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지구의 땅 밑에 있다는 교리..
담당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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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4:48
지방교회나 세대주의를 일반 교계가 함부로 이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참 문제가 많다.
아이가 자라면서 걸음마를 배우고 뜀박질을 배우는 것처럼 교회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이므로 배우고 자라 가기 때문에 한 순간의 문제를 두고 고착인지 자라 가는 과정인지를 꼭 살펴야 한다. 다섯 살 주일학생이 집에는 아버지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 두 아버지가 꼭 같네 라고 한다면 훌륭하게 자라 가고 있는 중이다. 집에 있는 아버지만 알다가 하늘을 알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이제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발전이다. 그런데 집에 있는 육체의 아버지와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같다면서 교리서를 작성하고 또는 수백 수천 년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문제가 있는 교회다. 그냥 문제 정도가 아니다 장애거나 미쳤거나 뭔가를 작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대주의의 아쉬움은 많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 그대로 믿으려는 그 노력과 집착은 계약신학이 잘 배우고 따라야 한다. 세대주의는 언약신학의 신신학적 또는 신사적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직 인본을 벗지 못한 탓이니 좀 기다려 주면 좋겠다. 천주교가 아닌 정상적인 기독교란 어느 교파 어느 목회자라도 자라 가는 과정에 실수도 하고 또 고치게 된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지방교회의 장점은 무수하고 신령하며 부럽다. 그러나 교회론을 두고 한 지역 한 교회를 너무 심하게 고수하려 했다. 그냥 둬도 그들 내부에서 스스로 발전하면서 보충을 하게 될 것이다. 제대로 믿지도 않는 어설픈 신학자들이 차원 높은 지방교회의 표현을 하나 붙들고 이단으로 제작을 해 나간느 짓은 삼가는 것이 좋다. 지방교회의 구원론은 개혁주의의 발전 방향에서 한참을 앞서 나간 모습이다. 공회와 표현은 조금 달라 보이나 시대를 뛰어 넘고 인간의 노력을 뛰어 넘는 이런 대목을 볼 때 그들과 하나님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 영의 사람이 되려고 필사적이다. 보이는 세상에 적당히 붙들려 헛소리를 섞는 신학계나 교계가 가늠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공회는 지방교회에 대하여 아마 태생적으로 본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형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아낌 없이 한 말씀을 드린다. 지방교회의 구원론과 말세론 쪽에 나오는 설명 중에 '지옥'은 땅옥이니 이 지구 땅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만은 아쉽다. 아다시피 공회는 세상 과학이나 상식에게 붙들리는 곳이 아니다. 지옥이 우리 발 밑에 있다면, 천국은 달이나 태양이나 은하계 어디쯤 있어야 한다. 지방교회가 그 출발 때 주력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이다. 영의 사람 되기를 노력했다. 교회의 분열을 온 몸으로 막아 섰다. 이런 면은 전부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은 그렇게 중요한 연구 분야는 아니었거나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부분은 덜 열어 주셨을 듯하다. 한 사람에게 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공회도 부족한 부분이 좀 많다.
지방교회가 성경으로 신앙의 더 중요하고 더 기둥적인 것은 거의 다 바르게 잡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위치처럼 죽어서 가 보기 전에는 사실 특정하기가 좀 애매한 부분은 세월이 좀 지난 뒤에 깨달을 수도 있다. 루터에게 먼저 주신 장점도 있고 칼빈에게 더 많이 주신 장점도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출발이 100 년이 넘는 오늘, 1 세대 워치만 니가 가시고 2 세대가 아마 다 가시고 이제 3 세대가 시대를 감당해야 하는 오늘까지도 오로지 출발의 모습만을 반복하려 한다면 아쉽다. 특히 지옥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을 파고 들어 가면 어디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 신령'이라는 공회의 입장을 한 번쯤 들어 봤으면 좋겠다.
음부는 성경 표현에 땅 밑에 있다고 했으니 그렇게 아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지옥 > 땅 밑에 있는 지하 감옥'이다. '천국 >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하늘 저 하늘 어디에 있는 낙원'이다. 은하계 어디쯤 있을지 아직 좌표는 찍지 않고 있다. 이렇게 성경의 표현으로 한 걸음을 걷기는 하지만 어디서 쉽게 중단하고 단정하고 주저 앉아 버리면 곤란할 듯하다. 일단 천국을 우주의 저 하늘로 두고 지옥을 우리 발 밑에 지구의 마그마 불구덩이 어디쯤이라고 생각은 할 수 있다 해도, 이렇게 해 놓는 것이 중요한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좁게 해석해서 있는 그대로 믿자는 것이다. 촘촘히 좌표를 찍어 나가면 된다. 아이의 걸음마 첫 순간에 축구 차기 기술이 들어 가거나 댄스의 스템 기교가 들어 가면 이 것은 문제가 많다. 걸음마가 반복이 되며 균형이 확실히 잡히고 나면 그 바탕 위에 기술과 변형이 들어 가며 다채로워 진다. 교리도 천국은 은하계 우주 명왕성 저 뒤 어디쯤.. 지옥은 지옥의 마그마 불구덩이 어디쯤.. 이렇게 일단 좌표를 찍는 것이 당연하고 좋고 바른 발전의 첫 걸음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꾸 읽다 보면 지구물리학적 대기권 바깥과 지구의 핵 안에 있다는 이 좌표를 다시 찍어야 한다는 단계가 오게 된다. 이 단계 이전이면 틀린 것이 아니라 어린 것이고, 이 단계를 넘어 갔으면 한 단계 더 나아 진 것이다. 그런데 3세 5세 10세까지는 1단계에 있어도 자연스러우나 50년을 믿고 성경을 수십 년 가르친 신앙의 원로가 여전히 그렇게 가르친다면 이 것은 발전 과정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없고 성장 장애 > 난장이.. 그런 표현에 해당 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인물은 그럴지라도 그가 속한 교단이 초급 단계에 머물게 되면 보통은 함께 갇히게 된다.
공회의 위대한 점 중에 하나는 역사 가장 못 나고 못 배운 덕유산 골짝에서 시작해서 마7장의 넓은 길 좁은 길을 차가 위험하니 대로로 다니지 말고 뒷골목으로 조심하고 다녀라고 읽으며 출발을 했는데 그런 1학년 수준을 2학년으로 3학년으로 꾸준하게 한 걸음씩 밟고 올라 갔다는 점이다. 이렇게 쉬운 성장의 단계라는 것은 '신학'과 '교단'에 갇힌 사람들은 벗어 나지를 않고 또 벗어 날 줄을 모른다. 공회의 진보성과 보수성, 공회의 발전성과 정체성 고수가 절묘하다는 구체적 사례를 들 때 늘 제시하고 있다.
소위 개혁주의를 거친 이들은 세대주의를 무조건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고 시작하는데 그 것이 바로 개혁주의라는 보석에 티가 된다. 세대주의에게는 개혁주의만이 생명이요 전부이지만 우리가 개혁주의 노선이니 우리는 우리 내부 문제를 집중하는 것이 옳다. 신앙의 제대로 된 첫 걸음은 세대주의라야 하고 문자적 해석이라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세대와 문자 속에 넣어 두신 하나의 흐름이다. 그 다음에는 세대주의와 문자에 묶어 놓은 듯하나 그 속에 담아 놓은 무한의 신령계를 향해 가야 할 끝 없는 우주 여행이다. 이 우주 여행을 하려고 해도 위험하다며 매도를 하는 것이 신학자들이 흔히들 말하는 풍유 해석이다. 풍유 해석을 금지하는 순간 성경은 고전 문학의 쇠사슬에 묶인다. 그렇다고 제 멋대로 낙서를 하고 망상에 환청을 따라 가면서 우주 여행을 한다는 이들은 우주 여행까지 갈 것도 없이 집 부근의 낭떠러지에서 모두 변사체로 발견이 된다.
아주 중요한 설명이며 정리가 되는데 어디 기록이 되었으면 한다. 이런 표현들을 모아서 잘 정리하면 신학개론, 성경개론에 담거나 주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의 서론이나 각주에 잠깐 넣을 만한 표현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걸음마를 배우고 뜀박질을 배우는 것처럼 교회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이므로 배우고 자라 가기 때문에 한 순간의 문제를 두고 고착인지 자라 가는 과정인지를 꼭 살펴야 한다. 다섯 살 주일학생이 집에는 아버지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 두 아버지가 꼭 같네 라고 한다면 훌륭하게 자라 가고 있는 중이다. 집에 있는 아버지만 알다가 하늘을 알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이제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발전이다. 그런데 집에 있는 육체의 아버지와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같다면서 교리서를 작성하고 또는 수백 수천 년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문제가 있는 교회다. 그냥 문제 정도가 아니다 장애거나 미쳤거나 뭔가를 작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대주의의 아쉬움은 많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 그대로 믿으려는 그 노력과 집착은 계약신학이 잘 배우고 따라야 한다. 세대주의는 언약신학의 신신학적 또는 신사적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직 인본을 벗지 못한 탓이니 좀 기다려 주면 좋겠다. 천주교가 아닌 정상적인 기독교란 어느 교파 어느 목회자라도 자라 가는 과정에 실수도 하고 또 고치게 된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지방교회의 장점은 무수하고 신령하며 부럽다. 그러나 교회론을 두고 한 지역 한 교회를 너무 심하게 고수하려 했다. 그냥 둬도 그들 내부에서 스스로 발전하면서 보충을 하게 될 것이다. 제대로 믿지도 않는 어설픈 신학자들이 차원 높은 지방교회의 표현을 하나 붙들고 이단으로 제작을 해 나간느 짓은 삼가는 것이 좋다. 지방교회의 구원론은 개혁주의의 발전 방향에서 한참을 앞서 나간 모습이다. 공회와 표현은 조금 달라 보이나 시대를 뛰어 넘고 인간의 노력을 뛰어 넘는 이런 대목을 볼 때 그들과 하나님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 영의 사람이 되려고 필사적이다. 보이는 세상에 적당히 붙들려 헛소리를 섞는 신학계나 교계가 가늠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공회는 지방교회에 대하여 아마 태생적으로 본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형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아낌 없이 한 말씀을 드린다. 지방교회의 구원론과 말세론 쪽에 나오는 설명 중에 '지옥'은 땅옥이니 이 지구 땅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만은 아쉽다. 아다시피 공회는 세상 과학이나 상식에게 붙들리는 곳이 아니다. 지옥이 우리 발 밑에 있다면, 천국은 달이나 태양이나 은하계 어디쯤 있어야 한다. 지방교회가 그 출발 때 주력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이다. 영의 사람 되기를 노력했다. 교회의 분열을 온 몸으로 막아 섰다. 이런 면은 전부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은 그렇게 중요한 연구 분야는 아니었거나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부분은 덜 열어 주셨을 듯하다. 한 사람에게 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공회도 부족한 부분이 좀 많다.
지방교회가 성경으로 신앙의 더 중요하고 더 기둥적인 것은 거의 다 바르게 잡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위치처럼 죽어서 가 보기 전에는 사실 특정하기가 좀 애매한 부분은 세월이 좀 지난 뒤에 깨달을 수도 있다. 루터에게 먼저 주신 장점도 있고 칼빈에게 더 많이 주신 장점도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출발이 100 년이 넘는 오늘, 1 세대 워치만 니가 가시고 2 세대가 아마 다 가시고 이제 3 세대가 시대를 감당해야 하는 오늘까지도 오로지 출발의 모습만을 반복하려 한다면 아쉽다. 특히 지옥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을 파고 들어 가면 어디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 신령'이라는 공회의 입장을 한 번쯤 들어 봤으면 좋겠다.
음부는 성경 표현에 땅 밑에 있다고 했으니 그렇게 아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지옥 > 땅 밑에 있는 지하 감옥'이다. '천국 >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하늘 저 하늘 어디에 있는 낙원'이다. 은하계 어디쯤 있을지 아직 좌표는 찍지 않고 있다. 이렇게 성경의 표현으로 한 걸음을 걷기는 하지만 어디서 쉽게 중단하고 단정하고 주저 앉아 버리면 곤란할 듯하다. 일단 천국을 우주의 저 하늘로 두고 지옥을 우리 발 밑에 지구의 마그마 불구덩이 어디쯤이라고 생각은 할 수 있다 해도, 이렇게 해 놓는 것이 중요한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좁게 해석해서 있는 그대로 믿자는 것이다. 촘촘히 좌표를 찍어 나가면 된다. 아이의 걸음마 첫 순간에 축구 차기 기술이 들어 가거나 댄스의 스템 기교가 들어 가면 이 것은 문제가 많다. 걸음마가 반복이 되며 균형이 확실히 잡히고 나면 그 바탕 위에 기술과 변형이 들어 가며 다채로워 진다. 교리도 천국은 은하계 우주 명왕성 저 뒤 어디쯤.. 지옥은 지옥의 마그마 불구덩이 어디쯤.. 이렇게 일단 좌표를 찍는 것이 당연하고 좋고 바른 발전의 첫 걸음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꾸 읽다 보면 지구물리학적 대기권 바깥과 지구의 핵 안에 있다는 이 좌표를 다시 찍어야 한다는 단계가 오게 된다. 이 단계 이전이면 틀린 것이 아니라 어린 것이고, 이 단계를 넘어 갔으면 한 단계 더 나아 진 것이다. 그런데 3세 5세 10세까지는 1단계에 있어도 자연스러우나 50년을 믿고 성경을 수십 년 가르친 신앙의 원로가 여전히 그렇게 가르친다면 이 것은 발전 과정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없고 성장 장애 > 난장이.. 그런 표현에 해당 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인물은 그럴지라도 그가 속한 교단이 초급 단계에 머물게 되면 보통은 함께 갇히게 된다.
공회의 위대한 점 중에 하나는 역사 가장 못 나고 못 배운 덕유산 골짝에서 시작해서 마7장의 넓은 길 좁은 길을 차가 위험하니 대로로 다니지 말고 뒷골목으로 조심하고 다녀라고 읽으며 출발을 했는데 그런 1학년 수준을 2학년으로 3학년으로 꾸준하게 한 걸음씩 밟고 올라 갔다는 점이다. 이렇게 쉬운 성장의 단계라는 것은 '신학'과 '교단'에 갇힌 사람들은 벗어 나지를 않고 또 벗어 날 줄을 모른다. 공회의 진보성과 보수성, 공회의 발전성과 정체성 고수가 절묘하다는 구체적 사례를 들 때 늘 제시하고 있다.
소위 개혁주의를 거친 이들은 세대주의를 무조건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고 시작하는데 그 것이 바로 개혁주의라는 보석에 티가 된다. 세대주의에게는 개혁주의만이 생명이요 전부이지만 우리가 개혁주의 노선이니 우리는 우리 내부 문제를 집중하는 것이 옳다. 신앙의 제대로 된 첫 걸음은 세대주의라야 하고 문자적 해석이라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세대와 문자 속에 넣어 두신 하나의 흐름이다. 그 다음에는 세대주의와 문자에 묶어 놓은 듯하나 그 속에 담아 놓은 무한의 신령계를 향해 가야 할 끝 없는 우주 여행이다. 이 우주 여행을 하려고 해도 위험하다며 매도를 하는 것이 신학자들이 흔히들 말하는 풍유 해석이다. 풍유 해석을 금지하는 순간 성경은 고전 문학의 쇠사슬에 묶인다. 그렇다고 제 멋대로 낙서를 하고 망상에 환청을 따라 가면서 우주 여행을 한다는 이들은 우주 여행까지 갈 것도 없이 집 부근의 낭떠러지에서 모두 변사체로 발견이 된다.
아주 중요한 설명이며 정리가 되는데 어디 기록이 되었으면 한다. 이런 표현들을 모아서 잘 정리하면 신학개론, 성경개론에 담거나 주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의 서론이나 각주에 잠깐 넣을 만한 표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