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 집안의 어두운 내력 - 거지 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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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 00:00
제가 믿게 된 것은 집안 전체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1931년 7월에 뙤양볕 아래 먹을 것이 없어 생풀을 뜯고 있던 덕유산 자락의 삼봉산 골짝의 할머니를 지나 가던 호주 선교사 전은혜 선생님이 전도를 했고 그 다음 주일 10 리를 산골짝으로 더 올라 가야 했던 원기동 마을로 교회를 찾아 간 것이 저희 가정의 신앙 출발이었습니다.
오전 예배를 마치고 밥 한 그릇을 얻어 먹은 할머니는 집에 배가 고파 울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다음 주일에는 작은 아니는 업고 좀 큰 아이는 손을 잡고 걷게 하여 또 10 리 밖의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점심 밥 한 그릇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사람의 근본은 평생을 두고 지울 수가 없는 밑 그림으로 항상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정은 거지였습니다. 낭망적인 거지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나 희망이 전혀 없던 상황입니다. 할아버지가 얼마 없는 살림조차 남의 빚에 보증을 섰다가 없앴는데 집에 있는 솥까지 넘겨 줬습니다. 그런데 속병이 있어 젊은 가장이 늘 안방에 누워만 지냈습니다. 덕유산 끝자락 마을에 살던 이 가정은 얻어 먹을 것도 없는 시절에 오뉴월 보릿고개에는 생풀을 뜯어 먹으며 죽지 못해서 그냥 생존을 이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 생활에는 제가 아득한 옛 이야기로 들은 이 말들이 마치 제가 직접 그런 세월을 살았던 것처럼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출신이 거지면 살아 가는 것도 거지고, 생각하는 것도 늘 거지 근성을 벗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뭘 좀 가지게 되면 잘해 봐야 졸부 노릇이나 합니다.
항상 남의 것이나 주변에 떨어 져 있는 거두어 먹는 '걷이 생활' '걷이 > 거지'라는 말을 혼자 새겨 보는 때가 참 많습니다. 사실 출신 그 자체는 개선 불가능은 아닙니다. 그래서 출신을 따지지 말자는 말에 일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출신이란 과거요 역사와 자기의 어제 모습입니다. 어제 강아지가 오늘 말처럼, 어제 망아지가 오늘 개처럼 될 수 있겠는가? 개선은 가능해도 본질적 변화는 어렵습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믿음 안에서만 돌변할 수는 있으나 믿음이라는 것이 거의 다 우리 주관의 착각에서 그치지 주님 보실 때 진정한 믿음이 되어 주님의 능력으로 출신과 과거를 아주 바꾸어 새로운 피조물의 생활로 나아 가는 것은 드뭅니다. 앉은뱅이가 일시 일어 났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 가는 것이 일반 우리들입니다.
제 고백의 시작을 살피는 이유는 주님께 받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요 우리의 인생인데,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출신이 거지 체질이다 보니 정신을 단단히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집안의 내력이 목회를 비롯한 공사 생활에 번져 나옵니다. 제가 잘 하는 것이 있고 저와 함께 하는 조직이 있다면, 이런 면을 조심하지 않으면 이 조직은 거지떼가 되는 것이지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까지 가지 않고 혼자 잘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지가 잘해 봐야 다리 밑에 거지입니다.
주님이 구유에서 시작한 것은 대속의 희생이나 저는 집안 내력적으로 복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먹고 살아 보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으나 실패하고 낙오 된 상황에서 거지가 된 집안이 제 출발입니다. 그 윗대 이야기는 알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할아버지 시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자식이 잘못해서 망해도 다시 쉽게 일어 섭니다. 원래 가난하고 천한 사람은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은 쉬워도 잘 되는 것은 어렵고 잘 되었다 해도 원래 자리로 쉽게 돌아 갑니다.
이런 거지 근성의 집안에서 태어 나고 자라면서 제게는 신앙 세계를 떠나 일반 세상이라도 이해하거나 받아 줄 수 없는 생활이 많았습니다. 이런 과거가 하나 다행스럽게 사용 되는 것은 교인들 중에 못 났다고 생각하여 주저하는 이들과 과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통하는 데가 있고, 그래서 저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데 도움 되는 경우입니다. 반면에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일반적으로 자라 나온 분들에게는 제 단면이 보일 때는 그들에게 평생에 시험이 될 수 있는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뭐라고 말을 할 수 없고 그냥 기가 막혀서 돌아 서거나 마음 문을 닫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의 정상적인 생활이 실제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세상의 정상적인 생활이 자연계시 차원에서 보다 나은 것이고 적어도 그런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는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또는 이런 연장선에서 고개 들 수 없고 재론하기 힘든 여러 일들을 해 왔고 이제 제가 가진 이 노선의 위치 때문에 여러 이야기를 해야 할 시점입니다.
아무리 엉망인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을 접할 때는 동질감이 느껴 지고,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버겁고 불편하게 느껴 진다면,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제가 순간이라도 긴장하지 않으면 아주 더럽고 나쁘고 괴이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순식간일 것입니다. 현재 제가 속한 공회나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모습들은 제가 걸어 온 길과 아주 정반대가 되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훌륭한 곳을 만들고 싶은 것이 제 소망이지만, 실제 결과는 천한 사람으로 인해 아주 천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늘 긴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자일 가능성도 있고, 현재 후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