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모든 신앙이 다 그러 하듯 결혼도 실제가 문제 - 5
담당
0
4
2021.09.26 18:26
5. 신앙의 위치와 사명과 하나님의 인도는 모든 사람에게 늘 같지 않다.
(성령의 개별 인도)
알고 보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다르게 인도하신다. 만일 누구에게나 같은 때는 성경 진리라고 한다.
진리는 모두에게 같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신 환경과 인도는 다르다. 주신 현실에서 자기를 인도할 때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
결혼에 대한 원칙은 분명하다. 모두에게 같다. 그러나 인도하는 순서와 과정과 모습은 한 사람도 같지 않고 모두가 다 다르다.
교회 내 결혼처럼 보여도 내용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찬 가지로 남에게 외부 결혼처럼 보여도 내용은 신앙 결혼일 수 있다.
예수님은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러나 애굽으로 피난 갔다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으로 만 알았다.
호세아는 죄인 고멜에게 빠졌다고 보였지만 실은 주님의 명령이었다. 야곱은 이삭에게 순종한 듯 보였으나 미모를 따라 갔다.
(순종 같은 거역, 거역 같은 순종)
어떤 사람은 호세아 1장 2절을 핑계 대며 음란의 죄를 마구 지을 수 있다. 야곱은 지도자 이삭에게 순종한 듯 갔으나
결혼에 대해 교회 내의 원만해 보이는 추진, 불가피하게 선교처럼 탐험처럼 또는 모세나 요셉처럼 이방 결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나안이라는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과의 결혼이 좋다. 그러나 그렇게만 우리를 기르지 않으신다.
대부분은 안에서 기르시나, 우리의 실수나 착오나 심지어 우리의 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인도는 먼 곳을 향할 수도 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빌1:18,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1:20,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교회 안에 만연한 7계명 범죄)
우리 나라의 단점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장점도 분명히 있다. 적지 않다. 한국 교계도 장점 단점이 많다.
시기 질투 분쟁 속 좁고 급한 성격은 단점이다. 이 단점 때문에 한국 교회의 전도와 부흥과 정통 신학을 지킨 면이 있다.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에서는 사람을 차별하고 노예를 부려 놓고 우리에게는 백정이나 양반이 같다고 가르쳤다. 고맙다.
좌파들은 이런 면을 두고 외식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선교지에서 성취했으니 감사할 뿐이다.
자유주의 좌파 신학은 복 된 것도 저주로 바꾸며 이를 간다. 우리는 원래 나쁜 것도 좋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세우려 한다.
선교사들에게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 남녀의 이성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의 청정 지역인 이 곳을 아주 엉망을 만들었다.
남녀 문제에 관한 한 시대의 흐름 때문에 막을 길은 없지만 선교사들이 우리를 자기들처럼 절제가 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남녀가 강단을 바라 보며 앉되 서로 볼 수 없게 앉는 것이 왜 잘못이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양 쪽을 헐어 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선교사들이 가고 나니 한국 교회는 칸을 헌 것이 발전이니 이제 섞어 앉아야 발전이라고 했다.
섞어 앉는다? 조심만 하면 된다. 무슨 남녀 반의 1미터 통로가 남녀의 죄를 막겠는가? 섞어 앉다가 마구 엉켜 붙게 했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 볼을 비벼 대며 가슴을 문질러 댄다. 그랬다고 더 큰 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인사법이다.
한국 사람은 쳐다 보지 못하게 나눠 놓아도 한 집에 들어 간다는 것만 가지고도 애매했다. 그런데 칸을 뜯고 섞어 버렸다.
서양 교회는 댐을 쌓고 옆에 수문으로 조절했다. 한국 사람은 댐만 있고 수문이 없었다. 갑자기 헐어 버리니 사태가 났다.
한국 사회가 서구화 되면서 교회가 마지 못해 뒤에서 조심하며 따라 갔어야 하는데 교회들이 사회에 앞서 온갖 일을 했다.
예배 시간에 교회의 수련회에서 각종 행사에서 짝짝을 뒤섞고 율동을 하고 허그를 하고? 5천년 갇혔던 귀신들이 풀렸다.
한 번 풀리고 나면 한국인 우리의 성향은 발전도 탈선도 무엇이든 끝장을 본다. 한국의 사회까지 정화조로 만들어 버렸다.
불신자라 해도 감히 남녀가 남 보는 데서는 아는 척도 못하던 시절, 교회는 찬양대 학생회 핑계 대고 애매하게 교제를 했다.
애매하게 교제를 하니 이성의 정욕이 달아 올랐다. 이를 지켜 보는 불신자들은 겉으로 욕을 하면서 속으로는 부러워 죽는다.
결국 이 나라의 모든 이성 문란은 교회가 선도를 했다. 학생회가 선도했고, 학생회를 지도하는 교회와 부모가 방화범이다.
겉으로는 교회 내 성도의 교제가 있고 그 과정에서 결혼으로 나아 가는 것이 한국 교계의 교회 내 신앙 결혼의 대세가 된다.
이 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삼상8장에서 뇌물만 받았으나 엘리의 아들들의 2장에서 성전 안에 죄였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해결법이 있다. 엘리 아들들의 죄는 엘리 스스로 해결법이 없다 했다. 그리 말을 하고도 눈을 감아 줬다.
(주일과 결혼의 추진에는 '정답'이 없다.)
어느 정도까지가 주일을 지키는 것인가? 원칙은 있으나 개별 행동을 두고는 지침을 마련할 수 없다. 방향만 제시할 수 있다.
일하지 말고 돈 벌지 말라는 것은 원칙이다. 그러나 응급 상황은 예외다. 응급 상황을 핑계 대면 주일에 뭐든지 할 수 있다.
결혼 전의 이성 문제는 마음의 죄까지 짓지 말라 했다. 그런데 마음의 죄를 이길 재주는 없다. 속 마음은 남이 알 수도 없다.
신앙 결혼이 옳다. 교회 결혼이 옳다. 세상 결혼을 금한다... 이 정도만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모세 요셉의 결혼은 어떻게 되나?
삼손이 딤나 여인에게 간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 운동을 위해 블레셋을 치기 위한 순서였다. 부모는 몰라서 이를 막고 나섰다.
다윗과 솔로몬의 이방인 결혼은 외부로 보면 율법의 금지 사항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이방까지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오늘은 신약이며 신령한 시대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가 문제다.
자기 신앙으로 자기 현실에서 신앙 결혼을 노력했으나 길이 막히고 방법이 없게 될 때는 주변을 넓히는 것은 주님의 인도다.
교회 안에 3자가 볼 때는 좋은 사람이 있는데 자기의 세상 기준 때문에 피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구별은 어렵다.
다만 이렇게 주변을 넓혀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신앙의 결혼을 추진하려면 상대방 때문에 결혼식도 예식장이 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내용을 아시는 주님이 지켜 보신다. 주변의 평판과 시선 때문에 자기를 인도하는 주님을 거절하면 안 된다.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주시는 은혜는 크다. 잘하면 배나 좋은 일이 기다린다. 방심하면 배나 손해 본다.
잘 모르는 모든 분들에게 기본적으로 안내하는 것은 이 정도다. 나머지는 구체적인 질문이 있어야 안내를 할 수 있겠다.
(성령의 개별 인도)
알고 보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다르게 인도하신다. 만일 누구에게나 같은 때는 성경 진리라고 한다.
진리는 모두에게 같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신 환경과 인도는 다르다. 주신 현실에서 자기를 인도할 때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
결혼에 대한 원칙은 분명하다. 모두에게 같다. 그러나 인도하는 순서와 과정과 모습은 한 사람도 같지 않고 모두가 다 다르다.
교회 내 결혼처럼 보여도 내용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찬 가지로 남에게 외부 결혼처럼 보여도 내용은 신앙 결혼일 수 있다.
예수님은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나셨다. 그러나 애굽으로 피난 갔다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으로 만 알았다.
호세아는 죄인 고멜에게 빠졌다고 보였지만 실은 주님의 명령이었다. 야곱은 이삭에게 순종한 듯 보였으나 미모를 따라 갔다.
(순종 같은 거역, 거역 같은 순종)
어떤 사람은 호세아 1장 2절을 핑계 대며 음란의 죄를 마구 지을 수 있다. 야곱은 지도자 이삭에게 순종한 듯 갔으나
결혼에 대해 교회 내의 원만해 보이는 추진, 불가피하게 선교처럼 탐험처럼 또는 모세나 요셉처럼 이방 결혼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나안이라는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과의 결혼이 좋다. 그러나 그렇게만 우리를 기르지 않으신다.
대부분은 안에서 기르시나, 우리의 실수나 착오나 심지어 우리의 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인도는 먼 곳을 향할 수도 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빌1:18,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1:20,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교회 안에 만연한 7계명 범죄)
우리 나라의 단점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장점도 분명히 있다. 적지 않다. 한국 교계도 장점 단점이 많다.
시기 질투 분쟁 속 좁고 급한 성격은 단점이다. 이 단점 때문에 한국 교회의 전도와 부흥과 정통 신학을 지킨 면이 있다.
선교사들이 그들 나라에서는 사람을 차별하고 노예를 부려 놓고 우리에게는 백정이나 양반이 같다고 가르쳤다. 고맙다.
좌파들은 이런 면을 두고 외식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선교지에서 성취했으니 감사할 뿐이다.
자유주의 좌파 신학은 복 된 것도 저주로 바꾸며 이를 간다. 우리는 원래 나쁜 것도 좋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세우려 한다.
선교사들에게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 남녀의 이성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의 청정 지역인 이 곳을 아주 엉망을 만들었다.
남녀 문제에 관한 한 시대의 흐름 때문에 막을 길은 없지만 선교사들이 우리를 자기들처럼 절제가 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남녀가 강단을 바라 보며 앉되 서로 볼 수 없게 앉는 것이 왜 잘못이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양 쪽을 헐어 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선교사들이 가고 나니 한국 교회는 칸을 헌 것이 발전이니 이제 섞어 앉아야 발전이라고 했다.
섞어 앉는다? 조심만 하면 된다. 무슨 남녀 반의 1미터 통로가 남녀의 죄를 막겠는가? 섞어 앉다가 마구 엉켜 붙게 했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 볼을 비벼 대며 가슴을 문질러 댄다. 그랬다고 더 큰 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인사법이다.
한국 사람은 쳐다 보지 못하게 나눠 놓아도 한 집에 들어 간다는 것만 가지고도 애매했다. 그런데 칸을 뜯고 섞어 버렸다.
서양 교회는 댐을 쌓고 옆에 수문으로 조절했다. 한국 사람은 댐만 있고 수문이 없었다. 갑자기 헐어 버리니 사태가 났다.
한국 사회가 서구화 되면서 교회가 마지 못해 뒤에서 조심하며 따라 갔어야 하는데 교회들이 사회에 앞서 온갖 일을 했다.
예배 시간에 교회의 수련회에서 각종 행사에서 짝짝을 뒤섞고 율동을 하고 허그를 하고? 5천년 갇혔던 귀신들이 풀렸다.
한 번 풀리고 나면 한국인 우리의 성향은 발전도 탈선도 무엇이든 끝장을 본다. 한국의 사회까지 정화조로 만들어 버렸다.
불신자라 해도 감히 남녀가 남 보는 데서는 아는 척도 못하던 시절, 교회는 찬양대 학생회 핑계 대고 애매하게 교제를 했다.
애매하게 교제를 하니 이성의 정욕이 달아 올랐다. 이를 지켜 보는 불신자들은 겉으로 욕을 하면서 속으로는 부러워 죽는다.
결국 이 나라의 모든 이성 문란은 교회가 선도를 했다. 학생회가 선도했고, 학생회를 지도하는 교회와 부모가 방화범이다.
겉으로는 교회 내 성도의 교제가 있고 그 과정에서 결혼으로 나아 가는 것이 한국 교계의 교회 내 신앙 결혼의 대세가 된다.
이 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삼상8장에서 뇌물만 받았으나 엘리의 아들들의 2장에서 성전 안에 죄였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해결법이 있다. 엘리 아들들의 죄는 엘리 스스로 해결법이 없다 했다. 그리 말을 하고도 눈을 감아 줬다.
(주일과 결혼의 추진에는 '정답'이 없다.)
어느 정도까지가 주일을 지키는 것인가? 원칙은 있으나 개별 행동을 두고는 지침을 마련할 수 없다. 방향만 제시할 수 있다.
일하지 말고 돈 벌지 말라는 것은 원칙이다. 그러나 응급 상황은 예외다. 응급 상황을 핑계 대면 주일에 뭐든지 할 수 있다.
결혼 전의 이성 문제는 마음의 죄까지 짓지 말라 했다. 그런데 마음의 죄를 이길 재주는 없다. 속 마음은 남이 알 수도 없다.
신앙 결혼이 옳다. 교회 결혼이 옳다. 세상 결혼을 금한다... 이 정도만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모세 요셉의 결혼은 어떻게 되나?
삼손이 딤나 여인에게 간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 운동을 위해 블레셋을 치기 위한 순서였다. 부모는 몰라서 이를 막고 나섰다.
다윗과 솔로몬의 이방인 결혼은 외부로 보면 율법의 금지 사항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이방까지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오늘은 신약이며 신령한 시대다.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쉽게 판단하지 못한다.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가 문제다.
자기 신앙으로 자기 현실에서 신앙 결혼을 노력했으나 길이 막히고 방법이 없게 될 때는 주변을 넓히는 것은 주님의 인도다.
교회 안에 3자가 볼 때는 좋은 사람이 있는데 자기의 세상 기준 때문에 피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구별은 어렵다.
다만 이렇게 주변을 넓혀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신앙의 결혼을 추진하려면 상대방 때문에 결혼식도 예식장이 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내용을 아시는 주님이 지켜 보신다. 주변의 평판과 시선 때문에 자기를 인도하는 주님을 거절하면 안 된다.
참으로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주시는 은혜는 크다. 잘하면 배나 좋은 일이 기다린다. 방심하면 배나 손해 본다.
잘 모르는 모든 분들에게 기본적으로 안내하는 것은 이 정도다. 나머지는 구체적인 질문이 있어야 안내를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