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백] 주일학교, 불신 시기 - 깊은 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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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9 00:00
(창동교회)
저희 집안은 원 고향은 경남 거창의 북 쪽인 고제면 봉산입니다. 저는 거창읍으로 이사를 한 후에 태어 났기 때문에 거창읍에서 고등학교 3학년인 19 세까지 살았습니다. 집안으로는 봉산교회가 고향 교회지만 제게는 거창의 창동교회가 모교회입니다.
(공회의 주일학교 변화)
1960년대의 공회는 서부교회가 교회사의 전통적 주일학교를 서부교회식 주일학교로 체제를 바꾸던 시기입니다. 전통적 주일학교는 세상 학교식으로 입학과 학년과 남녀반을 구별하고 1 년 단위의 담임제가 특징입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는 반사가 개척 교회 목회자처럼 주일학교를 시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아동이 자기 반이며 학년 연령 남녀를 나누지 않습니다. 물론 임기는 평생입니다.
서부교회는 1961년에 홍순철 선생님이 통합반을 혼자 시작했고 백 목사님이 이를 허락했고 그 시행을 보며 모든 반들이 따라 하게 되어 1963년부터는 오늘에 이르는 서부교회식 주일학교 체제가 형성 되었습니다.
(창동교회의 적용)
서부교회가 전면적으로 주일학교의 체제를 변경 시켰는데도 공회의 전국에 흩어 져 있는 교회들은 각 교회의 목회자들이 통합반 체제를 언제 어떻게 적용하는지가 다 달랐습니다. 백 목사님은 어떨 때는 전면적 조처를 내리지만 대개는 일파만파로 번져 가는 자유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니던 창동교회는 1971년까지 과거 체제로 내려 왔습니다. 1972년에 이진헌 목사님이 담임으로 오시면서 바로 서부교회식을 적용했습니다. 제가 학생으로 다닌 주일학교는 당시 주변의 다른 교회 주일학교와 모든 것이 같았습니다. 심지어 공과도 매월 부산으로 교역자회를 가시는 조사님들이 신년 초가 되면 부산의 기독교 서점에 가서 '총회 공과'라는 타 교단 공과를 단체로 구입해서 반사 선생님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공회의 발생지며 오늘까지도 중심 지역 중 하나인 거창의 제일 크고 중심 되는 교회가 그러했으니 공회 전체의 분위기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일학교 입학)
제가 제 기억으로 교회를 처음 다녔던 것은 1963년의 주일학교 유치반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의 특별 행사가 있을 때 기웃거렸던 기억만 있습니다. 몇 번을 다녔는지는 몰라도 일곱 살이 되자 주변에서 이제는 교회 주일학교의 유치반에 입학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들은 기억이 선명합니다. 입학 문제를 두고 제가 두어 마디를 물었던 기억은 있으나 내용은 기억에 없습니다. 당시 제게 말한 분들은 집에서 가족 2 - 3 명이었습니다. 이제 '유치원 나이가 되었으니 교회 주일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 없으나 제 잘못은 아닙니다. 그 때의 후회 때문에 또 신앙과 교육적인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평생 목회하면서 어떤 아이라도 주일학교뿐 아니라 장년반 예배에 출석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최대한 노력해 왔습니다. 장년반 예배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 해도 장년반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쉬워도 어떤 종류의 어린 아이라 해도 예배 참석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장례식과 결혼식과 집회처럼 특별행사라 해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불신의 시기)
백 목사님이 목회 일지를 적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출생하던 1957년에 제1회 집회가 시작 됩니다. 처음에는 교역자를 주로 대상으로 하고 이후 참석 범위를 늘려 갑니다. 중요한 것은 매년 계속이었고 이 집회는 백 목사님의 전국 전체 공회 교회들에 대한 목회였습니다. 백 목사님의 목회는 좁게는 담임으로 계시던 곳 한 교회였고, 넓게는 백 목사님의 신앙 지도를 원하는 전국의 모든 교회와 교인들을 대상으로 평생 이어 집니다.
이런 시기에 저는 어머님 뱃속에서 또 젖을 먹는 유아 시기에는 어머님께 매달려 다니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1회 집회부터 참석을 했으나, 정말 아쉬운 것은 일곱 살이 되던 유치반 입학 때까지 대부분의 시기에 저는 불신자 시기를 보냈습니다.
저희 가정이 교회의 모든 면에 핵심이다 보니 늘 듣고 보는 것은 교회 일들인데 아이들은 어른들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늘 떠 밀어 냈고 원래 신앙도 없고 성격도 그런 것에 체질이 맞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교회를 간간히 구경만 했고 실제 저의 그 시절은 신앙의 기본과 이 노선에서 불신자나 이방인이었습니다.
(통한의 시절)
제가 일반 교인으로 살았다면 이러나저러나 별 상관이 없지만 제가 이 노선의 중심에서 이 노선을 소개하는 위치를 가졌고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이 기억은 너무나도 통한적입니다. 군인이 중요한 전투를 겪어 보지 못했거나 또는 정규 군사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면 그의 평생에 그런 면은 심리적으로도 열등감을 갖게 되고 실력 면에서도 말할 수 없는 손실이며 빈 곳이 됩니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경험이 없는 것이나 여자로 말하면 아이 낳아 보지 않고 시집살이를 해 보지 않은 것으로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이야기거리에서 그칠 수 없는 역사적 체험적 손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늦게 믿은 것이나 믿기 전에 나쁜 짓을 한 것은 바울의 경우로 볼 수 있듯이 믿고 나면 옳게만 쓰입니다. 그러나 이미 믿는 가정에서 출생을 한 사람이 믿지 않는 시기를 가졌다는 것은 교인의 타락과 탈선에 해당이 됩니다. 이런 시기가 신앙이 제대로 들고 난 뒤에 얼마나 큰 손실이 되는지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목회의 경험이 많아 질수록 이 사소해 보이고 흔해 보이는 손해가 얼마나 큰지, 결손 가정이라는 단어를 떠 올립니다. 해당 아이들에게는 치명적 표현이지만 우리는 사회적으로 통계를 볼 때 결손 가정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잘 압니다. 평소에는 이런 결손 가정의 인격 장애나 빈 곳이 잘 드러 나지 않지만 아주 중요할 때 소리 없이 이런 영향이 흰 종이에 검정 먹물을 쏟아 놓듯이 식수원에 정화조 물을 방류하듯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용적 결손 가정)
저는 외견상 전통의 신앙 가정이었고 경제도 어린 시절 거창군 전체에서 손꼽는 정도였습니다. 겉 모습은 반듯합니다. 현재는 유명 사립학교로 알려 져 있는 거창고등학교와 그 부설 샛별초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일곱 살이 되도록 믿는 가정 안에서 불신자로 방치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통한으로 늘 와 닿습니다. 곧 적겠지만 그 때 온 가정이 총력을 기울여 저를 예배에 참석을 시키고 신앙 교육을 했을지라도 그 것은 제게 오히려 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삐뚤어 졌으니 그 죄가 더하도록 되면 되었지 효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저로서는 일곱까지 신앙의 가정에서 신앙의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제 개인의 감상에 젖어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제 신앙 내면에 7 년의 빈 곳이 있음과 이로 인해 제가 해야 할 일, 맡을 자리, 판단하고 앞 서서 나가야 할 곳곳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으니 총체적으로 말하면 저로 인하여 부실이 생겼다면 제 여러 단점 중에서 어린 7 년의 세월이 신앙 세계 안에서 불신앙이었던 때를 먼저 짚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첫 출석)
일곱 살에 창동교회 주일학교 유치반에 첫 입학을 했습니다. 믿는 가정 안에서 교회를 전혀 다니지 않고 불신자로 버려 둔 아이가 이제 교회에 정식 교인으로 초청을 받아 가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회고를 듣다 보면 교회와 어른들은 아직 교회 갈 때가 되지 않았다 하는데 뭔가 끌려서 억지로 따라 다녔다는 분들 또는 공회 내에서도 백 목사님께 가까이 지도를 받던 분들은 너무 당연히 그렇게 어린 시기의 아이들을 마음 먹고 꾸준히 교회로 데려 다니고 집회까지 일부로 참석 시킨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들과 저를 비교하면 달리기 경주에 3 분의 1 지점에 먼저 도착한 선수처럼 부럽습니다. 이런 과거라는 것은 훗날에 보충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대체가 되거나 상쇄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평생 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장애로만 남아 있습니다.
첫 날 교회를 갈 때는 집에서 옷이나 여러 가지 준비를 남 다르게 해 주었기 때문에 굉장히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당시는 예배당이 마루였고 남녀반에 학년별 선생님이 한 분씩 계셨으며 반마다 3 - 4 명이나 많아야 4 - 5 명의 학생을 원으로 앉혀 놓고 가르쳤습니다. 유치반이니 제일 앞 자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두 번이나 갔을지 모르는데 갑자기 학교를 한 해 당겨서 일곱 살에 집에서 1백 미터 거리에 있던 거창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환경과 자기 책임)
타 교단은 전부가 유치반이 되어야 입학을 시켰고 공회도 제도적으로 그러했고 또한 변환기를 겪으면서도 제가 다닌 교회는 새로운 체제를 늦게 적용했기 때문에 7 세의 어린 아이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저와 같은 경우의 이런 불신 시절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될 시기에, 가져서는 안 될 불행을 가지게 된 것이 전적 제도에 의한 것이니 제 책임은 없는가? 저는 이 노선의 사람이고 이 노선의 중심에서 이 노선을 설파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 노선은 이 면을 두고 인정사정 보지 않고 아주 단호합니다. 6.25 전쟁에 출생한 사람은 그 사람이 그런 극단적 어려움 속에서 출생을 해야 하는 자기 책임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보이는 것만으로 전부를 삼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환경 탓에 부모 탓에 남 탓만 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오늘 교계의 책임 문제는 이런 쪽으로 일색입니다. 불신자라면 차라리 운명의 탓이라도 한다면 남 탓을 하는 것보다는 좀 낫고, 교인이라면 주권과 예정에 돌리는 것이 차라리 좀 나을 것인데 외견상 환경에 의하여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면 모든 화살을 그 환경과 그 외부에 다 쏟아 버립니다. 불신자라면 안목이 좁은 것이고 교인이라면 불신자적 언행입니다.
왜 제게는 7 세가 되기까지 믿는 가정에서 불신 시기를 갖게 되었던가? 외견적으로는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그렇고 공회적으로는 1962년에 모교회인 서부교회가 옳고 좋은 제도를 확립 시켰으며 지교회에 바로 지시를 하면 되는 일인데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 버려 둔 것이 문제고, 제가 다닌 교회 입장에서는 조사님의 책임이며 가정에서는 유아의 인체와 마음의 최초 형성기에 신앙 부분은 비워 둔 것이니 가정은 누구 책임이라 할 것도 없이 가정 책임입니다. 가정 안에서는 누구의 책임인가? 따져 보면 제 책임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노선은 100 % 환경의 책임이라고 보이는 바로 이런 극단적인 경우에도 피해자인 제가 100 % 저의 책임 문제라고 확정을 지우도록 가르칩니다. 다른 철학이나 종교나 다른 교회의 교리와 비교할 때 이 노선의 교훈이 보다 심오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만든 논리일까? 성경을 그냥 읽지 않고 그 안에 담아 두신 내용들을 접해 갈수록 또 성경 전체의 내용을 연결 지우며 공부해 갈수록 모든 것은 하나님과 자기의 둘 관계가 변수이고 이 둘 관계에서 하나님은 절대자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문제는 자기에게로 귀착이 됩니다. 성경이 그렇고 실제가 그렇고 관찰이 그렇고 논리적으로도 당연합니다. 이런 세계를 모를 때는 저의 7 세 전까지의 불신 세계는 하나의 어린 시절 이상도 이하도 될 필요가 없는데 제게는 제 신앙의 결손 시기, 그 결손 시기가 제게 주어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저라는 존재, 그런데 오늘은 제가 활동해야 하는 사명이 있고, 이 사명과 이 지난 날의 결손의 상관 관계를 놓고 볼 때 저로서는 통한의 시기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고, 매사를 두고 아쉬울 때마다 더듬어 보면 가장 오래 되고 근본에 깔려 있는 배경에는 결손적 신앙이 있습니다. 집안의 사회적 출신이 거지 성향인데 신앙의 첫 출발이 결손 신앙으로 밑바닥을 다 닦아 버리게 되면 그 위의 건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신앙의 부실, 제 활동 속에 늘 광범위하게 깔려 있는 결손적 문제점, 이런 것이 잘 보이지 않던 때는 용감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태생적 근본적 부실이 잘 보이고 이런 것이 잘 보일수록 허장성세, 외화내빈, 빈수레의 요란한 소리, 용두사미, 태산명동 서일필... 이런 단어가 크게 들립니다. 백 목사님의 제게 대한 유언적 몇 말씀들도 이 노선 자료 공유 차원에서 소개 드릴 기회를 찾겠으나 그 중 이 부실 문제와 관련하여 1989년 1월 5일 저녁 8시 30분경, 서부교회 중간반 사경회를 인도하던 제게 강단 위로 목사님의 메모가 전달 되었고 그 메모를 받고 바로 강의를 중단하고 목사님이 계시던 5층으로 가 뵙자 한 말씀을 꼭 짚어 주신 것도 이 문제였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저와 이 글을 적고 있는 현재의 저는 사람 자체가 다릅니다. 그 때는 그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몰랐고 지금에서야 그 소리가 제 마음 속에서 갈수록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있습니다.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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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선의 높이 때문에
: 이 노선에서 맡은 자료와 연구 책임 때문에
: 제가 할 수 없는 말, 입에 담기 민망한 표현을 이 곳에서 쏟은 적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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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이 있다면 남을 향한 비판으로 자기를 향해 비판해야 할 것이고
: 신앙이 있다면 남 정도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자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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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선에서 배울수록
: 이 홈에서 많은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안내를 할 때마다
: 제 마음 속에 늘 후회스럽고 고통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지난 일들을 자백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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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은 좋은 것뿐 아니라 잘못 된 것을 말해도
: 결국은 돌고 돌아서 교묘히 제 자랑으로 변질이 됩니다.
: 이 노선에서 이런 것까지를 배웠으니 다행스럽게도 그런 위험성까지를 염두에 둘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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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 개설 초기부터 공회 안팎에 쏟아 낼 비판이 많았으므로
: 저만 아는 제 지난 날의 제 잘못을 자백하고 스스로 매를 들어 칠 기회를 찾았으나
: 신앙 생활에 정말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잘못을 해 놓고도 자백할 기회를 찾는 것인데
: 이제는 때도 되었고 더 늦출 수도 없고 또 시대적 사명으로 나가기 전에 미리 이 시점에서 적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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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목사님을 제대로 모셔 본 사람마다 간증하는 것 중 하나는
: 어떤 위대한 사람도 가까이 다가 가게 되면 다가 갈수록 실망을 하게 되는데
: 백 목사님은 위대하여 존경하고 가까이 다가 가 보면 다가 갈수록 더 존경스럽다 합니다.
: 이런 분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의인이며 성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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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수준의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 멀리서 볼 때는 제법 사람답게 보일 수 있는데
: 실제 가까이 다가 와서 생활 속에 접해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인데
: 세상 말로 재수가 좋아서 줄을 잘 섰고 때를 잘 만나서 횡재를 한 꼴이니
: 이런 사람은 졸부처럼 그 속을 뒤져 보면 아주 우습지를 않은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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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스럽게 남이 알지 못하는 제 속에 그런 잘못 된 점을
: 하나씩 이런 곳을 통해 미리 적어 놓아야
: 훗날 이 노선의 위치가 더 높아 질 때 최소한 이 노선을 전하는 저 때문에
: 이 노선을 직접 상대하여 한 없이 발전할 분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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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세를 감당할 수 있도록
: 말세의 큰 빛과 함께 대로를 마련해 주신 이 노선에 감사하며
: 이 노선의 입구에서 안내문을 나누는 사람의 못난 과거 이야기를 좀 담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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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일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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