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인도(7) - 80년대 서부주교의 비상 대책들 : 선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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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0 21:49
1979년까지 서부주교는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나도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그림 같은 시절을 가졌다.
매주일 오전 8:30, 부산의 서구 동대신1가 381번지에 초등 6년 이하의 출석수 8천 명이 몰려 들었으나 이후 상황이 문제였다.
1979년의 언론 보도가 시작 되며 전국에서 몰려 드는 견학팀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고 80년대가 시작 되며 파고가 밀어 쳤다.
거의 전부 불신 가정에서 데려 오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만으로도 휘청일 정도인데 계속 되는 요인들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80년대식의 서부주교의 대처)
1982년, 주일학교의 현장 총 지휘자가 교체 되었다. 1970년의 1천 명 주일학교를 8천 명까지 가파르게 발전만 시킨 전임자..
그는 백 목사님께 입 바른 소리를 하는 실무자였다. 양심적이고 양식적이며 열정적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불만이 쌓여 갔다.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되자 목회를 내 보냈다. 목회자가 되고 보면 다 알게 된다. 엄마의 심정을 모르면 아이를 낳아 보면 된다.
후임에 매주 1 개 반에 300 명 이상을 출석 시킨 주교 최고 성적의 인물이 주교를 책임 지게 되었다. 이 분은 무조건 순종한다.
후임자에게 떨어 진 최우선 과제는 1천 명을 8천까지 올려 놓은 서부주교를 80년대의 악화 된 여건에서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과제에 필요하면 죄 되지 않는 것은 거의 다 허용했다. 죄 되지 않는다는 뜻은 정확하게 서부 주교의 근본 방향을 말한다.
일자와 숫자까지 기록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 적을 수 있으나 훗날 논문으로 발표할 분에게 맡기고 대략만 적어 본다.
* 연 1 회 시상식이 2 회가 되었다.
1 년에 몇 회 시상이 서부식인지 기준은 없다. 서부식은 예배 외의 행사는 최저치로 간다. 타 교회는 당연히 최대치로 간다.
아이들에게 선물이나 상품처럼 세상 것으로 유인하지 않는 것이 서부주교다. 역사적으로 내려 온 연말 시상 딱 하나만 했다.
1982년에 바뀐 책임자는 1월 말에 전도한 학생이 태풍과 설 추석 명절까지 주일을 지켜도 개근상을 받지 못함을 지적 했다.
이런 문제점은 실제 판자촌 골목을 훑고 다닌 반사에게는 너무 절박했다. 불신 가정의 어린 주교생의 상실감은 너무 심했다.
서부주교는 규모 때문에 유동 학생이 넘친다. 그 중에 너무 귀하게 붙든 아이가 낙심을 하는데도 제도 때문에 잘라야 할까?
이런 경우를 구제하기 위해 연 1 회 시상을 2 회로 나눠 전반기 후반기로 시행을 했다. 당연히 즉효가 있었다. 이후가 문제다.
한 번 완화 시켜 효과를 보면 연 4 회로 가고 싶어 진다. 연 2 회는 허락을 했으나 그 이상은 단호히 막았다. 참 절묘한 조처다.
1 회를 2 회로 늘린 조처를 인본이라는 내부의 비판도 있었다. 2 회까지 늘린 것은 모든 면으로 볼 때 허용 가능 범위로 본다.
* 요절지와 출석표 모음집도 있었다.
매주 받는 요절지는 예배 후 돌아 가며 대부분 버리고 간다. 교회로부터 방사선으로 사방에 요절지가 온 골목에 버려 졌다.
불신 가정에서 빠져 가며 나오는 학생들의 일반 수준이 그렇다. 교회 주변의 불신자들의 시선도 따가 왔고 우리도 미안했다.
이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요절지 52장을 페이지마다 붙이게 하고 연말에 제출하면 시상을 했다. 어쨌든 상품 항목이 늘었다.
이 것도 연 2 회로 시상이 되자 시상식에 상의 종류가 배로 늘었다. 여기에 주일과 수요 오후 출석표를 만들어 제출하게 했다.
아직은 타 교회들에 비해 시상도 체계화도 또는 인본이라는 표현도 가당치 않았다. 불신 가정의 아이들을 챙기는 정도였다.
문제는 어디부터 인본이냐는 것이다. 최소화를 추구하는 서부식의 최소화 범위 안인가, 아니면 일반식으로 나가고 있는가?
일선 반사로 열심히 뛰면서도 주교와 공회 노선의 본질을 아는 이들은 의문으로 지켜 봤고 대부분은 잘 활용할 뿐이었다.
어떤 예외도 없이 운영 되던 주교가 80년대부터 한 가지씩 새로운 방법이 허용 되면서 당시의 어려움을 힘겹게 대처했다.
* 지각 학생의 처리 문제가 등장했다.
불신 가정에서 30 분 이상 걸리는 거리의 30여 명 이상을 데려 오는 반사들에게는 한 손에 데려 오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일부는 먼저 보내고 일부는 데려 오고, 그리고 준비가 덜 된 학생은 보조 반사나 큰 아이나 여러 방법으로 뒤에 오게 한다.
81년부터 시작한 TV의 만화 영화가 8시 40분에 끝난다. 다 봐야만 집을 나서는 학생들이 있다. 지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의 관리가 정규 학교나 타 교회처럼 학생수가 명확하면 관리에 어려움이 없다. 서부주교는 규모 때문에 파악이 어렵다.
예배 중 물 마시러 가는 학생, 화장실 갔다 오는 학생, 덩달아 바람 쐬러 나가는 학생, 반마다 학생이 많으니 통제가 어렵다.
그 넓은 마루에 반 표시도 없이 뒤섞였고 너무 늦거나 비가 오면 자기 반까지 들어 가기 어려워 입구에 서성거리기도 한다.
학생은 비록 지각은 했으나 출석은 했다며 출석표를 요구한다. 반사는 출석수가 성적이므로 당연히 출석에 포함을 시킨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아주 애매한 경우들이 생긴다. 예배당 입구에 서 있었는지 안을 한 번 쳐다 보고 마당에서 놀다 갔는지..
70년대는 폭발적으로 부흥이 되고 있어 너 아니라도 학생은 넘쳐 라는 말이 통할 수 있었다. 장악력을 위해 강하게 나갔다.
80년대에 70년대처럼 유지를 하려니 1 명의 학생이 아쉽다. 대 놓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나 애매하면 유리하게 보고한다.
이런 사례가 늘자 주교생이 8:30 예배에 지각인지 결석인지 애매할 때 장년반에 출석 시키면 주교 출석으로 인정을 해 줬다.
주교 예배는 50 분 정도다. 장년반 예배는 1 시간이 넘어 간다. 장년반 예배도 어깨끼리 부딪힌다. 아이들로서는 고통이다.
그러니 더 쉽게 하려고 장년반에 앉는 경우는 없다. 반사의 손이 미치지 못한 학생을 그냥 둘 수 없어 더 챙기자는 뜻이었다.
장년반에 출석 시킨 학생을 주교 출석으로 인정하자 반사가 여러 사정으로 놓친 학생들을 장년반에 대거 출석을 시켰다.
주일 오전 8:30~9:20에만 예배당에 앉히는 것과 10:00~11:00 장년반에 추가할 수 있는 기회는 출석 총수에 크게 도움 된다.
8:30 예배의 지각이나 피치 못한 결석생을 위해 허락을 했으나 마음 먹고 주일 오전 예배를 2 회로 활용하는 사례가 생겼다.
하나의 예외는 다른 예외로 가지를 치며 나무가 무성해 진다. 그 대신 열매는 부실해 진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뽑힐 수 있다.
반사 별로 활동 거리나 위치에 따라 주교 오전을 장년 오전에 보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구조적으로 안 되는 반도 있다.
이들이 오전 예배의 출석은 주교 오전, 장년 오전, 장년 오후 예배까지 포함을 시켜 달라고 했다. 이 것도 허용이 되어 졌다.
이렇게 되자 장년 오전에 보충 못한 반사만 장년 오후를 활용한 것이 아니라 장년 오전 오후를 다 활용하는 반사도 생겼다.
장년반 예배로 말하면 주일 오전과 오후 예배 중에 오후 예배를 없애고 오전 예배를 1부 2부 3부로 나누는 것과 같아 진다.
이렇게 되면 예배의 단일성이 깨진다. 다만 타 교회가 예배의 단일성은 모르고 교인의 생활 편리를 위해 쪼개는 것과 달리
서부 주교의 이런 상황은 주교 오전 예배는 주교 오전 1 회로만 유지하면서 지각이나 결석 학생의 보충만을 위한 것이었다.
같아 보이나 예배 단일성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보충은 보충으로 끝이 났다. 또 주교생의 장년반 출석은 하라 해도 어렵다.
* 문제는,
80년대의 사회 발전으로 판자촌의 정비와 집단 이주, 과외 금지, TV 보급, 주말의 가족 일정이 모여 주교 환경이 달라 지듯
80년대의 누적 되며 동시 다발로 밀려 드는 주교의 어려운 환경에서 70년대처럼 주교를 유지하려 여러 대책을 내다 보니까
초대교회의 단순하며 단일성의 은혜적인 주교 예배가 비록 타 교회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도 스스로 볼 때 너무 달라 졌다.
70년대의 끝자락을 본 견학인들이나 80년대 끝까지 왔던 견학인들의 놀라움은 모두가 같았다. 규모가 크니 파악을 못했다.
그러나 주교 전체를 보던 몇몇 지도부는 80년대 식의 주교가 이대로 가다가는 타 교회처럼 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서부주교는 백 목사님의 목회 원칙에 따라 총 책임자 1 인에게 전권을 맡기다 시피 한다. 최대한 지원을 아까지 않는다.
뭔가 일반식으로 가는 느낌을 갖지만 어디쯤에서 중단을 시킬지는 목사님이 결정한다. 실무 책임자는 조처를 이어 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교 책임자가 이전과 확실히 다르게 주교를 운영한다고 보였고, 아는 사람은 목사님의 통제 범위였다
이런 상황은 1982년에 임명 된 책임자가 70년대 주교보다 비교 못할 여건에서 그 때처럼 유지하려다 보니 나온 대책이고
백 목사님은 이럴 지켜 보며 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80년대 식은 인본이고 이미 타락을 했다고 생각하는 내부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회 내에서 대 놓고 지도부를 비판했다. 새로운 책임자가 일일이 목사님께 보고하고 조처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백 목사님께 대한 반발이었다. 백 목사님은 인본이 되어 가고 그들은 70년대 서부 주교를 일으켜 세운 신본이라는 정도였다.
실명으로 적었으면 좋겠으나 지금은 그들의 사전 동의가 없으면 경찰 검찰 법원을 늘 오가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적는다.
후임을 비판하는 쪽은 스스로 교회 주류며 본류며 공로자며 교회의 전부다. 그 쪽 출신 중에 돌아 선 이는 훗날 단 1 명이다.
참 우습고 안타까운 것은 그 1 명은 자신이 그런 데 가담한 적이 없다는 정도다. 그들 중 제일 핵심이었는데, 그는 몰랐다.
그는 사람이 좋고 신앙이 좋아서 그가 함께 한 이들의 비판적 고라적 반발까지 몰랐을 듯하다. 사람 좋기는 틀림이 없다.
바로 이 상황이 백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와 공회가 그렇게까지 분쟁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노선이 나뉘게 된 초기 모습이다.
꼭 같은 것을 봐도 서로가 반대였고 달랐다. 정말 그렇게 다르다면 서로 옳다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열매로 안다.
비판하는 이들의 비판은 구구절절 다 옳았다. 새 책임자의 조처는 제1의 사명이 주교의 유지였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한 순간의 단면만 보면 비판도 맞고, 주교의 변화도 노선을 벗어 난 정도는 아니니 과도기의 여러 대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정말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은 세월을 통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안다. 그 때 비판 측은 지금 일반 교단화로 다 나갔다.
그 때 신임 책임자는 비판 측보다 백 목사님 사후에 더 멀리 가 버렸다. 주교의 본질을 알지 못하여 발생한 우발 충돌이었다.
비판측의 신본은 그들에게 주어 진 70년대와 80년대를 혼동했다. 새 책임자는 80년대를 대처하다 방법론만 남아 버렸다.
오늘 코로나를 대처하다 발생하는 일도, 또 오늘 교계가 주일과 교회와 예배를 해체하는 과정을 보는 공회의 대처도 그렇다.
코로나에 실시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비판하는 교회는 알지 못한다.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두고만 서로 다른 정도다.
1989년 백영희 사후 재독을 교계의 비판은 예배를 몰라서 나온 것이고 그 때 방송 예배를 드린 곳은 예배를 모르고 했다.
예배의 본질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 결국 자기 지식을 따라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거의 다 실패한다. 미리 알고 기름 준비를 해도 부족해서 실패를 하는데 준비가 아예 없이도 성공을 하겠는가?
지금 교회들이 과거 교회와 다른 교회로 운영 된다. 공회 기준은 물론 그들 과거 기준으로 봐도 그렇게 되면 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들의 주일은 70년대부터 이미 그들이 주장한 과거 주일과 다르다. 과거가 옳다면 교계 주일은 오래 전에 없어 졌다.
그 교 회들의 예배 역시 80년대를 넘어 서면서 거의 다 없애 버렸다. 오늘 예배를 유지하는 곳은 거의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공회에는 예배를 지켜 내는 교회가 몇 곳은 있어 보인다. 내려 온 관습 때문에 지키지 알고 지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잠깐, 요약을 하고 넘어 간다.)
70년대 주교는 과거 서부주교의 모습과 원칙을 다 지키며 경이적인 발전을 했다. 광야 40 년과 비교할 정도였다.
80년대 주교는 마치 가나안에 들어 간 주교의 모습이다. 광야 40 년을 경험한 이들이 만나가 신본이라면 맞는 말일까?
광야 시절이 끝이 났고 이제 가나안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시기라 하여 농사를 짓되 영농의 방법론만 개발하면 신본일까?
나는 양비론이 싫으나 한 번씩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80년대 주교가 70년대 주교의 원칙과 모습을 잊지 않았어야 한다.
80년대의 변화 된 현실을 통해 인도하시는 주님 앞에 70년대를 기억하면서 몇몇 조처를 신중하게 잘 사용했다면...
80년대의 변화 된 현실에 대처를 한다며 하나씩 꺼내 들었던 과도기의 작은 조처들이 모이고 쌓이면서 선을 넘고 있었다.
백 목사님은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자신이 곧 별세할 것을 알았다. 자신이 가면 교회도 주교도 알아서 운영을 해야 한다.
백 목사님이 여전히 생존한 상태에서 백 목사님은 공회도 서부교회도 서부주교도 웬만하면 하는 대로 지켜 보고 있었다.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간섭 간여 지도를 최소화 하면서 그의 사후 각 책임자가 단독으로 결정할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선을 넘을 때만 조용히 그리고 단호히 한 번씩 못을 박았다. '이 것은 아니다!' 그 외에 웬만한 것은 그냥 두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직접 겪어 봐야만 알고 자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를 향해서도 나를 향해서도 누구에게도 같았다.
바로 이 시기에 백 목사님이 최소화로 표시를 하자 콕 찍어서 금하지 않은 것은 마치 지시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이 백 목사님 사후 백 목사님 특별 지시를 받아 뒀니, 또는 교계처럼 하는 것이 이제 필요하다 했니.. 혼란이 시작됐다.
매주일 오전 8:30, 부산의 서구 동대신1가 381번지에 초등 6년 이하의 출석수 8천 명이 몰려 들었으나 이후 상황이 문제였다.
1979년의 언론 보도가 시작 되며 전국에서 몰려 드는 견학팀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고 80년대가 시작 되며 파고가 밀어 쳤다.
거의 전부 불신 가정에서 데려 오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만으로도 휘청일 정도인데 계속 되는 요인들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80년대식의 서부주교의 대처)
1982년, 주일학교의 현장 총 지휘자가 교체 되었다. 1970년의 1천 명 주일학교를 8천 명까지 가파르게 발전만 시킨 전임자..
그는 백 목사님께 입 바른 소리를 하는 실무자였다. 양심적이고 양식적이며 열정적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불만이 쌓여 갔다.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되자 목회를 내 보냈다. 목회자가 되고 보면 다 알게 된다. 엄마의 심정을 모르면 아이를 낳아 보면 된다.
후임에 매주 1 개 반에 300 명 이상을 출석 시킨 주교 최고 성적의 인물이 주교를 책임 지게 되었다. 이 분은 무조건 순종한다.
후임자에게 떨어 진 최우선 과제는 1천 명을 8천까지 올려 놓은 서부주교를 80년대의 악화 된 여건에서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과제에 필요하면 죄 되지 않는 것은 거의 다 허용했다. 죄 되지 않는다는 뜻은 정확하게 서부 주교의 근본 방향을 말한다.
일자와 숫자까지 기록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 적을 수 있으나 훗날 논문으로 발표할 분에게 맡기고 대략만 적어 본다.
* 연 1 회 시상식이 2 회가 되었다.
1 년에 몇 회 시상이 서부식인지 기준은 없다. 서부식은 예배 외의 행사는 최저치로 간다. 타 교회는 당연히 최대치로 간다.
아이들에게 선물이나 상품처럼 세상 것으로 유인하지 않는 것이 서부주교다. 역사적으로 내려 온 연말 시상 딱 하나만 했다.
1982년에 바뀐 책임자는 1월 말에 전도한 학생이 태풍과 설 추석 명절까지 주일을 지켜도 개근상을 받지 못함을 지적 했다.
이런 문제점은 실제 판자촌 골목을 훑고 다닌 반사에게는 너무 절박했다. 불신 가정의 어린 주교생의 상실감은 너무 심했다.
서부주교는 규모 때문에 유동 학생이 넘친다. 그 중에 너무 귀하게 붙든 아이가 낙심을 하는데도 제도 때문에 잘라야 할까?
이런 경우를 구제하기 위해 연 1 회 시상을 2 회로 나눠 전반기 후반기로 시행을 했다. 당연히 즉효가 있었다. 이후가 문제다.
한 번 완화 시켜 효과를 보면 연 4 회로 가고 싶어 진다. 연 2 회는 허락을 했으나 그 이상은 단호히 막았다. 참 절묘한 조처다.
1 회를 2 회로 늘린 조처를 인본이라는 내부의 비판도 있었다. 2 회까지 늘린 것은 모든 면으로 볼 때 허용 가능 범위로 본다.
* 요절지와 출석표 모음집도 있었다.
매주 받는 요절지는 예배 후 돌아 가며 대부분 버리고 간다. 교회로부터 방사선으로 사방에 요절지가 온 골목에 버려 졌다.
불신 가정에서 빠져 가며 나오는 학생들의 일반 수준이 그렇다. 교회 주변의 불신자들의 시선도 따가 왔고 우리도 미안했다.
이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요절지 52장을 페이지마다 붙이게 하고 연말에 제출하면 시상을 했다. 어쨌든 상품 항목이 늘었다.
이 것도 연 2 회로 시상이 되자 시상식에 상의 종류가 배로 늘었다. 여기에 주일과 수요 오후 출석표를 만들어 제출하게 했다.
아직은 타 교회들에 비해 시상도 체계화도 또는 인본이라는 표현도 가당치 않았다. 불신 가정의 아이들을 챙기는 정도였다.
문제는 어디부터 인본이냐는 것이다. 최소화를 추구하는 서부식의 최소화 범위 안인가, 아니면 일반식으로 나가고 있는가?
일선 반사로 열심히 뛰면서도 주교와 공회 노선의 본질을 아는 이들은 의문으로 지켜 봤고 대부분은 잘 활용할 뿐이었다.
어떤 예외도 없이 운영 되던 주교가 80년대부터 한 가지씩 새로운 방법이 허용 되면서 당시의 어려움을 힘겹게 대처했다.
* 지각 학생의 처리 문제가 등장했다.
불신 가정에서 30 분 이상 걸리는 거리의 30여 명 이상을 데려 오는 반사들에게는 한 손에 데려 오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일부는 먼저 보내고 일부는 데려 오고, 그리고 준비가 덜 된 학생은 보조 반사나 큰 아이나 여러 방법으로 뒤에 오게 한다.
81년부터 시작한 TV의 만화 영화가 8시 40분에 끝난다. 다 봐야만 집을 나서는 학생들이 있다. 지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의 관리가 정규 학교나 타 교회처럼 학생수가 명확하면 관리에 어려움이 없다. 서부주교는 규모 때문에 파악이 어렵다.
예배 중 물 마시러 가는 학생, 화장실 갔다 오는 학생, 덩달아 바람 쐬러 나가는 학생, 반마다 학생이 많으니 통제가 어렵다.
그 넓은 마루에 반 표시도 없이 뒤섞였고 너무 늦거나 비가 오면 자기 반까지 들어 가기 어려워 입구에 서성거리기도 한다.
학생은 비록 지각은 했으나 출석은 했다며 출석표를 요구한다. 반사는 출석수가 성적이므로 당연히 출석에 포함을 시킨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아주 애매한 경우들이 생긴다. 예배당 입구에 서 있었는지 안을 한 번 쳐다 보고 마당에서 놀다 갔는지..
70년대는 폭발적으로 부흥이 되고 있어 너 아니라도 학생은 넘쳐 라는 말이 통할 수 있었다. 장악력을 위해 강하게 나갔다.
80년대에 70년대처럼 유지를 하려니 1 명의 학생이 아쉽다. 대 놓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나 애매하면 유리하게 보고한다.
이런 사례가 늘자 주교생이 8:30 예배에 지각인지 결석인지 애매할 때 장년반에 출석 시키면 주교 출석으로 인정을 해 줬다.
주교 예배는 50 분 정도다. 장년반 예배는 1 시간이 넘어 간다. 장년반 예배도 어깨끼리 부딪힌다. 아이들로서는 고통이다.
그러니 더 쉽게 하려고 장년반에 앉는 경우는 없다. 반사의 손이 미치지 못한 학생을 그냥 둘 수 없어 더 챙기자는 뜻이었다.
장년반에 출석 시킨 학생을 주교 출석으로 인정하자 반사가 여러 사정으로 놓친 학생들을 장년반에 대거 출석을 시켰다.
주일 오전 8:30~9:20에만 예배당에 앉히는 것과 10:00~11:00 장년반에 추가할 수 있는 기회는 출석 총수에 크게 도움 된다.
8:30 예배의 지각이나 피치 못한 결석생을 위해 허락을 했으나 마음 먹고 주일 오전 예배를 2 회로 활용하는 사례가 생겼다.
하나의 예외는 다른 예외로 가지를 치며 나무가 무성해 진다. 그 대신 열매는 부실해 진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뽑힐 수 있다.
반사 별로 활동 거리나 위치에 따라 주교 오전을 장년 오전에 보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구조적으로 안 되는 반도 있다.
이들이 오전 예배의 출석은 주교 오전, 장년 오전, 장년 오후 예배까지 포함을 시켜 달라고 했다. 이 것도 허용이 되어 졌다.
이렇게 되자 장년 오전에 보충 못한 반사만 장년 오후를 활용한 것이 아니라 장년 오전 오후를 다 활용하는 반사도 생겼다.
장년반 예배로 말하면 주일 오전과 오후 예배 중에 오후 예배를 없애고 오전 예배를 1부 2부 3부로 나누는 것과 같아 진다.
이렇게 되면 예배의 단일성이 깨진다. 다만 타 교회가 예배의 단일성은 모르고 교인의 생활 편리를 위해 쪼개는 것과 달리
서부 주교의 이런 상황은 주교 오전 예배는 주교 오전 1 회로만 유지하면서 지각이나 결석 학생의 보충만을 위한 것이었다.
같아 보이나 예배 단일성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보충은 보충으로 끝이 났다. 또 주교생의 장년반 출석은 하라 해도 어렵다.
* 문제는,
80년대의 사회 발전으로 판자촌의 정비와 집단 이주, 과외 금지, TV 보급, 주말의 가족 일정이 모여 주교 환경이 달라 지듯
80년대의 누적 되며 동시 다발로 밀려 드는 주교의 어려운 환경에서 70년대처럼 주교를 유지하려 여러 대책을 내다 보니까
초대교회의 단순하며 단일성의 은혜적인 주교 예배가 비록 타 교회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도 스스로 볼 때 너무 달라 졌다.
70년대의 끝자락을 본 견학인들이나 80년대 끝까지 왔던 견학인들의 놀라움은 모두가 같았다. 규모가 크니 파악을 못했다.
그러나 주교 전체를 보던 몇몇 지도부는 80년대 식의 주교가 이대로 가다가는 타 교회처럼 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서부주교는 백 목사님의 목회 원칙에 따라 총 책임자 1 인에게 전권을 맡기다 시피 한다. 최대한 지원을 아까지 않는다.
뭔가 일반식으로 가는 느낌을 갖지만 어디쯤에서 중단을 시킬지는 목사님이 결정한다. 실무 책임자는 조처를 이어 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주교 책임자가 이전과 확실히 다르게 주교를 운영한다고 보였고, 아는 사람은 목사님의 통제 범위였다
이런 상황은 1982년에 임명 된 책임자가 70년대 주교보다 비교 못할 여건에서 그 때처럼 유지하려다 보니 나온 대책이고
백 목사님은 이럴 지켜 보며 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80년대 식은 인본이고 이미 타락을 했다고 생각하는 내부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회 내에서 대 놓고 지도부를 비판했다. 새로운 책임자가 일일이 목사님께 보고하고 조처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백 목사님께 대한 반발이었다. 백 목사님은 인본이 되어 가고 그들은 70년대 서부 주교를 일으켜 세운 신본이라는 정도였다.
실명으로 적었으면 좋겠으나 지금은 그들의 사전 동의가 없으면 경찰 검찰 법원을 늘 오가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적는다.
후임을 비판하는 쪽은 스스로 교회 주류며 본류며 공로자며 교회의 전부다. 그 쪽 출신 중에 돌아 선 이는 훗날 단 1 명이다.
참 우습고 안타까운 것은 그 1 명은 자신이 그런 데 가담한 적이 없다는 정도다. 그들 중 제일 핵심이었는데, 그는 몰랐다.
그는 사람이 좋고 신앙이 좋아서 그가 함께 한 이들의 비판적 고라적 반발까지 몰랐을 듯하다. 사람 좋기는 틀림이 없다.
바로 이 상황이 백 목사님 사후 서부교회와 공회가 그렇게까지 분쟁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노선이 나뉘게 된 초기 모습이다.
꼭 같은 것을 봐도 서로가 반대였고 달랐다. 정말 그렇게 다르다면 서로 옳다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열매로 안다.
비판하는 이들의 비판은 구구절절 다 옳았다. 새 책임자의 조처는 제1의 사명이 주교의 유지였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한 순간의 단면만 보면 비판도 맞고, 주교의 변화도 노선을 벗어 난 정도는 아니니 과도기의 여러 대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정말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은 세월을 통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면 안다. 그 때 비판 측은 지금 일반 교단화로 다 나갔다.
그 때 신임 책임자는 비판 측보다 백 목사님 사후에 더 멀리 가 버렸다. 주교의 본질을 알지 못하여 발생한 우발 충돌이었다.
비판측의 신본은 그들에게 주어 진 70년대와 80년대를 혼동했다. 새 책임자는 80년대를 대처하다 방법론만 남아 버렸다.
오늘 코로나를 대처하다 발생하는 일도, 또 오늘 교계가 주일과 교회와 예배를 해체하는 과정을 보는 공회의 대처도 그렇다.
코로나에 실시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비판하는 교회는 알지 못한다.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두고만 서로 다른 정도다.
1989년 백영희 사후 재독을 교계의 비판은 예배를 몰라서 나온 것이고 그 때 방송 예배를 드린 곳은 예배를 모르고 했다.
예배의 본질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 결국 자기 지식을 따라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거의 다 실패한다. 미리 알고 기름 준비를 해도 부족해서 실패를 하는데 준비가 아예 없이도 성공을 하겠는가?
지금 교회들이 과거 교회와 다른 교회로 운영 된다. 공회 기준은 물론 그들 과거 기준으로 봐도 그렇게 되면 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들의 주일은 70년대부터 이미 그들이 주장한 과거 주일과 다르다. 과거가 옳다면 교계 주일은 오래 전에 없어 졌다.
그 교 회들의 예배 역시 80년대를 넘어 서면서 거의 다 없애 버렸다. 오늘 예배를 유지하는 곳은 거의 거의 알지를 못한다.
그래도 공회에는 예배를 지켜 내는 교회가 몇 곳은 있어 보인다. 내려 온 관습 때문에 지키지 알고 지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잠깐, 요약을 하고 넘어 간다.)
70년대 주교는 과거 서부주교의 모습과 원칙을 다 지키며 경이적인 발전을 했다. 광야 40 년과 비교할 정도였다.
80년대 주교는 마치 가나안에 들어 간 주교의 모습이다. 광야 40 년을 경험한 이들이 만나가 신본이라면 맞는 말일까?
광야 시절이 끝이 났고 이제 가나안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시기라 하여 농사를 짓되 영농의 방법론만 개발하면 신본일까?
나는 양비론이 싫으나 한 번씩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80년대 주교가 70년대 주교의 원칙과 모습을 잊지 않았어야 한다.
80년대의 변화 된 현실을 통해 인도하시는 주님 앞에 70년대를 기억하면서 몇몇 조처를 신중하게 잘 사용했다면...
80년대의 변화 된 현실에 대처를 한다며 하나씩 꺼내 들었던 과도기의 작은 조처들이 모이고 쌓이면서 선을 넘고 있었다.
백 목사님은 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자신이 곧 별세할 것을 알았다. 자신이 가면 교회도 주교도 알아서 운영을 해야 한다.
백 목사님이 여전히 생존한 상태에서 백 목사님은 공회도 서부교회도 서부주교도 웬만하면 하는 대로 지켜 보고 있었다.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간섭 간여 지도를 최소화 하면서 그의 사후 각 책임자가 단독으로 결정할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선을 넘을 때만 조용히 그리고 단호히 한 번씩 못을 박았다. '이 것은 아니다!' 그 외에 웬만한 것은 그냥 두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직접 겪어 봐야만 알고 자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를 향해서도 나를 향해서도 누구에게도 같았다.
바로 이 시기에 백 목사님이 최소화로 표시를 하자 콕 찍어서 금하지 않은 것은 마치 지시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이 백 목사님 사후 백 목사님 특별 지시를 받아 뒀니, 또는 교계처럼 하는 것이 이제 필요하다 했니.. 혼란이 시작됐다.
세부목록
- 시대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1) - 교계와 비교 : 주교 같은 오늘의 공회 대책
- 시대적 인도(2) - 공회 역사로 오늘을 본다 : 30년 단위의 전환점
- 시대적 인도(3) - 교회와 예배가 없어 졌다 : 그 대책은?
- 시대적 인도(4) - 서부주교의 불편한 진실 : 평정심을 잃게 한 대규모 견학
- 시대적 인도(5) - 서부주교의 80년대, 그 힘겨운 상황 : 도심 개발과 이주
- 시대적 인도(6) - 사회 발전과 국가 정책 : 과외 금지, 만화 방영의 파괴력
- 시대적 인도(7) - 80년대 서부주교의 비상 대책들 : 선을 넘고 있었다.
- 시대적 인도(8) - 끝 없는 전도, 내재 된 심각성 : 주교의 열매로 돌아 본다.
- 시대적 인도(9) - 20대의 주교 대형 버스 : 발전인가 후퇴인가
- 시대적 인도(10) - 개간과 길바닥 : 분교로 마무리 했으나

공회의 모든 판단은, 수치나 어느 명문 규정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럴 수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신축적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탈선을 하면서 하나씩 서서히 진행하면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다. 타락이 아주 용이하다.
반면에 제대로 잘 믿고 충성을 하려 들면 규제나 규정 때문에 불편함은 없다. 발전에도 너무 좋은 제도이다.
70년대의 발전은 규정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도 다 좋게 대처하면서 끝 없이 질주하며 팽창했다.
80년대의 경우는 규정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지도력 때문에 유지되었다.
모든 것은 각자 자기 속에 양심이 알고 지켜 볼 것이고 더 확실한 것은 시간이 조금 가 보면 모두가 알게 된다.
80년대 조처는 당시로 보면 문제가 많았고 우리도 숫자 부흥을 위해 신앙을 희생 시킬 것인가 의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