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적용, 백영희의 그 시차의 목회
연구
1
4
2023.01.07 22:19
(나이와 원칙)
백 목사님은 믿는 날부터 원칙에 단호했다. 기본에 충실했고 양심적이었으며 누구 앞에서도 진리 문제만은 양보가 없었다.
출옥 성도를 비롯해서 교회사에 괜찮은 분들을 소개할 때 이런 표현은 흔하다. 그러나 그들과 비교 해도 이 분은 특별했다.
어떤 위대한 분들도 나이가 많아 지면 좀 흐려 진다. 노숙해 지고 원만해 진다는 표현을 하지만 실제로 좀 달라 져 보인다.
그러나 백영희는 갈수록 날카로워 갔고 80세로 가던 순간이 가장 예리했다. 이런 면에서 이 분은 확실히 특별한 인물이다.
(자엄, 타려)
그런데 이 분의 칼날을 보면 자기에게는 더욱 엄했고 날카로웠으나, 그가 지도하는 사람에게는 고려 배려가 확실히 넘쳤다.
그런데 타인이라 해도 자기와 가까우면 엄했고 멀면 배려가 많았다. 가깝다 해도 신앙의 은혜가 더하면 또 더욱 엄해 졌다.
그래서 백영희의 심복 여부를 판단할 때 비판이 혹독하고 억울할수록 가깝다 보면 되고 배려가 넘치면 불신자로 보면 된다.
백영희는 소망을 두는 사람에게는 잘 했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질책을 받지 않은 일이 있다면 아주 잘했다는 뜻이 된다.
(백영희의 가족)
백영희의 가족이라 하면 호적상 직계로 한정 되지 않는다. 형제, 조카, 6촌 8촌.. 그들의 가족까지 공회 안에는 가족이 많다.
그들과 결혼 관계로 추다 보면 공회의 지도부는 전국 어느 교회든 거의 다 엮일 정도다. 바른 교회란 세월 속에 이렇게 된다.
신앙의 노선 때문에 모였고 그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얽힌 뒤의 처리가 문제다.
백영희에게는 7남매 자녀가 있고 친 동생 3 가정이 공회 목회자 가정이다. 백계순, 백영익, 백태영. 모두가 탁월한 분들이다.
이들 10 명을 최 중심의 가족에 두고 그들의 직계로 나가면 백영희의 가족 범위는 너무 많아 진다. 그들 전부를 놓고 따진다.
백영익 백태영은 늘 칭찬했다. 그래서 모든 교역자들이 그리 따랐다. 그들은 백영희와 구구절절 다 달랐다. 이제야 알지만..
백계순에 대해서는 별세했다 소식이 전해 졌을 때 딱 한 마디 한 것이 전부다. 이 원리를 가지고 자녀들을 보면 파악이 된다.
자녀 중에 칭찬이 있고 교회 직책과 활동에 배려가 있다면 신앙이 없는 것을 가르치려고 기회를 주는 것이지 신앙이 아니다.
서영준 목사님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배려라고 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987년에 별세하는 과정에서 알 수가 있다.
공회의 그 거대한 집회 장소 한 가운데 떡하니 서서, 또 서부교회의 세계 10대 교회 예배당 마당에서 모든 사람 앞에 선 분..
주일 오전 예배 후 예배당 마당에 선 글라스에 화려한 외국풍의 옷 등은 평소 목사님이 지향해 온 방향과 정반대로 달랐다.
이 장면을 보고 백 목사님이 변질 되었다는 분, 백 목사님의 신뢰가 넘쳐서 그렇다는 분, 너무 어려서 그냥 두고 본다는 분..
판단은 각자 하겠지만 그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그 판단을 보면 그 사람이 이 노선을 얼마나 아느냐는 자기 판단이 된다.
서영준 목사님은 험하게 어렵게 혹독하게 밀어 붙였다. 서자나 사생아처럼. 최재현 목사님에게는 파격적 대우가 몰려 갔다.
최 목사님을 후계자로 삼는 과정이라며 서울 한복판에서 탈퇴하는 분이 있었다. 공회 전체를 통해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
최 목사님은 공회 내 가장 어리기 때문에 이제야 기르느라고 기회를 본다는 이는? 없었다고 기억 된다.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백영희의 목회 세계)
공회는 이런 면을 개인의 개별 신앙이 다르고, 그 개별 신앙이란 어리고 약하면 배려가 필요한데 그 배려를 구원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미 실력이 있고 신앙이 있는 분을 대우하고 알아 주는 것은 그의 복을 훼손하고 그를 시험 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로가 많으면 더욱 혼을 냈다. 세상과 다르고 타 교단과 다른 모습이었다. 백영희의 사후를 이 눈으로 보면 공회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누가 이어 가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시에 그 원칙으로 살아야 할 자신에게는 갈수록 더 엄격했고 지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개별적었다.
신앙이 있으면 엄하게 요구했고 앞에서 끌었으나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들 뒤에서 살펴 주었다.
아는 사람은 그의 목회에 감탄했고 모르는 사람은 억울해 했고 불평을 쏟아 놓았다. 모두가 달랐다.
이 원리로 공회는 그 분 하나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서부교회를 이루고 국내 최고의 교단이 되었다.
이 원리와 적용을 그 분은 그 자녀들에게도 사용했다. 일제히 불만이 쏟아 졌고 혜택 보는 이들은 환호했다.
목사님 사후의 공회 모습은 이미 이런 기본 성향에서 미리 드러 나고 있었다. 이 것이 공회사를 보는 열쇠다.
이 노선 그대로 목회를 하게 되면 개별 교회도 가정도 공회도 이 연구소도 이런 현상은 항상 반복이다.
백 목사님은 믿는 날부터 원칙에 단호했다. 기본에 충실했고 양심적이었으며 누구 앞에서도 진리 문제만은 양보가 없었다.
출옥 성도를 비롯해서 교회사에 괜찮은 분들을 소개할 때 이런 표현은 흔하다. 그러나 그들과 비교 해도 이 분은 특별했다.
어떤 위대한 분들도 나이가 많아 지면 좀 흐려 진다. 노숙해 지고 원만해 진다는 표현을 하지만 실제로 좀 달라 져 보인다.
그러나 백영희는 갈수록 날카로워 갔고 80세로 가던 순간이 가장 예리했다. 이런 면에서 이 분은 확실히 특별한 인물이다.
(자엄, 타려)
그런데 이 분의 칼날을 보면 자기에게는 더욱 엄했고 날카로웠으나, 그가 지도하는 사람에게는 고려 배려가 확실히 넘쳤다.
그런데 타인이라 해도 자기와 가까우면 엄했고 멀면 배려가 많았다. 가깝다 해도 신앙의 은혜가 더하면 또 더욱 엄해 졌다.
그래서 백영희의 심복 여부를 판단할 때 비판이 혹독하고 억울할수록 가깝다 보면 되고 배려가 넘치면 불신자로 보면 된다.
백영희는 소망을 두는 사람에게는 잘 했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질책을 받지 않은 일이 있다면 아주 잘했다는 뜻이 된다.
(백영희의 가족)
백영희의 가족이라 하면 호적상 직계로 한정 되지 않는다. 형제, 조카, 6촌 8촌.. 그들의 가족까지 공회 안에는 가족이 많다.
그들과 결혼 관계로 추다 보면 공회의 지도부는 전국 어느 교회든 거의 다 엮일 정도다. 바른 교회란 세월 속에 이렇게 된다.
신앙의 노선 때문에 모였고 그들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얽힌 뒤의 처리가 문제다.
백영희에게는 7남매 자녀가 있고 친 동생 3 가정이 공회 목회자 가정이다. 백계순, 백영익, 백태영. 모두가 탁월한 분들이다.
이들 10 명을 최 중심의 가족에 두고 그들의 직계로 나가면 백영희의 가족 범위는 너무 많아 진다. 그들 전부를 놓고 따진다.
백영익 백태영은 늘 칭찬했다. 그래서 모든 교역자들이 그리 따랐다. 그들은 백영희와 구구절절 다 달랐다. 이제야 알지만..
백계순에 대해서는 별세했다 소식이 전해 졌을 때 딱 한 마디 한 것이 전부다. 이 원리를 가지고 자녀들을 보면 파악이 된다.
자녀 중에 칭찬이 있고 교회 직책과 활동에 배려가 있다면 신앙이 없는 것을 가르치려고 기회를 주는 것이지 신앙이 아니다.
서영준 목사님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배려라고 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987년에 별세하는 과정에서 알 수가 있다.
공회의 그 거대한 집회 장소 한 가운데 떡하니 서서, 또 서부교회의 세계 10대 교회 예배당 마당에서 모든 사람 앞에 선 분..
주일 오전 예배 후 예배당 마당에 선 글라스에 화려한 외국풍의 옷 등은 평소 목사님이 지향해 온 방향과 정반대로 달랐다.
이 장면을 보고 백 목사님이 변질 되었다는 분, 백 목사님의 신뢰가 넘쳐서 그렇다는 분, 너무 어려서 그냥 두고 본다는 분..
판단은 각자 하겠지만 그 판단이 문제가 아니라 그 판단을 보면 그 사람이 이 노선을 얼마나 아느냐는 자기 판단이 된다.
서영준 목사님은 험하게 어렵게 혹독하게 밀어 붙였다. 서자나 사생아처럼. 최재현 목사님에게는 파격적 대우가 몰려 갔다.
최 목사님을 후계자로 삼는 과정이라며 서울 한복판에서 탈퇴하는 분이 있었다. 공회 전체를 통해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
최 목사님은 공회 내 가장 어리기 때문에 이제야 기르느라고 기회를 본다는 이는? 없었다고 기억 된다.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백영희의 목회 세계)
공회는 이런 면을 개인의 개별 신앙이 다르고, 그 개별 신앙이란 어리고 약하면 배려가 필요한데 그 배려를 구원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미 실력이 있고 신앙이 있는 분을 대우하고 알아 주는 것은 그의 복을 훼손하고 그를 시험 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로가 많으면 더욱 혼을 냈다. 세상과 다르고 타 교단과 다른 모습이었다. 백영희의 사후를 이 눈으로 보면 공회는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누가 이어 가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시에 그 원칙으로 살아야 할 자신에게는 갈수록 더 엄격했고 지도하는 사람들에게는 개별적었다.
신앙이 있으면 엄하게 요구했고 앞에서 끌었으나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들 뒤에서 살펴 주었다.
아는 사람은 그의 목회에 감탄했고 모르는 사람은 억울해 했고 불평을 쏟아 놓았다. 모두가 달랐다.
이 원리로 공회는 그 분 하나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서부교회를 이루고 국내 최고의 교단이 되었다.
이 원리와 적용을 그 분은 그 자녀들에게도 사용했다. 일제히 불만이 쏟아 졌고 혜택 보는 이들은 환호했다.
목사님 사후의 공회 모습은 이미 이런 기본 성향에서 미리 드러 나고 있었다. 이 것이 공회사를 보는 열쇠다.
이 노선 그대로 목회를 하게 되면 개별 교회도 가정도 공회도 이 연구소도 이런 현상은 항상 반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