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무게, 죽음과 부활 그리고 또 있다.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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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6 12:19
남자의 무게는 자기 몸무게에 아내를 더해야 한다. 한짐이다. 평생 지고 가야 한다. 한 목숨 다 바치지 않고는 어렵다.
여자는 자기 몸무게에 아이들을 더해야 한다. 여러 짐이다. 그래서 모두가 벗으려 한다. 짐을 벗으면 에서처럼 된다.
남자가 아이에 갖는 부담은 막상 따져 보면 여성과 다르다. 아무리 남편에게 바친다 해도 모성애와 비교할 수는 없다.
남자는 여자를 책임 지고, 여자는 아이를 책임지도록 하나님께서 위치와 사명을 정해 놓았고 짐을 얹어 놓아 버렸다.
목회자는 자기 몸무게에 교인 무게를 더해야 한다. 파출소 소장이나 학교의 담임은 별 일만 없으면 된다. 짐이 다르다.
목회자는 자기 교인 하나하나에게 아내를 진 남편처럼, 아이를 진 어머니처럼 그 무게를 느끼면 비로소 목회자라 한다.
교인이 일을 당했을 때, 또 교인의 희로애락을 두고 목회자의 감정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지를 보면 목회자의 분량이다.
교인의 문제를 사택의 아내나 자녀처럼 상대한다면 목회자다. 그런 교인의 숫자와 그 느낌의 총량이 목회자의 목회다.
주님은 택한 백성 전부가 이 땅 위에서 겪을 고난 전부에 택한 백성이 영원히 지옥에서 겪을 고통을 모두 짊어 지셨다.
이 것은 도성인신의 육체를 가진 인성으로서는 느끼고 질 수가 없는 무게다. 겉은 인성이나 속은 하나님이 져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만으로 말하면 곤란하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일반 사람이 흔하게 각오하는 벌이다.
피할 수 있는데 가족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도 있고 주인이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도 있다. 오늘도 그렇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망의 그 마지막 모습을 십자가로 표시를 했으나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다. 영원 지옥 형벌이 문제다.
주님의 육체는 우리와 같다. 다른 강도들과 비슷하게 운명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주님은 지옥의 영원 형벌을 받았다.
3일의 무덤이란 우리 사는 곳에서는 3일의 시간이나 음부는 시공이 없는 신령계다. 주님은 영원한 고난을 전부 받았다.
교회가 어리면 십자가 그 순간에 모든 것을 고정한다. 좀 자라고 나면 십자가 그 순간부터 3일을 계속해서 살피게 된다.
교회가 더 밝아 지게 되면 십자가와 3일의 고난이 끝 난 다음의 부활을 눈여겨 본다. 부활이란 그냥 좋기만 한 것일까?
죽음으로 우리의 죄와 지옥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이제 영원히 끝 없이 하나님을 향해 자라 가야 한다. 부활 때문이다.
죽음으로 우리 죄를 씻고 부활을 통해 이제 영원히 살아 갈 우리가 걸어 갈 길을 먼저 걸어 가셨다. 쉬운가 어려운가?
수준이 낮으면 십자가 죽음이 더 고생이고 부활은 좋은 일로 본다. 하나님의 세계를 생각하면 부활 이후도 고난이다.
주님이 지신 무게는 인간의 죄악을 해결할 지옥의 영원 형벌에다 우리가 끝없이 자라 갈 영원한 길의 짐까지 함께 졌다.
여기까지가 인간 우리를 상대할 때 계산이다.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짐과 부담은 죄인의 주인인 사단의 끝 없는 요구였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고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으니 사단에게서 우리를 되찾으려면 사단의 요구를 다 들어 줘야 한다.
죄값 때문에 때리면 맞아야 하나 죄를 짓지는 말아야 한다. 그 절정이 십자가다. 눈물로 쉽게 해결할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인간을 대신한 짐, 우리를 종으로 삼고 있는 사단에게서 우리를 빼내려면 사단이 지우는 짐을 다 져야 하는데
이 모든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요구다. 완전자 절대자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 하신 주님에게 요구하는 그 무게,
이 것은 앞에서 말한 모든 짐과 비교할 때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능자 하나님만 가능하다.
그래서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것이다. 귀신은 천주교 식의 십자가 위에 찡그린 고통까지만 짐이라 한다.
여자는 자기 몸무게에 아이들을 더해야 한다. 여러 짐이다. 그래서 모두가 벗으려 한다. 짐을 벗으면 에서처럼 된다.
남자가 아이에 갖는 부담은 막상 따져 보면 여성과 다르다. 아무리 남편에게 바친다 해도 모성애와 비교할 수는 없다.
남자는 여자를 책임 지고, 여자는 아이를 책임지도록 하나님께서 위치와 사명을 정해 놓았고 짐을 얹어 놓아 버렸다.
목회자는 자기 몸무게에 교인 무게를 더해야 한다. 파출소 소장이나 학교의 담임은 별 일만 없으면 된다. 짐이 다르다.
목회자는 자기 교인 하나하나에게 아내를 진 남편처럼, 아이를 진 어머니처럼 그 무게를 느끼면 비로소 목회자라 한다.
교인이 일을 당했을 때, 또 교인의 희로애락을 두고 목회자의 감정이 어느 정도 함께 하는지를 보면 목회자의 분량이다.
교인의 문제를 사택의 아내나 자녀처럼 상대한다면 목회자다. 그런 교인의 숫자와 그 느낌의 총량이 목회자의 목회다.
주님은 택한 백성 전부가 이 땅 위에서 겪을 고난 전부에 택한 백성이 영원히 지옥에서 겪을 고통을 모두 짊어 지셨다.
이 것은 도성인신의 육체를 가진 인성으로서는 느끼고 질 수가 없는 무게다. 겉은 인성이나 속은 하나님이 져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만으로 말하면 곤란하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일반 사람이 흔하게 각오하는 벌이다.
피할 수 있는데 가족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도 있고 주인이나 친구를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도 있다. 오늘도 그렇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망의 그 마지막 모습을 십자가로 표시를 했으나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다. 영원 지옥 형벌이 문제다.
주님의 육체는 우리와 같다. 다른 강도들과 비슷하게 운명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주님은 지옥의 영원 형벌을 받았다.
3일의 무덤이란 우리 사는 곳에서는 3일의 시간이나 음부는 시공이 없는 신령계다. 주님은 영원한 고난을 전부 받았다.
교회가 어리면 십자가 그 순간에 모든 것을 고정한다. 좀 자라고 나면 십자가 그 순간부터 3일을 계속해서 살피게 된다.
교회가 더 밝아 지게 되면 십자가와 3일의 고난이 끝 난 다음의 부활을 눈여겨 본다. 부활이란 그냥 좋기만 한 것일까?
죽음으로 우리의 죄와 지옥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이제 영원히 끝 없이 하나님을 향해 자라 가야 한다. 부활 때문이다.
죽음으로 우리 죄를 씻고 부활을 통해 이제 영원히 살아 갈 우리가 걸어 갈 길을 먼저 걸어 가셨다. 쉬운가 어려운가?
수준이 낮으면 십자가 죽음이 더 고생이고 부활은 좋은 일로 본다. 하나님의 세계를 생각하면 부활 이후도 고난이다.
주님이 지신 무게는 인간의 죄악을 해결할 지옥의 영원 형벌에다 우리가 끝없이 자라 갈 영원한 길의 짐까지 함께 졌다.
여기까지가 인간 우리를 상대할 때 계산이다.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짐과 부담은 죄인의 주인인 사단의 끝 없는 요구였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고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으니 사단에게서 우리를 되찾으려면 사단의 요구를 다 들어 줘야 한다.
죄값 때문에 때리면 맞아야 하나 죄를 짓지는 말아야 한다. 그 절정이 십자가다. 눈물로 쉽게 해결할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인간을 대신한 짐, 우리를 종으로 삼고 있는 사단에게서 우리를 빼내려면 사단이 지우는 짐을 다 져야 하는데
이 모든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요구다. 완전자 절대자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 하신 주님에게 요구하는 그 무게,
이 것은 앞에서 말한 모든 짐과 비교할 때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능자 하나님만 가능하다.
그래서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것이다. 귀신은 천주교 식의 십자가 위에 찡그린 고통까지만 짐이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