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랫길의 선택, 방향이 정해 지면 한 없이 멀어 진다.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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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갈랫길의 선택, 방향이 정해 지면 한 없이 멀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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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교회 묘소의 불교 대사 묘소)
길이 같으면, 아무리 차이가 나도 거리 문제만 있다. 따라 가면 된다. 말하자면 더, 오래 살면 해결 되는 경우가 참 많다.
길이 다르면 나란히 가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영영 만나지 못한다. 길이 다르면 가는 세계가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
그래서 공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선'이라는 말을 한다. 고신의 초기가 그랬다. 교회가 건전하면 어느 교회든 그러하다.
부부 자녀로 산다 해도, 종교의 노선이 다르면 천국과 지옥이다. 같은 기독교라도 노선이 다르면 평생을 살고도 다르다.

국내 제일 유명한 절의 조실이 서부교회 묘소에 있다. 일제 때 숭실학교를 맡은 평양 부자의 아들이 주지 위에 조실이고
그의 여동생 남편 정기수는 숭실학교 교장을 지냈고 함석헌 등이 교사였다. 해방 후 조만식의 외무를 맡은 측근이었다.
이 조실은 일제 때 유학을 했고 최 부자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가출하여 그 유명한 절에서 평생 도만 닦은 참선 중이다.
그가 한창 때 제천의 공회 교회를 개척한 여동생 집에 갔다가 백영희를 만났다. 몇 마디만 나눴으나 가슴에 박혀 버렸다.

동생은 오빠가 흔들린 모습을 알았다. '오라버님, 돌아 서세요. 영생 문제입니다.' '길을 잘못 섰어. 너무 많이 와 버렸어'
여동생이 모두 공회 핵심에 사위들이 공회 목사다. 그 절을 찾아 한 말씀씩 건넸다. 조실 대사는 서부교회 묘에 묻혔다.
너무 많이 갔다 해도 돌아 서면 빠를 분인데 뭐가 곤란했을까? 임종 때 그 절에서 알면 종교 전쟁이 벌어 진다며 막았다.
출상 날 교회 마당에 무술? 중 1백여 명이 들이 닥쳤다. 서부교회가 세계 10대 교회 규모고 법조인 조카가 막고 나섰다.

일반 중 하나가 돌아 서도, 종교 전쟁으로 비화 되며 언론에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불교계에 황장엽의 망명 정도였다.
불교계는 실명을 피하면서 대사의 가족이 돈 문제로 장례를 어지럽힌 것처럼 덮었다. 확전하면 타격이 엄청 날 일이다.
이런 선택은 천국과 지옥의 결정이니 일단 이 곳의 우리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다 함께 천국은 가지만 모든 택자 모든 중생 된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 진 사명과 천국의 모습을 두고 선택을 하게 된다.




(돌아 올 수 없는 선택)
먼 거리의 출장 약속을 잡아 놓고 고속도로를 선택했다가 길을 혼동하면 약속은 지킬 수 없다. 이런 것을 노선이라 한다.
서울의 완벽해 보이는 지하철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한 번 잘못 선택하고 올라 타면 약속 시간은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서울공회는 공회였던 과거까지 잊자는 길을 걷는다. 대구공회는 이 좋은 공회를 교계 식으로 운영하면 좋다는 노선이다.
부산공회는 이 좋은 공회의 교훈을 공회 식으로 운영하면 더 좋다는 노선이다. 그 방법에 따라 4 가지 정도가 따로 간다.

서울로 가는 것이 좋으나 걸어서 갈 것인가, 고속버스가 좋을 것인가, 기차로 갈 것인가, 가면서 좀 둘러 보고 갈 것인가..
방법론만 가지고 보면 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방법론 안에 노선적인 문제가 있다면 갈수록 멀어 진다. 아주 달라 진다.
부산공회는 기본적으로 같은 노선이다. 그런데 속에 든 생각과 자세와 방향이 다르면 길 자체가 다른 것처럼 달라 진다.
노선과 노선의 차이가 많을수록 다시 시작할 때 돌아 서기가 어렵고 만회가 어렵다. 멀수록 돌아 서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전과는 비교적 쉽고 편입은 어려우며 전공과 학교를 함께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 의사가 노가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일이 없어 지고, 교회와 예배가 사라 지는 상황을 급한 마음으로 연구소가 집중해서 들여다 보고 있다.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예외 없이 처음에는 쉽게 생각을 했다. 또 좋게 생각을 했다.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해방 후 남북이 처음 나뉠 때는 오늘처럼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일찍 오간 사람은 바꿀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를 운영하다 보면 교회가 전력해서 이끌어야 하는 불신자, 초신자, 어려움을 겪으며 흔들리는 교인들이 항상 있다.
이들을 붙들어 주기 위해 사력을 전력하는 것이 교회다. 사력을 다해서 될 일이 있고 그를 잃어도 해서 안 될 일도 있다.
멀리서 오느라고 예배 때문에 고생을 하는 교인, 그에게 교회 주변에 와서 살던 조금 일찍 준비하면 된다는 말이 어렵다.
남편과 시댁은 안 믿고 학교와 직장이 묶여 있는 교인이 첫 은혜를 받고 기회를 달라고 사정을 한다면 거절할 수 있을까?

예배 시간을 조금 늦춰 주거나 1 부와 2 부 예배로 분할을 해서 그 교인의 초기 어려움을 넘기고 좋은 교인이 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가 부러워 하는 한국 교계가 되었다. 한국 교회의 모든 성공한 교회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곳이 있을까?
공회는 교회의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주변의 다른 교회를 다니거나 조금 지각을 해도 시간에 맞추도록 노력을 하라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며 율법주의라고 정죄한다. 교회와 예배에 대한 자세가 잘못 되면 교회와 예배가 오늘처럼 이렇게 된다.

어린 교인을 위해 다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린 교인이 아무리 떠난다 해도 교회와 예배란 지켜야 할 것도 있다.
공회보다 예배와 주일을 훨씬 엄하게 지켜 내는 교회도 있다. 이런 교회의 공통적인 점은 그렇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구도 강하게 시작할 수 있다. 몇 년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공회는 일제 때부터 오늘까지 늘 한결로 내려 왔다.
주일과 예배의 기본 방향과 자세를 바꿔 본 적은 없다. 교회가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을 노선이라고들 한다.



(교회와 예배의 노선)
* '교회'란
머리를 보면 교회인지 바로 판단이 나온다. 교회의 두목이 목사라면, 교인들이라면, 장로님이라면, 또는 교단이라면?
머리가 주님일 때의 교회만 교회다. 그 단체 그 학교 그 가정에 머리가 누군가. 그 교회의 최종 머리는 주님이 확실한가.
머리가 개면 꼬리를 조사한다고 애 먹지 않아도 된다. 머리가 말이면 발톱을 본다고 애 먹을 것도 없다. 교회의 머리는?
말로는 전부 주님을 머리라 한다. 절에 중도 돌부처를 팔고 성당도 마리아를 판다. 목사와 교인이 주님을 팔지 않을까.

이유여하 막론하고 백영희가 두목인가, 백영희의 말이 옳으니 그 말을 따르는 것인가? 칼빈주의는 덮어 놓고 칼빈이다.
칼빈의 말은 전부 옳다고 쳐 놓고, 애매하면 갖다 붙여서 합리화를 해 버린다. 공회도 그런가? 그렇다면 교회가 아니다.
교황이 두목이고 신부가 측근이면 교회가 아니다. 목사나 교인이 겨뤄 보고 두목을 정한다면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규정이 머리 된 교회도 있다. 이런 교회를 체계화 되었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좋은 교회라고 한다. 실은 교회가 아니다.

공회가 말하는 교회는 주님이 머리 된 교회만 교회다. 주님이 머리면 옳은 것을 따른다. 옳은 것은 하나니 주님 것이다.
진리가 머리 되면 주님이 머리라는 뜻이다. 선배 앞에 눌리는 교회, 세계 신학의 통설에 눌리는 교리, 그 무엇이라 해도.
옳은 것만 따르고 옳은 것이 아니면 전원이 찬성해도 한 사람의 반대를 꺾지 못하고 꺾지 않는 교회, 공회 교회관이다.
주님만 머리로 삼은 교회. 말이 아니고 실제 그렇게 되도록 일단 구도와 방향을 잡아 뒀다. 다른 교회는 구조가 다르다.

코로나를 두고 교단의 본부가 발표하면 밑에서는 알아서 따라 간다. 노회가 결정하면 지방의 각 교회는 노회를 따른다.
노회 총회도 어렵게 되면 신학교에 의뢰 한다. 신학교 교수회가 결정하면 따라 간다. 이 모든 결정은, 모두 다수결이다.
그래서 구조적으로 교회가 될 수 없는 구조이다. 말로는 화려하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치밀 정밀하게 적어 둔다.
오늘 교회가 없다는 말은 교회이 출렁이면 목회자가 따라 가 버린다. 교인을 잘 움직이면? 그 목회자가 교회의 머리다.


* '예배'란
교회라 할 때 '머리'를 따지듯이, 예배라 할 때는 자세를 본다. 주님이 머리며 그 주님께 예배를 한다면 조심하는 것이다.
예배란 주님을 섬긴다고 말들은 모두 한다. 실제 조심하는지 행동을 보면 안다. 주님 좋은 대로 주님 중심으로 하는가?
말은 주님 앞에 조심한다 해 놓고 제 멋대로 하는가, 누구 좋은 대로 하는가? 세상 따라 하는가? 종은 자세를 보고 안다.
천주교처럼 과거를 중시하는 곳은 예배가 일단 조심스럽다. 이 것은 좋다. 그런데 그런 조심이 체질인가 주님 때문인가.

뛰고 싶은 사람은 주님이 뛰기를 원한다며 주님을 판다. 악을 쓰고 싶은 사람은 주님이 악 쓰는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한다.
신학 강좌를 하고 싶은 사람도 그렇게 말을 한다. 찢어 진 청바지 입고 나온 사람은 주님이 소탈한 것을 좋아 해서 그런다.
불신자가 제사 할 때 습관인 사람, 마지 못해 하는 사람, 죽은 귀신이 되어 찾아 오는 줄 알고 조심하는 사람이 표시 난다.
예배를 주님께 맞추면 예배, 자기나 주변이나 분위기에 맞추면 예배처럼 보일 뿐이지 예배는 아니다. 예배는 자세에 있다.


* '설교'란
예배 안에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으로 대략 구분한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전한다면 예배의 설교라 할 수 있다.
제 지식을 선전하는 사람, 제 입장을 발표하는 사람, 자기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 듣는 사람의 감동을 끌어 내는 사람들.
별별 종류가 있다. 예배의 설교는 머리 되신 주님 앞에 주님의 뜻이 뭔지를 살피며 그 뜻으로 회개를 하고 결심을 한다.
형식은 설교자를 통해 듣지만 전하는 설교자나 듣는 교인이나 모두가 그 시간에 주님의 뜻을 살피고 배우고 확인 한다.

설교가 길다고 줄이라면? 설교자는 주님 뜻을 전하는 것이 서툴어 문제고 줄이라는 사람은 지금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설교 내용을 간여하는 사람? 전하는 사람의 잘못과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좋으나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설교가 어렵다는 사람? 설교자는 쉽게 전하려 노력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주님께 자기 마음을 직접 열어 달라 해야 맞다.
설교 내용이 자기와 반대 되면? 성경에 맞는 말이면 자기를 고치고 수술하는 말씀이다. 반발하는 자기를 잡아야만 한다.


* '찬송'이란
음악회와 예배의 찬송은 다르다. 예로 부터 교회의 찬송은 성가대나 독창 등의 이름으로 음악회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주님은 빼 버리고 인간들끼리 모여 술 집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고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듯이 교회의 노래로 친다.
찬송은 주님께 '감사'다. 주님의 대속에 감사며 주님의 여러 은혜에 대한 감사 감격이다. 주님의 은혜가 앞에 가야 한다.
그 감사와 감격을 잘 표현하고 북돋우면 찬송이다. 찬송을 부르고 듣는 자기 마음이 좋아 진다고 찬송 되는 것은 아니다.

체질적으로 클래식 좋아 하는 사람은 찬송도 클래식으로, 원래 팝송을 좋아하면 찬송도 굳이 팝송식으로 부르려고 한다.
예배도 찬송도 알지 못하고 자기의 흥 풀이, 자기의 기분 풀이, 자기의 취미 생활 정도로 안다. 오늘 찬송이란 거의 없다.
오늘 설교를 찾기도 어렵고 찬송을 접하기도 참 어렵다. 현재 교계가 함께 사용하는 찬송은, 목록만 봐도 찬송은 아니다.
기도는 절의 염불인지 무당 굿판에 옹알이인지 누구의 한풀이인지 모르겠다. 마6:7에서는 중언부언 불신자 염불로 본다.


* '기도'란
애타는 '간구'를 기도라 한다. 설교는 주님 뜻을 찾아야 하고 전해야 하기 때문에 '정확성'이 중요하다. 미리 적어도 좋다.
기도란 정확한 의사 전달에 있지 않다. 우리가 구할 것은 미리 아신다 했다. 다만 우리를 구하게 해서 주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란 말을 잘하든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은 이미 아시니 애 터지는 내 간절, 그 자세 그 애절이 기도의 중심이다.
예배의 대표 기도라면 모두가 알아 들을 정도면 충분하다. 대표 기도의 발표와 진행과 표현이 서툴어도 이 것은 괜찮다.

타 교단에서 먼저 시작을 했고 우리 공회에 까지 물 밀듯이 밀고 들어 오는 풍조는 기도문을 준비해서 읽는 대표 기도다.
기도문을 미리 준비하면 내용은 정확해 진다. 설교는 정확히 전달할 자신이 없으면 원고를 만들어 전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러나 기도는 애 터지는 중심, 마음, 애절한 자세를 가지고 교인을 대표하여 부르짖는 것이다. 기도문의 발표가 아니다.
어떻게 하다 이제 공회 곳곳, 가장 공회다워야 할 곳의 주일 강단까지 기도문을 읽는다. 기도가 뭔지를 가르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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