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의 교회 100년사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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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9 18:47
(신풍교회 100 년사)
이 연구소와 공회를 운영하는 신풍교회는 한국 교회의 선교 초기 교회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2 가지의 연혁을 가지고 있다.
연혁을 좀 넓게 잡으면 1924년에 신풍교회는 설립이 되었다. 이후 선교부나 일제에 휩쓸려 교회 존속이 애매해 진 적이 있고
오늘의 예배당을 좁게 놓고 연혁을 따지면 1952년에 손양원 사모님이 개척을 했으나 재개척이라 해야 할지 좀 혼란스럽다.
교회의 출발 역사가 뚜렷하면 교회답지 않은 면이 있다.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되었는지 애매한 점이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공회의 출발인 개명교회도 박순명이 1905년에 개척했고 1924년까지 흔적이 있다 1932년경 없어 졌다. 마을은 다 알고 있다.
같은 동네에서 백 목사님이 1936년에 10리 밖 농산교회를 다니다 1939년에 개명교회를 개척한다. 재개척인지 좀 애매하다.
신앙의 성향과 이후 이어지는 성격을 보면 아예 다르다. 다만 교회의 역사를 좀 객관적이고 넓게 본다면 재개척으로 보인다.
1939년 1월이라는 시점도 연구소가 처음 언급했다. 백 목사님 스스로 일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기도소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영철, 순교자일까?)
'신풍' 교회는 1924년, 현재 신풍교회의 중심 교인의 부친 시절에 형제간이 그들의 주택 한 켠에서 가족끼리 예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1925년에 광주에서 쫓겨난 애양원이 '신풍' 1 번지로 거대 시설과 예배당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존속이 애매해 졌다.
1천 명이 넘는 교인과 미국의 선교부가 직접 운영하는 시설이 시골 바닷가 마을 안에 들어서자 '신풍'교회는 별관처럼 되었다.
1925년부터 애양원교회에 함몰 되어 별관이나 분교, 하나의 부속 기관처럼 되었고 신사참배와 6.25를 거치며 애매해 졌었다.
1950년 손양원 순교 직후 애양원교회는 훗날 WCC가 되는 통합 교단의 중심으로 방향을 잡았고 손양원 가족은 투쟁을 했다.
1951년 손양원 가족이 손양원 신앙으로 지켜 내려는 부산의 고려파가 총회로부터 제거 되자 손양원 가족은 애양원과 나뉜다.
1952년 부산의 고려파가 총회와 따로 출발하자 손양원 사모님은 바로 개척을 한다. '신풍' 교회가 뚜렷히 표시가 나게 되었다.
정양순 사모님이 마을 안에서 개척을 하자 애양원은 마을 길목에 맞개척을 했다. 정양순 교회는 오늘 신풍교회로 존속 된다.
손 목사님 생전인 1948년에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고 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순교를 한다. 여기까지는 한국교회사에 적혔다.
그 날 같은 장소에서 또 한 명의 신풍 마을의 학생이 순천의 학생 지도자로 함께 처형 된다. 모두가 두 아들과 친구며 동지다.
그 이름이 차영철이다. 신풍 마을 사람과 신풍의 교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여순반란사건에 연계 된 줄은 함구했다.
최근 신풍교회사를 마무리 하는 과정에 이 이름이 비로소 밝혀 졌다. 가족을 통해 호적과 모든 자료를 바로 찾아 나서 보았다.
일제 때 사망으로 처리 되어 있다. 집안이 워낙 유력하였고 이런 문제에 휩쓸리면 어느 쪽에 어떻게 당할지 몰라서 감췄다.
집안의 내력을 더 이상 설명하기는 어렵다. 누가 봐도 뛰어 난 인물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신풍 교인으로 순교를 했다.
그런데 집안의 유력한 분이 철저히 잘 감춰 버린 바람에 완벽하게 잊혀 졌다. 순교인지를 확인하려면 복잡하다. 또 어렵다.
여러 정황에서 그렇게 보인다. 이 정도가 되면 타 교단은 순교화를 시켜 버린다. 이 곳은 짐작만 해 두고 세월 속에 살펴 본다.
(역사의 증빙 자료)
흔히들 역사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하다. 옳다. 그런데 이들은 책상에만 앉은 사람이다.
그들은 태어 난 날과 부모를 직접 알고 목도 했는가? 전해 들은 말인가? 호적을 떼고 DNA 검사까지 해서 알게 되었는가?
부모는 안다. 본인은 짐작을 한다. 그런데 여러 상황을 보면 더 이상 친자 검사가 필요가 없다. 법적 분쟁에는 필요한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짐작하게 해 놓으면 소설이 된다. 그렇다고 문서로 입증을 하려 들면 소설과 맞설 정도의 또 다른 소설이 된다.
차영철, 그는 반란 사건에 좌익에게 처형 되었다. 신풍교회의 핵심 교인의 직계 식구다. 손 목사님의 직계 차종석의 사촌이다.
순천에서 우익에 서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 당시 우익은 기독교 학생회의 다른 이름이었다. 집안에서 황급히 무조건 묻었다.
이 곳은 격변기의 정치 상황을 아주 잘 아는 곳이며 그런 가정이다. 신사참배도 6.25 점령기도 공회의 분리 과정도 다 그렇다.
정말 역사는 따로 움직인다. 아는 사람은 그냥 안다. 모르는 사람은 코끼리 만져 보는 장님들의 소리다. 알고자 하면 알게 된다.
이 연구소와 공회를 운영하는 신풍교회는 한국 교회의 선교 초기 교회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2 가지의 연혁을 가지고 있다.
연혁을 좀 넓게 잡으면 1924년에 신풍교회는 설립이 되었다. 이후 선교부나 일제에 휩쓸려 교회 존속이 애매해 진 적이 있고
오늘의 예배당을 좁게 놓고 연혁을 따지면 1952년에 손양원 사모님이 개척을 했으나 재개척이라 해야 할지 좀 혼란스럽다.
교회의 출발 역사가 뚜렷하면 교회답지 않은 면이 있다.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되었는지 애매한 점이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공회의 출발인 개명교회도 박순명이 1905년에 개척했고 1924년까지 흔적이 있다 1932년경 없어 졌다. 마을은 다 알고 있다.
같은 동네에서 백 목사님이 1936년에 10리 밖 농산교회를 다니다 1939년에 개명교회를 개척한다. 재개척인지 좀 애매하다.
신앙의 성향과 이후 이어지는 성격을 보면 아예 다르다. 다만 교회의 역사를 좀 객관적이고 넓게 본다면 재개척으로 보인다.
1939년 1월이라는 시점도 연구소가 처음 언급했다. 백 목사님 스스로 일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기도소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영철, 순교자일까?)
'신풍' 교회는 1924년, 현재 신풍교회의 중심 교인의 부친 시절에 형제간이 그들의 주택 한 켠에서 가족끼리 예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1925년에 광주에서 쫓겨난 애양원이 '신풍' 1 번지로 거대 시설과 예배당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존속이 애매해 졌다.
1천 명이 넘는 교인과 미국의 선교부가 직접 운영하는 시설이 시골 바닷가 마을 안에 들어서자 '신풍'교회는 별관처럼 되었다.
1925년부터 애양원교회에 함몰 되어 별관이나 분교, 하나의 부속 기관처럼 되었고 신사참배와 6.25를 거치며 애매해 졌었다.
1950년 손양원 순교 직후 애양원교회는 훗날 WCC가 되는 통합 교단의 중심으로 방향을 잡았고 손양원 가족은 투쟁을 했다.
1951년 손양원 가족이 손양원 신앙으로 지켜 내려는 부산의 고려파가 총회로부터 제거 되자 손양원 가족은 애양원과 나뉜다.
1952년 부산의 고려파가 총회와 따로 출발하자 손양원 사모님은 바로 개척을 한다. '신풍' 교회가 뚜렷히 표시가 나게 되었다.
정양순 사모님이 마을 안에서 개척을 하자 애양원은 마을 길목에 맞개척을 했다. 정양순 교회는 오늘 신풍교회로 존속 된다.
손 목사님 생전인 1948년에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고 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순교를 한다. 여기까지는 한국교회사에 적혔다.
그 날 같은 장소에서 또 한 명의 신풍 마을의 학생이 순천의 학생 지도자로 함께 처형 된다. 모두가 두 아들과 친구며 동지다.
그 이름이 차영철이다. 신풍 마을 사람과 신풍의 교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여순반란사건에 연계 된 줄은 함구했다.
최근 신풍교회사를 마무리 하는 과정에 이 이름이 비로소 밝혀 졌다. 가족을 통해 호적과 모든 자료를 바로 찾아 나서 보았다.
일제 때 사망으로 처리 되어 있다. 집안이 워낙 유력하였고 이런 문제에 휩쓸리면 어느 쪽에 어떻게 당할지 몰라서 감췄다.
집안의 내력을 더 이상 설명하기는 어렵다. 누가 봐도 뛰어 난 인물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신풍 교인으로 순교를 했다.
그런데 집안의 유력한 분이 철저히 잘 감춰 버린 바람에 완벽하게 잊혀 졌다. 순교인지를 확인하려면 복잡하다. 또 어렵다.
여러 정황에서 그렇게 보인다. 이 정도가 되면 타 교단은 순교화를 시켜 버린다. 이 곳은 짐작만 해 두고 세월 속에 살펴 본다.
(역사의 증빙 자료)
흔히들 역사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하다. 옳다. 그런데 이들은 책상에만 앉은 사람이다.
그들은 태어 난 날과 부모를 직접 알고 목도 했는가? 전해 들은 말인가? 호적을 떼고 DNA 검사까지 해서 알게 되었는가?
부모는 안다. 본인은 짐작을 한다. 그런데 여러 상황을 보면 더 이상 친자 검사가 필요가 없다. 법적 분쟁에는 필요한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짐작하게 해 놓으면 소설이 된다. 그렇다고 문서로 입증을 하려 들면 소설과 맞설 정도의 또 다른 소설이 된다.
차영철, 그는 반란 사건에 좌익에게 처형 되었다. 신풍교회의 핵심 교인의 직계 식구다. 손 목사님의 직계 차종석의 사촌이다.
순천에서 우익에 서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 당시 우익은 기독교 학생회의 다른 이름이었다. 집안에서 황급히 무조건 묻었다.
이 곳은 격변기의 정치 상황을 아주 잘 아는 곳이며 그런 가정이다. 신사참배도 6.25 점령기도 공회의 분리 과정도 다 그렇다.
정말 역사는 따로 움직인다. 아는 사람은 그냥 안다. 모르는 사람은 코끼리 만져 보는 장님들의 소리다. 알고자 하면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