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희 사망의 직전과 직후 - 그 가족을 중심으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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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6 16:28
1987년 3월의 총공회를 참석하기 위해 미국의 큰 딸과 둘째 사위가 김해 공항에 도착을 했다.
큰 사위는 전쟁 직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30여 년이 지난 1984년에 한국으로 목회를 위해 나왔고 큰 딸은 1964년에 미국으로 결혼해서 간 후 23년만에 남편의 목회를 위해 영구 귀국을 하였다. 둘째 사위는 세인트루이스교회의 장로로 안수를 받기 위해 일시 방문을 했다. 오는 차 안에서 둘째 사위는 아들이 하바드 대학교 미식 축구 선수로 입학하게 된 감동을 전했고 큰 딸은 대구의 목회지에 가면 교회 부흥을 위해 100 가지가 넘는 아이디어를 적어 왔다며 대구 기독교 방송국에 설교 시간을 마련할 인맥으로 부터 백 목사님이 금지한 내용만 펼쳐 놓았다. 이 기록의 일자나 이름은 더러 부정확할 수 있으나 전체의 흐름과 글의 취지에 대해서는 당시를 가장 잘 알고 잘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적어 본다.
백 목사님은 일단 한국에 불러 낸 다음에 딸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게 하면 저절로 그 계획이 무산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딸은 아버지와 거래를 통해 목회 환경을 원하는 대로 펼쳐 놓고 자신의 활동력을 가미하면 단기간 부흥은 쉽다고 봤다. 단기간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게 되면 서부교회 부목을 통해 후임을 원한다는 것은 굳이 말은 하지 않아도 가까운 주변에서는 그대로 읽고 있었다. 한국에 올 때 조건이 혼자 있는 남편도 돌봐야 하고 미국에서는 할 일도 마땅치 않고, 또 고령의 부친에게 만사를 챙겨 드릴 맏딸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근본 문제를 바로 잡아 드리면 효도도 되고 보람도 있게 될 것으로 봤다. 막내가 30여 년만에 나왔다며 선언할 때도 그 비슷한 말들이 있었다. 부친 사후이니 접근의 방법과 해결할 일은 달랐지만. 1970년대 말에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일대 유신 개혁처럼 혁명처럼 재구성하려 했던 장남의 경우도 그 명분이나 여러 논리가 같았다. 그러나 백영희는 그런 주변의 시도를 하나의 줄로 잡고 자녀들은 그들 원하는 대로 끌려 했고 부친은 그 끈을 끌면 원래 노선으로 올 수 있다고 봤다. 최소한 소원은 그렇게 가졌다. 그 것이 백영희의 평생 대인 접촉의 기본 정신이며 노력이었다.
백순희 큰 딸이 1987년 3월 서부교회에 도착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일어 났다.
- 우선 옷 차림이 파격적이었다. 서부교회와 공회는 굳이 교복은 없었으나 뭔가 흐름이 있었다. 모든 금지를 다 깨 버렸다.
- 교회의 행정과 조직에 손을 댔다. 목사님은 최대한 지원했다. 과거 생각할 수 없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의아했다.
- 인적 정리랄까 재구성이 시작 되었다. 충신과 역적 그리고 중간의 인물이 분류 되고 이에 따른 대우가 눈으로 보여 졌다.
- 목사님의 음식, 일정, 차량까지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딸의 정치라고 했다. 딸의 말은 다 듣는다며 뒷말이 나왔다.
- 사직동교회 송용조 목사님의 탈퇴를 가져 오게 되는 교학실의 대응, 그 교학실장의 선임도 딸의 요구가 반영이 되었다.
현재 딸은 생존하고 있다. 건강하며 당시를 잘 기억할 분이다. 일부는 인정하고 일부는 극구 부인할 듯하다.
읽는 사람이 이 글도 다 믿지는 않을 듯하다. 기억은 자유이고 기록이 있다 해도 당시의 왜곡 변색은 가능하다.
모두의 기억은 다를 것이고 기록을 가진 이들도 당시의 입장에 따라 달라 질 듯하지만 이런 목격도 있었다고 적어 본다.
당시를 살펴 보며 오늘의 우리를 그대로 대입하면 그 날의 그들은 오늘의 나와 우리가 되어 오늘의 공회와 각 교회가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늘 반복 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를 좀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비판이나 부정적 접근이 아니라 소망을 향해 우리가 참고할 사안이다. 이의가 있다면 즉각 확인하고 해당 부분에 원글을 남기면서 이견이나 발언을 따로 표시해 두겠다.
백 목사님에게 가장 충성을 했다면서 뒤로 돌아 서서는 딸들이 말하면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며 이 노선과 목사님을 마음껏 비판한 분들, 그들이 흘려 놓은 유리 조각이 지금까지도 곳곳에 널브러져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의 발에 상처를 주거나 진입을 막고 있다. 이들의 말이 어떤 면에서 맞는지, 어떤 면에서 곡해를 했는지, 어느 대목에 어떻게 불순이 되고 고라화가 되었는지, 또는 그는 끝까지 충신의 충언만 했는데 옮기는 이들이 왜곡 변조를 한 경로까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큰 사위는 전쟁 직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30여 년이 지난 1984년에 한국으로 목회를 위해 나왔고 큰 딸은 1964년에 미국으로 결혼해서 간 후 23년만에 남편의 목회를 위해 영구 귀국을 하였다. 둘째 사위는 세인트루이스교회의 장로로 안수를 받기 위해 일시 방문을 했다. 오는 차 안에서 둘째 사위는 아들이 하바드 대학교 미식 축구 선수로 입학하게 된 감동을 전했고 큰 딸은 대구의 목회지에 가면 교회 부흥을 위해 100 가지가 넘는 아이디어를 적어 왔다며 대구 기독교 방송국에 설교 시간을 마련할 인맥으로 부터 백 목사님이 금지한 내용만 펼쳐 놓았다. 이 기록의 일자나 이름은 더러 부정확할 수 있으나 전체의 흐름과 글의 취지에 대해서는 당시를 가장 잘 알고 잘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적어 본다.
백 목사님은 일단 한국에 불러 낸 다음에 딸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게 하면 저절로 그 계획이 무산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딸은 아버지와 거래를 통해 목회 환경을 원하는 대로 펼쳐 놓고 자신의 활동력을 가미하면 단기간 부흥은 쉽다고 봤다. 단기간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게 되면 서부교회 부목을 통해 후임을 원한다는 것은 굳이 말은 하지 않아도 가까운 주변에서는 그대로 읽고 있었다. 한국에 올 때 조건이 혼자 있는 남편도 돌봐야 하고 미국에서는 할 일도 마땅치 않고, 또 고령의 부친에게 만사를 챙겨 드릴 맏딸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 서부교회와 총공회의 근본 문제를 바로 잡아 드리면 효도도 되고 보람도 있게 될 것으로 봤다. 막내가 30여 년만에 나왔다며 선언할 때도 그 비슷한 말들이 있었다. 부친 사후이니 접근의 방법과 해결할 일은 달랐지만. 1970년대 말에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일대 유신 개혁처럼 혁명처럼 재구성하려 했던 장남의 경우도 그 명분이나 여러 논리가 같았다. 그러나 백영희는 그런 주변의 시도를 하나의 줄로 잡고 자녀들은 그들 원하는 대로 끌려 했고 부친은 그 끈을 끌면 원래 노선으로 올 수 있다고 봤다. 최소한 소원은 그렇게 가졌다. 그 것이 백영희의 평생 대인 접촉의 기본 정신이며 노력이었다.
백순희 큰 딸이 1987년 3월 서부교회에 도착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일어 났다.
- 우선 옷 차림이 파격적이었다. 서부교회와 공회는 굳이 교복은 없었으나 뭔가 흐름이 있었다. 모든 금지를 다 깨 버렸다.
- 교회의 행정과 조직에 손을 댔다. 목사님은 최대한 지원했다. 과거 생각할 수 없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의아했다.
- 인적 정리랄까 재구성이 시작 되었다. 충신과 역적 그리고 중간의 인물이 분류 되고 이에 따른 대우가 눈으로 보여 졌다.
- 목사님의 음식, 일정, 차량까지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딸의 정치라고 했다. 딸의 말은 다 듣는다며 뒷말이 나왔다.
- 사직동교회 송용조 목사님의 탈퇴를 가져 오게 되는 교학실의 대응, 그 교학실장의 선임도 딸의 요구가 반영이 되었다.
현재 딸은 생존하고 있다. 건강하며 당시를 잘 기억할 분이다. 일부는 인정하고 일부는 극구 부인할 듯하다.
읽는 사람이 이 글도 다 믿지는 않을 듯하다. 기억은 자유이고 기록이 있다 해도 당시의 왜곡 변색은 가능하다.
모두의 기억은 다를 것이고 기록을 가진 이들도 당시의 입장에 따라 달라 질 듯하지만 이런 목격도 있었다고 적어 본다.
당시를 살펴 보며 오늘의 우리를 그대로 대입하면 그 날의 그들은 오늘의 나와 우리가 되어 오늘의 공회와 각 교회가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늘 반복 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를 좀 낫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비판이나 부정적 접근이 아니라 소망을 향해 우리가 참고할 사안이다. 이의가 있다면 즉각 확인하고 해당 부분에 원글을 남기면서 이견이나 발언을 따로 표시해 두겠다.
백 목사님에게 가장 충성을 했다면서 뒤로 돌아 서서는 딸들이 말하면 손바닥 뒤집듯이 한다며 이 노선과 목사님을 마음껏 비판한 분들, 그들이 흘려 놓은 유리 조각이 지금까지도 곳곳에 널브러져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의 발에 상처를 주거나 진입을 막고 있다. 이들의 말이 어떤 면에서 맞는지, 어떤 면에서 곡해를 했는지, 어느 대목에 어떻게 불순이 되고 고라화가 되었는지, 또는 그는 끝까지 충신의 충언만 했는데 옮기는 이들이 왜곡 변조를 한 경로까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