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인도(5) - 서부주교의 80년대, 그 힘겨운 상황 : 도심 개발과 이주

남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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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는 이 홈에 올려진 글 중에 이곳에서 따로 소개하고 싶은 글도 포함됩니다. 

시대적 인도(5) - 서부주교의 80년대, 그 힘겨운 상황 : 도심 개발과 이주

담당 0 9
앞에서 서부주교의 '불편한 진실1'을 설명했다. 외부의 대구모 방문은 주교의 전도 심방 학생 인도의 현장을 흔들어 놓았다.
만일 70년대 초반에 대규모 방문이 있었다면 방문인들은 더 은혜를 받고 서부주교의 출석은 더 뜨겁게 달아 올랐을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전도 환경이 통째로 바뀌고 있었고 여기에 외부의 대규모 방문이 본격화 되면서 파고를 맞게 됐다.



(1970년대의 주교 환경)
이렇게 이상적인 환경이 주어 질 수 있을까? 1970년대를 돌아 보면 그렇다. 당시 현장의 반사들도 글을 읽고서야 알 듯하다.

1. 전쟁이 만들어 놓은 극빈 인구의 밀집
6.25 전쟁으로 전국의 피난민이 순식간에 부산으로 다 몰렸다. 그 어떤 이유로도 한국의 역사 전체를 통해 이렇게 밀집이 될 상황은 전무후무하다. 임진왜란의 피난민은 사방으로 흩어 졌다. 당시는 인구가 적었다. 구한말의 피난은 끝도 없는 만주 들판으로 대거 흩어 졌다. 6.25는 하루 아침의 날벼락이었고 남한의 전 국민은 계획 없이 무조건 남쪽을 향했고 부산은 그 막 다른 골목이며 희망이었다. 여기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까지 밀어 붙인 국군이 1.4 후퇴를 하면서 이 번에는 북쪽의 피난민까지 남 쪽으로 하루 아침에 다시 몰려 왔다. 부산 전체 중에서 피난민의 가장 극적인 집결지가 바로 부산의 서구 중 대신동이었고 서부교회는 그 중심에 있었다. 지금 부산은 그 때와 전혀 다르다. 당시 부산은 현재 서부교회 일대가 서 쪽 끝이고 북 쪽은 산으로 막혔고 서 쪽 끝은 서면이며, 남 쪽은 바다가 된다. 초량동과 수정동 역시 피난민이 산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 가서 소복하게 쌓였으나, 중요한 것은 컴퍼스로 원을 그려 보면 옆으로 길다. 대신동은 서대신동과 동대신동이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양 쪽에 나란히 둘러 싸고 있다. 서부교회에서 도보 30 분 거리에 남으로는 충무동 감천 아미동이 다 들어 오고, 서부교회의 맞은 편에는 서대신 1, 2, 3 동에 부민동까지, 뒤로는 동대신 1, 2, 3, 4 동에 보수동 대청동에는 국제시장의 상인들이 빼곡하게 살고 있었다. 한 눈에 딱 보면 서부교회의 위치는 1980년대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다. 만일 시내버스에 태운다면 부산 최대의 단일 지역인 영도구가 전부 들어 오고, 그리고 서구 다음으로 인구가 밀집 된 초량과 수정동과 좌천동 전부가 다 주일학교의 출석 거리가 된다. 서부교회를 처음 갔을 때 주변을 둘러 보면서 이럴 수가 있나 감탄만 나왔다.

1953년에 전쟁이 끝나면서 전시의 피난 상황은 해소가 되었으나 이왕 자리를 잡은 곳에서 다시 움직이지는 못하게 된 피난민들이 부산의 어딘들 다시 비집고 들어 갈 곳이 없게 되면서 그대로 눌러 앉게 되고 이런 현상은 197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 져 내려 왔다. 1970년대의 서부교회 주교는 전도의 입지가 너무 좋았고 이 전도의 입지가 아무리 좋아도 일반인의 개종은 입지와 큰 관계가 없는 반면 어린 학생들의 전도는 수족관에서 물고기를 퍼내듯 쉬웠다. 어느 한 골목만 들어 가면 수십 명을 굴비 엮듯이 이끌고 교회를 향해 나갈 수 있다! 이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부산의 모든 교회와 전국의 모든 골목에 상상 못할 좋은 환경은 주어 졌고, 부산 중에서도 서부교회에게는 가장 극적인 전도의 입지 환경이 주어 졌었다. 이렇게 따지다 보면 '서부교회'라는 이름과 '백영희'라는 이름과 그 휘하에 죽자고 뛰어 다닌 현장의 '반사들'과 그 반사들을 총 지휘한 인물의 위대한 과거 역사는, 별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이름과 활동 뒤에 강렬하게 드러 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작정하고 이렇게 만드려는 섭리였고, 예정이었다. 이 면을 더 짚다 보면 교리 중에서 가장 첫 손에 꼽을 사안이 나오게 되고 이 면을 조금 비틀고 강조해 버리면 전형적인 이단 사이비의 형성으로 갈 소지까지 보인다. 우리는 정통의 교리를 제대로 배웠으므로 은혜와 이탈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차원에서 살펴 보는 것이 맞다.


2. 인구의 변동에 개입 된 시대적 상황
전쟁 때문에 갑자기 부산으로 몰린 피난민, 그리고 부산의 지형 때문에 형성된 서부교회의 입지는 하나의 사건이고 사변이며, 천재지변이었다. 서부교회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여기에 인구의 시대적 변동이 또 하나 더해 졌다. 피난민이 밀려 들던 1950년대는 유아 사망은 많았으나 대개 한 가정에 7-8 명을 낳았다. 1960년대가 되면서 국가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가정 별 자녀가 5-6 명을 걸쳐 1970년대가 되면 4 명 안팎으로 줄어 든다. 정부는 60년대 3 명, 70년대에는 2 명, 80년대에는 1 명을 목표로 세웠으나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정상적인 가정의 현대화가 된 가정에 먼저 그 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주교 전도의 주 대상은 중산층이 아니고 상류층은 더욱 아니다. 거의 최하 빈민층이 대상이다. 이 곳은 먹고 살 것이 없는데도 아들을 낳아야 했다. 그래서 아들이 확보 되지 않으면 정부의 시책 이상으로 아이들을 낳았다. 그리고 산아제한 정책이 급격하게 반영이 되는 상황에서도 빈민층의 밀집도를 계산하면 한 집에 10 명의 아이가 있든 3 명의 아이만 있든, 서부교회가 세계 최대 주일학교를 향해 올라 가는데 필요한 아동의 숫자는 넘쳤고 골목의 아이들 숫자가 적어서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서울 인구 1천 만 명에 서울 주변 인구가 1천 만 명이니 수도권에 2천 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목사와 교회의 역량이 없어 교인을 채우지 못하지 인구의 감소 때문에 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초대형교회들이 숫자를 채우지 못하는 일은 없다. 주일학교의 전도 상황으로 보면 1980년대까지 부산의 서부교회는 세계 최대 주일학교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주변의 아동 인구는 넉넉했다. 정부가 아무리 인구 증가를 억제해도 70년대보다 80년대의 총 인구는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가 깊어 가면서 갑자기 부산의 서부교회가 주력하던 지역에까지 도심 개발이 심각하게 진행 되었다. 이 것이 처음에는 별 것 없다고 느껴 졌는데 어느 날 주일학교의 활동 지형을 바꾸고 있었다.

우선 서부교회의 바로 뒤에는 구덕산에서부터 흘러 내리는 보수천이 있고 이 주변에 아주 어려운 판자집이 밀집되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청계천을 복개해서 도로가 되고 주변이 정비가 되니 도시는 발전을 하나 이 주변에 모여 살던 극빈층 밀집 지역은 하루 아침에 멀리 이주를 하게 된다. 이런 기회에 평소 이사를 원했던 가정은 멀리 가 버렸고, 또 이주 대책에 따라 새로 주어 지는 주거지는 당연히 아주 먼 곳에 형성 된다. 도로가 넓어 져 버리니 도시 미관과 교통과 발전에는 다 좋아 지나 주교의 전도 환경, 서부교회 식으로 몰아 오기는 종료 된다. 하천 하나가 복개 되면서 이 일대에서 출석하던 수백 명이 한꺼번에 없어 진다. 그렇게 되면 전도할 지역을 넓히면 된다. 부산의 끝까지 가도 주교 반사들은 힘이 넘쳤고 또 가기만 하면 학생들은 데려 올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지역의 이주, 저 판자촌의 정비, 어느 도로의 확장 포장화가 끝없이 이어 지며 주일학생의 전도 지역은 도시의 개발과 확대에 반비례 되며 어려워 졌다. 70년대의 우리 사회는 60년대부터 시작 된 산업 발달과 자본 축척에 힘입어 하루 다르게 개발이 이어 졌고 서부교회의 반사들은 드 넓은 전도 지역을 가졌기 때문에 불편했을 뿐이고 그 동안 공을 들여 놓은 가정과 그 골목들이 아까울 뿐이지 새로운 학생으로 채우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반사들의 여력과 전도의 공간은 무한이 아니었다. 80년 대의 초반이 되자 벌써 서부교회 주교의 유지란 전도의 지역으로 보면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모든 주거와 도로와 환경의 정비가 있을 때마다 서부주교는 이미 공을 들여 왔고 이미 굳혀 놓았던 좋은 문전옥답을 세상에게 내 줘야 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반사들은 교회로부터 더 먼 곳으로 계속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갈수록 시간에 쫓기고, 활동 거리가 늘어 나는 만큼 한 아이에게 쏟는 정성이 이동에 버려 졌다. 더욱 힘들어 지는 환경이란, 세상의 경영으로 보면 낭비가 되거나 비효율이 되는데 신앙의 세계는 같은 결과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많아 지면 충성이 더해 지고 충성이 더해 지면 하나님은 정성으로 보신다. 더 나아 지는 것이다. 아무튼 서부교회에서 걸어서 오던 거리를 중심으로 주일학생을 인도한 반사들이 30 분을 걸어서도 데려 오지 못하게 되자 시내 버스를 이용하는 문제를 질의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고 그 때도 공회의 주일은 돈을 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주일 한 번을 지키기 위해 평생 시험을 치지 못하고 실직자로 살며, 6.25처럼 환란 때는 순교를 각오하고 지켜 온 주일이다. 공회의 교리는 주일에 돈을 내고 차를 타지 않으나, 신앙 어린 사람이 멀리 있는 교회를 가기 위해 차를 타는 것은 장차 주일을 알게 되면 예배당 주변으로 이사를 오게 될 것이며 그 과도기에 차를 타지 않기 위해 집에 있지 말고 차를 타고 교회를 오라고 가르쳐 왔다. 반사의 신앙으로는 주일에 차를 타지 않고 탈 필요도 없으나 차를 타지 않고는 교회로 올 수 없는 학생을 예배에 데려 오는 목적이라면 돈을 내고 차를 타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교회 주변에 살다가 이주 정책에 떠밀려 멀리 간 학생들, 그들을 본 교회로 데려 와야 하는 과정에 반사들이 멀리 간 학생들을 시내 버스에 태우기 시작하자 그 일대의 학생들이 함께 오게 되면서 서부주교의 활동은 부산 전역으로 갑자기 확대가 된다. 그리고 모든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은 주일 아침 8시부터 서부교회로 가는 방향에 학생들을 몇 명이나 태워 받는지를 서로 물으며 신기해 했고 적극적으로 돕는 분위기가 되었다. 교회가 그 많은 차를 구입하고 운전수를 사용하려 했다면 자가용 시대가 오기 전의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 요즘으로 보면 모닝 정도 되는 포니2형 택시에 16 명을 태우는 것은 주교 반사들 사이에 예사였다. 시내 버스에는 1백 명 이상을 태우는 것이 흔했다. 기사들도 신이 나고, 신기하고, 이야기거리가 되었고, 내 기억에 승차 거부 때문에 불편을 느꼈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은 없다.

평소 개인적으로 택시 탈 일이 있을 때 '서부교회'라고 말하면 당시 기사들은 부산 어디에 있어도 바로 알아 차렸다. 부산 전역으로 퍼지는 이 문제는 교회로서 장차 주교의 운영에 내적 한계를 겪어야 하는 위기의 전 단계였고, 이 문제는 한 편으로 2 가지 크나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서부교회 주변에서 멀리 이주 하는 바람에 다시는 서부교회를 다닐 수 없게 된 학생들과 가족들은 훗날 그들이 사는 주변의 교회를 다니게 될 때 평생 그들이 어릴 때 다녔던 서부교회의 그 광경과 반사들의 활동을 잊지 못한다. 또 부산 전역으로 흩어 지는 학생들을 따라 가서 그 주변의 학생들을 데려 오는 과정에 그 지역 주변의 교회들과 학생의 출석 문제로 갖가지 오해와 충돌은 당연히 발생을 했다. 우선 보면 서로 자기 학생이라고 소리를 높이고 감정을 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교회나 주교 반사는 그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교인들 중에서 교회가 좋아서 막 뛰기 시작하는 상태다. 교회를 향한 마음은 불이 붙었고 신앙은 어린 편이다. 양 쪽이 다 그러니 원만하게 협의하지는 못한다. 대부분 그냥 싸움이 난다. 부산의 대부분 교회들은 매주 매월 막대한 선물을 상품을 건다. 서부교회는 아예 그런 것이 없다. 그런데 주변의 교회가 학생들을 일시 데려 가도 결국 또 서부교회로 와 버린다. 각 교회의 핵심 교인들의 자녀 정도만 다닌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거듭 되니 공회보다 교단의 역사가 오래 되고 또 각 교회 별 역량이 있는 교회들이 서부교회 식으로 반사 체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운영의 방법을 서부교회처럼 바꾸게 되자 먼 거리의 서부교회보다 주변의 골목 교회에 주교생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서부교회로 출석한 학생을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대충 잡아 봤을 때 45만 명 정도로 계산이 나온 기억이 있다. 그런데 부산 전역의 각 교단 각 교회들이 모두 주일학교에 힘을 쓰게 되고 그로 인해 각 교회의 주교생의 증가를 계산해 보면 서부교회의 주교가 부산 전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 전과 후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서부교회를 통해 타 교회를 간 학생들, 또 각 교회가 스스로 서부교회 식으로 운영 방법을 바꾸면서 증가한 주교생의 부흥은 부산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 되고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 오는 견학 교회들이 돌아 가서 부흥이 되고 또 전국에 있는 공회 교회들 때문에 그 지역도 그렇게 되는 상황이었다. 전국의 어지간한 중소 도시에는 공회 교회가 하나쯤은 있다. 중소 도시 정도의 공회 교회는 개척 교회 정도면 1~2백 명, 장년반이 100여 명이 되면 주교생은 5~6백 명이 기본이고 몇몇 곳에서는 1천 명을 넘겨 버렸다. 그렇게 되면 중소 도시의 모든 교회에 파급이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80년대는 서부교회가 사회적 각종 주거지와 도로 등의 사회적 발달 과정에 내부적으로 활동하는 범위가 넓어지며 곧 닥칠 내부 한계에 직면하되, 외부적으로는 한국 교회 전체의 주교 부흥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었다.

현재 이 글은 서부교회의 70년대가 절정이고 80년대는 힘들었던 시기이며 그 시기에 그 다음을 미리 준비한 교회는 다른 면으로 더 나은 또 다른 공회 노선의 특별한 길을 걷고 있으나, 단순히 뛰어만 다니고 당시의 흐름에만 휩싸여 그냥 열심히 노력한 교회나 반사는 사회 환경이 아주 달라 지는 90년대가 되면서 눈에 띄게 서부교회식 또는 공회의 주교의 위축에 따라 위축이 되었고, 현재는 주교의 와해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방향이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계속 이어 진다. 서부교회의 장점은 한도 없이 많다. 가히 광야 40 년에 비교할 정도다. 그러나 광야 40 년에 말 못할 모순과 분란과 범죄는 넘쳤다. 서부주교와 공회의 노선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그 때마다 더욱 회개하고 더욱 준비하고 더욱 외길을 견지한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넜고 가나안을 받았다. 그렇지 않은 수백 만 명은 광야에 자신을 묻었다.
연구1 2022.08.23 18:16  
미개 사회에서 근대화를 거치는 과정에는, 지역을 넓히는 것보다 기존 주거지를 촘촘하게 사용했다.
전쟁 중 형성된 피난민의 판자촌은 불법 건축의 단속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극단적으로 밀집되었다.
이 판자촌은 통째로 이주 시키기 전에는 단속도 파악도 불가능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발판이 되었다.
부산의 판자촌은 '산복도로'라는 아주 특이한 이름으로 대변 된다. 인터넷에 찾아 보면, 역사가 많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어느 날 한 곳이 갑자기 사라 진다. 도심 멀리 어디 집단 이주를 시키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는 청계천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서부교회 주변의 개발사는 전도의 역주행 역사였다.
부산의 지역 변천사를 유튜브에 찾아 보면 좋고 순천의 영화 촬영장 셋트도 그 때를 생생하게 그렸다.
골목에서 손에 잡히는 문을 하나 열면 여러 아이들이 나왔다. 대문이 있는 곳은 여러 세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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