줬다. 뻔히 알면서.
교회는 교인들의 눈치도 봐야 하고 역사에 남을 기록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우선 먹고 살려면 세상 눈치를 봐야 했다. 정치다.
2020년 1월말, 국가적으로 코로나 비상 사태가 선포 되고 정부는 바람몰이를 했다. 교계는 일제히 맞짱구 치며 서로 나섰다.
신학의 예배론적으로 교회사적으로 온 세상 사람이 다 죽어 나가는 이런 상황에서는 교회를 폐쇄하는 것이 복음이라 했다.

고신도 총신도 합신도 어디도 누구도 입이 달리고 한 자리 한 사람들, 하고 싶은 분들, 기회를 잡고 싶은 곳은 전부 떠들었다.
세상이 걱정하는 일을 교회가 하면 안 된다고.. 교회를 없애면 세상이 더 좋아하는 줄도 몰랐나? 앞을 다투며 호응을 했다.
독감일 뿐인데.. 중세 때처럼 마구 죽어 나가는 때도 아니고 그럴 일도 아님을 메르스니 싸스니 거쳐 봐 놓고 호들갑이었다.
교계가 호응을 해 주니 교회를 끝장 내고 싶은 정권이야 오죽 반가웠을까? 일제 때도 인민군 점령 때도 모두 이런 식이었다.



이제 정부가 With Corona? 코로나 바이러스란 흔한 그런 바이러스니 이 아이들과는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자연이란다.
지난 2년은 왜 그렇게 했던가? 백신 접종율을 달성하지 못해서 그렇단다. 그러면 앞으로 신종이 나올 때마다 이럴 건가?
교통사고 사망율보다 낮고, 평소 감기 독감에 죽는 숫자보다 턱 없이 낮지만, 구경 거리가 필요한 정부로서 잘 써먹었다.
코로나 방역만 앞에 내걸면 뭐든지 용서가 되고 덮을 것은 모두 덮어 버리고 또 해치우고 싶은 것은 모두 그렇게 했다.

교회는 누구와 싸웠을까? 코로나 2년에 교회를 출석하지 않다 보니 이제 애매하게 다니던 교인들이 아주 주저 앉았다.
더구나 다른 교회로 좀 옮기고 싶었던 교인들은 2년의 휴식기를 통해 교회를 바꿀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여러 가지다.
그래도 한국 교회 전체를 통해 총공회 계열의 몇 교회는 잘 버텼다. 그러나 투쟁의 본질을 알고 대처를 했을까? 모르겠다.
그 교회들의 평소 처신과 운영 성향을 보면 하던 것을 할 교회이고 또 일제와 점령기 이야기 때문에 얼떨결에 버틴 듯하다.

서부교회는 언론이 세세하게 밝히는 바람에 그 투쟁의 내면이 다 나왔다. 교계 차원에서는 모범이 되었으나 공회는 아니다.
천하를 휩쓸고 간 2년의 방역 기간은 노아 홍수와 다를까? 보이는 면은 달라도 교회가 싸울 투쟁의 성향은 그 때와 같았다.
노아 홍수는 방주가 승패였지 신학 강좌도 교회의 운영 모습도 규모도 아니었다. 여론도 아니고 알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교회의 예배, 정한 시간 정한 장소는 교회가 필요해서 정한다. 그리고 교회의 결정은 그냥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본질이다.

마을 주민이 교회 대문을 막으면 우리는 경찰을 불러 해산을 시키고 들어 가지는 않는다. 막히면 막힌 곳에서 예배 드린다.
막힌 곳에서 예배를 드릴 교회 마당이 없으면 그 때 가서 다른 곳을 찾는다. 20년 전에 부공2가 매월 그렇게 한 적이 있다.
총공회 본부에서 매월 첫 주일 지난 월요일에 교역자회를 개최했다. 부공1이 현관문을 폐쇄하자 골목에서 예배를 드렸다.
몇년을 계속 그렇게 했다. 그 골목은 맞은 편이 서부교회 마당이다. 일반 골목을 사이에 뒀으나 실제로는 교회 공간이었다.


즉, 공회는 어디든 이런 원리를 다 안다는 뜻이다. 이 번에는 각 교회 별로 상황이 전개 되었다. 각 교회의 장소는 다 다르다.
서부교회는 현관을 정부가 막았다. 마당은 막지 않았다. 그런데 마당 밖에서 막혔다고 생각했다. 그 것은 서부교회 결정이다.
6.25 점령은 3개월 이하였다. 일제 신사참배는 6년이었다. 이 번 방역은 2년이었다. 이제 그 마지막 순간이 지나 가고 있다.
이 번에 좀 잘 대처한 곳도 있고 아쉬운 곳도 있을 것이다. 이 번을 잘 살펴 다음을 잘 준비하면 모두에게 이 번은 복이 된다.

이 번이 지나 갈 때 지나 간 과거로 두고 들추지 않으면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또 이어 지게 되어 있다.
교회는 이 땅 위에서는 '전투 교회'가 필연이다. 피할 길은 없다. 다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싸웠는지만 문제다.
교회를 노리는 안팎 귀신이 어느 면으로 어떤 전쟁으로 진행하는지를 살피지 못하면 이겼다 해놓고 지게 된다.
학창 시절에 등교 1등을 가장 많이 하거나 딱지를 가장 많이 딴 학생이 학교 생활을 제일 잘한 것은 아닐 듯하다.
교인 2021.10.18 05:55  
개인적으로 지난 2년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코로나는 선택의 연속이었으나 주님은 순종을 보고 계셨다. 예배인원 20명 제한이라는 국가 명령을 어떤 식으로 따를 것인가? 아니면 기존에 하던대로 예배를 드림으로 벌금형과 폐쇄령의 수순을 밟으며 공예배를 지속할 것인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순간의 선택은 영원한 순종과 불순종을 결정 짓는다.

전염성이 강한 악성 피부병인 문둥병은 철저한 격리가 필수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는 독감 수준이 맞다. 격리는 필요하나 전체를 몰아가는 부화뇌동이 문제다. 최근 코로나에 걸려 14일 동안 격리되었던 지인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열도 안나고 아무 이상도 없는데 양성 확진자 판정을 받고 보호시설에 격리된 30대 남성의 말을 인용해 본다. 가서 무슨 치료를 받았는가? 전혀 치료는 없었고 주는  밥 세끼 먹고 T.V 휴대폰 보면서 푹 쉬고 왔다. 나갈 때 음성 판정 받아서 나왔는가? 아니다. 그냥 나가라 했고 나가서 코로나 검사 받아야 한다 했다. 그래서 보건소 가서 받으니 음성 나왔단다. 여기서 의구심이 하나 든다. 격리시설을 나갈 때 왜 음성이 된 아무 근거도 없이 내보내는가? 14일이라는 기간을 채우니 그냥 나가란다. 격리시설에서 검사를 해서 음성 판정이 나와야 나올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가 아닌가? 양성 확진자가 음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육안으로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냥 쉬면 음성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던 것일까? 참 의문이다. 무증상으로 격리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감기 몸살처럼 양성이 푹 쉬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음성이 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증거다.

이번 건은 예방 주사다. 다니엘은 기도금지령이 내려졌을 때 기존에 하던 그대로 기도를 계속했다. 다음에도 예배금지령이 내려지면 어떤 선택과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수는 있겠지만 일단 모이는 것이 원칙이다. 급성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매일 100명 이상 속출하는 경우는 예외다. 지금도 전국 교회는 점심식사 금지다. 주일 하루 전날인 토요일 점심 고깃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자리가 없이 빼곡하다. 여기에 거리두기는 무용지물이다. 마스크는 더더욱 필요없다. 다 벗고 고기 먹고 커피 마시며 대화하고 자유롭게 식당 안을 돌아 다닌다. 토요일 점심 식당안은 괜찮고 일요일 점심 교회안은 안된단다. 불신 세상과 똑같은 대우를 해 달라거나 공평성의 문제를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왜 이렇게 대우가 다른가? 대우가 달라야, 장자를 죽이고 죽이지 않는 차별이 있어야 구출, 구원의 출애굽이 가능하다. 이런 불공평 속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 현실 속 3계명을 묵상해 본다.

하나님의 역사로 보면 우리 믿는 자가 그동안 예배를 등한시하여 받는 징계로 봐야 하는 면도 있고 더 깨끗한 면을 기르기 위해 전투하라는 연단의 면도 봐야 할 것이다. 징계만 강조하면 집에서 가족끼리 실시간만  정답이고 전투만 강조하면 정부와 몸싸움하기 쉽다. 실시간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정부와 협조적인 대화나 따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나 어느 한쪽만 강하게 밀어 부치는 극단적인 선택을 경계하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징계와 전투 신앙의 연단이라는 두 면을 살피다 보면 결론은 막히는데 까지 가는 것이 우리 예배의 마지막 선이다. 시험이 오면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무조건 고난을 자취하라는 고행주의가 아니다. 막히는데까지 가려면 예배는 고수하고 나머지는 다 포기해야 한다.

토요일 점심 고깃집처럼 마스크 벗고 다들 떠들며 주일날 식사는 못해도 말없이 묵묵히 설교만 듣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국가가 예배를 막는 것처럼 보여도 내가 나를 막고 있는 것이다. 교회 인원수가 많든 적든 예배당을 막으면 일단 예배당 앞마당에 모이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예배당 20명 제한이면 교인 전원이 집, 실시간 밖에 길이 없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마귀가 원하는 바이다. 마귀가 노린 것은 일단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일날 삼삼오오라도 일단 한 곳에 모였으면 그 교회는 반은 성공이며 승리다. 직장도 모이고 마트도 모이고 공공시설도 모이는데 생계보다도 더 중요한 영원이 달린 문제인데 왜 못 모이는가? 국가가 예배당 예배 인원 20명으로 강력하게 제한하면 직장가는 것처럼 마트 가는 것처럼 얼마든지 예배당 밖에서는 모일 수가 있다.

앞으로도 주일날 우선 예배당 앞에 모이는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함을 교훈받는다. 교회 근처 교인의 집이나 생각해 보면 활용 장소는 주변에 널려 있다. 직장을 가서 하루 종일 마스크 끼고 직원들과 부대끼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공감할 것이다. 중세시대 페스트로 마을 전체가 죽어 나가고 직장, 마트가 일시 폐쇄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이동금지령인 국가 비상사태가 아니고 월요일날 직장을 갈 수 있다면 마트 가는 것이 일상처럼 자유롭다면 기존에 하던대로 주일날 예배당 앞마당에 모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일단 모이면 그 자체가 예배다. 모이는데까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며 그 다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것이다.

앞으로도 코로나 할애비가 와서 비대면 예배 즉 실시간 예배만 허용한다면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실시간 담당 20명은 기드온 300 용사처럼 예배당 안에서 중무장하고 예배당 밖 주차장에서는 만차가 될 때까지 교인 대다수가 가족단위로 차 안에서 예배 드리고 예배가 끝나면 도시락 먹고 커피숍처럼 주차장에서 2명씩 교제도 나누고 소수 노약자나 면역력이 약한 병자는 집에서 실시간을 드리는 등 세 곳으로 나눠 예배 드리는 것도 코로나 시대에 좋은 예배 모습의 한 예라 하겠다. 누구는 말한다. 교회까지 차운전해 와서 비좁은 차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이나 집에서 실시간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나 그거나 이거나 매 한가지 아니냐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주는 집에서 한주는 예배당 주차장 차안에서 예배를 드려 보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어디서 예배드려도 상관 없는 나만 생각지 말고 느끼고 보며 자라는 5-6살 자녀들, 후세대까지 감안한다면 예배 장소의 여러 면을 고려해 보자는 뜻이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평소 예배 원칙을 세워 둬야 한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시험도 올 것이다. 밤중인 환난의 때에 설득은 의미가 없다. 평소 배운대로, 결국 교리와 신조와 행정은 하나다.
공회원 2021.10.18 21:12  
여러 면을 더하여 생각하게 해 주신 글에 공감합니다.
교인 2021.10.19 05:56  
성전 밖 마당으로 인생을 마치면 실패한 신앙이다. 자라가는 소망성을 두고 달리 보면 성전 밖 마당에서 주신 은혜 받아 있는 힘 다하면 언제든지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가족끼리 집에 모이는 것도 나쁘지 않고 좋으나 성전 안을 금지하면 성전 밖 마당이 집보다는 더 좋아 보인다. 마귀는 좋은 것을 내 보이며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은 등 뒤로 숨긴다. 그래서 세상 사자성어처럼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의 적이 된다. 또 시험이 온다면 성전인 예배당 안, 성전 밖 마당인 주차장, 집안에서 실시간 셋 중에서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불합격자는 늘 존재하는 것이니 재시험은 또 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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